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 #4. 폭풍의 눈이 열리다

Share

#4. 폭풍의 눈이 열리다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7 15:23:53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

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

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에서 상류층 세계의 정점으로 편입되었다. 

이아준보다 한 살 많은 도국 역시 파란만장했다. 중학생 시절, 대한민국 최대 엔터 기업인 JW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혹독한 시간을 견디더니, 이제는 연기와 노래를 병행하는 독보적인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두 남자의 경제력은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대단해졌다. 하지만 신하늘만은 늘 그들의 도움을 완강히 거절하며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재단과 보육원에 감당 못 할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부모의 뒤치다꺼리를 중학생 때부터 도맡으면서도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S대 컴퓨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는 두 친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 그녀가 3년 전, 돌연 CH-컴퍼니에 입사하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같이 사고 난 강소희는 너네 소속사 아니야?”

이아준이 묻자, 수화기 너머 도국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맞아. 불여우 같은 여자야.

“소문보다 더 별로인가 봐?”

-인성 더럽기로는 소속사 안에서는 이미 유명해.

이아준은 미간을 깊게 구기며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대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 시내의 화려한 풍경이 오늘따라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윽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어수선한 속내를 달래보려 애썼다.

“하늘이······ 그 회사 들어가고 바빠도 얼굴은 밝아 보여서 좋았거든. 근데 최근 일주일은 좀 이상했어.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달까.”

도국에게서는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 흐르는 공기가 무거웠다. 

휴일임에도 쉴 틈 없이 잠실대교 위를 유령처럼 흘러가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아준은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이 쓴 것인지, 시끄러운 속내 때문인지 향기로웠던 바닐라 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사고가 터진 지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CH-컴퍼니 임원진은 ‘비상시국’이라는 명목하에 나를 병실로 다시 밀어 넣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차준호의 곁을 지키다 새벽녘에야 겨우 씻고 옷만 갈아입은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

빨리 눈이라도 떠야 원망이라도 하는데. 강소희에 비해 덜 다쳤다고 하지만, 왜 이리 깨어나는 게 더딘 걸까. 걱정만 늘어갔다.

오늘도 내 생명줄은 병원 로비에서 사 온 바닐라 라떼 한 잔이었다. 카페인과 당분으로 억지로 정신을 깨우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했다.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고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식욕은커녕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어제오늘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못 한 탓에, 옷장에서 나름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원피스가 눈에 띄게 헐렁해졌다.

기자들은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사생활을 캐묻는 그들의 눈빛에 진저리가 났다. 

시간이 흘러 깊은 밤이 되자 겨우 병동에 정적이 찾아왔다. 주인 없는 빈 침상만 덩그러니 놓인 VIP 병실에서, 나는 차갑게 앉아 있는 고미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고미주가 가방에서 수표를 꺼내 내밀었다.

“앞으로 며칠은 더 수고해야 할 거야. 이건 보너스라고 생각해.”

며칠이라니. 당장이라도 ‘내일부터는 다른 직원을 부르십시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내민 돈을 마주하는 순간,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빚더미 속에서 자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돈이었는데, 왜 지금은 이 수표 한 장 한 장이 모욕처럼 느껴지는 걸까.

알량한 자존심이 가슴 안쪽을 긁어댔다. 나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돈은 사양하겠습니다.”

고미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의아함과 불쾌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뭐?”

“제 연봉 속에는 이런 비상근무에 대한 수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미주는 ‘헛’ 하고 실소를 터뜨리더니, 더욱 날카로운 표정으로 수표를 흔들어 보였다.

“신 비서, 어른이 주면 토 달지 말고 받는 거야. 어떻게 비서 교육을······.”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차진아가 쪼르르 다가와 고미주의 손에서 수표를 낚아챘다.

“어머, 비서 언니! 안 받을 거면 내가 받을게요. 나 사고 싶었던 가방 있는데!”

철없는 행동에 내심 혀를 차던 찰나, 고미주가 딸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게 내려치며 버럭 화를 냈다.

“꼴사납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왜 나한테만 그래? 엄마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지? 오빠가 옆 병실에 누워 있는 급 떨어지는 배우랑 놀아나다 사고 나서! 맞지?”

“그 계집은 차 대표한테 스쳐 지나가는 장난감일 뿐이야! 회장님은 꼭 정치계 집안하고 결혼 시킨다고 하셨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현기증과 함께 울렁거림이 치밀어 올랐다. 장난감······ 그리고 정치계 집안이라니.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가 쏟아부은 진심이 이들에게는 어떤 무게였을지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주치의 강진욱이 의료진을 대동한 채 급히 병실로 들어섰다.

“사모님, 차 대표님이 의식을 회복하셨습니다!”

“어머, 정말인가요? 수고하셨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우나 고우나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됐다. 

나는 강진욱의 입술 끝만 바라보며 추가 설명을 기다렸다.

“그 대신······.”

“대신······ 뭐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주치의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해리성 기억 상실 증세가 관찰됩니다.”

“네? 기억······ 상실이요?”

고미주는 휘청거리며 의자를 붙잡았고, 나 또한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강진욱은 무거운 어조로 소견을 이어갔다.

“대략 지난 3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소실된 상태로 추정됩니다.”

3년? 

하필이면 3년이라면! 

‘설마······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와 함께 숨 쉬고, 사랑을 속삭이며, 때론 잔인한 이별을 고했던 그 모든 계절이······, 

차준호라는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소거되었다는 뜻이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03. [은밀하고 수상한 잘난 그 남자]

    나는 일단 씻고 나와 머리를 대충 말린 다음, 차준호가 보내준 옷을 입었다.오늘도 소름이 돋을 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사이즈였다.“내 치수는 어떻게 알았지? 아······! 합격하고 나서 적었던······ 신입 사원 자기소개서?”문항도 많고 온갖 개인정보를 수집하길래 내심 의아해했었는데.주소와 연락처는 기본이고 시력, 키, 몸무게, 신발 사이즈, 좋아하는 색, 하고 싶은 일, 심지어 식성과 취향까지 상세히 묻고 있어 당황스럽긴 했다.아무래도 유니폼을 제공하거나, 나처럼 비서실로 발령 난 직원들에게 옷을 맞춰주기 위해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과해도 너무 과했다.어쨌든 딱 봐도 고급스러운 명품이라, 이 회사에 합격하길 정말 잘했다는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나에게는 감사하기 짝이 없는 선물이었다.사실 입을 만한 번듯한 옷도 없고 미적 감각도 부족해서, 회사의 얼굴이자 대표의 이미지라 할 수 있는 비서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 막막했기 때문이다.물론 연봉을 턱턱 쥐여주었으니 앞으로는 내가 직접 사서 입어야겠지만, 오늘 배달된 이 옷도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하네.”의아한 마음에 어서 출근하고 싶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집을 나섰다.***C호텔 25층 스위트룸.차준호는 씻고 나와 간단히 오믈렛을 먹은 뒤, 입가심으로 맛은 없지만 제 몸에 좋다는 생녹즙 잔을 들고 거실로 들어섰다.오전 8시의 정적을 깨고 스피커폰 너머로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02. [완전무결 대표님의 유별난 복지]

    나는 CH-컴퍼니의 대표, 차준호의 개인 비서다.그리고 지금은 손에 테이크아웃 바닐라 라테를 쥐고 종횡무진 그의 뒤를 바짝 쫓아다니는 중이다.내 안에서 터져 나온 신기함과 감탄은 차준호라는 남자가 움직이는 매 순간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서사로 연결되었다.고급 호텔 프라이빗 룸에서 열린 신작 게임 론칭 연회장에서도,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의 외국인 고위 임원들과 마주한 엄중한 자리에서도.차준호는 특유의 서늘한 우아함과 도도함으로 좌중을 단숨에 압도하는 독보적인 오라를 가감 없이 내뿜었다.조각처럼 다듬어진 서늘하고 수려한 이목구비에 어울리는 매너 있는 손짓과 교양 넘치는 말투. 그는 완벽한 오너의 형상 그 자체로 당당하게 거대 비즈니스를 주무르고 있었다.카메라 프레임 속에나 존재할 법한 연예인 이상의 비주얼은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을 일시에 사로잡았다.그는 독보적인 품격으로 분위기를 완벽하게 리드했다. 상대가 날카롭고 계산적인 질문을 던질 때마다, 차준호는 살짝 입꼬리를 비틀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한 치의 오차 없는 사업적 통찰력으로 상대를 가차 없이 압박했다.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실어 던지는 그의 모습은, 젠틀함이라는 비단으로 감싼 칼날 그 자체였다.옆에서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이었다.‘신기한 사람이네. 진짜 경영이라는 건 저런 사람이 하는 거구나.’이어진 행보는 더욱 놀라웠다. 이번엔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대기실이었다. CH-컴퍼니가 야심 차게 준비한 신인 연예인이 올해 데뷔 무대를 갖는다며 직접 현장을 찾은 것이었다.기획사 대표가 이런 음악 방송 현장까지 직접 챙기는 게 맞나 싶어 솔직히 의구심이 들었다.하지만 차준호의 저돌적인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대기실을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01. [사람 착각하게 만들기는]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나는 멍하니 서서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완벽하게 맞춘 슈트 핏에,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만큼 위험하고 매혹적인 아우라를 지닌 남자가 서 있었다.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 당황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옷을 내려 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파격적인 대우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게임 개발팀이 아닌 비서실인 건지.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굳어 있는데,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정적을 깨며 불쑥 앞으로 나섰다.“입사하자마자 초록 ID 카드라니! 벌써 승진이라도 한 겁니까? 하하! 반갑습니다, 나는 허기찬 비서실장이에요! 후임이 오다니, 이제 살았네요. 하하!”“말씀 편하게 하세요. 허 실장님.”유쾌한 인상의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나는 멍하니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걸린 사원증은 파란색 테두리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로비를 가득 채우며 바쁘게 출근하는 수많은 직원들의 사원증은 전부 흰색 테두리였다.초록색 사원증은 승진을 거친 대리에게만 주어지는 색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등골이 저릿해졌다.‘왜 나한테만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차준호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는 내 혼란스러운 눈빛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천천히 훑어 내릴 뿐이었다.그의 짙은 눈동자가 내 입술과 목선, 그리고 몸에 딱 맞춰진 원피스의 라인을 따라 아주 천천히 내리꽂혔다. 살갗을 노골적으로 문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00. [그 남자의 세상 속으로 한 발 들어서며]

    차준호가 대체 나에게 퀵을 왜 보내지?주소는 또 어떻게 안 건가 싶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아, 입사 지원서에 거주지를 적어 넣긴 했었지.’하긴, 어제 회사에 방문해 서둘러 연봉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내 손으로 똑똑히 주민등록상 주소와 급여 계좌번호를 적어 놓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입사 전날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지원자의 집에 뜬금없이 기습 배달을 보낼 줄이야.당황스러움과 기묘한 의문은 일단 잠시 뒤로 밀어둔 채, 나는 서둘러 좁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집 대문은 어차피 오랫동안 고장 나서 마당 안쪽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터라, 현관문을 열자마자 담장 너머의 배달 기사님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나한테 올 택배나 배달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서두르시는 걸까.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골목길 어귀에 세워둔 오토바이의 시동 소리가 탈탈탈, 하고 요란한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배달 기사님은 내게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랗고 네모난 명품 브랜드 쇼핑백을 묵직하게 건넸다.“신하늘 씨 맞으시죠? 여기 서명 부탁합니다.”“아,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배송지가 CH-컴퍼니로 되어 있던데······ 이게 뭔가요?”내가 엉겁결에 볼펜을 받아 들고 인수증에 서명을 남기자, 배달 기사님은 송장을 슬쩍 훑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CH-컴퍼니 차준호 대표님이 보낸 옷이랑 신발, 가방입니다. 비싼 거니까 잘 확인해 보세요.”세상에, 옷이랑 신발이랑 가방이라니?기사님이 떠난 뒤, 나는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박스를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서서히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상자 틈새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고급스러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99. [그 잘난 남자를 자꾸 상상했잖아]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도국은 강소희의 손목을 억세게 낚아채며 그녀를 세트장 벽으로 밀어붙였다.이 여자가 거슬리게. 자신도 모르게 그는 눈에 감정이 실리게 되었다.거친 숨결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간격을 가파르게 채웠다. 대사를 뱉는 도국의 목소리에 서슬 푸른 힘이 실렸다.“내가 말했잖아. 당신······ 거슬린다고.”원래 대사는 '거슬린다'가 아니라 '좋아한다'였던가. 하지만 감독은 NG를 외치지 않았다.도국의 거친 어조와 위압적인 태도가 오히려 극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단숨에 끌어올린 덕분이었다. 강소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도국은 그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너······ 저리 가!”“그 입 좀 다물어.”카메라 앵글이 두 사람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잡아채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지간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다.'이것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문이 스칠 때, 도국은 강소희가 아닌 전혀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려야만 이 거짓된 접촉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많은 스태프와 수십 대의 카메라 조명이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을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도국은 그저 감정을 지워낸 텅 빈 눈으로 강소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강소희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도 감정이 흔적도 없이 싹 비워져 있었다."난······ 지금 솔직하지 못한 상태야. 항상·····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98. [저 불여우, 친한 척 하기는]

    분명히 합격은 했는데, 마치 누군가 실수로 잘못 보낸 문자인가 싶어 나는 이 몇 자 되지 않는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나는 보글보글 벌써 멸치 육수가 끓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뜬금없어도 이렇게 뜬금없을 수가 없었다.S대 컴퓨터공학과 수석 졸업이라는 타이틀도, 밤을 새워가며 빚어낸 포트폴리오도 전부 개발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분명 ‘게임 개발팀’에 지원했는데. 난데없이 비서실이라니? 나와는 결코 접점이 없을 것 같은 합격 통지였다.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주방의 차가운 정적을 깨고 휴대전화 화면이 한 번 더 반짝이며 연이어 문자가 도착했다.---------------------------------[CH-컴퍼니 안내 사항]근무 형태: 주 5일, 시간 탄력 근무제급여 조건: 계약금 5천만 원, 연봉 세후 1억 5백만 원 (초과수당 시간당 5만 원)복리후생: 성과 상여금 최저 50% 보장, 업무용 의복(정장 및 활동복) 지원---------------------------------“······연봉, 1억?”순간 숨이 턱 막히며 나도 모르게 도마를 세게 쳤다. 그 바람에 썰어두었던 감자 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무슨 소리냐며 안방에서 친구들이 고개를 빼끔 밀어 넣고 물어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난 입술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 숫자의 무게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달콤해서, 오히려 그 배후에 숨겨진 의도가 몹시 의심스러웠다.‘이상하네. 지원자를 착각하고 잘못 보낸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 지옥의 대리인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 비밀의 밤, 잔인한 선물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 사람 미치게 하는 거짓말 같은 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9. 빌런을 좋아한 건가. 이런 망할.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