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수십 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수많은 의사와 재활 트레이너들의 처방을 받아봤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보통은 ‘아치를 받쳐달라’거나 ‘발목이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는 식의 뜬구름 잡는 요구가 전부였다. 저 수치들은 최첨단 3D 스캐너와 동작 분석 장비로 수십 번을 측정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데이터였다. 그런데 눈앞의 젊은이는 마치 신의 눈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완벽한 처방을 내리고 있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장인의 목소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낮게 깔려 있었다.
“그냥, 재능 있는 선수를 돕고 싶은 사람일 뿐입니다.”
장인은 한참 동안 지훈을 쳐다보다가 이현성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발 좀 보자.”
이현성이 신발과 양말을 벗자, 장인은 맨발로 선 그의 자세와 발목, 아치의 모양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이현성의 발 곳곳을 눌러보며 미세한 균형의 문제점을 확인했다.
“…기가 막히는군.”
한참을 살피던 장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젊은이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해. 이 정도의 처방이라면… 신의 경지야.”
장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자에서 최고급 가죽과 카본 소재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틀 뒤에 찾으러 와.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네놈 몸에 완벽하게 맞는 물건을 만들어주지.”
더 이상 질문도, 의심도 없었다. 진정한 전문가는 상대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었다. 지훈의 비범함을 인정한 장인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장인의 작업실에서 나온 이현성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코치님… 대체 어떻게…?”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최고의 분석가라고.”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 역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제3자, 그것도 해당 분야의 장인에게 완벽하게 통했다는 사실이 짜릿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이제 확신할 수 있어. 이 능력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
두 사람은 곧바로 훈련 장소로 이동했다. 지훈이 수소문해서 빌린, 시간당 사용료를 내는 허름한 실내 체육관이었다. 구단 시설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훈련하기에는 충분했다.
“자, 인솔이 완성되기 전까지 이틀 동안은 기초 밸런스와 코어 근육을 잡는 데 집중할 겁니다.”
지훈은 매트 위에 엎드려 플랭크 자세를 시범 보였다.
“프로 선수를 데려다 놓고 고작 플랭크라니, 우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현성 선수는 지금 몸의 중심 축, 즉 코어가 완전히 무너져 있어요. 아무리 팔다리가 튼튼해도 중심이 무너지면 모든 힘이 흩어집니다.”
이현성은 말없이 자세를 따라 했다. 처음에는 쉬워 보였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등과 허리는 아래로 처지고 턱은 들렸다.
평소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코어 근육만을 고립해서 사용하는 훈련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허리! 더 낮추세요! 엉덩이에 힘주고! 몸을 일직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현성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5분이 지났을까, 결국 그는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5분짜리 플랭크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게 지금 선수님의 몸 상태입니다.”
플랭크를 시작으로 버드독, 데드버그 등 코어 안정화 운동이 이어졌고 보수 볼 위에서 한 발로 서서 균형을 잡는 밸런스 훈련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훈련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현성은 불평 한마디 없이 모든 훈련을 소화했다.
훈련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몸이 얼마나 심각하게 불균형 상태였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훈의 모든 지시는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휴식하겠습니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지훈이 훈련 중단을 선언했다. 이현성은 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때였다. 체육관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현성!”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공식 에이전트인 김민철 실장이었다. 그는 이현성의 몰골과 그 옆에 서 있는 낯선 지훈을 번갈아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웬 이상한 놈이랑 같이 유치원생 체조라도 하고 있는 거냐?”
김 실장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
“자네가 그 사기꾼인가? 우리 현성이한테 붙어서 뭘 뜯어내려고. 당장 꺼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가 있어.”
이현성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실장님,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이분은 제 코치님이십니다.”
“코치? 하!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이런 애송이가 네 코치라고? 이현성, 정신 차려! 너 지금 구단에서도 쫓겨날 판이야. 당장 나랑 같이 들어가서 단장님한테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데서 시간 낭비나 하고 있어?”
김민철은 이현성의 팔을 잡아끌려 했다. 하지만 이현성은 그 손을 뿌리쳤다. 2년간 에이전트 앞에서 늘 고개를 숙여야 했던, 주눅 든 투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싫습니다. 저는 코치님을 믿고 이 훈련을 계속할 겁니다.”
“뭐? 야, 이현성!”
김민철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그때, 지훈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김민철 실장님, 맞으시죠? GSM 소속이시던데.”
“네가 날 알아? 그래, 내가 김민철이다. 왜?”
“선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방치하는 것도 에이전트의 업무 중 하나입니까?”
“뭐, 뭐라고?”
“이현성 선수는 S급 포텐셜을 가진, 리그를 지배할 수 있는 투수입니다. 그런 선수가 무너지는 걸 2년 동안 지켜보기만 한 것도 모자라, 이제 와서 재능을 썩히라고 강요하는 게 당신의 방식입니까?”
지훈의 차분하지만 뼈를 때리는 말에 김민철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여! 현성이는 끝났어! 입스에 걸린 투수는 재활도 안 돼!”
“입스가 아니예요. 그건 무능한 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갖다 붙인 편리한 핑계일 뿐입니다.”
지훈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2주. 아니, 이제 12일 남았군요. 12일 후에 이현성 선수는 마운드에서 증명할 겁니다. 누가 진짜고 누가 사기꾼인지를. 그러니 그때까지는 저희 훈련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죠. 선수 보호에 대한 계약 조항을 위반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수십 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수많은 의사와 재활 트레이너들의 처방을 받아봤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보통은 ‘아치를 받쳐달라’거나 ‘발목이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는 식의 뜬구름 잡는 요구가 전부였다. 저 수치들은 최첨단 3D 스캐너와 동작 분석 장비로 수십 번을 측정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데이터였다. 그런데 눈앞의 젊은이는 마치 신의 눈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완벽한 처방을 내리고 있었다.“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장인의 목소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낮게 깔려 있었다.“그냥, 재능 있는 선수를 돕고 싶은 사람일 뿐입니다.”장인은 한참 동안 지훈을 쳐다보다가 이현성에게 손짓했다.“이리 와서 발 좀 보자.”이현성이 신발과 양말을 벗자, 장인은 맨발로 선 그의 자세와 발목, 아치의 모양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이현성의 발 곳곳을 눌러보며 미세한 균형의 문제점을 확인했다.“…기가 막히는군.”한참을 살피던 장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 젊은이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해. 이 정도의 처방이라면… 신의 경지야.”장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자에서 최고급 가죽과 카본 소재를 꺼내기 시작했다.“이틀 뒤에 찾으러 와.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네놈 몸에 완벽하게 맞는 물건을 만들어주지.”더 이상 질문도, 의심도 없었다. 진정한 전문가는 상대를 한눈
의외의 말에 이현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대신, 성공 보수 방식이었으면 합니다. 제가 선수님의 코칭을 맡은 이후, 선수님의 연봉이 인상되거나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경우, 그 인상분의 일정 비율을 저의 보수로 지급하는 겁니다. 만약 성과가 없다면, 저도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파격적인 조건이었다.이현성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는 밑져야 본전인 계약. 동시에 이 제안은 강지훈이 자신의 능력에 얼마나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왜… 왜 그렇게까지…?”“저도 증명해야 하니까요. 제 능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이현성 선수는 그 최고의 증명이 되어줄 겁니다.”지훈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이현성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는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집어 들고 합의서의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이현성’2년 만에 처음으로, 미래를 향한 계약에 사인을 했다.사인을 마친 이현성이 고개를 들었다.“이제 뭘 하면 됩니까?”“우선 제대로 된 인솔부터 맞춰야 합니다. 제가 아는 전문가에게 연락해서 선수님의 발에 완벽하게 맞는 걸로 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2주. 2주간 제가 짜주는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여 주십시오.”시스템 창에 떠올랐던 ‘예상 교정 기간: 2주’라는 문구가 지훈의 머릿속에 선명했다.“2주 후에는 어떻게 되는데요?”“2주 후에, 당신은 1군 마운드에 다시 서게 될 겁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지훈의 단호한 선언에 이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그때, 이현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김민철 실장’이었다. 그의 정식 에이전트였다. 이현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여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네, 실장님.”[“너 지금 어디야? 오늘 2군 등판 엉망이었다며? 구단에서 연락 왔잖아. 너 그냥 은퇴시키는 게 어떻겠냐고.”]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갑고 무심했다. 이미 자신에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재활센터의 실내 불펜으로 향했다. 포수도 없이 텅 빈 홈플레이트를 향해 낡은 공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 이현성의 거친 숨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자, 신발을 벗고 잠시 이리 와보시죠.”지훈의 말에 이현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의 지시에 따랐다. 지훈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오전에 편의점에서 샀던 빳빳한 판 초콜릿이었다. 그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두꺼운 종이 갑을 반으로 접었다.“이게 뭡니까?”“임시방편입니다. 지금 선수님께 필요한 건 좌측 발바닥의 아치를 살짝 받쳐줘서, 착지 시 발목이 바깥으로 돌아가는 걸 막아줄 일종의 인솔(깔창)입니다. 이건 그걸 흉내 내는 거죠.”지훈은 접은 종이 갑을 이현성의 왼쪽 운동화 안, 발바닥 아치 부분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신발을 다시 신어보라고 했다. 이현성은 반신반의하며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어…?”어색했다. 발바닥의 특정 부분이 살짝 융기된 느낌. 하지만 동시에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늘 살짝 바깥쪽으로 쏠리는 것 같았던 왼쪽 발목이, 안쪽에서 무언가 단단하게 받쳐주는 듯한 감각이었다.“그 상태로 마운드에 서 보십시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공을 던져보세요. 스트라이크를 넣으려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몸의 균형 감각에만 집중해서.”이현성은 홀린 듯 마운드에 올랐다. 손에 익숙한 공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발바닥의 이질적인 감각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홈플레이트를 향해 가볍게 팔을 뿌렸다.휙-!공은 형편없는 코스로 날아가 홈플레이트 한참 옆에 처박혔다. 역시나, 하는 실망감이 이현성의 얼굴을 스쳤다.“거 보십쇼. 아무 차이… 없…”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공의 궤적은 엉망이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감각은 달랐다. 투구 후, 언제나 왼쪽으로 미세하게 쏠리던 몸의 중심이 오늘은 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기둥이 몸의 축을 단단히 잡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것은 기회였다. GSM에서 쫓겨나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지금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곧장 이현성의 2군 훈련장 위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재활과 훈련을 담당하는 곳이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재활센터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다음 날 새벽, 지훈은 첫차를 타고 이현성이 있다는 재활센터로 향했다. 무작정 찾아간다고 만나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현성의 진짜 문제점과 그 해결책이었다.재활센터 앞에서 기다린 지 세 시간이 지났을까. 훈련을 마친 듯 지친 표정의 이현성이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전성기 시절의 빛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스물두 살 청년의 모습만 남아있었다.지훈은 심호흡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이현성 선수님, 맞으시죠?”이현성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낯선 남자를 쳐다봤다.“누구시죠?”“제 이름은 강지훈이라고 합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기자라면 사절입니다. 인터뷰 안 합니다.”이현성은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그를 지나치려 했다. 지훈은 다급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기자 아닙니다. 저는… 선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그 말에 이현성은 코웃음을 쳤다.“내 문제를 해결해?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심리학 박사도, 미국에서 건너온 재활 트레이너도 못 고친 내 병을 당신이 고친다고?”“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지훈은 이현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시스템 창이 알려준 그대로를 읊었다.“선수님의 문제는 입스 같은 심리적인 게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서 심리적인 문제가 커 보이지만, 그건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에요. 진짜 원인은 아주 사소한 신체 밸런스 문제입니다.”이현성의 얼굴에 황당함과 짜증이 뒤섞였다. 또 어
하지만 눈앞의 시스템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임에서나 보던 스탯 창이,눈앞의 소년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렴풋이 짐작했던 문제점들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세하고 정확한 데이터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이건… 뭐지? 내가 미친 건가?혼란에 빠진 지훈의 귓가에 소년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아… 손목…”그 소리에 지훈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 기이한 현상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시스템 창에 떠오른 ‘긴급 처방’을 떠올리며 소년에게 말했다.“학생, 빨리 이리 와봐. 얼음찜질부터 해야 해.”지훈은 소년을 부축해 연습장 구석에 있는 낡은 냉동고로 데려갔다. 다행히 아이스팩이 몇 개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아이스팩을 수건에 감싸 소년의 손목에 대주었다.“고… 고맙습니다, 아저씨.”“일단 이렇게 하고 오늘은 더 이상 운동하면 안 돼.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아. 아마 인대에 무리가 갔을 거야.”지훈의 말에 소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병원에요? 저… 곧 중학교 전국대회 선발전이 있는데…”“지금 무리하면 선수 생명 끝날 수도 있어. 너, 스윙할 때 허리는 안 아팠니?”“네? 허리요? 가끔 좀 뻐근하긴 했는데…”소년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은 시스템 창의 ‘좌측 허리 근육 긴장 (경고!)’라는 문구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네 스윙은 완전히 상체 힘으로만 하고 있어. 하체를 전혀 못 쓰니까 허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지. 손목 부상도 결국 그것 때문에 온 거야. 힘이 부족하니까 마지막에 손목으로만 공을 때리려고 하잖아.”소년의 눈이 더욱 커졌다.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지훈이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학교 코치님도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지적해준 적은 없었다.“아저씨… 야구 선수셨어요?”“…그냥, 야구를 좀 좋아해.”지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눈앞의 시스템 창은 여전히
“그러니까, 강지훈 씨. 내 말은 이제 그만 나오라는 소리야.”글로벌 스포츠 매니지먼트(GSM)의 박 팀장은 값비싼 원목 책상에 팔꿈치를 기댄 채, 지독한 경멸이 깃든 눈으로 지훈을 쏘아봤다. 해고 통보였다. 아니, 해고라는 말도 사치였다.계약 기간 만료 후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서류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통보였으니까.“팀장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이번 최현수 선수 재계약 건은…”“시끄러워.”박 팀장의 한마디에 지훈의 말은 공중에서 힘없이 흩어졌다.“최현수 선수가 우리랑 재계약 안 한 게 네 탓이라고 하는 거 아니잖아. 애초에 너한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지도 않았고. 그냥, 강지훈 씨는 우리 회사랑 안 맞는 것 같다는 거지. 스포츠에 대한 열정? 그런 건 아마추어들이나 갖는 거고 이 바닥은 돈이야. 인맥이고.”그는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로 툭 던졌다.“이달 월급이랑 위로금 조금 넣었으니까, 이걸로 맛있는 거나 사 먹고. 앞으로는 좀 더 네 주제에 맞는 일을 찾아봐. 이를테면… 편의점 알바 같은 거?”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지훈의 귓전을 때렸다.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졌지만, 분노를 표출할 자격조차 없었다. 그는 GSM의 말단 사원, 아니, 1년짜리 계약직 인턴에 불과했다.정직원이 되기 위해 지난 1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며, 밤샘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하지만 돌아온 것은 ‘주제에 맞지 않는 열정’이라는 비수와 함께 날아온 해고 통보였다.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얇은 종이 쪼가리의 두께가 그의 1년의 무게였다. 더 이상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그는 꾸벅,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팀장실을 나섰다.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동정, 호기심, 그리고 안도감.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비겁한 안도감이 공기 중에 끈적하게 떠다녔다.지훈은 제 자리에 놓인 얼마 안 되는 짐을 상자에 담았다. 그때, 동기인 민혁이 다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