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 #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공유

#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작가: silver구슬
last update 게시일: 2026-05-18 23:53:59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

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

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

[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

[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중환자실을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천벌 받을 강소희! 감히 이X! 어떻게···!] 

고미주는 흥분해 소리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말을 이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강소희 씨도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차 대표님 옆 병실로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어후! 그 X! 일어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교양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천박함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권위가 무색할 만큼 상스러운 언사였다.

혹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차준호와 극적으로 사귀게 되어 새해를 보내다 내가 누워있었다면?

‘고미주에게 저런 모욕을 들었겠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부르르 몸이 떨려와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진욱은 멋쩍은 듯 주의사항을 알려주고는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나갔다.

고미주는 병실의 방음이 별로인 것을 모르는지 복도로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내며 한숨을 흘렸다.

“신 비서, 차 대표의 기억 3년 치가 사라졌대. 이게 말이 돼?”

내 말이 그 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좋게 끝났지만 함께하는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삭제된 3년의 기록과 함께, 그 세계 속의 나라는 존재 역시 깨끗이 지워졌다.

어느새 나의 손은 목에 걸린 펜던트만 만지고 있었다. 

늘 웃게 해 주고, 그렇게 달게만 굴더니.

“앞으로는 나 여기 자주 안 올 거야. 신 비서가 차 대표를 잘 챙겨줘.”

“······네?”

이런 날벼락같은 소리를 하다니.

가족이 돌봐야 할 문제 아닌가?

“차 대표는 나와 진아를 몰라. 3년 전에 회장님이 불러주신 거라 지금도 가족으로 인정 안 할 거야.”

뭔가 고미주도 나만큼이나 심란해 보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그 난리를 다시 겪기는 싫은데, 쯧.”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고백했다가 차이고 다른 여자랑 스캔들이 난 남자가 기억까지 날려 버렸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쿵- 어느새 고미주는 병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아 녹아버린 커피를 입에 댔다.

‘아, 이런···.’

입안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양재동 신사옥 20층 대표실.

185cm가 넘는 장신에 30대 후반이지만 20대 같은 외모를 가진 주원형은 통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관리된 몸을 감싼 명품 글렌 체크 슈트 역시 지금 자신과 어울렸고 이곳의 주인답게 내뿜는 기운이 대단해도 소용 없었다.

왜 오랜 세월 그녀를 탐닉했음에도, 정작 그녀의 시선 끝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머문 적이 없었던 걸까.

주원형은 늦은 시각이지만 구불구불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정체가 상당한 강남대로만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소희는?”

주원형은 홍보실장 김훈에게 태블릿 PC를 건네받으며 다시 숨을 크게 뱉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잠을 자는 건지, 의식이 안 돌아온 건지. 제가 갔을 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고비 넘겼으니 별일 없을 거라 했습니다.”

오늘도 참 대단한 기사들이 떴다. 모두 강소희와 차준호와의 그럴듯한 로맨스 소설 같은 추측성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강소희는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그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굴며 날만 세우고 영화 촬영 때문에 잠잘 시간도 없었을 텐데.

돌연 연말 모든 일정도 취소하고 잠적하더니 결국 황당한 사고를 당해버렸다.

“그 교활한 여우가 기어이 차준호에게 들러붙었군. 분위기는 어때?”

그가 미간을 좁힌 채 기사를 묵묵히 훑어내자 김훈은 이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대표님, 강소희가 평소 스캔들 없이 지내서 동정표를 얻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김훈은 참으로 유능한 직원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언론 대응 능력이 뛰어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은 신기루처럼 덧없는 환상 위에 세워진 직업이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것.

대세를 타서 흐름이 형성되면 순식간에 몸값이 1000배가 뛰기도 한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면 거지꼴이 되어 대중의 기억에서 악마가 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게 이 바닥 생리인데···.

“그 방만한 것을 그동안 얼마나 조였는데도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제 감정이 주원형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하고 이 대표실에서 몸만 붙어먹은 게 거의 10년이었다.

결국,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니.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어 억장이 무너졌지만, 딴 놈이랑 있다가 그랬다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김훈은 주원형의 안색을 살피다 더욱 입꼬리를 올려 세웠다.

“사실 차준호라면 CC그룹을 이끌 차기 후계자이자 CH-컴퍼니 대표 아닙니까. 잘 되어도 좋고, 헤어져도 로맨스죠.”

주원형은 더욱 심사가 꼬여 들어 태블릿을 김훈에게 성의 없이 넘겨주고는 다시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김훈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저기··· 대표님. 내일 병원에는 안 가십니까?”

분명 주원형이 강소희를 마음에 품은 뒷사정도 이해하고 부글거리는 속내도 알았기에 그리 물은 것 같았다.

“나중에 잠잠해지고 나면.”

“아하, 네.”

김훈은 새해 일정이 바쁘니 잘 선택했다면서 강소희에 대해선 추가 언급 없이 다른 사안을 브리핑했다.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주원형은 강소희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김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도 주원형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까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

다음 날, VIP 병실 복도 앞

이거 새해부터 너무한 나날만 연속이었다. 올해 운수는 꽝인지 온 우주가 음해하려는 건 아닌가 가설까지 세우게 되었다.

차준호가 새벽 중환자실에서 VIP 일반 병동으로 옮기자마자 다시 기자들은 바퀴벌레처럼 몰려들어 혼을 쏙 빼놓았다.

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에 들어갈 여유조차 없어 발 디딜 틈이 없는 이곳에서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래도 며칠 단련이 되었기에 영혼 없는 AI가 되어 제법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었던 분홍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 스타킹에 핑크 스틸레토 킬힐을 신고 빈틈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는 옷이 꼭 맞았는데, 지금은 며칠 먹은 게 없어 그런지 제법 헐렁해져 있었다.

‘이 옷을 입었던 그날도 그는 다 나를 잊었겠지.’

나도 모르게 손이 또 목덜미에 닿았다.

과연 그는, 오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 목걸이는 알아 보려나. 

나는 기자를 상대하면서도 물끄러미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은 그와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5. 90%의 진실, 말하지 않은 나머지

    밤의 장막이 걷히고, 여명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프라이빗 공간의 창을 타고 스며들었다.지난밤, 서로를 탐하며 모든 것을 터뜨릴 듯 열정을 포개고 난 뒤에야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독했던 고된 여정의 끝에서 찾아온 잠은 꿀처럼 달콤하고 안락했다.하지만 아침이 되어 창가로 흐릿하게 흘러드는 백색광에 눈이 적응해 가자, 어젯밤의 밀도 높은 열기는 아침의 민망함으로 변해 차가운 이성을 깨워냈다.나는 잠든 차준호를 깨우지 않은 채 욕실로 향했다. 물소리 사이로 생각을 조용히 정돈했다.그러고 보니, 대체 무슨 정신으로 회사 사옥 한복판에서 이런 낯 뜨거운 거사를 치른 것일까.조만간 허기찬이나 서진원이 출근할 것이고, 아래층에는 주말이어도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누빌 터였다.‘대표님이 변했어.’어젯밤 이곳에서 차준호와 입술을 겹치고 서로의 옷가지들을 하나씩 은밀하게 거두어낼 때마다, 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흘러갔다. 그 강렬한 열기 앞에서 과거의 메마르고 건조했던 관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나를 가득 품어 오던 그의 아주 작은 손길 하나조차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애틋함을 머금고 있었다.드디어 우리도 평범하고 평온한 연인이 된 것일까.‘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있네. 피임까지 하지 말자니.’입가에 번지는 나지막한 실소가 공기 중으로 산산이 부서졌다.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여전히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고 잠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평소의 견고한 철벽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무방비했다. 아마 나를 지키고 이 판을 짜느라 그 역시 며칠 동안 단 한순간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었다.항상 먼저 깨어나 나를 내려다보던 건 차준호였는데, 이렇게 먼저 일어나 그를 지켜보는 것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4. 동상이몽, 연인들

    CH-컴퍼니 대표실 한편 리모델링을 한 은밀한 이곳에 정제된 침묵이 찾아왔다.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3월 1일.모든 미련을 털어내고 차준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 떠나겠노라 단단히 마음먹은 이후로,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하지만 그가 매일매일 던진 수평선 너머의 파문은 지나치게 거대했다.그리고 오늘 드디어 역대급 거대한 물보라를 그가 일으켰다.“신하늘, 놀란 거야? 나는 너랑 닮은 아이를 원해.”차준호의 입에서 이런 명제가 흘러나올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성인 남녀가 밤을 지새우고 체온을 섞다 보면 자연스레 수순처럼 따라오는 일이라 해도, 늘 철벽을 세우고 거리를 둔 차준호가 나를 향해 건넨 그 말은 내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다만 오늘은 이성도, 계산도 아닌 오롯이 본능에만 이끌리고 싶었다.이번에는 그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묵직한 입술을 내가 먼저 집요하게 덮쳐버렸다.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귀가에서 사정없이 울려댔고, 시야는 이미 아득한 열감으로 일렁였다.내가 세워둔 서늘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걸까. 기한으로 정해둔 날이 이제 겨우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을 감은 채 차준호라는 남자를 오롯이 내 품에 가두었다. 그에게 안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이래서 일단은 견디며 살아보아야 하는 건가.차준호의 목을 끌어 안은 채, 열기를 더욱 돋우며 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같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3. 거짓말쟁이들의 뜨거운 밤

    23층에서 25층, 익숙한 비서실을 지나 대표실로 향하는 길.“대표님, 참 가지가지 대단도 하시네요.”어느새 나는 차준호의 단단한 손에 이끌려 조용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게임 개발실이 위치한 층을 벗어나자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명절 직후의 주말인 데다 다른 부서 직원들은 연차를 몰아 쓴 덕에 사옥 안은 적막했다.“지난주에 대표실을 좀 리모델링했거든.”비서실을 지나자, 허기찬 대신 서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요청하신 자료는 메신저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그래, 고생했어.”나를 대신해 정식 비서 자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총무과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해주겠지. 그래도 여자 비서가 아니라 다행스러워하는 나 자신에게 허무한 콧웃음이 흘러나왔다.차준호가 나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대표실 안쪽 프라이빗 공간이었다.예전에 무심코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은은하게 깔린 간접 조명 아래, 세련된 소파와 미니바가 보였고, 그 옆으로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가 자리했다.원래 한남동 저택이나 호텔 스위트룸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인 데다가 서재 같던 공간이 원룸처럼 꾸며져 있어 색다른 기류가 흘렀다.설마 나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면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이 판을 짜둔 걸까.황당함에 말을 잊은 나를 보며, 그가 입꼬리를 짓궂게 올려 세웠다.“차나 한잔할까. 내가 이제야 건강 좀 챙겨볼까 하고 술은 좀 줄였거든.”어느새 차준호는 미니바 앞에서 익숙하게 찻주전자를 꺼냈다. 나는 묘한 기분에 할 말을 잃은 채 털썩 소파에 몸을 묻었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2. 기가 막힌 인간관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프리미엄 라운지.세나는 물끄러미 포털 사이트에 도배된 기사들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옆에 서 있던 나나가 부러움 섞인 한숨을 흘리며 말을 보탰다.“와, 신 비서님 진짜 대박이다. 이제 그냥 우리나라에서 제일 핫한 여자가 되어버렸잖아?”다른 멤버들도 감탄사를 터뜨리며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면, 옆자리에 앉은 하나는 떨리는 입술을 바짝 깨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사람 인생 진짜 알 수 없네. 와, 말이 안 나온다. 쳇!”“진짜 신 비서님은 완벽한 워너비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다 가졌지?”두나의 말대로 신하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단순히 명예나 부, 혹은 차준호라는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배경 때문이 아니었다.풍파를 겪어도 남자의 달콤한 호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강단 있게 밀어붙이는 신하늘의 독보적인 기개와 단단함은 같은 여자가 보아도 눈이 부실 만큼 멋졌다.“김희주는 이제 완전 나락으로 떨어지겠네. 풋, 하하!”눈치 없이 깔깔거리는 나나를 보며 하나의 눈빛이 오싹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하나는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하지만 말이야······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졌을 때가 가장 위기도 빨리 오는 법이지.”기이할 정도로 광기가 번들거리는 하나의 눈빛에, 세나는 순간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상황대로라면 신하늘을 질투하고 미워해야 마땅한 쪽은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세나는 이상하게도, 거대한 파도에 맞서 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신하늘을 속으로 깊이 응원하고 있었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1. 진실의 판이 거짓을 집어 삼키다

    JW엔터테인먼트 사내 식당.주원형은 억지로 강소희의 손목을 끌다시피 하여 식당 안으로 향했다.주원형 역시 입맛이 싹 달아난 상태였지만, 회사 임직원들과 소속 연예인들 앞에서 강소희의 옆자리가 여전히 자신의 몫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대표님, 나 진짜 지금 제정신 아니에요.”강소희는 숟가락을 힘없이 잡은 채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판 위 음식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의 서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을 바라보는 주원형의 식도 너머로 공기가 유난히 시리게 얹혔다.“나라고 속이 편하겠어? 하지만 네 이미지를 생각해. 지금 구석에 숨어서 쭈그러져 있어 봐라. 당장 사람들이 너더러 뭐라고 수군대겠어?”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강소희의 경직되어 있던 얼굴에 순식간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어머, 그러네. 신하늘한테 밀려서 차준호한테 차인 시시한 여자가 나라니.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천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답게, 강소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국에 밥을 말았다.물론 복스럽게 음식을 넘길 위인은 아니었으나, 표정만큼은 화장품 CF를 촬영할 때처럼 생기와 여유가 넘쳐흘렀다.차준호가 이토록 파격적으로 신하늘의 손을 잡아줄 줄이야. 작년 말부터 치밀하게 세워두었던 김희주와의 연대와 계획이 산산이 부서졌음을 직감했다.대한민국의 모든 시선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인 신하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차준호가 던진 속보는 단순한 열애설 이상의 거대한 정치적·상업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어떻게 차준호는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후려치는지.”주원형은 혀를 차며 제육볶음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원래 차준호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0. 점화, 서서히 불꽃이 타오르다

    [올해 뜨거워질 총선 열기의 신호탄은 세종동! 과연 유권자의 마음은?][정치 9단 막강 권력자 김희주와 신출내기 다크호스 신하늘! 폭풍의 격돌 예고!][TT 여론조사 결과 34% 대 32% 박빙! 중도층 표심이 최대 변수!][당대표를 노리던 김희주에게 치명타 입힌 신하늘! 경쟁당의 파격 영입 시도되나]아침이 되자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온통 내 이름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아직 선거 시작도 하지 않았고, 선거인명부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알림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면서도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거세게 요동쳤다.어쨌든 그건 그거고 나의 일은 차질 없이 해야 했다.밤을 꼬박 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최기범에게 제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렸다.회사 피트니스센터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는데, 나를 향하는 사원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해진 상태였다.마치 톱스타 에스텔라를 바라볼 때나 감돌던 묘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섞인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어제 휴대전화 전원을 꺼둔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쏟아진 문자와 미확인 음성 메시지, SNS 반응은 폭발적인 수준이었다.단 한 번도 비공개로 전환한 적 없던 게시물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열띤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Umm Umm UmmUm Um Um Um Um시시각각 서늘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발신자 제한으로 온 문자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악담으로 내 마음을 베어냈다.정치판에는 얼씬도 말라는 경고부터,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자중하라는 치졸한 협박까지. 글자마다 서슬 퍼런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계속 설치다간 험한 꼴을 볼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9. 빌런을 좋아한 건가. 이런 망할.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8. 내가 미쳤지.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7. 완벽한 타인의 숨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6. 천하의 나쁜 남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