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같은 시각, 반대 통로 대기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녹화를 앞두고 결국 ‘에스텔라’의 무대 의상이 아랍풍의 니캅(Niqab) 같은 얼굴 가리개 스타일로 긴급 변경되었다.
리더인 하나는 홧김에 막내 세나에게 손찌검한 것이 뒤늦게 후회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전 마스크를 쓰고 대기실을 나가는 세나에게 미안하다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경솔했어.”
하나는 다른 멤버들에게도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언니는 성격 좀 죽이세요. 이제 우리도 톱스타 반열이잖아요.”
나나의 말에 하나는 자신이 과연 톱스타가 맞나 싶었다가, 그나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하는 생각에 씁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데뷔만 하면 마냥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욕심이 커질수록 내면의 비참함도 함께 늘어갔다.
“그래, 앞으로 조심할게.”
하지만 옆에
“어! 대표님!”“오셨습니까?”허기찬과 선우현을 비롯한 XX당 관계자들이 하나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나 역시 천천히 차준호에게로 다가섰다.자신의 죽음마저 아득하게 비웃던 이 남자가, 이제 내가 벌여놓은 정황의 전장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회사 안 들어가셨어요? 아니면 회장님하고 한남동이라도 가시지.”“신하늘 밥 안 먹었을 거 아니야.”이 와중에 밥 타령이라니.그러고 보니 그가 몰고 온 보좌 인력들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팩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싱그러운 과일과 정갈한 고급 한정식 도시락, 그리고 세련된 디저트까지.이 남자는 늘 이랬다. 자신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것은 방관하면서도, 언제나 내 끼니와 안위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사람 마음을 이토록 심란하게 어지럽혀 놓고서.“대표님, 저랑 잠깐 옥상에서 이야기 좀 나눠요.”어쨌든 나를 아끼는 그 지독한 마음을 이용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는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망설임 없이 내 손을 꽉 감싸 쥐었다.“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그가 잡아끄는 온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이 굳어있던 내 심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었다.***서울의 밤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으나, 그 속살은 지독하게 건조하고 냉혹했다.옥상 위, 나는 차준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득한 허공을 응시했다. 봄의 초입이라기엔 너무도 예리한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베고 지나갔다.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별빛이 차갑게 일렁였
세종동의 좁은 골목 초입, 최기범이 공들여 준비한 그곳에 다다랐을 때 도시에는 서서히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그러나 건물 내부는 마치 쇳물을 부어 넣는 주물공장처럼 열기와 긴장감으로 펄펄 끓어오르는 모양새였다.일반 직장인들에게는 퇴근길에 접어들 시간이었지만, 이곳엔 당에서 파견한 정예 인력이 즉각 투입되어 사무실은 흡사 거대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벽면에는 내 얼굴과 기호가 큼지막하게 박힌 초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거 공약서와 홍보 인쇄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다섯 대의 유선 전화기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듯 울려 댔고, 벽면 데스크에 늘어선 봉사자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팽팽한 치열함 속의 총격음처럼 귀를 때렸다.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전의 내게 선거일이란 그저 빨간 날로 표시된 공휴일일 뿐이었고, 거실 소파에 누워 개표 방송을 게임하듯 들여다보던 게 전부였다.하지만 이것이 진짜 정치판의 민낯이자,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의 서막이었다.사무실 한쪽, 당에서 파견된 선거 전략 전문가 이승은 선대위원장이 지역구 지도 한 장을 거창하게 펼쳐 놓으며 나를 불러세웠다.“신 후보님, 개표 방송 날 전국에서 가장 먼저 후보님 가슴에 당선 무궁화꽃이 달릴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판을 짜겠습니다!”내가 직접 벌인 판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절로 기가 찼다.“역시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그럼요. 오래 사셔서 국회에도 아주 길게 머물러 주셔야죠.”내가 오래오래 살아가는 그 길에 반드시 차준호라는 남자도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데.그 지독하고 오만한 성격상 절대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차준호의 귓가에는 차진철 회장과 강진욱 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닿지 않았다.아버지에게 자신의 시한부 비밀이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으나, 어차피 언젠가는 드러났을 진실이었다.그보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제 목숨을 던져서라도 자신을 수술대로 떠밀려는 신하늘의 기특하고도 처연한 간절함이었다.차준호가 여전히 생명에 초연한 채 딴생각에 잠겨 있자, 차진철 회장은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당장 이식 수술 날짜부터 잡아! 진아와 고 여사에게는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데려올 테니! 조직적합성까지 맞다는데 이게 기회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니면 강소희라도 끌어들이든가! 해준다고 할 때 받아! 받아들이란 말이다!”차준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무엇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온통 신하늘뿐이었다. 밥은 제때 챙겨 먹었는지, 저 험악하고 어수선한 선거판 한가운데에서 위축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조급해진 차준호는 말 한마디마다 서늘한 독을 품은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아버지, 소희는 배우이고 현재 임신 중입니다. 진아 이야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고요. 타인의 피를 짜내 연명하느니, 차라리 우아하게 말라죽겠습니다. 사람 목숨, 그리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그러자 차진철 회장 역시 벼락같이 일어나 차준호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잡았다.“네 어미도 그렇게 금방 죽었다! 다들 내 곁을 그리 황망하게 떠나 버렸는데······ 너마저 이러면······ 나는 대체 어쩌라고·····&m
병원 복도에는 하얀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자욱하게 맴돌며, 마치 유령의 숨결처럼 서늘하게 피부를 핥고 지나갔다.차진철 회장의 눈빛에는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은 듣고 싶지 않은 잔인한 진실을 터뜨려 버린 나를 향한 원망이자, 무너진 자존심이 내뿜는 독기였다.“신 비서, 선거로 바쁜 몸일 텐데 남의 집안일에 유난 떨지 말고 어서 돌아가!”피 끓는 아비의 절박함인 동시에, 무너져 내린 위엄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화풀이였을지언정 난 반발하지 않았다.오한이 서릴 정도의 무시와 멸시를 해도 차준호만 살릴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차 대표는 절대로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큰일이야, 신 비서. 제발 살려줘.]고미주를 통해 알게 된 그 잔인한 진실이 귓가를 울렸다.그렇기에 나는 차진철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끌어들여 그를 강제로 벼랑 끝에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다.“제가 무모했습니다, 회장님. 이런 방식으로 알려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이기적인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대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나의 처연한 사죄에 차진철은 짓눌린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몸을 돌려 서늘한 복도 너머로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신하늘, 같이 가. 기다려.”거칠고도 단단한 악력이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돌아본 곳에는 여전히 오만한 가면을 쓰고 있는 차준호가 서 있었다.늘 모든 것에 초연하고 아득한 거리를 두던 남자의 두 눈동자에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사정
차진철 회장의 등장만으로도 로비를 채우고 있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쏠려들었다.나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수행원들을 빽빽하게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병원 복도의 공기를 순식간에 다시 겨울로 바꿔 버렸다.구겨진 미간 아래로 굳어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노골적인 멸시와 불쾌함이 그 서늘한 눈빛에 훤히 찍혀 있었다.“신 비서, 선거는 벌써 포기한 건가? 바쁠 텐데 그만 가봐.”감히 이 재계의 거물을 병원으로 불러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겁이 없긴 했다.차진철의 냉정한 축객령에도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차준호의 얼굴에도 깊은 불쾌함이 감돌았다.“신하늘, 선 넘지 마.”손끝으로 차가운 오한이 몰려왔지만, 나는 꺾이지 않기 위해 허리를 바짝 세우고 차진철 회장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제가 아무리 바빠도 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나의 당돌한 응수에 차진철의 안색이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운 좋게 공천장을 거머쥐어도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아.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지!”그는 거침없이 날 선 비난을 내던지며 나를 짓눌렀다.정치적 입지가 고공행진을 이어간다 한들, 차진철의 눈에 나는 여전히 감히 차준호의 곁을 탐할 수 없는 미천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하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이 서늘한 거물을 직접 병원으로 끌어들였겠는가.“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원들을 모두 멀리 물려주십시오. 회장님과 대표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만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신하늘, 피곤하니까 일 키우지 마
“어르신! 차준호가 아프다니요?”김희주는 충격과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대고 크게 외쳤다.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서늘하고 차가운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건조하게 깔린 음성이 들려왔다.― 신하늘이 흔들리기 시작하겠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선거운동 따위는 제대로 해내지 못할 수순이야.호재도 이런 대형 호재가 없었다. 차준호라는 거대한 인물의 치명적인 건강 이상이라니.미리 알았더라면 자신이 진작에 그 약점을 낚아채 세상에 터뜨리고,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 갔을 터였다. 이건 예상치 못한 최고의 변수였다.“그렇다면······ 제가 사퇴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혀를 쯧쯧 차는 서늘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김희주는 순간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굳혔다.자신이 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묘책이라는 말을 내던졌다는 뜻은, 자신을 구원할 계략을 꾸미고도 남았다는 소리였다.― 그 여자의 발목을 낚아채 흠을 붙잡고 늘어져 보든가. 대중은 김 의원을 향한 관심을 자연스레 잊게 될 것이오. 이번 선거는 몸을 사리고, 다음 지방선거 때 김 의원이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전폭적으로 판을 깔아주겠소.김희주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네?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요?”언제 울었냐는 듯 일그러졌던 그녀의 얼굴 위로, 서서히 기괴하고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이건 차원이 다른 새로운 도약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이라니, 막강한 실권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