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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폭풍의 눈이 열리다

Penulis: silver구슬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5-17 15:23:53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

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

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에서 상류층 세계의 정점으로 편입되었다. 

이아준보다 한 살 많은 도국 역시 파란만장했다. 중학생 시절, 대한민국 최대 엔터 기업인 JW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혹독한 시간을 견디더니, 이제는 연기와 노래를 병행하는 독보적인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두 남자의 경제력은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대단해졌다. 하지만 신하늘만은 늘 그들의 도움을 완강히 거절하며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재단과 보육원에 감당 못 할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부모의 뒤치다꺼리를 중학생 때부터 도맡으면서도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이아준과 도국이 재단에 거금을 기부해도, 신하늘은 그 돈을 오직 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만 썼다.

대신 그녀는 자신을 갈아 넣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빡빡하게 소화하며 대출 이자를 갚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결국 S대 컴퓨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는 두 친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 그녀가 3년 전, 돌연 CH-컴퍼니에 입사하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일에만 매달리는 신하늘을 보며 아준과 도국은 마음 한구석에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을 느껴왔다.

“그나저나, 같이 사고 난 강소희는 너네 소속사 아니야?”

이아준이 묻자, 수화기 너머 도국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맞아. 불여우 같은 여자야.

“소문보다 더 별로인가 봐?”

-인성 더럽기로는 소속사 안에서는 이미 유명해.

이아준은 미간을 깊게 구기며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대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 시내의 화려한 풍경이 오늘따라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윽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어수선한 속내를 달래보려 애썼다.

“하늘이······ 그 회사 들어가고 바빠도 얼굴은 밝아 보여서 좋았거든. 근데 최근 일주일은 좀 이상했어.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달까.”

도국에게서는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 흐르는 공기가 무거웠다. 

휴일임에도 쉴 틈 없이 잠실대교 위를 유령처럼 흘러가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아준은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이 쓴 것인지, 시끄러운 속내 때문인지 향기로웠던 바닐라 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사고가 터진 지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CH-컴퍼니 임원진은 ‘비상시국’이라는 명목하에 나를 병실로 다시 밀어 넣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차준호의 곁을 지키다 새벽녘에야 겨우 씻고 옷만 갈아입은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

빨리 눈이라도 떠야 원망이라도 하는데. 강소희에 비해 덜 다쳤다고 하지만, 왜 이리 깨어나는 게 더딘 걸까. 걱정만 늘어갔다.

오늘도 내 생명줄은 병원 로비에서 사 온 바닐라 라떼 한 잔이었다. 카페인과 당분으로 억지로 정신을 깨우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했다.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고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식욕은커녕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어제오늘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못 한 탓에, 옷장에서 나름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원피스가 눈에 띄게 헐렁해졌다.

기자들은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사생활을 캐묻는 그들의 눈빛에 진저리가 났다. 

시간이 흘러 깊은 밤이 되자 겨우 병동에 정적이 찾아왔다. 주인 없는 빈 침상만 덩그러니 놓인 VIP 병실에서, 나는 차갑게 앉아 있는 고미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고미주가 가방에서 수표를 꺼내 내밀었다.

“앞으로 며칠은 더 수고해야 할 거야. 이건 보너스라고 생각해.”

며칠이라니. 당장이라도 ‘내일부터는 다른 직원을 부르십시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내민 돈을 마주하는 순간,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빚더미 속에서 자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돈이었는데, 왜 지금은 이 수표 한 장 한 장이 모욕처럼 느껴지는 걸까.

알량한 자존심이 가슴 안쪽을 긁어댔다. 나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돈은 사양하겠습니다.”

고미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의아함과 불쾌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뭐?”

“제 연봉 속에는 이런 비상근무에 대한 수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미주는 ‘헛’ 하고 실소를 터뜨리더니, 더욱 날카로운 표정으로 수표를 흔들어 보였다.

“신 비서, 어른이 주면 토 달지 말고 받는 거야. 어떻게 비서 교육을······.”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차진아가 쪼르르 다가와 고미주의 손에서 수표를 낚아챘다.

“어머, 비서 언니! 안 받을 거면 내가 받을게요. 나 사고 싶었던 가방 있는데!”

철없는 행동에 내심 혀를 차던 찰나, 고미주가 딸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게 내려치며 버럭 화를 냈다.

“꼴사납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왜 나한테만 그래? 엄마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지? 오빠가 옆 병실에 누워 있는 급 떨어지는 배우랑 놀아나다 사고 나서! 맞지?”

“그 계집은 차 대표한테 스쳐 지나가는 장난감일 뿐이야! 회장님은 꼭 정치계 집안하고 결혼 시킨다고 하셨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현기증과 함께 울렁거림이 치밀어 올랐다. 장난감······ 그리고 정치계 집안이라니.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가 쏟아부은 진심이 이들에게는 어떤 무게였을지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주치의 강진욱이 의료진을 대동한 채 급히 병실로 들어섰다.

“사모님, 차 대표님이 의식을 회복하셨습니다!”

“어머, 정말인가요? 수고하셨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우나 고우나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됐다. 

나는 강진욱의 입술 끝만 바라보며 추가 설명을 기다렸다.

“그 대신······.”

“대신······ 뭐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주치의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해리성 기억 상실 증세가 관찰됩니다.”

“네? 기억······ 상실이요?”

고미주는 휘청거리며 의자를 붙잡았고, 나 또한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강진욱은 무거운 어조로 소견을 이어갔다.

“대략 지난 3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소실된 상태로 추정됩니다.”

3년? 

하필이면 3년이라면! 

‘설마······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와 함께 숨 쉬고, 사랑을 속삭이며, 때론 잔인한 이별을 고했던 그 모든 계절이······, 

차준호라는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소거되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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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02. 끝 혹은 시작을 위한 지금 이 순간

    ‘가소롭게, 감히 나를 어떻게 하려고?’위험이라니.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오기를 넘어 허탈한 헛웃음마저 흘러나왔다.“김희주가 그 정도로 치졸하게 나오는 거야?”-김희주가 아니야. 그리고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네 생명까지 위협하려는 정황이 포착됐어. 심각한 수준이야. 부디 조심해.이아준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늘하게 서려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더욱 밀착시킨 채,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누가 나를?”악플이나 저열한 기사로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선을 넘다 못해 목숨까지 위협하려 든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어. 하지만 아군이 늘어날수록 적군도 비례해서 늘어나는 법이니까. 경찰에 정식으로 조사를 의뢰했고, 김정규도 사력을 다해 추적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줘. 곧 정체를 밝혀낼 테니까.이아준의 음성은 얼음 조각처럼 날이 서 있었다.김희주 말고 대체 그 적군이라는 존재가 누구란 말인가. 살면서 타인에게 손가락질받을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으며 살아왔는데.나라는 존재가 탐탁지 않을 수는 있어도, 물리적인 폭력으로 위협하려 들다니.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무서운 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지 비로소 현실로 와닿았다.-일단 너를 향해 지속적으로 비방글을 유포하거나, 악의적인 기사만 쏟아내는 기자를 추적 중이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물리력을 행하려는 세력은 김희주 측 소행은 아니라는 점이야.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순간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명에 세상이 뚝 멈춰 선 듯했다.-일단 혼자 다니는 건 절대 금물이야.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나는 유리창에 비친 차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01. 가소롭게, 날 건드리려고?

    신하늘과의 대립만으로도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는데.당에서 젊은 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세종동 출신 앵커를 차기 후보로 내세운다는 소문을 듣자 김희주의 입지는 순식간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머리채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독기가 치밀어 올랐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을 뱉어냈다.“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공식 입장을 밝힙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세종동의 운명을 바꿀 재개발 사업을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등 뒤에서 날아드는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취재진인지 군중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기괴한 메아리였다.스스로가 비참하고 억울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그녀가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선언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 폭발하며 시야가 순식간에 백색의 무명으로 물들었다.“아드님 최기범 씨께서 세종동 봉사활동을 본인이 이어받겠다고 발표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한 기자의 송곳 같은 질문이 심장에 꽂히며 김희주의 혈관 속 혈압을 기어이 폭발 직전까지 밀어 올렸다.아들까지 들먹이다니. 귀를 막고 싶어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강소희 씨가 신하늘 캠프에 합류하며 김희주 씨의 과오 폭로를 예고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젊은 여기자였다. 송곳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남성 기자들의 고성 사이에서도 단연 선명하게 귓전을 때렸다.강소희라니. 도대체 왜 이런 판국에 기어 나오는 걸까.‘멍청한 것, 숨길 치부도 많은 년이!’김희주는 강소희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허탈한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며 맥이 탁 풀어졌다.최근 확보한 강소희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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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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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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