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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23:53:59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

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

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

[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

[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중환자실을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천벌 받을 강소희! 감히 이X! 어떻게···!] 

고미주는 흥분해 소리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말을 이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강소희 씨도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차 대표님 옆 병실로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어후! 그 X! 일어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교양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천박함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권위가 무색할 만큼 상스러운 언사였다.

혹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차준호와 극적으로 사귀게 되어 새해를 보내다 내가 누워있었다면?

‘고미주에게 저런 모욕을 들었겠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부르르 몸이 떨려와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진욱은 멋쩍은 듯 주의사항을 알려주고는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나갔다.

고미주는 병실의 방음이 별로인 것을 모르는지 복도로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내며 한숨을 흘렸다.

“신 비서, 차 대표의 기억 3년 치가 사라졌대. 이게 말이 돼?”

내 말이 그 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좋게 끝났지만 함께하는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삭제된 3년의 기록과 함께, 그 세계 속의 나라는 존재 역시 깨끗이 지워졌다.

어느새 나의 손은 목에 걸린 펜던트만 만지고 있었다. 

늘 웃게 해 주고, 그렇게 달게만 굴더니.

“앞으로는 나 여기 자주 안 올 거야. 신 비서가 차 대표를 잘 챙겨줘.”

“······네?”

이런 날벼락같은 소리를 하다니.

가족이 돌봐야 할 문제 아닌가?

“차 대표는 나와 진아를 몰라. 3년 전에 회장님이 불러주신 거라 지금도 가족으로 인정 안 할 거야.”

뭔가 고미주도 나만큼이나 심란해 보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그 난리를 다시 겪기는 싫은데, 쯧.”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고백했다가 차이고 다른 여자랑 스캔들이 난 남자가 기억까지 날려 버렸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쿵- 어느새 고미주는 병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아 녹아버린 커피를 입에 댔다.

‘아, 이런···.’

입안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양재동 신사옥 20층 대표실.

185cm가 넘는 장신에 30대 후반이지만 20대 같은 외모를 가진 주원형은 통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관리된 몸을 감싼 명품 글렌 체크 슈트 역시 지금 자신과 어울렸고 이곳의 주인답게 내뿜는 기운이 대단해도 소용 없었다.

왜 오랜 세월 그녀를 탐닉했음에도, 정작 그녀의 시선 끝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머문 적이 없었던 걸까.

주원형은 늦은 시각이지만 구불구불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정체가 상당한 강남대로만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소희는?”

주원형은 홍보실장 김훈에게 태블릿 PC를 건네받으며 다시 숨을 크게 뱉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잠을 자는 건지, 의식이 안 돌아온 건지. 제가 갔을 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고비 넘겼으니 별일 없을 거라 했습니다.”

오늘도 참 대단한 기사들이 떴다. 모두 강소희와 차준호와의 그럴듯한 로맨스 소설 같은 추측성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강소희는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그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굴며 날만 세우고 영화 촬영 때문에 잠잘 시간도 없었을 텐데.

돌연 연말 모든 일정도 취소하고 잠적하더니 결국 황당한 사고를 당해버렸다.

“그 교활한 여우가 기어이 차준호에게 들러붙었군. 분위기는 어때?”

그가 미간을 좁힌 채 기사를 묵묵히 훑어내자 김훈은 이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대표님, 강소희가 평소 스캔들 없이 지내서 동정표를 얻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김훈은 참으로 유능한 직원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언론 대응 능력이 뛰어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은 신기루처럼 덧없는 환상 위에 세워진 직업이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것.

대세를 타서 흐름이 형성되면 순식간에 몸값이 1000배가 뛰기도 한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면 거지꼴이 되어 대중의 기억에서 악마가 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게 이 바닥 생리인데···.

“그 방만한 것을 그동안 얼마나 조였는데도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제 감정이 주원형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하고 이 대표실에서 몸만 붙어먹은 게 거의 10년이었다.

결국,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니.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어 억장이 무너졌지만, 딴 놈이랑 있다가 그랬다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김훈은 주원형의 안색을 살피다 더욱 입꼬리를 올려 세웠다.

“사실 차준호라면 CC그룹을 이끌 차기 후계자이자 CH-컴퍼니 대표 아닙니까. 잘 되어도 좋고, 헤어져도 로맨스죠.”

주원형은 더욱 심사가 꼬여 들어 태블릿을 김훈에게 성의 없이 넘겨주고는 다시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김훈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저기··· 대표님. 내일 병원에는 안 가십니까?”

분명 주원형이 강소희를 마음에 품은 뒷사정도 이해하고 부글거리는 속내도 알았기에 그리 물은 것 같았다.

“나중에 잠잠해지고 나면.”

“아하, 네.”

김훈은 새해 일정이 바쁘니 잘 선택했다면서 강소희에 대해선 추가 언급 없이 다른 사안을 브리핑했다.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주원형은 강소희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김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도 주원형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까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

다음 날, VIP 병실 복도 앞

이거 새해부터 너무한 나날만 연속이었다. 올해 운수는 꽝인지 온 우주가 음해하려는 건 아닌가 가설까지 세우게 되었다.

차준호가 새벽 중환자실에서 VIP 일반 병동으로 옮기자마자 다시 기자들은 바퀴벌레처럼 몰려들어 혼을 쏙 빼놓았다.

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에 들어갈 여유조차 없어 발 디딜 틈이 없는 이곳에서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래도 며칠 단련이 되었기에 영혼 없는 AI가 되어 제법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었던 분홍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 스타킹에 핑크 스틸레토 킬힐을 신고 빈틈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는 옷이 꼭 맞았는데, 지금은 며칠 먹은 게 없어 그런지 제법 헐렁해져 있었다.

‘이 옷을 입었던 그날도 그는 다 나를 잊었겠지.’

나도 모르게 손이 또 목덜미에 닿았다.

과연 그는, 오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 목걸이는 알아 보려나. 

나는 기자를 상대하면서도 물끄러미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은 그와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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