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오늘은 진짜 안 건드림. 잘 자.]윤서하는 메모를 읽은 채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별장 복도는 이미 조용해져 있었다. 낮 동안 사람들 발에 밟히던 마룻바닥도, 장비를 옮기며 연달아 열리고 닫히던 방문도 모두 잠잠했고, 멀리 바닷바람이 창틀을 밀어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비는 새벽이 되면서 잦아들었지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규칙적으로 돌계단을 두드렸다.서하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결국 열지 않았다.나가서 뭘 할 건데.‘왜 안 건드려요?’그렇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자기가 먼저 붙지 말라고 했다. 건드리지 말라고도 했고, 도현이 바로 곁에 있는 별장에서는 정신 차리자고 말한 것도 자기였다. 그러니 이준이 그대로 해주는 게 맞았다.맞는데.메모 한 장이 괜히 얄미웠다.서하는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가, 잠시 뒤 다시 주워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버릴 이유가 없어서였다.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다음 날 오전, 폭우가 걷힌 별장은 전날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다시 푸르게 드러났고, 젖은 정원석과 소나무에서는 비 냄새가 올라왔다. 촬영팀은 밀린 일정을 따라잡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움직였으며, 서하는 김미자의 지시에 따라 별장 뒤편의 낡은 직원 숙소를 정리하게 됐다.직원 숙소는 본채와 달리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곳이었다.문을 여는 순간 묵은 먼지 냄새와 눅눅한 목재 냄새가 섞여 나왔다. 벽지는 군데군데 떠 있었고, 오래된 장롱 위에는 천으로 덮어놓은 상자들이 여러 겹 쌓여 있었다. 창문은 바닷바람 탓인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틈으로 들어온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서하는 장갑을 끼고 가장 위 상자부터 내렸다.“이런 데까지 청소해야 돼요?”등 뒤에서 이준 목소리가 들렸다.서하는 돌아보지 않았다.“누가 따라오랬어요.”“촬영 장소라서.”“어제는 잘도 안 건드리더니.”말이 먼저 나갔다.서하 손이 바로 멈췄다.뒤늦게 자기 입을 때리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이
“거기 왜 빨개?”도현의 손전등 빛이 목덜미에 머무는 순간, 서하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카락부터 끌어내렸다.손끝이 지나치게 빨랐다.괜히 가리면 더 수상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몸이 먼저 움직였고, 조금 전까지 세탁실에 함께 있던 차이준의 얼굴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실제로 이준의 입술이 목에 닿은 적은 없었다. 젖은 셔츠가 스쳤고, 습기가 찬 세탁실에서 머리카락과 작업복 깃이 피부를 계속 문질렀을 뿐이었다.그런데 그 사실을 설명하려니 오히려 더 이상했다.“세제 때문인가 봐.”서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을 한번 긁었다.“세제?”“아까 젖은 유니폼 한꺼번에 꺼냈잖아. 새로 들어온 세제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도현은 여전히 목덜미를 바라봤다. 의심해서라기보다는 걱정하는 얼굴이라 서하는 더 불편해졌다.“따가워?”“조금.”“약 있어?”“숙소 가서 씻으면 괜찮아져.”도현은 손전등을 내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재킷 깃을 조금 더 여며줬다. 젖은 머리카락이 피부에 달라붙지 않도록 밖으로 빼주는 손길도 익숙했다. 8년을 같이 살아온 사람의 손이었다.서하는 그 손을 피하지 못했다.아니,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일 너무 무리하지 마.”도현은 그 말만 남기고 세탁실을 먼저 나갔다.문이 닫히자 서하는 그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거짓말은 별것 아니었다.세제 알레르기.그 정도면 누구나 한번쯤 둘러댈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별것 아닌 거짓말 하나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계속 남았다. 도현이 둘러준 재킷은 따뜻했고, 그 안쪽에 몸을 웅크릴수록 자신이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서하는 전기가 돌아오기 시작한 별장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비는 여전히 세찼고, 유리창 너머 바다는 검은 덩어리처럼 일렁였다. 촬영팀 직원들은 정전 때문에 미뤄진 장비 점검을 다시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젖은 신발 밑창 소리가 이어졌다.계단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서하는 걸음을 멈췄다.차이준이 있었다.비상통로를 통해 돌아온 모양
“서하야?”문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서하는 온몸의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조금 전까지 입술에 남아 있던 열감도, 바로 앞에 선 차이준의 젖은 셔츠도, 세탁실 안을 가득 채운 눅눅한 공기도 갑자기 지나치게 선명해졌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문과 외벽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보다 문밖의 작은 인기척 하나가 더 크게 들렸다.서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이준의 가슴을 밀었다.“나가요.”목소리를 낮추느라 입술만 빠르게 움직였다.이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 쪽을 한번 보더니 서하를 내려다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 인간의 얼굴에는 아주 미세한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어디로.”“몰라요. 아무 데로나.”“정문으로 나가면 더 빠른데.”서하는 눈을 크게 떴다.“미쳤어요?”그때 문손잡이가 한번 돌아갔다.잠금장치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래된 문이 습기를 먹어 뻑뻑해진 탓인지 바로 열리지는 않았다. 도현이 바깥에서 문을 한 번 더 밀었다.“안에 있지?”서하는 급히 대답했다.“어! 잠깐만!”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자기 귀에도 어색했다.서하는 주변을 훑었다. 세탁기 두 대, 벽 쪽에 쌓인 린넨 바구니, 젖은 유니폼, 그리고 낮에 직원에게 들었던 오래된 비상동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장은 예전에 가족과 직원의 이동 공간을 완전히 나눠 사용했던 곳이라 세탁실 뒤에도 작은 외부 통로가 있다고 했다.서하는 세탁기와 벽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역시나 낡은 문 하나가 있었다.“여기.”이준이 따라와 고개를 숙였다.“저기로 나가라고?”“네.”“너무 좁은데.”“몸 접으면 되잖아요.”“나 차이준인데.”서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돌아봤다.“그래서요?”“태어나서 이런 데로 쫓겨나본 적이 없어서.”“축하해요. 오늘 처음 해보겠네.”이준이 웃음을 참는 동안, 서하는 그의 팔을 잡아 문 쪽으로 밀었다. 젖은 셔츠 너머로 아직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고, 그 감각 때문에 오히려 더 조급해졌다
“우리 둘이 여행은 못 가도 여기서 바다는 보겠다.”도현이 웃으며 한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고, 윤서하는 별장에 도착한 첫날부터 차이준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문제는 그 인간도 똑같이 굴었다는 거였다.“유부녀 씨.”직원 출입구 앞에서 한번 불러놓고는,“왜요.”“아무것도.”그대로 지나갔다.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는 장소가 바뀌어도 그대로였다.해안 별장은 본채보다 작았지만 촬영팀과 직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정신없이 복잡해졌고, 도현은 기사팀 차량 정리 때문에 밖을 오갔으며 서하는 젖은 수건과 직원 유니폼을 세탁실로 옮기느라 첫날부터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그런데 저녁부터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창문을 때리던 빗소리는 점점 커졌고, 바닷바람까지 들이치면서 별장 전체 조명이 몇 번 깜빡이더니 결국 전기가 꺼졌다.“아, 진짜.”서하는 휴대폰 불빛을 켜고 세탁실 문부터 밀었다. 직원들이 입고 들어온 젖은 유니폼을 그대로 두면 냄새가 배길 게 뻔해서 어둠 속에서도 정리해야 했고, 세탁기 안쪽에 쌓인 옷을 꺼내던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여기 있었네.”목소리만 들어도 알았다.“왜 왔어요.”“찾으러.”“누굴.”“너.”서하 손이 멈췄다.“찾지 말라며.”“언제요.”“별장 오기 전에. 아는 척도 하지 말고, 가까이도 오지 말고.”“내가 그랬어요?”“응. 아주 야무지게.”“그럼 왜 왔는데요.”차이준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그 말 지키는 거 보여주려고.”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지금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실패거든요?”“그래?”“둘이 있잖아요.”“그건 네가 먼저 와 있었고.”“세탁실인데 내가 와 있지 누가 와요.”“난 유니폼 찾으러.”“손 있어요?”“있지.”“그럼 찾아서 가요.”이준은 대답 대신 젖은 셔츠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비를 맞고 들어온 건지 그의 소매도 축축했고 머리끝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이거 내 건데.”“본인 방에 가져가서 말려요.”“말려줄래?”“내가 왜.”“청소팀
“들키더라도 네 선택으로 들켜.”한유라가 던진 그 말이 머리에서 안 빠진 채였는데, 다음 날 윤서하는 더 미친 소식을 들었다.차이준과 1주일을 같이 자야 했다.정확히는 같은 별장에서.그런데 남편도 함께였다.“윤서하 씨, 다음 주 일정 비워요.”김미자가 명단 한 장을 내밀었고, 서하는 무심코 받아 들었다가 두 번째 줄에서 눈을 멈췄다.해안 별장 사전 촬영.기간 7일.청소 지원 인원.윤서하.“잠깐만요.”“왜.”“제가 왜 가요?”“동관 아카이브 같이 봤잖아. 구조 기록도 도와줬고.”“다른 사람 많잖아요.”“다들 일정 있어.”“저도 있어요.”“뭔데.”차이준 피하기.그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서하는 입을 닫았다.“……빨래.”“집에서?”“네.”“7일치 쌓아놨다가 와서 해.”“아, 되게 냉정하시네.”김미자는 대꾸도 없이 명단을 다시 툭 쳤다.“별장도 박물관 자료로 쓸 거라 옛날 직원 공간까지 찍는대. 서하 씨가 가는 게 제일 빨라.”“차이준 씨도 가요?”질문이 너무 빨랐다.김미자가 눈썹을 올렸다.“당연하지. 걔가 촬영하는 건데.”서하는 바로 종이를 접었다.“안 궁금했어요.”“방금 물었잖아.”“업무상.”“얼굴은 사적인데.”“요즘 왜 다들 제 얼굴을 읽냐고요.”서하는 명단을 들고 돌아섰다.망했다.같은 저택에서도 미치겠는데 7일짜리 별장이라니.그 인간은 분명 바다를 핑계로 별소리를 다 할 게 뻔했다.‘유부녀 씨, 야경 좋네.’아니.‘바다 보니까 키스하고 싶네.’더 미친 건 그 대사가 실제로 차이준 입에서 나올 법했다는 거였다.“하.”“벌써 보고 싶어?”등 뒤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서하는 눈을 감았다.정말 귀신보다 정확했다.돌아보니 이준이 복도 벽에 기대 서 있었고, 손에는 같은 일정표가 들려 있었다.“누가요.”“나.”“왜 제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표정이 ‘같이 가네’인데.”“‘죽이고 싶네’예요.”“둘이 비슷하네.”“전혀 안 비슷해요.”이준이 종이를 펼쳐 보이며 웃었다
“저 여자, 유부녀지?”한유라의 질문이 떨어졌는데 차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보다 더 선명해서 윤서하는 속이 확 뒤집혔다.“왜 입 다물어요?”이준이 서하를 봤다.“네가 말해야 할 것 같아서.”“평소엔 남의 말도 잘 뺏어가면서.”“이번 건 네 거잖아.”유라는 둘을 번갈아보다가 태블릿 화면을 껐다.“좋아. 그럼 차이준, 넌 나가.”“왜 나만.”“윤서하 씨랑 둘이 얘기할 거니까.”“무슨 얘기.”“네가 있으면 또 쓸데없이 입 끼울 얘기.”이준이 바로 서하를 봤다.“나가?”“왜 나한테 물어요.”“싫으면 안 나가려고.”“나가요.”“진짜?”“네.”“쫓아내놓고 보고 싶어 하면 곤란한데.”서하가 문을 가리켰다.“3초 줄게요.”“무섭네.”“2초.”이준은 결국 웃으며 나갔고, 문을 닫기 직전 얼굴만 다시 들이밀었다.“유부녀 씨.”“왜.”“내 욕 너무 세게 하지 마.”“1초.”문이 바로 닫혔다.유라가 그 모습을 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쟤 원래 저렇게 유치했나.”“저한테 물으면 좋은 대답 안 나와요.”“알겠네요.”유라는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하는 괜히 긴장했으나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사진 때문이죠?”“사진은 지우면 돼요.”“그럼 뭐 때문에요.”유라는 잠깐 서하의 결혼반지를 봤다가 바로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자발적이었어요?”서하가 멈칫했다.“뭐가요.”“저 관계.”“관계라고 할 것도 없는데.”“그건 내가 판단 안 해요. 묻는 건 하나예요.”유라는 말을 어렵게 돌리지 않았다.“차이준이 직위나 집안 배경으로 윤서하 씨한테 뭘 요구했어요?”“아니요.”“돈?”“일한 돈은 받았어요.”“키스 대가로 준 돈은?”서하 얼굴이 바로 굳었다.“그런 거 없어요.”“사진 찍겠다고 압박한 적?”“없고요.”“거절했는데 따라붙은 적은.”서하는 잠깐 생각했다.“따라붙긴 많이 했는데.”유라 표정이 변했다.서하가 바로 덧붙였다.“제가 쫓아내면 갔어요. 욕하면서도 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