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상국 태상황(太上皇)의 둘째 황자 염형(炎炯)의 장자.
이름하여 염상(炎常).
그는 어릴 적부터 화려한 외모와 총명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진갈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와, 금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
그러나 그의 내면 어딘가에는,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얇은 칼날이 감춰져 있었다.
권세와 재력, 미모와 언변을 겸비한 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아마도 랑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질투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염상과 랑하는, 어릴 적부터 광명군부 산하의 연무관에서 함께 무술을 배우며 자랐다.
형제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사이.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은 연적(戀敵)이기도 했다.
랑하의 아내, 금수련.
그녀는 화호족의 귀족 부락인 비취구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은 곧 염상의 고향이기도 했다.
염상은 오랫동안 수련을 연모했다.
그녀의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 도도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성정.
귀족 가문의 여식다운 기품 속에서도, 그녀는 때때로 깨질 듯 연약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 이미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 장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혼담은 수련이 성인이 되자마자 빠르게 성사되었다.
그녀의 아비 금예가 쌓아 올린 명예는, 랑욱 대장군의 아들 랑하와 외동딸의 혼인으로 보상받았다.
염상에게 그 모든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비취구의 대혼례 날 밤.
웃음과 축배가 끊이지 않던 그날, 그는 신방 앞에서 랑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문이 닫히고, 염상은 등을 돌려 처음으로 넋을 놓고 울었다.
그는 랑하를 친구로 사랑했고, 무장으로 존경했으며, 같은 남자로서 증오했다.
무표정하게 그녀를 품에 안은 그가,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염상은 수련을 잊지 못했다.
아니, 잊으려 애쓰지조차 못했다.
현궁에 올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수련의 처소를 찾았다.
그녀는 그를 맞이할 때마다 활짝 웃었고, 그렇게 웃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염상이 들려주던 고향 이야기, 어릴 적 그들이 함께 놀던 계곡과 만개했던 매화꽃….
그러나 결국… 그녀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랑하가 현궁을 비운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은… 마치 달빛에 취한 듯 불시에 선을 넘었다.
그저 딱 한 번… 마치 꿈속처럼.
그러나 다음은 없었다.
또한 둘 중 그 누구도, 그 은밀한 일에 대해서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휘청이며 돌아서는 랑하를 뒤로 한 염상은, 연못가를 떠나 곧장 수련의 처소로 향했다.
그녀의 눈가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다가오는 염상을 보자, 오늘은 웬일로 먼저 다가와 품에 안겼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그가 평생을 갈망해 온 여인의 감촉이었다.
‘랑하, 그대가 무너지는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내 이 속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수련을 향해 있었지만, 집착의 끝은 이미 랑하를 겨누고 있었다.
***
“흰 여우 새끼 하나가 광명군부와 현궁 주변을 얼씬거린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염상은 수하의 급한 보고를 받았다.
현궁으로 가서 랑하의 상태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수련의 처소로 가서 그녀를 달래 준 뒤 돌아온 직후였다.
“모습을 감추려 했으나, 분명 백호족 놈이었습니다! 보초 중 하나가 은발을 가진 자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하였습니다!”
그 병사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그 백호족 놈은, 저희가 매복 중인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염상은 수하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은발을 가진 백호족 순혈.
심지어 현궁까지 넘나든다는 존재.
“도대체… 놈이 이곳까지 기어들어 와 대체 뭘 하고 있다는 것이냐?”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런데 그놈이… 대장군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뭐라?”
염상의 갈색 눈동자가 좁아졌다.
“랑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냐? …설마, 자객인가?”
“그게 좀 이상한 것이… 무기도 없이, 그저 대장군을 지켜보는 듯했습니다.”
그의 입가가 스르르 일그러졌다.
눈가에는, 숨기지 못한 흥분이 번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일제히 창과 칼을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이완은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순간 돌바닥이 쾅 하고 울리고, 바닥 틈새로부터 균열이 번개처럼 퍼졌다.이완이 둘째 걸음을 내딛는 동안, 갈라지며 조각난 돌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병사들의 칼과 창날이 빛을 받아 번쩍였으나, 그 순간 바람이 방향을 바꿔 병사들의 시야를 찢어버렸다.이어진 셋째 걸음.폭발하듯 울린 진동과 함께, 수십의 병사들이 허공에 뜨며 몸이 부서졌다.갑옷이 찢어지고, 칼이 땅바닥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냈다.비명과 금속음, 그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살아남은 병사들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목덜미를 짓눌린 듯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갑옷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병사들이 떨리는 손으로 창검을 놓는 모습이 보였다.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백성들마저 무릎이 꺾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들 모두, 그 은빛 파동 앞에 한 마디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염렬은 발악하듯 손을 뻗었으나, 순간 알 수 없는 힘으로 단상 위에서 그대로 튕겨 나갔다.그 모든 혼란을 뚫고… 이완이 랑우에게 다가갔다.한 걸음.또 한 걸음.형틀의 두꺼운 쇠가 으스러지며 부서져 나갔다.랑우를 묶은 질긴 밧줄과 입에 물린 재갈이 절단되듯 풀리며 바닥에 흩어졌다.마침내.이완은 두 팔로 랑우를 끌어안았다.거친 숨결이 서로의 목덜미에 닿았다.“…내가 왔어, 랑우.”그 말에, 랑우가 희미하게 웃었다.그러나 이완의 호흡은 무겁게 쳐져 있었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은빛 파동 또한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그때.휘이이이익…!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성벽 위로부터, 수십 발의 쇠촉이 허공을 찢으며 몰려왔다.그 찰나의 순간, 랑우가 몸을 틀었다.아무 말도 없이 두 손으로 이완의 어깨를 감싸며 그의 몸을 온전히 가렸다.거침없이 날아온 화살 하나가 랑우의 부서진 좌측 어깨뼈를 다시 한번 꿰뚫으며 ‘퍽’하고 진득한 소리를 냈다.그
백호부의 산자락에는 늦겨울 바람이 부드럽게 흘렀다. 아이들이 눈밭 위에서 함성을 지르며 구르고, 장인들은 마당 한쪽에서 활시위를 고쳐 매고 있었다. 성문 앞에 서 있던 이완은 멀리서 병사들의 훈련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들려왔다. 랑우와 경렬이 떠난 지 나흘째.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랑우가 돌아오면, 얼른 그와 함께 시험해 보고 싶은 병법이 수두룩했다. 그때 문루 위에서 울려 퍼진 급박한 종소리. 숨이 목까지 찬 비원이 그의 앞으로 급하게 뛰어왔다. “족장님! 랑우 님이… 상국 군에게 생포되셨습니다! 경렬, 그자가 배신을….” “…뭐라고?” 이완이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었다. “처형일이… 이틀 뒤 정오, 황성 앞뜰이라고…!” “…처형…?” 그 순간, 이완의 시야에서 주변 풍경이 모조리 사라졌다. 귓가엔 오로지 피가 심장에서 솟구치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곧 부족의 원로와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제가 가서 랑우를 데려오겠습니다.” 이완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주위 공기를 누를 만큼 차갑고 서늘했다. “안 됩니다, 족장님! 상국 황성은 사방이 군영입니다. 그것도 대낮에….” “맞습니다! 누가 봐도 함정입니다! 이건 분명 족장님을 노리는 적의 계략입니다!” 이완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서 달빛이 번뜩였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가야 합니다.”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 누구도 따르지 마십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 겨울의 끝. 한낮의 태양이 오늘따라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성루와 석벽이 오래간만에 뜨겁게 데워지고, 처마 끝에 고였던 눈은 완전히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황성 앞뜰 중앙에는 거대한 처형대가 세워져 있었고, 수백 명의 군사들이 빽빽하게 둘러싸 철벽을 이루었다. 그 위에, 두 손이 결박되고 족쇄가 채워진 랑우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갈이 입을 틀어막았
차갑고 따뜻한 두 사람의 체온이 점점 더 닮아가기 시작했다.랑우의 숨이 입술 위로 내려앉자, 이완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입술 끝이 천천히 벌어지고, 숨과 숨이 더욱 깊게 얽혀들었다.“하아…”매끈한 이완의 등을 타고 내려오는 랑우의 손길이, 허리를 넘어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그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퍼지는 저릿한 감각에, 이완의 호흡이 더욱 가빠졌다.“…흐으… 아읏….”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몸을 떠는 이완의 목덜미에 랑우의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아으… 랑우….”신음을 참아보려는 듯 낮게 울리는 소리.순간 랑우의 입술이, 한껏 예민해진 가슴의 돌기를 덥석 물어왔다. 동시에 거친 손이 사타구니 사이를 거머쥐자, 이완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아! …하읏!”등불 빛이 두 사람의 피부 위에서 잔물결처럼 떨렸다.이완은 눈을 감고 랑우의 손길과 품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어느새 차가운 제 몸 안으로 랑우의 따뜻한 몸이 단단하게 밀고 들어오자, 뱃속에서 심장까지 불이 붙은 듯 단숨에 달아올랐다.“…하아!”랑우의 까슬까슬한 손끝이 이완의 손을 찾아 단단히 쥐었다.창호 밖은 여전히 눈발이 흩날렸다.그 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서로의 품이, 백호부가 영원히 건재할 것이라고… 그리 믿었다.***다음 날 아침.성벽 위의 깃발이 바람에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눈은 멎었으나, 공기는 여전히 매섭게 차가웠다.“족장님, 의원님께서 조용히 뵙고 싶어 하십니다.”비원의 말에, 이완은 랑우와 함께 염렬의 처소로 향했다.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와 은은한 차향이 흘러나왔다.염렬의 눈빛은 여느 때처럼 온화했으나, 그 깊숙한 어딘가에는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이완. 드디어 현웅이… 당신이 그리도 찾던 사람의 소식을 보내왔습니다.”이완의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크기를 키웠다.“…제 어머니 말씀입니까?”“그래요. ‘옥비’라는 이름으로 불리시던 분이죠.”염렬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비취구
백호부 경내 서편, 경렬의 처소.창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등불 심지를 가볍게 흔들었다.경렬은 나지막한 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한 손에 술잔을 쥔 채, 무겁게 처진 어깨 아래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술잔 속에 비친 얼굴은 잔뜩 피로해 보였다.“이런 제길… 이제 정말로 지치는구나….”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오래 묵힌 독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저 미천한 것들이 감히 내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것을,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이완은 백호부에서 신분의 귀천이 다 사라졌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여기서 그는 ‘의원님’, 혹은 그저 ‘경렬’.그러나 그 이름은 그의 수많은 가면 중 하나일 뿐이었다.그의 진짜 이름은… 염렬(炎列).현 상국 황제 염위의 사촌 염평(炎玶)의 아들.어머니가 천한 기생이라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패였고, 궁의 대리석 바닥조차 제대로 한 번 밟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황족에게 받은 절반의 피는… 그에게 아무런 권리를 주지 못했다.밥상 위엔 찬밥.앉은 자리마다 된서리.그는 그때마다 잔잔히 웃었다.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친부의 적통이라는 그 반쪽짜리 형제들이, 자신을 사정없이 때리고 골방으로 내칠 때도 웃었다.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을 무릎 꿇릴 날이 올 거라 믿었으니까.그는 사람 좋은 의원 행세로 환심을 사고, 현웅 같은 고아들을 어렸을 적부터 길러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산채 두목이었던 야귀를 이용해 사람 장사로 돈을 모았다.그러던 어느 늦은 밤.신비로운 능력으로 사람을 여럿 죽이고 탈출했다던, 후궁의 사생아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자신의 원대한 계획에 쓸모가 있을까 하여 수하들을 풀어 쫓던 중, 운 좋게도 연무곡 초입에 쓰러져 있던 그 은발과 벽안의 청년을 쉽게 손에 넣었다.냉궁 괴물, 염완.제 스스로 이름을 ‘이완’이라 바꾼 자.염렬은 그를 보자마자 직감했다.모든 것을 역전시킬 강력한 패.자신만을 위한 유일무이한 검이 될 존재.그의 힘을 손아귀에 넣으면, 상국 황실도, 자신을 조
상국 동북 변방의 산맥은 숨을 삼킨 듯 고요했다.한겨울 밤.차가운 산등성 위로 희뿌연 서리가 내리고, 가느다란 나무껍질 틈새마다 얼음 결정이 매달려 있었다. 저 멀리 골짜기에서 늑대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세상은 온통 은빛 정적에 잠겨 있었다.그 고요 속을, 검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흑의로 전신을 감싸고, 날카로운 칼을 품에 숨긴 수십 명의 사내들.상국 군부 최정예 중의 최정예,그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했으며, 그 어느 성읍이든 하룻밤이면 무너뜨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상국 황실의 오랜 치욕인, 저주받은 사생아.지금은 백호부의 주인인, ‘은발의 괴물’을 죽이는 것.“그놈의 머리를 베어, 이 밤에 황상께 올린다.”우두머리의 속삭임에, 나머지 그림자들이 눈빛으로만 대답했다.산길을 벗어나자, 어느새 그들의 시야에 하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백호부.마치 빙설을 쌓아 올린 듯 매끈한 돌벽이, 달빛을 받아 서리처럼 반짝였다.높은 성루 위에는 횃불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그 너머에서는 희미한 인기척이 스쳤다.바람조차 얼어붙은 밤인데, 성곽에서 풍겨오는 공기는 묘하게 뜨겁고 단단했다.이 성은 단순한 방어 거점이 아니었다.‘백호족이 이 땅에 뿌리내렸다.’그 사실을 온 세상에 당당히 선언하는 상징 그 자체였다.자객들의 발끝이 굳은 눈밭 위에서 잠시 머무르는 순간, 갈고리가 성벽 위로 날아올랐다.쇠사슬이 성벽에 걸리자마자, 그림자들은 일시에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그때.성벽 귀퉁이의 망루 꼭대기.달을 가만히 등지고, 또 다른 그림자가 서 있었다.하얀 도포 자락.바람에 찬란하게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그 사이로, 푸른 불꽃 같은 눈이 노려보듯 번뜩였다.그 눈빛이 자객들의 몸을 훑는 순간…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자객들의 팔과 다리가 무거워졌다.칼자루가 하나둘씩 손에서 미끄러졌다.마치 목울대를 보이지 않는 손이 움켜쥔 듯,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그 존재는 여전히 아무
상국 곳곳에 소문이 번지고 있었다.동북 변방, 사람의 눈이 쉽게 닿지 않는 깊은 산맥 속.그곳에 신비로운 흰 여우가 산다는 이야기였다.푸른 눈동자와 은빛 머리칼을 가진 사내.분명 사람이나, 마치 신수(神獸)처럼 신비로운 모습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자.죽음의 벼랑 끝에서 보란 듯 다시 살아 돌아온 자.그리고 그 옆에는, 상국을 배신한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한때 토벌군의 선봉장 중 한 명이었던, 상국 최고의 젊은 장수.그가 은빛 사내에게 무릎을 꿇고, 그를 대신해 검을 휘두른다는 소문.처음엔 모두가 비웃으며, 패배자들의 망상이라 치부했다.그러나 점점 더 많은 발걸음이 하나둘 그 산을 향했다.귀족의 횡포에 땅과 가족을 잃은 농부들, 역적의 누명으로 멸문당한 이들, 도망친 노예, 버려진 병사와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로 끌려온 이들까지.사람들은 입을 모아 속삭였다.“그 산에는 버려진 자들을 받아주는 흰 여우가 산다는군.”처음 그곳은, 그저 관군들의 눈을 피해 숨죽여 사는 이들이 모인 작은 공동체였다.그러나 그 중심에 ‘흰 여우’라 불리는 두목이 있었고, 그 곁에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필하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있었다.이완은 버림받고 그에게로 피한 모든 이들을 기꺼이 받아주었고, 랑우는 그런 그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두 사람을 두려워했으나, 곧 모두가 알게 되었다.그들이 이끄는 무리는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지 않으며, 약자를 지키고 품는다는 것을.그렇게 ‘도망친 자들의 숲’은, ‘살기 위해 모인 자들의 성채’로 변모해 갔다.눈처럼 하얀 여우가 그려진 깃발 아래, 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백호족(白狐族, 흰 여우 부족).달이 밝은 어느 밤.소나무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그림자.랑우가 조용히 말했다.“완, 모두가 널 믿고 따르고 있어.”이완은 달빛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두 개의 푸른 눈동자에 달이 나란히 비추었다.랑우는 그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