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그의 이름은 랑하(狼河).
대장군 랑욱(狼旭)의 적장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를 산고로 잃고 홀로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부친은 아내를 잃은 뒤 평생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적막한 현궁에서 글보다 무예를 먼저 배웠고, 사사로운 정을 감추는 법부터 익혔다.
서늘한 눈빛.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
허리춤에 드리운 장검과 절제된 기운.
그는 늘, 한발 물러선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 왔다.
그리고 두 어깨에는 언제나, 온 나라의 기대가 얹혀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랑하는 화호족 금예(金藝)의 딸 금수련(金秀蓮)과 혼인했다.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가문 간의 혼담에서 비롯된 연이었다.
사실 수련은, 어렸을 때부터 랑하를 짝사랑해 왔었다.
하지만 혼인 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랑하는 아이가 있든 없든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지만, 그런 그의 태도야말로 수련에게는 가장 큰 상처였다.
그런 랑하가… 지금껏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감정에 붙들려 있었다.
단 한 번의 만남.
단 한 번의 접촉.
그러나 그날 후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손끝에 남은 감촉.
입술에 스친 열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빛나던, 그 푸른 눈동자.
밤이 되면 어김없이 같은 꿈을 꾸었다.
그를 끌어안고, 숨이 뒤엉키도록 입을 맞추며, 끝없이 탐하고 또 탐하는 꿈.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기억.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마음.
그는 날이 갈수록, 그 꿈에 점점 더 깊이 사로잡혀 갔다.
‘이것이 중독이 아니라면… 정녕 마도(魔道)란 말인가?
랑하야, 랑하… 네 꼴이 우습구나….’
랑하는 매일 같이 가슴속으로 한탄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지우려 애써도, 그 백호족 청년의 형상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
“내가 보니, 랑하 자네, 그날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혹시 정말로 백호족 순혈을 보기라도 한 건가?”
염상의 눈꼬리가 번쩍이며 치켜 올랐다.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으나, 목소리 끝에 실린 날카로운 흥분은 숨기지 못했다.
랑하는 연못 위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흠칫’하며 거두었다.
“…몸이 아직 좋질 않아. 이제 좀 쉬어야겠어. 그리고 가기 전에, 수련을 한 번 돌아봐 주게. 그녀가 요즘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군. 비취구(翡翠區) 소식도 좀 들려주고….”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이례적으로 가늘게 떨렸다.
‘오호, 이것봐라….’
이를 영민하기로 이름난 염상이 놓칠 리가 없었다.
“봤군, 봤어! 자네를 마주치고도 무사히 도망쳤다니, 엄청난 놈이 틀림없군! 그래, 어떻던가? 혼을 빼놓을 만큼 신묘하던가?”
랑하는 잠시 침묵했다.
숨을 고르며 시선을 피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 놈이 순간 독을 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염상의 얼굴에 ‘역시나’라는 표정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다가서더니, 랑하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잘 생각해 보게! 정말 자세히 보았는가? 그를 마주했을 때, 도대체 어땠는가?”
그 물음에는 단순한 호기심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래된 질투와 욕망, 은근한 조롱과 집착이 뒤엉켜 있었다.
랑하는 문득 가슴 밑에서부터 치솟는 어지러움에 휘청였다.
마치 온몸의 중심이 한순간에 무너진 듯,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윽!”
염상은 놀라서 그를 황급히 부축했다.
“랑하, 자네 정말 쉬어야겠군!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나 보구만.”
랑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느릿하게 회랑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염상은 목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완벽한 사내가 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내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던가?’
상국 최고의 무사이자, 백호부 이영 외에는 적수가 없다던 그가, 자신의 말 몇 마디에 이토록 동요하며 휘청이다니.
염상은 순간, 온몸이 조여오는 흥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집착으로 이어졌다.
‘그래! 저게 바로 내가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던 오랜 벗의 모습이지.’
염상의 눈빛은 어느새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워졌다.
‘내 기필코, 랑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말리라! 그 백호족 놈이 누구든, 반드시 잡아내서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라도!’
나는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태어났다.갓난아기 때부터 몸이 약해, 부모님과 부족민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특히 족장이신 아버지는, 외동인 내가 잘못될까 늘 노심초사하셨다.백호부와 부족민들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하다 하셨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 목숨을 이어가기조차 벅찼다.부족에게 달빛의 성지라 불리던 은어곡은, 상국 황궁에서 멀지 않았다.내가 홀로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아버지는 매번 나를 직접 그곳으로 데려다주셨다.지금 생각하면 목숨을 건 일이었는데, 어린 나는 그저 들떠서 좋아만 했다.물론 이제는 안다.아버지가 단지 내 요양을 위해 그곳을 찾으신 게 아니라는 것을.오래전에 누군가를 그곳 어딘가에 묻으셨고, 그 무덤은 오직 아버지만이 알고 계셨다는 것을.그리고 그 이를 평생 그리워하셨다는 것도….이 모든 건 어느 깊은 밤, 약초에 취한 아버지의 혼잣말을 우연히 듣고 알게 되었다.사람들은 아버지를 위대한 시조(始祖)이자 족장이라고 불렀다.그는 전쟁터에서 등불처럼 항상 앞장섰고, 버려져 흩어진 무리를 한데 모았다.그러나 나에게 그는… 홀로 취해 거친 숨을 붙들던 연약한 사람이기도 했다.아버지는 종종 밤에도 처소의 불을 켜지 않으셨다.그 어둠 속에서, 가끔 희미한 향이 잔잔히 피어올랐다.그것이 무엇인지는,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저 먼 극동 설산에서만 자란다는 약초.언젠가 어린 나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낯선 기운에 이끌려 아버지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탁자 위의 검은 향로에서 피어오르던, 푸르스름하고 달콤한 연기.“…아버지, 이건 뭐예요?”손이 그릇에 닿으려는 순간, 그의 차가운 손이 번개처럼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건드리지 마라.”그러나 나는 향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냄새가…너무 좋아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향로를 깊숙이 밀어 치우셨다.“네가 알 필요 없는 거다.”“왜요?”“너는 몰라도 된다. 위험한 거야.”“아버지는… 왜 쓰세요?”짧은 침묵 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살아야 하
달빛이 세상을 뒤덮은 밤이었다.하늘에서 흘러내린 은빛의 강물이 계곡을 감싸고, 그 빛 속에서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졌다바위 절벽 사이로 흘러드는 물 위에, 달빛이 유리처럼 부서지며 흩날렸다.은빛 조각들은 강물 위를 따라 번져가다, 마침내 별빛과도 섞여 하나의 장막을 이루었다.그 장막 속에 두 그림자가 어렸다.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큰 그림자 하나, 그리고 그 곁에 기댄 작은 그림자.어른의 어깨는 산처럼 무거웠고, 아이의 앳된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른 무게와 빛이, 한밤의 계곡 위에서 고요히 겹쳐지고 있었다.아이는 숨결이 가늘었고, 조그마한 눈동자는 힘이 없어 보였다.그러나 달빛이 닿는 순간마다 그 뺨에는 미약한 생기가 스며드는 듯했다.남자가 아이의 두건을 벗기자…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고운 뺨 위로 흘러내렸다.그는 말없이 아이의 겉옷을 벗겨 바위 위에 올려두고, 자신도 천천히 두건을 벗었다.서늘하고 아름다운 얼굴,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은백색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찬연히 빛났다.그 순간, 마치 달빛이 사람의 형상을 빌려 내려온 듯… 계곡은 숨을 죽였다.남자는 아이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아이의 두 눈이 놀란 듯 깜박이며 떨렸다.“아버지… 여기서 뭘 하시려는 거예요?”“곧 알게 될 것이다.”그 품은 차가웠으나 동시에 부드러웠다.아이는 저절로 힘을 빼고, 가만히 몸을 맡겼다.남자는 아이를 안은 채 물가로 걸음을 옮겼다.찰박—차가운 물결이 발목에서 이내 허리까지, 또 어깨까지 스며들며 두 사람을 휘감았다.달빛은 물 위에서 번져 나와, 은빛 물결이 되어 그들의 살결을 타고 흘러내렸다.아이의 젖은 머리칼과 두 푸른 눈동자는 그 빛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남자는 아이를 조금 높이 들어 올리며 물 위의 반짝임을 가리켰다.“이곳은 은어곡이라 한다. 계곡의 모습도 그렇지만, 빛이 반사되는 물결이 은빛 물고기를 닮아서, 내가 오래전에 붙인 이름이지.”그 말끝에, 남자의 시선이 잠시
그날, 황궁 앞의 뜰은 무너진 세계의 심장처럼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찢긴 깃발은 바람에 휘말려 망령처럼 울부짖었다.부서진 창과 칼은 사방으로 처절하게 뻗은 채, 더는 제 주인을 기다리지 않았다.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 상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보는 앞에서 그 위용을 드러냈다.태양이 가득한 대낮.보이지 않는 기운이 하늘을 열었고, 햇빛을 가르고 몰아치는 달빛이 상국 황성을 흔들었다.그 빛은 서늘했고, 동시에 신성했다.그 순간… 낮과 밤,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졌다.그 알 수 없는 기운 속에, 은발과 벽안을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그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땅은 진동하며 신음을 토했고, 먼지는 허공으로 피어올라 하늘에 기이한 무늬를 그렸다. 품에는 싸늘히 식은 시신을 안고 있었고, 그의 주위로 수백의 병사들이 마치 제물처럼 널브러졌다.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두 눈을 끝까지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 그 순간에도, 그 강렬한 빛은 모두의 뇌리에 새겨졌다.“한낮에 달빛이 걸어왔다.”“달의 포효가 태양의 정원을 무너뜨렸다.”“그 발걸음에 수십, 수백의 생명이 꺼졌다.”“그는 황궁마저 무너뜨릴 수 있었으나… 스스로 칼날을 거두었다.”불과 태양을 숭상하는 상국의 중심에서… 한낮에 떠오른 얼음 같은 달이 분노를 쏟은 일.황제는 그 사건을 역사에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남겨진 것은 단 하나의 어명.“반도 이완과 역적 랑우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그 말은 사람들의 입술을 일시적으로 봉하는 듯했으나, 오히려 그날의 일은 전설이 되어 온 대동 땅에 더욱 넓게 퍼져나갔다.***저녁 무렵, 백호부의 성곽 앞.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순찰병들이 떨리는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은빛의 그림자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혼자였다.핏빛으로 물든 옷은 낡고 닳아 빛이 바랬지만, 그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푸르고, 또 신비로운 빛을 품고 있었다.그가
바람은 고요했고, 숲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밤공기 속에는 이미 달빛이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허리 위에 걸린 둥근 달이, 맑은 물결 위에 차갑고 밝은 빛을 한가득 부어주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시간과 숨결이 외진 계곡 안으로 모여드는 듯했다. 이완은 랑우를 품에 안고,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그 계곡 아래로 향했다. 그 발걸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걷듯 똑바로 이어졌다. 달빛이 물결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겼다. 은어곡. 랑우와 함께한 짧은 추억이 고여 있는 은빛 물고기의 계곡. 이곳은 단순한 물줄기와 바위가 모인 곳이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다시 눈을 마주했던 곳.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서로를 알아본 자리. 목숨을 걸고 서로를 탐하듯 부딪히며, 격렬히 사랑했던 밤의 숨결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식기도 전에, 서로의 얼굴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던 기억. 밤새 망가지고 짓밟힌 몸을 다정히 씻겨주며, 따뜻한 어깨를 내어주던 순간. 이완은 이곳에서 랑우에게서 받았던 가장 진실한 위로와, 변함없이 고귀하다고 속삭여주던 그의 입술을 기억했다. 그 순간순간이 마치 달빛처럼 또렷했다. 마치 지금 눈앞에서 되살아나듯, 그 향기와 체온과 목소리까지 생생했다. 그러나 지금 품에 안긴 랑우의 몸은… 더 이상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돌처럼 굳어버려 차가움만이 남아 있었고, 체온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찬 물결이 발목을 스치더니, 곧 무릎까지 차올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물속에 천천히 잠겨 들었다. 흔들리는 은빛 물결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더는 구별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이완은 랑우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숨은 목구멍에 걸려 헐떡거렸고, 말라붙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호흡이 멈출 듯 떨리고 있었다. 그 밝은 달빛 아래, 함께 사랑을 나누
병사들이 일제히 창과 칼을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이완은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순간 돌바닥이 쾅 하고 울리고, 바닥 틈새로부터 균열이 번개처럼 퍼졌다.이완이 둘째 걸음을 내딛는 동안, 갈라지며 조각난 돌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병사들의 칼과 창날이 빛을 받아 번쩍였으나, 그 순간 바람이 방향을 바꿔 병사들의 시야를 찢어버렸다.이어진 셋째 걸음.폭발하듯 울린 진동과 함께, 수십의 병사들이 허공에 뜨며 몸이 부서졌다.갑옷이 찢어지고, 칼이 땅바닥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냈다.비명과 금속음, 그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살아남은 병사들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목덜미를 짓눌린 듯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갑옷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병사들이 떨리는 손으로 창검을 놓는 모습이 보였다.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백성들마저 무릎이 꺾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들 모두, 그 은빛 파동 앞에 한 마디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염렬은 발악하듯 손을 뻗었으나, 순간 알 수 없는 힘으로 단상 위에서 그대로 튕겨 나갔다.그 모든 혼란을 뚫고… 이완이 랑우에게 다가갔다.한 걸음.또 한 걸음.형틀의 두꺼운 쇠가 으스러지며 부서져 나갔다.랑우를 묶은 질긴 밧줄과 입에 물린 재갈이 절단되듯 풀리며 바닥에 흩어졌다.마침내.이완은 두 팔로 랑우를 끌어안았다.거친 숨결이 서로의 목덜미에 닿았다.“…내가 왔어, 랑우.”그 말에, 랑우가 희미하게 웃었다.그러나 이완의 호흡은 무겁게 쳐져 있었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은빛 파동 또한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그때.휘이이이익…!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성벽 위로부터, 수십 발의 쇠촉이 허공을 찢으며 몰려왔다.그 찰나의 순간, 랑우가 몸을 틀었다.아무 말도 없이 두 손으로 이완의 어깨를 감싸며 그의 몸을 온전히 가렸다.거침없이 날아온 화살 하나가 랑우의 부서진 좌측 어깨뼈를 다시 한번 꿰뚫으며 ‘퍽’하고 진득한 소리를 냈다.그
백호부의 산자락에는 늦겨울 바람이 부드럽게 흘렀다. 아이들이 눈밭 위에서 함성을 지르며 구르고, 장인들은 마당 한쪽에서 활시위를 고쳐 매고 있었다. 성문 앞에 서 있던 이완은 멀리서 병사들의 훈련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들려왔다. 랑우와 경렬이 떠난 지 나흘째.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랑우가 돌아오면, 얼른 그와 함께 시험해 보고 싶은 병법이 수두룩했다. 그때 문루 위에서 울려 퍼진 급박한 종소리. 숨이 목까지 찬 비원이 그의 앞으로 급하게 뛰어왔다. “족장님! 랑우 님이… 상국 군에게 생포되셨습니다! 경렬, 그자가 배신을….” “…뭐라고?” 이완이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었다. “처형일이… 이틀 뒤 정오, 황성 앞뜰이라고…!” “…처형…?” 그 순간, 이완의 시야에서 주변 풍경이 모조리 사라졌다. 귓가엔 오로지 피가 심장에서 솟구치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곧 부족의 원로와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제가 가서 랑우를 데려오겠습니다.” 이완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주위 공기를 누를 만큼 차갑고 서늘했다. “안 됩니다, 족장님! 상국 황성은 사방이 군영입니다. 그것도 대낮에….” “맞습니다! 누가 봐도 함정입니다! 이건 분명 족장님을 노리는 적의 계략입니다!” 이완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서 달빛이 번뜩였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가야 합니다.”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 누구도 따르지 마십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 겨울의 끝. 한낮의 태양이 오늘따라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성루와 석벽이 오래간만에 뜨겁게 데워지고, 처마 끝에 고였던 눈은 완전히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황성 앞뜰 중앙에는 거대한 처형대가 세워져 있었고, 수백 명의 군사들이 빽빽하게 둘러싸 철벽을 이루었다. 그 위에, 두 손이 결박되고 족쇄가 채워진 랑우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갈이 입을 틀어막았
“…허.” 염상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거,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 그의 두 눈동자는 섬뜩할 만큼 번쩍이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은어곡에서 랑하와 마주쳤다는 바로 그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놈이 감히 혼자 이곳까지 숨어들어,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고?’ 염상은 모든 의문이, 마치 깨진 그릇이 들어맞듯 조금씩 맞춰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 백호족 사내가 정말로 단순히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아니라, 랑하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존재라면?’ 사실 염상은 오래전부
‘이후’는 기지개를 켜며 움츠렸던 몸을 폈다. 목덜미를 짓누르고 멱살을 틀어쥐던 무게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잡아먹을 듯 기세등등했던 사내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졸린 듯 멍한 표정으로, 거친 숨만 연거푸 내쉬고 있었다. 이후는 다시 한번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다. 같은 사내라 해도, 자신보다 한참 커 보이는 떡 벌어진 어깨. 넓은 소매로도 가릴 수 없는 두툼한 팔뚝. 목덜미를 억세게 움켜쥐던 거친 손바닥과, 짙푸른 색의 관복 위로 드리워진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 ‘이 사람, 뭐야…?’ 자
“…악!” 벼락같은 일격에, 상대는 외마디 신음을 내지르며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랑하는 재빠르게 쫓아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그대로 목덜미를 눌러 제압했다. “백호족인 네 놈이 은어곡에 왜 온 것이냐!”“허억… 헉…!”“말하라!” 그러나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랑하는 빠르게 상대의 품속을 뒤졌으나, 그 어떤 무기도 감지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살갗 위로 맨손이 닿았을 때… 랑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이거, 왜 이래?’ 한여름임에도, 손끝에 닿은 체온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염상(炎常), 혹여… 백호족(白狐族, 흰 여우 부족) 순혈을 가까이서 본 일이 있나?” 랑하(狼河)의 말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마치 금서(禁書)를 열어 보듯 조심스러웠다.시선은 연못을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현실을 비껴간 듯 꿈결처럼 흐릿했다. 여름 햇살이 현궁 뒤뜰의 정자를 넘어 붉은 연꽃 위로 흩어졌다.물결에 반사된 그 빛은 되돌아와, 잔뜩 굳은 랑하의 얼굴 위를 스쳤다.그의 등 뒤로, 묵직한 흑발이 진청색 장포의 허리춤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중원의 동쪽, 대동(大東).이 땅에서, ‘랑하’, 그의 이름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