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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مؤلف: silver구슬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5-18 23:53:59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

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

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

[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

[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중환자실을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천벌 받을 강소희! 감히 이X! 어떻게···!] 

고미주는 흥분해 소리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말을 이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강소희 씨도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차 대표님 옆 병실로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어후! 그 X! 일어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교양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천박함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권위가 무색할 만큼 상스러운 언사였다.

혹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차준호와 극적으로 사귀게 되어 새해를 보내다 내가 누워있었다면?

‘고미주에게 저런 모욕을 들었겠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부르르 몸이 떨려와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진욱은 멋쩍은 듯 주의사항을 알려주고는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나갔다.

고미주는 병실의 방음이 별로인 것을 모르는지 복도로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내며 한숨을 흘렸다.

“신 비서, 차 대표의 기억 3년 치가 사라졌대. 이게 말이 돼?”

내 말이 그 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좋게 끝났지만 함께하는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삭제된 3년의 기록과 함께, 그 세계 속의 나라는 존재 역시 깨끗이 지워졌다.

어느새 나의 손은 목에 걸린 펜던트만 만지고 있었다. 

늘 웃게 해 주고, 그렇게 달게만 굴더니.

“앞으로는 나 여기 자주 안 올 거야. 신 비서가 차 대표를 잘 챙겨줘.”

“······네?”

이런 날벼락같은 소리를 하다니.

가족이 돌봐야 할 문제 아닌가?

“차 대표는 나와 진아를 몰라. 3년 전에 회장님이 불러주신 거라 지금도 가족으로 인정 안 할 거야.”

뭔가 고미주도 나만큼이나 심란해 보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그 난리를 다시 겪기는 싫은데, 쯧.”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고백했다가 차이고 다른 여자랑 스캔들이 난 남자가 기억까지 날려 버렸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쿵- 어느새 고미주는 병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아 녹아버린 커피를 입에 댔다.

‘아, 이런···.’

입안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양재동 신사옥 20층 대표실.

185cm가 넘는 장신에 30대 후반이지만 20대 같은 외모를 가진 주원형은 통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관리된 몸을 감싼 명품 글렌 체크 슈트 역시 지금 자신과 어울렸고 이곳의 주인답게 내뿜는 기운이 대단해도 소용 없었다.

왜 오랜 세월 그녀를 탐닉했음에도, 정작 그녀의 시선 끝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머문 적이 없었던 걸까.

주원형은 늦은 시각이지만 구불구불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정체가 상당한 강남대로만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소희는?”

주원형은 홍보실장 김훈에게 태블릿 PC를 건네받으며 다시 숨을 크게 뱉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잠을 자는 건지, 의식이 안 돌아온 건지. 제가 갔을 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고비 넘겼으니 별일 없을 거라 했습니다.”

오늘도 참 대단한 기사들이 떴다. 모두 강소희와 차준호와의 그럴듯한 로맨스 소설 같은 추측성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강소희는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그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굴며 날만 세우고 영화 촬영 때문에 잠잘 시간도 없었을 텐데.

돌연 연말 모든 일정도 취소하고 잠적하더니 결국 황당한 사고를 당해버렸다.

“그 교활한 여우가 기어이 차준호에게 들러붙었군. 분위기는 어때?”

그가 미간을 좁힌 채 기사를 묵묵히 훑어내자 김훈은 이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대표님, 강소희가 평소 스캔들 없이 지내서 동정표를 얻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김훈은 참으로 유능한 직원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언론 대응 능력이 뛰어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은 신기루처럼 덧없는 환상 위에 세워진 직업이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것.

대세를 타서 흐름이 형성되면 순식간에 몸값이 1000배가 뛰기도 한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면 거지꼴이 되어 대중의 기억에서 악마가 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게 이 바닥 생리인데···.

“그 방만한 것을 그동안 얼마나 조였는데도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제 감정이 주원형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하고 이 대표실에서 몸만 붙어먹은 게 거의 10년이었다.

결국,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니.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어 억장이 무너졌지만, 딴 놈이랑 있다가 그랬다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김훈은 주원형의 안색을 살피다 더욱 입꼬리를 올려 세웠다.

“사실 차준호라면 CC그룹을 이끌 차기 후계자이자 CH-컴퍼니 대표 아닙니까. 잘 되어도 좋고, 헤어져도 로맨스죠.”

주원형은 더욱 심사가 꼬여 들어 태블릿을 김훈에게 성의 없이 넘겨주고는 다시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김훈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저기··· 대표님. 내일 병원에는 안 가십니까?”

분명 주원형이 강소희를 마음에 품은 뒷사정도 이해하고 부글거리는 속내도 알았기에 그리 물은 것 같았다.

“나중에 잠잠해지고 나면.”

“아하, 네.”

김훈은 새해 일정이 바쁘니 잘 선택했다면서 강소희에 대해선 추가 언급 없이 다른 사안을 브리핑했다.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주원형은 강소희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김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도 주원형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까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

다음 날, VIP 병실 복도 앞

이거 새해부터 너무한 나날만 연속이었다. 올해 운수는 꽝인지 온 우주가 음해하려는 건 아닌가 가설까지 세우게 되었다.

차준호가 새벽 중환자실에서 VIP 일반 병동으로 옮기자마자 다시 기자들은 바퀴벌레처럼 몰려들어 혼을 쏙 빼놓았다.

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에 들어갈 여유조차 없어 발 디딜 틈이 없는 이곳에서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래도 며칠 단련이 되었기에 영혼 없는 AI가 되어 제법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었던 분홍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 스타킹에 핑크 스틸레토 킬힐을 신고 빈틈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는 옷이 꼭 맞았는데, 지금은 며칠 먹은 게 없어 그런지 제법 헐렁해져 있었다.

‘이 옷을 입었던 그날도 그는 다 나를 잊었겠지.’

나도 모르게 손이 또 목덜미에 닿았다.

과연 그는, 오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 목걸이는 알아 보려나. 

나는 기자를 상대하면서도 물끄러미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은 그와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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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00. 가슴속에서 휘몰아친 폭풍

    2월 28일 점심. 사내 카페테리아에는 평소보다 한결 가벼운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그러나 사람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대비되듯, 나의 내면은 지독한 악몽의 잔재로 까마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 번 뒤흔들린 입맛은 돌아올 줄 몰랐고, 정성스레 정돈된 차분한 대화 속에서도 온전히 그 온기를 누리지 못했다.직원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내일 정식 출시를 앞둔 게임의 최종 빌드를 실행했다. 앱 마켓 검수까지 완벽하게 끝마친 모바일 화면 위로 유려한 그래픽과 찰나의 화려함이 감각적으로 흘러나왔다.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던 김강무가 나지막이 탄성을 뱉어냈다.“수백억을 쏟아부을 때만 해도 PC와 모바일을 동시에 잡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마켓 검수까지 무사히 넘기고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네요.”김강무의 감탄에 나정아가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 화면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나저나 전 이제 휴대폰 화면이 훨씬 더 익숙해진 것 같아요. 줄곧 PC로만 테스트를 해왔었거든요.”“요즘은 데스크톱이 없는 가구도 많습니다. 그래픽과 타협하지 않고 모바일 최적화에 과감히 사활을 건 게 결국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사전 예약자만 해도 이미 300만을 가뿐히 넘어섰더군요.”옆자리의 최기범이 특유의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보탰다. 그러자 찻잔을 들고 있던 한규련이 은근히 분위기를 띄웠다.“게다가 이번에 에스텔라가 부른 메인 OST 반응이 그야말로 뜨겁던데요? 음원 차트 상위권은 물론이고 MV 조회수까지 폭발적이라 초기 유입은 확실히 잡은 셈이죠. 그건 그렇고·····&mi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9. D-Day-1,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3선 중진 김희주, 당 노선 불일치 및 막말 논란으로 전격 공천 탈락 수모!][지역 민심 외면한 결과? 김희주 컷오프 충격··· 세종동 물갈이 신호탄 되나][‘새 술은 새 잔에’… 지지 세력 몰락에 무너진 중진, 2030 신진 세력 급부상][XX당 공천 기습 발표 후 여론 촉각··· 경합 지역 속전속결 선거 체제 돌입][‘대어’ 신하늘의 행보는? XX당 영입설 솔솔, 전격 공천 받게 되려나]김희주의 몰락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대한민국의 정치부 헤드라인은 김희주의 추락과, 그 반사이익의 중심에 선 신하늘의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잠실 L그룹 회장실.블라인드 사이로 비쳐 드는 창백한 햇살 아래, 이아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입꼬리를 씰룩거렸다.정계 전체를 요동치게 만든 김희주의 컷오프 소식은 김희주에게 줄을 댔던 이아정의 코를 납작하게 누를 완벽한 호재였다.“할아버지, 김희주는 이제 완전히 끝났네요.”이아준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건넸어도 이왕춘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마치 거대한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식어가는 찻잔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년도 넘게 당에 공헌했는데, 공천조차 못 받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이왕춘의 목소리에는 환희가 아닌, 깊은 충격과 묘한 허탈감이 짙게 묻어났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8. 이제 시작인데, 왜 그래?

    밤 10시 반.어둠이 짙게 내린 프라이빗 공간 안, 차준호는 나지막한 클래식 음률 대신 최기범과의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켜둔 채 움직이고 있었다.신하늘이 도착하면 걸쳐 입을 포근한 로브를 정갈하게 정돈하고, 출출할 그녀를 위해 준비한 가벼운 야식을 보기 좋게 세팅하는 손길에는 기묘할 정도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신 과장, 얼른 퇴근시켜. 저러다 쓰러져.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최기범의 건조한 목소리에 차준호가 입꼬리를 얇게 말아 올렸다. 폭신한 거위털 이불의 날을 세워 정리하며 그가 넌지시 쏘아붙였다.“내 여자는 내가 알아서 챙겨. 상하이까지 출장 가서 나한테 전화 하다니.”―그냥 메신저로 또 보고서를 보냈기에 하는 말이야.“그나저나 신하늘 지지자 모임은 또 뭐야?”― ‘스카이 블루’ 바람을 일으키고 싶어서.차준호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손을 털었다.은밀한 공간 내부의 온도계를 체크해 적정 온도를 맞추고, 건조하지 않도록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지는 가습기를 가동시켰다.정숙한 움직임 속에서도 그의 물음은 묵직하게 최기범을 향했다.“넌 너희 어머니랑 두 번 다시 안 볼 생각이야?”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최기범의 나른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나라도 나서서 여론을 희석시켜야 하니까. 이슈를 분산하기 위해서랄까.차준호는 피식 콧웃음을 흘렸다. 신하늘을 위한 최선의 환경을 갖추면서도, 그의 이성은 최기범이 쌓은 주춧돌의 진짜 의도를 정교하게 계산하고 있었다.“그런데 네가 대중의 관심을 신하늘에게 더 쏠리게 만들었잖아.”―맞아, 난 지금 신하늘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어.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7. 살아도 죽어도 모두 같은 운명

    일요일 오전.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 대기실.“여기가 진짜 일본이라니! 우리 진짜 성공했다, 그치?”하나의 들뜬 목소리가 적막한 대기실 안을 쾌활하게 울렸다.“게다가 3월 1일 신작 게임 출시 이벤트 무대에 우리가 메인 주인공이라니! 언니 너무 기뻐요!”거울 앞에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던 두나 역시 붉어진 볼을 감추지 못한 채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들뜬 기색이 역력한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세나 역시 뿌듯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루빨리 더 높이 올라가 확실한 성공을 거둬야만 했다. 그래야 도국과 연예계 바닥에서 오래도록 같은 시선을 공유하며 연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를 향한 아련한 마음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그때, 대기실 한쪽 모니터를 조용히 바라보던 나나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두 손을 꼭 쥐었다.“언니들, 그거 알아요? 도국 오빠가 예전에 일본 예능에 나와서······ 본인이 우리 팬이라고 직접 말해 줬었대요. 덕분에 일본에서 우리 인기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뛴 거래요.”나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나는 입 안쪽에 맺히는 씁쓸함을 참지 못하고 하-, 나지막한 한숨을 흘려보냈다. 단 한 사람, 도국의 말 한마디가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하고 거대한지 새삼 뼈저리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그러자 옆에 서 있던 하나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그나저나 그 신 비서님도 처신 좀 똑바로 해야 할 텐데. 괜히 우리한테 피해 주지 말고 빨리 회사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하나의 투덜거림에 두나가 거울을 보며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신 비서님은 어차피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6. 경계선에서 속아주는 사이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선우현을 마주했던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이었으나, 그의 기세에 눌려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차준호가 사람을 시켜 호화로운 도시락까지 보내주었건만, 나는 제대로 된 감사 답신조차 보내지 못한 채 멍하니 선우현이 주고 간 명함 끝자락만 만지작거렸다.차진철 회장은 물론, 차준호조차 모르게 내 앞에 나타난 선우현.그가 사라진 뒤에도 여운처럼 남은 긴장감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신 과장님, 점심 안 드세요?”옆에서 나정아가 물어올 때까지도 깊은 시름에 빠져 있던 나는,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먹어야죠.” “오늘도 혹시······ 대표님이랑 드세요?” “아뇨, 오늘은 도시락 먹으려고요.”점심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와중에도 영양가 없는 고민으로 시간만 흘려보낸 꼴이었다.뒤늦게 확인한 사내 메신저 창에는 수많은 알림이 깜빡이고 있었다. 보고서를 잘 전달받았다는 최기범의 메시지, 그리고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차준호의 푸념까지.[신하늘, 감히 아침도 같이 안 먹고 사라지다니. 괘씸하네.]일개 직원과 달리 한가한 대표님은 더 쉬라는 의미였다고 가벼운 답장을 뒤늦게 보낸 뒤, 가슴 한구석의 찜찜함을 꾹 눌러 덮었다.파티션 너머로 나정아의 시선이 내 책상 옆에 놓인 고급 보온 백으로 향해 있었다. 연일 배달되는 정갈한 디저트와 요리에 내심 기대를 품은 눈치였다.“우리 어서 식사하러 가요.”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정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얏호! 매일 보신하는 기분이에요. 카페테리아로 가요!”아이처럼 밝게 웃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 위층에 있을 차준호를 떠올리며 천장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95. 90%의 진실, 말하지 않은 나머지

    밤의 장막이 걷히고, 여명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프라이빗 공간의 창을 타고 스며들었다.지난밤, 서로를 탐하며 모든 것을 터뜨릴 듯 열정을 포개고 난 뒤에야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독했던 고된 여정의 끝에서 찾아온 잠은 꿀처럼 달콤하고 안락했다.하지만 아침이 되어 창가로 흐릿하게 흘러드는 백색광에 눈이 적응해 가자, 어젯밤의 밀도 높은 열기는 아침의 민망함으로 변해 차가운 이성을 깨워냈다.나는 잠든 차준호를 깨우지 않은 채 욕실로 향했다. 물소리 사이로 생각을 조용히 정돈했다.그러고 보니, 대체 무슨 정신으로 회사 사옥 한복판에서 이런 낯 뜨거운 거사를 치른 것일까.조만간 허기찬이나 서진원이 출근할 것이고, 아래층에는 주말이어도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누빌 터였다.‘대표님이 변했어.’어젯밤 이곳에서 차준호와 입술을 겹치고 서로의 옷가지들을 하나씩 은밀하게 거두어낼 때마다, 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흘러갔다. 그 강렬한 열기 앞에서 과거의 메마르고 건조했던 관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나를 가득 품어 오던 그의 아주 작은 손길 하나조차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애틋함을 머금고 있었다.드디어 우리도 평범하고 평온한 연인이 된 것일까.‘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있네. 피임까지 하지 말자니.’입가에 번지는 나지막한 실소가 공기 중으로 산산이 부서졌다.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여전히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고 잠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평소의 견고한 철벽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무방비했다. 아마 나를 지키고 이 판을 짜느라 그 역시 며칠 동안 단 한순간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었다.항상 먼저 깨어나 나를 내려다보던 건 차준호였는데, 이렇게 먼저 일어나 그를 지켜보는 것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4. 폭풍의 눈이 열리다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 지옥의 대리인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 비밀의 밤, 잔인한 선물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 사람 미치게 하는 거짓말 같은 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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