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
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
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에서 상류층 세계의 정점으로 편입되었다.
이아준보다 한 살 많은 도국 역시 파란만장했다. 중학생 시절, 대한민국 최대 엔터 기업인 JW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혹독한 시간을 견디더니, 이제는 연기와 노래를 병행하는 독보적인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두 남자의 경제력은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대단해졌다. 하지만 신하늘만은 늘 그들의 도움을 완강히 거절하며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재단과 보육원에 감당 못 할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부모의 뒤치다꺼리를 중학생 때부터 도맡으면서도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이아준과 도국이 재단에 거금을 기부해도, 신하늘은 그 돈을 오직 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만 썼다.
대신 그녀는 자신을 갈아 넣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빡빡하게 소화하며 대출 이자를 갚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결국 S대 컴퓨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는 두 친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 그녀가 3년 전, 돌연 CH-컴퍼니에 입사하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일에만 매달리는 신하늘을 보며 아준과 도국은 마음 한구석에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을 느껴왔다.
“그나저나, 같이 사고 난 강소희는 너네 소속사 아니야?”
이아준이 묻자, 수화기 너머 도국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맞아. 불여우 같은 여자야.
“소문보다 더 별로인가 봐?”
-인성 더럽기로는 소속사 안에서는 이미 유명해.
이아준은 미간을 깊게 구기며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대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 시내의 화려한 풍경이 오늘따라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윽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어수선한 속내를 달래보려 애썼다.
“하늘이······ 그 회사 들어가고 바빠도 얼굴은 밝아 보여서 좋았거든. 근데 최근 일주일은 좀 이상했어.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달까.”
도국에게서는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 흐르는 공기가 무거웠다.
휴일임에도 쉴 틈 없이 잠실대교 위를 유령처럼 흘러가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아준은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이 쓴 것인지, 시끄러운 속내 때문인지 향기로웠던 바닐라 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사고가 터진 지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CH-컴퍼니 임원진은 ‘비상시국’이라는 명목하에 나를 병실로 다시 밀어 넣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차준호의 곁을 지키다 새벽녘에야 겨우 씻고 옷만 갈아입은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
빨리 눈이라도 떠야 원망이라도 하는데. 강소희에 비해 덜 다쳤다고 하지만, 왜 이리 깨어나는 게 더딘 걸까. 걱정만 늘어갔다.
오늘도 내 생명줄은 병원 로비에서 사 온 바닐라 라떼 한 잔이었다. 카페인과 당분으로 억지로 정신을 깨우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했다.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고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식욕은커녕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어제오늘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못 한 탓에, 옷장에서 나름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원피스가 눈에 띄게 헐렁해졌다.
기자들은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사생활을 캐묻는 그들의 눈빛에 진저리가 났다.
시간이 흘러 깊은 밤이 되자 겨우 병동에 정적이 찾아왔다. 주인 없는 빈 침상만 덩그러니 놓인 VIP 병실에서, 나는 차갑게 앉아 있는 고미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고미주가 가방에서 수표를 꺼내 내밀었다.
“앞으로 며칠은 더 수고해야 할 거야. 이건 보너스라고 생각해.”
며칠이라니. 당장이라도 ‘내일부터는 다른 직원을 부르십시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내민 돈을 마주하는 순간,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빚더미 속에서 자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돈이었는데, 왜 지금은 이 수표 한 장 한 장이 모욕처럼 느껴지는 걸까.
알량한 자존심이 가슴 안쪽을 긁어댔다. 나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돈은 사양하겠습니다.”
고미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의아함과 불쾌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뭐?”
“제 연봉 속에는 이런 비상근무에 대한 수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고미주는 ‘헛’ 하고 실소를 터뜨리더니, 더욱 날카로운 표정으로 수표를 흔들어 보였다.
“신 비서, 어른이 주면 토 달지 말고 받는 거야. 어떻게 비서 교육을······.”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차진아가 쪼르르 다가와 고미주의 손에서 수표를 낚아챘다.
“어머, 비서 언니! 안 받을 거면 내가 받을게요. 나 사고 싶었던 가방 있는데!”
철없는 행동에 내심 혀를 차던 찰나, 고미주가 딸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게 내려치며 버럭 화를 냈다.
“꼴사납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왜 나한테만 그래? 엄마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지? 오빠가 옆 병실에 누워 있는 급 떨어지는 배우랑 놀아나다 사고 나서! 맞지?” “그 계집은 차 대표한테 스쳐 지나가는 장난감일 뿐이야! 회장님은 꼭 정치계 집안하고 결혼 시킨다고 하셨어!”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현기증과 함께 울렁거림이 치밀어 올랐다. 장난감······ 그리고 정치계 집안이라니.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가 쏟아부은 진심이 이들에게는 어떤 무게였을지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주치의 강진욱이 의료진을 대동한 채 급히 병실로 들어섰다.
“사모님, 차 대표님이 의식을 회복하셨습니다!”
“어머, 정말인가요? 수고하셨어요.”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우나 고우나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됐다.
나는 강진욱의 입술 끝만 바라보며 추가 설명을 기다렸다.
“그 대신······.”
“대신······ 뭐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주치의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해리성 기억 상실 증세가 관찰됩니다.”
“네? 기억······ 상실이요?”고미주는 휘청거리며 의자를 붙잡았고, 나 또한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강진욱은 무거운 어조로 소견을 이어갔다.
“대략 지난 3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소실된 상태로 추정됩니다.”
3년?
하필이면 3년이라면!
‘설마······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와 함께 숨 쉬고, 사랑을 속삭이며, 때론 잔인한 이별을 고했던 그 모든 계절이······,
차준호라는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소거되었다는 뜻이었다.
월요일 밤이 깊어 갈수록, 대한민국 언론과 정치권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완전히 파묻혀 갔다.[속보! L그룹 회장실 전격 압수수색······ 총선 단 2일 전, 정재계 매머드급 파장][이왕춘 회장 돌연 쓰러져······ 실권 쥐었던 거물의 행방에 검찰 총력전][L그룹 파문의 진실은? 자택까지 수사관 급파, L그룹은 이아준 회장 대리의 비상 체제 가동]TV 앵커들의 격앙된 목소리와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는 광풍 속에서도, 이아준은 냉철하게 중심을 잡았다.쏟아지는 언론의 문의를 차단하고 임원진을 긴급 소집하며 L그룹 내부를 견고하게 다잡고 나서야 VIP 휴게실로 돌아온 그였다.도국은 미리 와서 기다렸다가 이아준이 등장하자 어깨를 다독였다.“수고했다.”“어휴, 진짜 정신없네. 할아버지가 대체 어디서 무슨 죄라도 지으신 건가?”“글쎄.”도국은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하는 이아준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달콤한 음료나 술 대신 얼음처럼 차갑고 시원한 생수병을 건넸다.아무리 여야가 운명을 걸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정쟁의 계절이라지만, 총선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이토록 무자비한 칼날이 정면으로 들어올 줄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바로 그때, 도국의 슈트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나지막하게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찍힌 이름을 확인한 도국의 눈매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평소라면 결코 이 시간에 올 리 없는 연락이었다. 그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며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짧은 정적 끝에 익숙하면서도
문 앞에 서서 차준호를 떠올린 나는 다시 거울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곳에 비친 내 모습은 조만간 대한민국 정치인이 되어 거대한 권력을 포상받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남편을 살리려는 비정한 마녀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인생에서 오답을 낸다면 그 대가는 신에게서 받는 벌이 될까.그 오만하고 완벽한 남자가 화마로 얼룩진 몸을 회복시키느라 병원 신세를 진 차진아의 일상을 다시 훼손해 생명을 연장하는 상황을 견딜 리가 없었다.수술 후유증이 차진아에게 발생한다면 지독한 낙인이자 저주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난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던 그때였다.-그래도 전 대표님의 이식 수술을 권하고 싶습니다.강진욱의 냉혹한 설명이 내 폐부를 짓눌렀다.이를 어쩌나.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저 역시 대표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 신에게 의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고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와 마주했다.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플랜 B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그 시각, 잠실 L그룹 본사 세미나실 옆 VIP 대기실.회장 대리라는 무거운 직함을 짊어지고 임원진과 전 본사 직원이 운집한 대형 행사를 무사히 치러 낸 이아준은 무대 뒤로 걸어 나오자마자 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오늘따라 이왕춘은 왜 부재중인 것인지. 마냥 기뻐야 하지만, 어깨 위를 짓눌러 오는 수천 개의 시선이 안겨 준 중압감
월요일 아침, 서울 성수동 스튜디오.잡지 화보와 글로벌 명품 브랜드 협찬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튜디오는 수많은 취재진과 스태프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메이크업을 마친 세나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나타난 도국을 보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 숨이 막혀 왔다.“세나야, 왔어?”그래도 오랜만의 재회가 어색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그의 눈빛에 세나의 가슴속 깊은 곳은 다른 의미로 속이 타들어 갔다.‘한때 키스도 나누고, 계약일지언정 몸과 마음을 다 건네며 연인으로 지냈던 사이인데······.’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지만, 차갑게 선을 그으며 관계의 종말을 선언한 것 역시 도국이었다.“오빠. 더 근사해지셨네요.”“세나 너도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하다며.”인기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민망했던 어젯밤 공항의 해프닝이 떠올라 화제를 돌렸다.“전 아직 멀었어요. 어제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설마 제 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신하늘 후보님 지지자들인 거 있죠?”그 말에 도국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풋, 하고 낮고 감미로운 탄성을 흘렸다.“녀석의 인기는 지금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지.”신하늘의 이름만으로도 눈부시게 풀어지는 그 미소에 세나의 가슴 한구석이 짓뭉개지듯 아려 왔다. 자신을 떠올릴 때도 저런 눈빛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도국이 신하늘을 향해 품은 감정은 단순한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괴로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그 시각, 고요하다 못해 침묵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한남동 자택의 거실.수심이 깊게 패인 차진철 회장의 곁에 서서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던 고미주는, 김포공항에 도착한 신하늘과 차준호의 모습이 붉은 헤드라인과 함께 송출되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아 턱 숨을 집어삼켰다.화면 속 신하늘과 차준호의 얼굴은 당장 영양제라도 맞고 쉬어야 할 만큼 위태로워 보였지만, 언론은 그저 두 사람이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세종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는 속보만을 연이어 띄워 보낼 뿐이었다.“고 여사, 진아야. 밤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쉬어.”차진철의 낮고 퍼석한 목소리가 거실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고미주는 쭈뼛거리며 그를 향해 조심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실상 이 집의 문턱을 다시 넘어섰을 때, 그녀를 맞이한 고용인들의 태도는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자신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모님, 오셨습니까." 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차진아를 향해서도 "진아 아가씨, 피곤하실 테니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으세요."라며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당황스러움마저 들 정도였다.슬그머니 둘러본 집 안 곳곳에는 자신과 차진아가 황급히 떠나며 남겨둔 흔적들이 손때 하나 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진아 방도 그대로고······ 제 물건들도 전부 예전 모습 그대로 놔두셨네요.”“당연한 것을 가지고.”차진철은 무심한 척 툭 던지듯 중얼거렸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핏기 없는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고미주는 불안한 눈빛으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신하늘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차준호가, 아주 찰나의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일요일 깊은 밤.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마침내 김포 공항에 도착한 세나는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발걸음마저 경쾌하게 흩트렸다.이번 기습 입국은 전적으로 대세 중의 대세인 도국과의 화보 촬영 때문이었다.아무래도 도국이 신하늘 편에 서서 기특하게 일해 준 자신을 위해 잡은 스케줄이 아닐까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언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끌며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세나가 옆에 있는 새로 배정된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자, 청점퍼 차림에 숏컷 머리를 한 20대 후반의 매니저 김연정이 세나에게 미소로 응답햇다.“나야말로 잘 부탁해. 대세 여가수 세나의 담당 매니저라니, 영광이야.”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음을 주고받았고, 경호원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가볍게 손인사를 하며 대화는 이어졌다.“나 사실 그동안 JW엔터테인먼트에서 코디 담당으로 일했었거든. 대우는 좋지 않았어도 연예인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이 바닥을 도저히 떠날 수가 없더라고.”JW라는 단어에 놀란 세나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언니, 그럼 오늘 저랑 촬영하는 도국 오빠, 그때도 보셨겠네요?”김연정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잔잔한 탄성을 내뱉더니 활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완벽한 남자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얼굴에, 능력도 인성도 진짜 최고야. 나도 팬클럽 ‘댄저러스’ 가입했거든.”세나는 밀려드는 뿌듯함에 베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나는 살짝 상기된 볼을 감싸 쥐며 수줍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저도
차준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 앞접시에 노릇한 해물전을 놓아주며,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식사 시간이잖아? 이런 대화는 그만.”다시 테이블 위로 묵직한 정적이 가라앉았고, 차진철 회장의 눈가에는 억누르지 못한 원망과 애통함이 그렁그렁 차올랐다.상대의 영혼을 단번에 베어내는 얼음 칼날 같은 서늘함이었다. 지켜보는 내 어깨가 절로 굳어질 만큼 완벽한 거절이었다.차가운 차준호의 반응에 차진아는 당황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말을 덧붙였다.“예전에 저한테 피부 이식도 해주었잖아요. 전 그저 그때의 은혜를 보답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때 차준호가 시선을 들어 차진아를 똑바로 응시했다.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차진아에게 닿는 순간,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나중에 아버지에게나 효도해. 그게 네가 할 보답이야.”단칼에 대화를 끊어낸 그는 미련조차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방금 전의 냉정함은 흔적도 없이 지워내고, 오직 자신의 궤도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이 나라는 듯 지독하고도 뜨거운 갈망만이 서린 눈길이었다.“우리 어서 먹고 해안가 산책이나 다시 하러 갈까?”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차진철의 초조함과 고미주의 당혹감이 기묘하게 뒤섞인 카페의 공기를 읽어냈다.창밖으로는 일요일의 평화로움을 닮은 파도가 여전히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고, 내 마음 역시 정해진 운명을 향해 다시금 위태로운 항해를 시작했다.***대한민국의 시선이 서울 세종동으로 쏠려 있어야 할 일요일 저녁.확성기 너머로 고함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