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 #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Share

#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23:53:59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

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

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

[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

[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중환자실을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천벌 받을 강소희! 감히 이X! 어떻게···!] 

고미주는 흥분해 소리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말을 이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강소희 씨도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차 대표님 옆 병실로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어후! 그 X! 일어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교양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천박함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권위가 무색할 만큼 상스러운 언사였다.

혹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차준호와 극적으로 사귀게 되어 새해를 보내다 내가 누워있었다면?

‘고미주에게 저런 모욕을 들었겠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부르르 몸이 떨려와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진욱은 멋쩍은 듯 주의사항을 알려주고는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나갔다.

고미주는 병실의 방음이 별로인 것을 모르는지 복도로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내며 한숨을 흘렸다.

“신 비서, 차 대표의 기억 3년 치가 사라졌대. 이게 말이 돼?”

내 말이 그 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좋게 끝났지만 함께하는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삭제된 3년의 기록과 함께, 그 세계 속의 나라는 존재 역시 깨끗이 지워졌다.

어느새 나의 손은 목에 걸린 펜던트만 만지고 있었다. 

늘 웃게 해 주고, 그렇게 달게만 굴더니.

“앞으로는 나 여기 자주 안 올 거야. 신 비서가 차 대표를 잘 챙겨줘.”

“······네?”

이런 날벼락같은 소리를 하다니.

가족이 돌봐야 할 문제 아닌가?

“차 대표는 나와 진아를 몰라. 3년 전에 회장님이 불러주신 거라 지금도 가족으로 인정 안 할 거야.”

뭔가 고미주도 나만큼이나 심란해 보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그 난리를 다시 겪기는 싫은데, 쯧.”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고백했다가 차이고 다른 여자랑 스캔들이 난 남자가 기억까지 날려 버렸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쿵- 어느새 고미주는 병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아 녹아버린 커피를 입에 댔다.

‘아, 이런···.’

입안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양재동 신사옥 20층 대표실.

185cm가 넘는 장신에 30대 후반이지만 20대 같은 외모를 가진 주원형은 통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관리된 몸을 감싼 명품 글렌 체크 슈트 역시 지금 자신과 어울렸고 이곳의 주인답게 내뿜는 기운이 대단해도 소용 없었다.

왜 오랜 세월 그녀를 탐닉했음에도, 정작 그녀의 시선 끝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머문 적이 없었던 걸까.

주원형은 늦은 시각이지만 구불구불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정체가 상당한 강남대로만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소희는?”

주원형은 홍보실장 김훈에게 태블릿 PC를 건네받으며 다시 숨을 크게 뱉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잠을 자는 건지, 의식이 안 돌아온 건지. 제가 갔을 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고비 넘겼으니 별일 없을 거라 했습니다.”

오늘도 참 대단한 기사들이 떴다. 모두 강소희와 차준호와의 그럴듯한 로맨스 소설 같은 추측성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강소희는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그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굴며 날만 세우고 영화 촬영 때문에 잠잘 시간도 없었을 텐데.

돌연 연말 모든 일정도 취소하고 잠적하더니 결국 황당한 사고를 당해버렸다.

“그 교활한 여우가 기어이 차준호에게 들러붙었군. 분위기는 어때?”

그가 미간을 좁힌 채 기사를 묵묵히 훑어내자 김훈은 이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대표님, 강소희가 평소 스캔들 없이 지내서 동정표를 얻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김훈은 참으로 유능한 직원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언론 대응 능력이 뛰어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은 신기루처럼 덧없는 환상 위에 세워진 직업이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것.

대세를 타서 흐름이 형성되면 순식간에 몸값이 1000배가 뛰기도 한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면 거지꼴이 되어 대중의 기억에서 악마가 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게 이 바닥 생리인데···.

“그 방만한 것을 그동안 얼마나 조였는데도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제 감정이 주원형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하고 이 대표실에서 몸만 붙어먹은 게 거의 10년이었다.

결국,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니.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어 억장이 무너졌지만, 딴 놈이랑 있다가 그랬다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김훈은 주원형의 안색을 살피다 더욱 입꼬리를 올려 세웠다.

“사실 차준호라면 CC그룹을 이끌 차기 후계자이자 CH-컴퍼니 대표 아닙니까. 잘 되어도 좋고, 헤어져도 로맨스죠.”

주원형은 더욱 심사가 꼬여 들어 태블릿을 김훈에게 성의 없이 넘겨주고는 다시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김훈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저기··· 대표님. 내일 병원에는 안 가십니까?”

분명 주원형이 강소희를 마음에 품은 뒷사정도 이해하고 부글거리는 속내도 알았기에 그리 물은 것 같았다.

“나중에 잠잠해지고 나면.”

“아하, 네.”

김훈은 새해 일정이 바쁘니 잘 선택했다면서 강소희에 대해선 추가 언급 없이 다른 사안을 브리핑했다.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주원형은 강소희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김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도 주원형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까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

다음 날, VIP 병실 복도 앞

이거 새해부터 너무한 나날만 연속이었다. 올해 운수는 꽝인지 온 우주가 음해하려는 건 아닌가 가설까지 세우게 되었다.

차준호가 새벽 중환자실에서 VIP 일반 병동으로 옮기자마자 다시 기자들은 바퀴벌레처럼 몰려들어 혼을 쏙 빼놓았다.

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에 들어갈 여유조차 없어 발 디딜 틈이 없는 이곳에서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래도 며칠 단련이 되었기에 영혼 없는 AI가 되어 제법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었던 분홍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 스타킹에 핑크 스틸레토 킬힐을 신고 빈틈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는 옷이 꼭 맞았는데, 지금은 며칠 먹은 게 없어 그런지 제법 헐렁해져 있었다.

‘이 옷을 입었던 그날도 그는 다 나를 잊었겠지.’

나도 모르게 손이 또 목덜미에 닿았다.

과연 그는, 오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 목걸이는 알아 보려나. 

나는 기자를 상대하면서도 물끄러미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은 그와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91. 뜨겁고도 살벌하게 기대되는 밤

    서로의 안색만 살피던 지난날을 지나, 오롯이 둘만의 온기로 채워진 이 스위트룸 침실로 돌아와 맞이하는 금요일 밤은 새삼 가슴이 뭉클할 만큼 감회가 새로웠다.어느덧 침대 옆 스탠드의 붉은 조도가 아득하게 옅어지고, 넓은 통창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화려한 야경만이 은은한 그림자를 끌어당기며 침실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고요한 침묵을 깨고 차준호가 나직한 음성을 흘려보냈다.“신하늘, 기특해.”이 남자는 늘 이런 사람이었다. 무심한 척 툭 던지면서도, 간질거릴 만큼 듣고 싶은 말과 가슴을 거세게 흔드는 듣기 좋은 말을 결코 참지 않고 똑바로 건네주는 사내.그렇기에 나는 내 인생 전체를 걸고, 심지어 목숨까지 던져가며 그를 지켜냈어도 단 한 순간조차 아깝지 않았다.내 마음을 전부 바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남자였으니까.이 사내에게 숱한 거짓말을 건네고, 김희주에게 짓밟힌 나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그를 이용하기까지 했던 지난겨울이었다. 세상을 거머쥐려는 야심 속에서도 나는 늘 나를 아프게 한 이 남자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렸었다.어둠 속에서 차준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나를 온전히 포위해 왔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볼을 가만히 쓸어내리다 이내 도망칠 틈도 없이 내 입술 위로 깊게 겹쳐졌다.조심스러우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숨결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은밀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흐트러진 마찰음 사이로 차준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가운의 끈을 천천히 풀어내렸다.스르르 기분 좋게 젖혀진 로브 틈새로 아늑한 밤공기와 그의 뜨거운 손길이 동시에 스쳤다.그의 손이 가슴과 허리를 지나, 아직은 부드럽고 납작한 내 아랫배 위로 묵직하게 머물렀다. 그 손길에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한 것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움과 강렬한 소유욕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아버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90. 돌고 돌아 마주한 완벽한 풍경

    4월 셋째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새벽.세나가 하나와 듀엣곡 녹음을 하고 단독 예능을 하기 위해 S본부로 도착하자마자 서늘한 기운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특히 이곳은 도국과 첫키스를 나누었던 JW엔터테인먼트 전용 대기실이었다.일단 그곳에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너무 이르게 준비하고 왔기에 잡혀 있는 스케줄을 생각하면 쪽잠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도국과 둘이서만 촬영한다는 기대 때문인지 깨어버린 마음 때문에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지난번에도 곡 작업을 한다고 CH에 왔지만 하나로 인해 지극히 사무적으로 10분 남짓 얼굴만 마주하고 헤어졌었다.다정하고 안정적이면서 그래도 세나에게는 조금의 특별한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과연 오늘은 어떻게 자신을 대해 주려나. 세나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에 도국과 한시적 계약 연애를 했더라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그동안 도국과 주고받은 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액정의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만큼은, 차가운 아침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세나는 그가 보내 준 글을 한 줄 한 줄 느리게 읽어 내려가며 천천히 간담을 쓸어내렸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도 습관처럼 숨소리조차 조심하고 있었다.그러다 신하늘에게 지지하고 이아준과 함께 나란히 있던 모습이 떠올라 설레던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역시, 도국 오빠에게 소꿉친구랑은 상대가 안 되네.'자신이 무슨 바보 같은 기대를 품고 있나 싶어 휴대전화를 덮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청바지에 점퍼 차림의 해사하게 웃는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세나야, 일찍 왔구나."도국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다. 예전 계약 연애를 하던 시절, 늘 곁에 있어 주던 그 시절의 목소리였다. 잔잔하고 낮게 깔리며 어딘가 든든한 그 울림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89. 내 친구에게 선사하는 짜릿한 선물

    [췌도 이식 수술을 성공시킨 CC그룹 계열사, 대한종합병원의 독보적 기술력! 의학계 초미의 관심][심장병을 앓던 차진철 회장, 아들 차준호에게 췌도 이식 단행 후 회복 중······ 완벽한 부활 예고!][‘외조의 왕’ 차준호, 자신의 건강 악화 속에서도 신하늘의 선거 승리를 위해 전력 투구][오는 6월 1일 제22대 국회의원 임기 개시를 앞두고, 신하늘 당선인의 향후 행보에 대중의 시선 집중]세상을 거세게 들썩이게 만들었던 선거가 끝나고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언론과 세상의 뜨거운 관심은 여전히 나와 차준호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차진철 회장은 숨길 이유가 없다며, 이번 성과를 오히려 언론에 전격적으로 공개하도록 지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췌장 특화 센터 건립을 전격 선포하며 의학 발전을 위한 아낌없는 지원을 대외적으로 발표했다.“하늘아, 지병까지 회사 이미지에 기가 막히게 이용하다니. 차진철 회장님한테 진짜 한 수 크게 배우고 간다.”소파에 누워 책을 읽던 차준호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응수했다.“조용히 하려던 걸 기자들이 기사화한 거야.”녀석은 나에게 줄 딸기를 씻으러 싱크대에 서서도 연신 투덜거렸다.“잘되는 회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사실 차진철 회장은 이번 수술을 계기로 강진욱 박사의 수술팀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의미에서 간·췌장 센터 건립을 결정했다. 국내에서 차준호처럼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해 더 깊이 연구하라며 200억 원이라는 기금까지 흔쾌히 조성해 주었다.나는 잘 씻긴 딸기 하나를 집어 차준호의 입에 넣어주며 그저 가만히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88. 봄날의 스위치가 탁! 켜지는 신호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주 월요일 아침.도국이 정식으로 CH-컴퍼니에 신곡을 넘기고 계약을 마무리 지은 덕분에, 해외 스케줄을 소화 중이던 하나까지 어제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오늘 정식으로 곡을 전달받은 세나는 하나와 둘이서 듀엣 프로젝트라는 공식 일정을 시작하게 되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바로 이 휴게실에서 하나에게 뺨을 맞기도 하고 욕설을 듣기도 했던 터라, 여전히 앙금이 가슴에 깊게 남아 있었다.세나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일회용 컵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쥔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악보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하나 역시 머뭇거리는 손길로 도국이 전달해 준 악보 뭉치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신 비서님, 진짜 끝내주신다.”악보의 첫 장을 넘기던 하나가 슬그머니 세나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세나 역시 제 앞에 놓인 도국의 악보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덕분에 도국 오빠도 저희에게 다가와 주셨네요.”도국이 선물한 곡은 그야말로 히트를 치지 않을 수 없는 명곡이었다. 세나와 하나의 음역대와 음색을 섬세하게 계산해 낸 파트 분배, 가슴 밑바닥을 서늘하게 긁어내리는 선율 구성은 완벽함 그 자체였다.게다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아련하고 깊은 사랑의 가사까지······. 악보 구석구석에는 도국의 정교함과 진심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어느덧 세나의 생각도 깊어졌다.도국이라는 남자가 그토록 아끼고 바라보던 여자. 신하늘이라는 존재는 알면 알수록 타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인물이었다.“임신까지 한 상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87. 진실이 빛나는 여명을 마주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차진철의 자발 순환은 빠르게 회복(ROSC)되고 바이탈 신호 역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강진욱 박사의 지시하에 차진철 회장은 중환자실에서 VVIP 특실로 속전속결 이동되었다.나와 차준호가 머무는 병실과 바로 옆 병실로 옮겨 왔다.지독한 기계음과 서늘한 소독약 냄새가 허파를 죄어오던 중환자실 복도를 지나, 마침내 묵직한 문이 열린 특실 안은 은은하고 미약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침대 중앙, 지독했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코와 입을 덮은 산소마스크도 사라진 차진철 회장의 가슴이 작지만 분명한 생명의 박동을 그리며 오르내렸다.패여버린 뺨과 꺼칠한 피부는 그간 그가 사선에서 벌인 처절한 사투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특유의 깊고 형형한 빛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고미주가 차진아와 함께 병상 곁으로 다가가 왈칵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그들은 부어오른 눈으로 차진철의 마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꺼스럭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차준호 역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끌고 병상 근처로 다가섰고, 나 역시 그의 곁에서 조용히 거리를 좁혔다.단 며칠 사이에 사람이 이토록 세월을 한꺼번에 뒤집어쓸 수도 있는 것일까.심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차진철이 오직 아들 차준호를 살려내기 위해 견뎌냈을 그 고통의 시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처절한 사투였다.강진욱이 다가와 차트를 확인한 뒤, 이제 편하게 대화를 나누어도 좋다는 듯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료진과 함께 조용히 퇴실해 주었다.모든 고비를 극복한 차진철은 가쁘게 가슴을 부풀리며, 감격과 안도에 젖어 있는 우리 모두의 얼굴을 천천히, 아주 깊게 둘러보았다.오롯이 정적만이 남은 병실 안으로, 비로소 가족의 시간이 돌아왔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86. 마침표가 아니야, 새 계절이 열렸잖아

    JW엔터테인먼트 대표 주원형의 숙소 거실은 지나치게 정적이었다.강소희는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휴대폰 화면을 쓸어 올렸다.반쯤 처진 커튼 사이로 봄햇살이 가늘게 쏟아졌지만, 그 빛은 그녀의 무릎 언저리에서 서늘하게 멈췄다.거실 안까지 침범하지 못한 빛이라 그런가. 마치 이 공간만은 여전히 겨울에 갇혀 있는 듯했다.화면 위로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기사가 쏟아져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강소희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행간 어딘가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 무섭게 탐독했다.한때 '서쪽 동네 초라한 공주님'에 불과하다며 얕잡아 보았던 여자가 끝내 대한민국 정치계의 역사를 고쳐 쓰다니.신하늘. 그 이름 석 자가 국회의원 배지와 나란히 놓인 세상을 보며 강소희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그것은 밑바닥에서 시작한 누군가가 기어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목격할 때 느껴지는 경외감에 가까운 생경한 감각이었다.그리고 생각의 끝은 결국 차준호에게로 수렴되었다.'기어이 준호도 토끼 비서님이 살렸나 보네.'대신 주원형이 은밀히 전해준 정보대로 공여를 대신한 차진철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강소희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거렸다.시간은 자꾸만 작년 12월 31일, 그 시린 겨울날로 되돌아갔다.차준호에게 몸의 일부를 주겠다고 서 있던 강원도 어느 대형 병원의 그 냄새가 지금도 코끝을 스쳤다.아이만 없었다면 그대로 자신의 장기를 이식을 해 주고 차준호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새겨졌을 텐데.강소희는 천천히 손을 배 위로 가져갔다. 아직은 매끄럽고 평평했지만, 기분 탓인지 손바닥을 대면 미세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있었다.주원형은 이 아이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4. 폭풍의 눈이 열리다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 지옥의 대리인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 비밀의 밤, 잔인한 선물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 사람 미치게 하는 거짓말 같은 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