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허.”
염상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거,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
그의 두 눈동자는 섬뜩할 만큼 번쩍이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은어곡에서 랑하와 마주쳤다는 바로 그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놈이 감히 혼자 이곳까지 숨어들어,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고?’
염상은 모든 의문이, 마치 깨진 그릇이 들어맞듯 조금씩 맞춰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 백호족 사내가 정말로 단순히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아니라, 랑하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존재라면?’
사실 염상은 오래전부터 랑하의 주변에 촘촘하게 자기 사람들을 심었다.
표면적으로는 수련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혹시라도 랑하의 빈틈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직접 매복시킨 수하들 외에도, 현궁 안팎의 보초병들 또한 매수해 두었다.
그렇게 공들인 덫 안에, 사냥감이 스스로 들어온 셈이었다.
염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가서 놈을 생포해 내 앞에 끌어오너라! 꼭 살아있는 채로 데려와야 한다!”
그의 말 속에는, 들뜬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놈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아라! 잡는 즉시, 눈을 묶어 가려야 한다!”
“예! 장군!”
명을 받은 수하가 물러가자, 염상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빛 달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운명 또한,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
“…흐….”
백호족 청년이 가는 숨을 겨우 토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빛 머리칼이 그의 뺨을 스치며 흔들렸다.
그의 눈은 검은 천으로 사정없이 동여매어져 있었고, 두 팔은 벌려진 채 나무틀에 단단히 묶여있었다.
“드디어 깨어난 건가…?”
염상은 단상 위에서 내려오며 키득거렸다.
그의 두 갈색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여긴 어디냐!”
백호족은 격하게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건 네 놈이 알 필요가 없다.”
염상이 천천히 그의 곁에 다가섰다.
“답하거라, 이 흰 여우 새끼야! 광명군부와 현궁에 왜 간 것이냐?”
염상의 말투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청년의 은빛 머리칼을 갑자기 거칠게 움켜쥐었다.
“…윽…!”
“누구를 암살이라도 하려던 것이냐?”
“네 놈이 알 바 없다!”
“혹여 내 벗, 랑하를 죽이러 갔던 거냐?”
그 순간, 청년의 몸이 움찔했다.
미묘한 떨림이 염상의 손끝에서 감지되었다.
그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고, 얼굴을 백호족의 코 앞까지 바짝 들이대며 낮게 읊조렸다.
“이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넌 필시 이완의 저주받은 후손이겠지….”
청년은 입술을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의 두 눈도 푸른색이겠구나.”
염상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군, 아주. 하지만 나는 위험한 걸 싫어해서 말이지.”
염상은 한 손으로 청년의 뺨과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몸을 크게 떨며,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짓이냐! …당장 풀어줘, 어서!”
“너희 더러운 백호족, 특히 너 같은 것들은 미혹의 재주가 뛰어나다지? 실로 그러한가?”
염상의 눈은 서늘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 순간 불꽃이 일렁였다.
그는 백호족의 흰 비단 속깃을 잡아 뜯듯 거칠게 열어젖혔다.
“…헉!”
순간 말갛게 드러난 청년의 가슴팍 위로 미세한 흉터 하나가 반짝였다.
염상의 시선이 그 흉터에 잠시 멈췄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옥으로 깎은 듯한 몸뚱이에 이런 흉터라니, 어디서 굴러먹다 긁힌 거냐?”
그는 손끝으로 그 흉터 근처를 슬쩍 스쳤다.
“그만하거라! 차라리 날 죽여라!”
그 백호족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염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 장난은 이쯤 하자. 네 놈의 목쯤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비틀 수 있다.”
염상은 단상 위로 다시 가볍게 올라서며 말을 이었다.
“말해라. 광명군부에서 무엇을 했는가? 현궁은 왜 갔으며, 랑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느냐?”
“…네놈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그래, 됐다.”
염상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저놈은 말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니, 랑하에게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군.’
그는 단상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넌 계속 입을 다물겠지.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네 놈을 나보다도 더 무자비하고 간악한 자에게 보낼 것이다.”
“…….”
염상은 마침내 결심한 듯 손을 들어 호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놈을 준비시켜라. ‘그곳’으로 보낼 것이다.”
그날 밤, 달은 기이할 만큼 크고 둥글었다.하늘을 반쯤 가렸던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마치 누군가의 거대한 눈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은빛 달무리가 산 아래 골짜기를 덮쳤다.그러나 치밀히 준비하고 행동했음에도,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피에 젖은 비원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이건 함정입니다, 두목!”이완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외투를 벗어 땅에 던졌다.전혀 예상치 못한, 너무도 빠른 포위였다.노예상의 수레가 지나간다는 정보는 미끼에 불과했고, 숲속 깊은 곳에 늘어선 군사들은 이미 은월단의 행동반경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푸르스름한 달의 영기가 이완의 손끝에 어른거렸다.그러나 그는 야귀의 일 이후로는, 수하들의 목숨이 직접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달빛의 힘을 사용해 사람을 해하는 일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특히 오늘처럼, 커다란 보름달이 뜬 날엔 더욱 위험했다.야귀를 죽였던 때처럼 또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폭주하다, 자기 사람들까지 해치게 될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또한 영력을 사용하기엔, 수하들과 적들이 너무 가깝게 뒤엉켜 있는 상황이었다.그리고 아무리 선제공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일반 군병들의 목숨까지 해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들 또한 그저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이는 것뿐.“전원 흩어져라! 비상 지침대로, 이제 각자 움직인다!”“…하지만, 두목!”“일단 다들 피해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예, 두목!”은월단 전원은 이완이 수십 번 훈련 시킨 대로,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찢어져 빛의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이완 자신도 깊은숨을 들이켜며 복면을 단단히 고쳐 쓴 뒤, 어둠 속에서 한 방향을 향해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숲.그런데 순간, 그의 뒤를 쫓는 기척이 느껴졌다.산짐승이 아니었다.날렵하지만, 기운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덩치가 큰 그 무언가.‘…사람이군. 한 명이다.’이완
처음 시작은 대수롭지 않았다.그저 노예상들의 집들만 골라 턴다는, 특이한 도적 떼들의 소문.그들은 달이 휘영청한 밤에 홀연히 나타나곤 했다.그런데 금은보화만 훔쳐 가는 것이 아니라, 쇠사슬에 묶여 있던 사람들까지도 죄다 데리고 나갔다.그 무리가 백성들에게 ‘은월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관아에서는 그저 웃어넘겼다.“호들갑 떨지들 말아라. 그래봤자 그저 좀도둑들 아니겠느냐?”그러나 어느 밤.상국 중부의 대영주 ‘금가(金家)’의 사병 훈련장이 통째로 불탔고, 노예로 길러지던 백성 백여 명이 풀려났다.심지어 무기와 화약고도 왕창 털렸다.그 이튿날, 남부의 고위 관료는 탐관오리라는 죄목으로 들보에 거꾸로 매달렸고, 관청 창고에는 빼돌렸던 세곡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었다.서북 변경의 황족 사병 군영.알 수 없는 이유로 병사들은 밤새 깊은 잠에 빠졌고, 아침이 되자 창고 안의 군량미가 모두 자취를 감췄다. 대신 마당 한가운데에는, “굶주린 자들에게 돌려주겠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나무패 한 장이 꽂혀 있었다.그 무렵 인근 마을 사람들은, 두건을 쓴 채 말을 몰고 달리는 한 무리를 보았다고 했다.그 중 한 사람의 삐져나온 머리칼이, 달빛 아래에서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는 증언 또한 뒤따랐다.그 도적 떼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대범해졌다.노예상에서 착취 귀족으로, 귀족에서 관리로, 관리에서 대감으로.그리고 마침내… 상국 황실의 후궁 하나가 밀거래하던 황금 수레가, 한밤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날 이후,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정말로, 저들이 그 수레를 털었다는 말인가.”기루 깊숙한 곳에 있는 밀실.붉은 비단 휘장 안에 모인 고관들의 얼굴엔 긴장과 공포가 섞여 있었다.그들의 시선은, 바닥 위에 펼쳐진 작은 두루마리 하나에 모였다.그곳에는, 이 새로운 도적 떼로 인한 여러 귀족과 고위 관료 십수 명의 피해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대체 어떤 놈들이 이리도 대담한가…?”“이번 사건만 해도, 오간 흔적도 없이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시각.밤공기는 서늘했지만, 달은 아직 은빛으로 환했다.산채 입구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나무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향기에 취한 듯, 이완은 굵은 가지에 기대어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 노인들의 기침 소리.그러나 이완의 눈동자는, 오직 저 멀리 둥근 달 위에 머물러 있었다.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은발이 아름답게 흩날렸다.이완의 모습은, 마치 달빛에 잠긴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하고 은은했다.그때, 나무 아래에서 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목, 여기서 뭐 하십니까? 혹여 아이들 때문에 잠자리가 불편하신 거면….”“그런 건 아니다. 그냥 달빛이 좋아서….”이완은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다시 달로 시선을 향하며 나직하게 말했다.“…옛 벗을 그리던 중이다.”비원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이완을 올려다보았다.달빛에 젖은 그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했지만, 또한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비원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물러났다.“…어머니… 랑우….”이완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찔거렸다.“당신들을 찾으려고 이곳을 빨리 떠나려 했는데… 이젠,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겨버렸습니다….”그의 말은 달빛에 실려, 멀리 계곡 물소리와 함께 은빛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그 늙은 소나무 위에서, 이완은 그렇게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에는 진한 그리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결심이 겹쳐 있었다.며칠 후.“비원.”이완은 모닥불 근처에 서 있던 그를 조용히 불렀다.“예, 두목님.”“황룡가의 비류옥 같은 노예 시장이 더 있나?”“중원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상국 안에서만 해도 그 수를 다 세지 못할 정도입니다, 두목.”“…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처럼 억울하게 잡혀 와서 사고 팔리는 이들이 더 있겠지.”“그렇습니다.”“그들 또한 구할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황룡가.상국 동남부 최대의 상업지.그러나 도박, 인신매매, 매춘, 살인 등… 은밀한 범죄가 일어나는 곳.그 안쪽 어딘가에 깊숙이 위치한 지하 회랑에는, ‘비류옥(飛流獄)’이라 불리는 비밀 노예 시장이 있었다.좁은 골목을 돌아 벽인 척 위장된 비밀 입구를 지나자, 썩은 짐승의 가죽 냄새와 비릿한 철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이완은 비원의 뒤를 따라 계단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뒤에는 현웅과 산적 세 사람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비원이 익숙하게 몇 마디 말을 건네며 ‘야귀’의 이름을 대자,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지하의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다.횃불이 이어지는 긴 회랑 안에는, 맨발의 노예들이 마치 짐승처럼 우리 속에 앉아 있었다.“아마도 이곳에 아이들을 넘겼을 겁니다. 이전에 데려갔던 아이들도 그랬고요.”이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은발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두 개의 벽안은 여전히 달빛처럼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비류옥 곳곳을 한참 뒤진 후, 이완의 무리는 아이들이 갇힌 우리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몇몇 아이들은 이완의 눈빛을 알아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하얀 형아…?”“정말 형이다! 형아!”“…쉿!”이완은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지만, 그 순간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어이, 거기! 뭣들 하는 것이냐!”경계를 서던 무사 하나가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현웅의 검이 번개처럼 오갔다.“커억…!”그의 비명은 목울대에 걸린 채 제대로 터지지 못했다.“침입자다!”멀찍이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자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갔다.장사치들과 보초들, 검을 든 무사들이 곳곳에서 몰려왔다.“저놈들 잡아라!”창과 도끼가 여기저기서 이완의 무리를 향해 어지럽게 쏟아졌다.산적들과 현웅이 차례로 검을 세워 들고 몰려오는 이들을 향해 달려갔다.깊은 지하.달빛의 힘을 쓸 수 없는 지금, 이완은 본연의 체력과 검술만으로 싸워야 했다.그러나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정확했고, 칼끝이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숨이 끊
이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달빛에 휘감긴 바람이 마치 그를 중심으로 맴돌 듯 소용돌이치고, 여기저기 걸린 천들이 떨어져 나갈 듯 힘 있게 나부꼈다.이완이 산채 중앙의 막사 앞에 도달했을 때, 덩치 큰 사내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는 짐승의 털을 이어 만든 외투를 두르고, 손엔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싸늘한 이완의 목소리가 울렸다.“…네가 야귀라는 자냐.”“그, 그렇다…! 설마, 네가 그 냉궁 괴물이냐?"심하게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공포와 당황스러움이 뒤엉켜 있었다.이완은 대답 대신 조용히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섰다.거세게 울리던 바람이, 다시 한번 그의 은발을 타고 휘몰아쳤다.야귀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였다.“…목숨은 목숨으로 받겠다.”이완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나는 순간, 야귀는 무언가에 홀린 듯 크게 몸을 떨었다.그리고.우두둑.두툼한 다리가 꺾이듯 굽혀졌다.쾅!쾅!쾅!그가 자신의 머리를 흙바닥에 연신 찧어대기 시작했다.한 번. 두 번. 세 번….사방으로 피와 뇌수가 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아악…!”누군가가 울부짖었지만, 이완은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야귀는 마지막으로 부서진 머리를 힘겹게 들어 이완과 경렬을 번갈아 본 뒤… 그대로 고꾸라졌다.이완은, 그렇게 피범벅이 된 야귀의 시체를 한참 동안 노려보며 서 있었다.달빛을 받은 그의 은발은 여전히 눈부시게 빛났다.경렬은 황홀하다는 듯 밝게 미소를 지으며, 그런 이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이렇게 네가 내 것이 되는구나…! 무섭고도 아름다운, 나만의 칼….’***잔혹했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산등성이에는 이슬에 젖은 풀 내가 감돌았다.이완은 야귀가 쓰던 막사 안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가슴 속의 분노와 열기가 천천히 가시고, 예민하게 들떴던 온몸의 감각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그러나 야귀가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이마가 깨지고 뇌수가 튀면
하늘을 찢어낼 듯한 비명이 연무곡을 울렸다.이완은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열기를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홀로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약초를 잔뜩 채집해서 돌아오자마자… 엉망이 된 별채, 피투성이가 된 경렬과 한 어린아이의 굳은 몸을 보았다.이완은 그 아이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평소에도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자신의 은백색 머리카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며 살갑게 웃어주던 아이였다.검붉은 피가 스며든 방바닥 위로, 아직 미처 식지 못한 작은 손이 떨구어진 채 굳어 있었다.경렬은 이를 악물고 가슴 압박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현웅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송구합니다, 의원님.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그런데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이완이 피를 토하듯 탄식하며 물었다.경렬은 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산채의 두목인 ‘야귀’라는 자가 수하들을 또 보냈습니다. 아이들을 모조리 데려가려던 중에, 이 아이가 저를 지키려다 그만….”이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시처럼 맺히는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그는 결국 그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목을 묻은 채… 한참을 비통하게 울부짖었다.그날 밤.연무곡 위의 하늘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솟았다.이완은 말없이 칼을 들고 산을 올랐다.흙탕물이 고인 고갯마루를 넘어 산채를 향하는 동안, 푸른 두 눈동자에 내내 달그림자가 박혔다.산속은 모든 것이 기묘할 만큼 조용했다.그 깊은 고요 속에서도, 이완의 마음속에서는 뭔가 무겁고 어두운 것이 끓어오르고 있었다.그것은 분노였고, 죄책감이었으며, 또한 이전엔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고 싶다는 강한 살기였다.경렬과 현웅이 그의 뒤를 따랐지만, 역시 이완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산채는 연무곡 뒤편 산 능선 중턱에 숨겨져 있었다.얼핏 보면,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