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
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
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
[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
[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중환자실을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천벌 받을 강소희! 감히 이X! 어떻게···!]
고미주는 흥분해 소리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말을 이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강소희 씨도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차 대표님 옆 병실로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어후! 그 X! 일어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교양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천박함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권위가 무색할 만큼 상스러운 언사였다.
혹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차준호와 극적으로 사귀게 되어 새해를 보내다 내가 누워있었다면?
‘고미주에게 저런 모욕을 들었겠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부르르 몸이 떨려와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진욱은 멋쩍은 듯 주의사항을 알려주고는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나갔다.
고미주는 병실의 방음이 별로인 것을 모르는지 복도로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내며 한숨을 흘렸다.
“신 비서, 차 대표의 기억 3년 치가 사라졌대. 이게 말이 돼?”
내 말이 그 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좋게 끝났지만 함께하는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삭제된 3년의 기록과 함께, 그 세계 속의 나라는 존재 역시 깨끗이 지워졌다.
어느새 나의 손은 목에 걸린 펜던트만 만지고 있었다.
늘 웃게 해 주고, 그렇게 달게만 굴더니.
“앞으로는 나 여기 자주 안 올 거야. 신 비서가 차 대표를 잘 챙겨줘.”
“······네?”이런 날벼락같은 소리를 하다니.
가족이 돌봐야 할 문제 아닌가?
“차 대표는 나와 진아를 몰라. 3년 전에 회장님이 불러주신 거라 지금도 가족으로 인정 안 할 거야.”
뭔가 고미주도 나만큼이나 심란해 보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그 난리를 다시 겪기는 싫은데, 쯧.”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고백했다가 차이고 다른 여자랑 스캔들이 난 남자가 기억까지 날려 버렸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쿵- 어느새 고미주는 병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아 녹아버린 커피를 입에 댔다.
‘아, 이런···.’
입안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양재동 신사옥 20층 대표실.185cm가 넘는 장신에 30대 후반이지만 20대 같은 외모를 가진 주원형은 통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관리된 몸을 감싼 명품 글렌 체크 슈트 역시 지금 자신과 어울렸고 이곳의 주인답게 내뿜는 기운이 대단해도 소용 없었다.
왜 오랜 세월 그녀를 탐닉했음에도, 정작 그녀의 시선 끝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머문 적이 없었던 걸까.
주원형은 늦은 시각이지만 구불구불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정체가 상당한 강남대로만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소희는?”
주원형은 홍보실장 김훈에게 태블릿 PC를 건네받으며 다시 숨을 크게 뱉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잠을 자는 건지, 의식이 안 돌아온 건지. 제가 갔을 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고비 넘겼으니 별일 없을 거라 했습니다.”
오늘도 참 대단한 기사들이 떴다. 모두 강소희와 차준호와의 그럴듯한 로맨스 소설 같은 추측성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강소희는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그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굴며 날만 세우고 영화 촬영 때문에 잠잘 시간도 없었을 텐데.
돌연 연말 모든 일정도 취소하고 잠적하더니 결국 황당한 사고를 당해버렸다.
“그 교활한 여우가 기어이 차준호에게 들러붙었군. 분위기는 어때?”
그가 미간을 좁힌 채 기사를 묵묵히 훑어내자 김훈은 이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대표님, 강소희가 평소 스캔들 없이 지내서 동정표를 얻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김훈은 참으로 유능한 직원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언론 대응 능력이 뛰어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은 신기루처럼 덧없는 환상 위에 세워진 직업이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것.
대세를 타서 흐름이 형성되면 순식간에 몸값이 1000배가 뛰기도 한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면 거지꼴이 되어 대중의 기억에서 악마가 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게 이 바닥 생리인데···.
“그 방만한 것을 그동안 얼마나 조였는데도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제 감정이 주원형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하고 이 대표실에서 몸만 붙어먹은 게 거의 10년이었다.
결국,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니.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어 억장이 무너졌지만, 딴 놈이랑 있다가 그랬다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김훈은 주원형의 안색을 살피다 더욱 입꼬리를 올려 세웠다.
“사실 차준호라면 CC그룹을 이끌 차기 후계자이자 CH-컴퍼니 대표 아닙니까. 잘 되어도 좋고, 헤어져도 로맨스죠.”
주원형은 더욱 심사가 꼬여 들어 태블릿을 김훈에게 성의 없이 넘겨주고는 다시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김훈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저기··· 대표님. 내일 병원에는 안 가십니까?”
분명 주원형이 강소희를 마음에 품은 뒷사정도 이해하고 부글거리는 속내도 알았기에 그리 물은 것 같았다.
“나중에 잠잠해지고 나면.”
“아하, 네.”김훈은 새해 일정이 바쁘니 잘 선택했다면서 강소희에 대해선 추가 언급 없이 다른 사안을 브리핑했다.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주원형은 강소희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김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도 주원형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까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 다음 날, VIP 병실 복도 앞이거 새해부터 너무한 나날만 연속이었다. 올해 운수는 꽝인지 온 우주가 음해하려는 건 아닌가 가설까지 세우게 되었다.
차준호가 새벽 중환자실에서 VIP 일반 병동으로 옮기자마자 다시 기자들은 바퀴벌레처럼 몰려들어 혼을 쏙 빼놓았다.
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에 들어갈 여유조차 없어 발 디딜 틈이 없는 이곳에서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래도 며칠 단련이 되었기에 영혼 없는 AI가 되어 제법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었던 분홍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 스타킹에 핑크 스틸레토 킬힐을 신고 빈틈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는 옷이 꼭 맞았는데, 지금은 며칠 먹은 게 없어 그런지 제법 헐렁해져 있었다.
‘이 옷을 입었던 그날도 그는 다 나를 잊었겠지.’
나도 모르게 손이 또 목덜미에 닿았다.
과연 그는, 오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 목걸이는 알아 보려나.
나는 기자를 상대하면서도 물끄러미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은 그와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23층에서 25층, 익숙한 비서실을 지나 대표실로 향하는 길.“대표님, 참 가지가지 대단도 하시네요.”어느새 나는 차준호의 단단한 손에 이끌려 조용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게임 개발실이 위치한 층을 벗어나자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명절 직후의 주말인 데다 다른 부서 직원들은 연차를 몰아 쓴 덕에 사옥 안은 적막했다.“지난주에 대표실을 좀 리모델링했거든.”비서실을 지나자, 허기찬 대신 서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요청하신 자료는 메신저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그래, 고생했어.”나를 대신해 정식 비서 자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총무과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해주겠지. 그래도 여자 비서가 아니라 다행스러워하는 나 자신에게 허무한 콧웃음이 흘러나왔다.차준호가 나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대표실 안쪽 프라이빗 공간이었다.예전에 무심코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은은하게 깔린 간접 조명 아래, 세련된 소파와 미니바가 보였고, 그 옆으로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가 자리했다.원래 한남동 저택이나 호텔 스위트룸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인 데다가 서재 같던 공간이 원룸처럼 꾸며져 있어 색다른 기류가 흘렀다.설마 나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면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이 판을 짜둔 걸까.황당함에 말을 잊은 나를 보며, 그가 입꼬리를 짓궂게 올려 세웠다.“차나 한잔할까. 내가 이제야 건강 좀 챙겨볼까 하고 술은 좀 줄였거든.”어느새 차준호는 미니바 앞에서 익숙하게 찻주전자를 꺼냈다. 나는 묘한 기분에 할 말을 잃은 채 털썩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프리미엄 라운지.세나는 물끄러미 포털 사이트에 도배된 기사들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옆에 서 있던 나나가 부러움 섞인 한숨을 흘리며 말을 보탰다.“와, 신 비서님 진짜 대박이다. 이제 그냥 우리나라에서 제일 핫한 여자가 되어버렸잖아?”다른 멤버들도 감탄사를 터뜨리며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면, 옆자리에 앉은 하나는 떨리는 입술을 바짝 깨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사람 인생 진짜 알 수 없네. 와, 말이 안 나온다. 쳇!”“진짜 신 비서님은 완벽한 워너비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다 가졌지?”두나의 말대로 신하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단순히 명예나 부, 혹은 차준호라는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배경 때문이 아니었다.풍파를 겪어도 남자의 달콤한 호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강단 있게 밀어붙이는 신하늘의 독보적인 기개와 단단함은 같은 여자가 보아도 눈이 부실 만큼 멋졌다.“김희주는 이제 완전 나락으로 떨어지겠네. 풋, 하하!”눈치 없이 깔깔거리는 나나를 보며 하나의 눈빛이 오싹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하나는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하지만 말이야······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졌을 때가 가장 위기도 빨리 오는 법이지.”기이할 정도로 광기가 번들거리는 하나의 눈빛에, 세나는 순간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상황대로라면 신하늘을 질투하고 미워해야 마땅한 쪽은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세나는 이상하게도, 거대한 파도에 맞서 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신하늘을 속으로 깊이 응원하고 있었다.
JW엔터테인먼트 사내 식당.주원형은 억지로 강소희의 손목을 끌다시피 하여 식당 안으로 향했다.주원형 역시 입맛이 싹 달아난 상태였지만, 회사 임직원들과 소속 연예인들 앞에서 강소희의 옆자리가 여전히 자신의 몫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대표님, 나 진짜 지금 제정신 아니에요.”강소희는 숟가락을 힘없이 잡은 채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판 위 음식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의 서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을 바라보는 주원형의 식도 너머로 공기가 유난히 시리게 얹혔다.“나라고 속이 편하겠어? 하지만 네 이미지를 생각해. 지금 구석에 숨어서 쭈그러져 있어 봐라. 당장 사람들이 너더러 뭐라고 수군대겠어?”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강소희의 경직되어 있던 얼굴에 순식간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어머, 그러네. 신하늘한테 밀려서 차준호한테 차인 시시한 여자가 나라니.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천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답게, 강소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국에 밥을 말았다.물론 복스럽게 음식을 넘길 위인은 아니었으나, 표정만큼은 화장품 CF를 촬영할 때처럼 생기와 여유가 넘쳐흘렀다.차준호가 이토록 파격적으로 신하늘의 손을 잡아줄 줄이야. 작년 말부터 치밀하게 세워두었던 김희주와의 연대와 계획이 산산이 부서졌음을 직감했다.대한민국의 모든 시선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인 신하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차준호가 던진 속보는 단순한 열애설 이상의 거대한 정치적·상업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어떻게 차준호는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후려치는지.”주원형은 혀를 차며 제육볶음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원래 차준호
[올해 뜨거워질 총선 열기의 신호탄은 세종동! 과연 유권자의 마음은?][정치 9단 막강 권력자 김희주와 신출내기 다크호스 신하늘! 폭풍의 격돌 예고!][TT 여론조사 결과 34% 대 32% 박빙! 중도층 표심이 최대 변수!][당대표를 노리던 김희주에게 치명타 입힌 신하늘! 경쟁당의 파격 영입 시도되나]아침이 되자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온통 내 이름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아직 선거 시작도 하지 않았고, 선거인명부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알림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면서도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거세게 요동쳤다.어쨌든 그건 그거고 나의 일은 차질 없이 해야 했다.밤을 꼬박 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최기범에게 제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렸다.회사 피트니스센터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는데, 나를 향하는 사원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해진 상태였다.마치 톱스타 에스텔라를 바라볼 때나 감돌던 묘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섞인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어제 휴대전화 전원을 꺼둔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쏟아진 문자와 미확인 음성 메시지, SNS 반응은 폭발적인 수준이었다.단 한 번도 비공개로 전환한 적 없던 게시물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열띤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Umm Umm UmmUm Um Um Um Um시시각각 서늘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발신자 제한으로 온 문자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악담으로 내 마음을 베어냈다.정치판에는 얼씬도 말라는 경고부터,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자중하라는 치졸한 협박까지. 글자마다 서슬 퍼런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계속 설치다간 험한 꼴을 볼
그날 밤, 자정을 넘긴 시각.신하늘이 터트린 충격적인 파장 덕분에 도국은 예정에 없던 일정이 백지화되며 간만에 유쾌한 여유를 얻게 되었다.그가 발길을 옮긴 곳은 잠실에 위치한 이아준의 레지던스였다.JW 대표실에서 보쌈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음에도, 도국은 문을 연 24시간 분식집에 들러 맥주와 떡볶이, 순대, 튀김 따위를 포장했다.벅차오르고 기분 좋은 일이 생길 때면 어째서 이런 투박한 음식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까.어린 시절,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마다 늘 곁에 놓여 있던 음식들이라 그런지도 몰랐다.“나 어제도 최고의 하루였는데 오늘도 운수 좋은 날로 쳐야겠다. 도국이가 불쑥 찾아오다니, 하하!”도국이 이아준의 레지던스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이아준은 그를 기꺼이 환대했다.거실 TV를 나지막이 틀어둔 채,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맥주 캔과 떡볶이, 순대, 모둠 튀김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을 펼쳐놓았다.“대표실에서 보쌈을 그렇게 먹고 왔는데, 이상하게 이게 또 당기더라고.”그 말에 이아준이 손가락을 튕기며 화답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도 저녁에 스테이크를 썰긴 했는데, 떡볶이 들어갈 배는 따로 있지. 아무래도 나, L그룹을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집어삼키게 될 것 같다. 혼술이라도 할까 했어.”“잘됐네. 축하한다.”“지금 심정 같아선 팬티만 입고 잠실역 한복판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니까, 하하!”도국은 맥주 캔을 내밀며 이아준을 향해 넌지시 입꼬리를 올렸다.이아준은 떡볶이 조각을 집어 먹으며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더니, 도국의 맥주 캔에 제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몸 관리 끝판왕인 주원형 대표가 너랑 보쌈을 먹
차준호가 나를 위해 공식적인 연인이라 선언을 한다고?늘 내 뒤를 묵묵히 받쳐주고, 나를 품어 안을 때나, 심지어 차진철 회장 앞에서도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기던 그였다.하지만 미래까지 함께할 수는 없다며 단단한 벽을 치던 남자가 이제 와서 나를 자신의 여자라고 세상에 밝히겠다니.나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직시하며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이 회사의 명운을 짊어진 분입니다. 굳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한 발짝 바짝 다가서며 낮게 읊조렸다.“이대로 혼자 달려 나가다 멈춰 섰을 때, 내 여자라는 태그를 달아놓아야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결국 이것 때문이었나.내가 또다시 홀로 남아 처참하게 짓밟힐까 봐. 판을 흔든 뒤 감당해야 할 그다음까지 그가 미리 걱정해 주는 건가.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길은 고마웠고, 모든 것을 걸고 지켜주려는 그의 중후한 헌신에 가슴이 울컥거릴 만큼 감격스러웠지만······.“너무 늦었네요, 대표님.”말을 마친 나는 서늘하게 돌아설 준비를 하였다.어차피 나를 온전히 안아줄 마음이었다면,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확실히 내 옆에 서 주었어야 했다.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었다.내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차준호가 전격적으로 일어서며 내 손목을 강하게 쥐어잡았다.“그래, 지독하게 늦었다는 거 알아.”억센 악력 뒤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러니 내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일단 식사라도 제대로 마치고 가.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