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다음 날 아침, 서연이 유나의 머리를 묶어주고 있을 때 도윤에게 전화가 왔다.“오늘 유나 데리고 나가도 돼?”서연의 손이 잠깐 멈췄다.“어디 가려고?”“놀이공원.”유나가 그 말을 들었는지 거울 앞에서 홱 돌아봤다.“놀이공원?”휴대폰 너머로도 들렸는지 도윤이 웃는 기척을 보였다.“반나절이면 돼. 저녁 전에 데려다줄게.”서연은 유나를 바라봤다. 친자 관계를 확인한 뒤 도윤과 유나가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예전 같으면 걱정부터 앞섰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알았어.”한 시간 뒤, 도윤이 집 앞으로 왔다.유나는 작은 가방까지 메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갔다.“아저씨!”“천천히.”도윤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서연은 그 모습을 보다가 유나의 가방을 건넸다.“안에 물이랑 물티슈 있어.”“응.”“그리고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 먹이지 마.”“하나만.”“하나도 큰 거 사주면 안 돼.”“알았어.”예전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아이를 사이에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 났다. 이상해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았다.도윤은 유나를 안고도 바로 떠나지 않았다.“어젯밤 전화…”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당신이 끊지 않은 거 알아.”도윤이 서연을 바라봤다.“너도 안 끊었잖아.”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때 유나가 도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아저씨, 가자!”도윤은 아이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서연을 봤다.“오늘 밤 유나 데려다줄게.”“응.”도윤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할 말이 좀 있어.”서연의 손끝이 굳었다.“유나 잠들고 나서 말하자.”어떤 말인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응.”도윤이 유나를 데리고 떠난 뒤 현관문을 닫은 서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할 말이 좀 있어.’그 한마디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도윤은 이미 유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5년 동안 숨긴 이유도 억지로 묻지 않았고, 자신이 말할 때
종방연이 끝난 뒤에도 서연의 머릿속에는 강혜원의 휴대폰 화면이 남아 있었다.유치원 앞에 서 있던 유나.누가 찍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사진을 혜원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안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든 유나의 얼굴부터 확인하고 나니 겨우 숨이 돌아왔다. 서연은 아이의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준 뒤 방문을 닫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조정우였다.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응, 정우야.”“집이야?”“응. 방금 들어왔어.”정우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평소보다 길었고, 서연도 먼저 재촉하지 않았다.“영상 봤어.”서연의 손이 멈췄다.“그 사람이 무대에서 네 이름까지 부르더라.”종방연 영상이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도윤이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자신을 따로 불렀던 장면까지 그대로 담겼을 것이다.“응.”그 한마디 뒤로 한동안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서연은 소파에 앉아 손가락으로 휴대폰 모서리를 쓸었다. 정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서연아.”“응.”“나 그만할게.”서연의 손가락이 멎었다.“정우야—”“아무 말 하지 마.”정우가 곧바로 말을 끊었다.“지금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더 우스워질 것 같으니까.”서연은 입술을 다물었다.정우는 자신과 유나를 오랫동안 지켜준 사람이었다.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어도 그가 건넨 마음까지 계약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쉽게 대답할 수 없었고, 그동안 명확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더 잔인했는지도 몰랐다.“한 가지만 물을게.”서연은 눈을 감았다.“물어봐.”“너 진심이야?”누구를 말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도윤.서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어제까지도 자신은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이 아이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기 때문에 다시 바라보는 건지 직접 말해주기를.‘그 말은 내가 직접 확실히 할게.’도윤은 그렇게 말했다.그런데 정우가 묻는 것은 도윤의 마음이
종방연 막바지, 감독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자, 이제 진짜 마지막입니다. 우리 주연 배우가 한마디 해야지. 윤도윤 씨, 오늘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요?”사방에서 박수가 터졌다.“한마디 해요!”“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지!”도윤은 잠시 앉아 있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은 잔을 만지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제 복도에서 들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그 말을 내가 할 때까지 기다려.’‘그전에는 네가 대신 아이 때문일 뿐이라고 말하지 마.’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그 말은… 나한테 남겨둬.’그 뒤로 도윤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서연도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떤 대답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다시 평소처럼 촬영을 마쳤다.“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도윤이 잔을 들었다.“감독님, 작가님, 스태프분들까지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하셨는데 덕분에 끝까지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박수가 이어졌다.서연도 사람들을 따라 손뼉을 쳤다.이대로 끝날 줄 알았다.그런데 자리에 앉으려던 도윤이 멈췄다.“그리고 한마디 더—박서연.”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서연에게 모였다.서연의 손도 멈췄다.혜원은 잔을 입가에 가져간 채 도윤을 바라봤고, 몇몇 스태프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굳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로 부를 이유가 없었기에 서연조차 다음 말을 예상하지 못했다.도윤은 서연을 바라봤다.“몇 달 동안 고생 많았어.”그게 전부였다.누구나 할 수 있는 인사였고, 어떤 의미도 붙이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다.서연은 대답 대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도윤도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그때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혜원이었다.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만큼 선명했다. 혜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잔을 내려놓았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서연은 모르는 척했다.도윤 역시 반응하지
종방연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서연은 강혜원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배우와 이야기하다 시선이 마주치면 혜원은 먼저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 웃긴 이야기를 꺼내면 평소처럼 잔을 들었다. 그런데 자리를 옮겨도 그 시선은 계속 따라왔다.친자 확인에 관한 일을 눈치챈 걸까.그 생각이 들자 서연은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맞물렸다.도윤과 유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5년 전 검사 결과가 조작됐을 가능성까지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제한적이었다.“박서연 씨.”혜원이 빈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잠깐 얘기 좀 할래요?”“여기서 해요.”“여기서 해도 되는 얘긴가?”혜원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연은 몇 초 뒤 따라갔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연회장을 벗어나 화장실 쪽 복도로 들어서자 음악 소리가 멀어졌고, 혜원은 화장실 앞에서 멈췄다.“확인했나 봐?”서연의 걸음이 멎었다.“뭘요?”“끝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혜원이 서연의 얼굴을 훑어보다 잔에 남은 술을 마셨다.“그 애 말이야.”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는지 혜원의 입가가 비틀렸다.“역시 맞았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이겼다고 생각해?”혜원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그 사람은 아이 때문에 널 보는 것뿐이야.”서연의 손끝이 굳었다.그 말은 이상할 만큼 정확한 곳을 찔렀다.며칠 전부터 혼자 되풀이하던 질문이었다.도윤이 자신과 유나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정말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야 알게 된 딸 때문인지 서연 역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혜원은 그런 서연의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반박을 못 하네?”“할 필요가 없어서요.”“아니. 너도 알고 있어서겠지.”서연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혜원이 먼저 돌아섰고, 서연은 그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수도를 틀어 손을 적셨지만 조금 전 들은 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그 사람은
촬영장 점심 메뉴가 달라진 건 도윤이 돌아온 다음 날부터였다.서연은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젓가락을 멈췄다. 매콤한 가지볶음과 들깨가 들어간 미역국, 예전에 촬영이 길어질 때면 꼭 찾던 반찬까지 들어 있었다. 한 번이라면 우연이라고 넘겼겠지만 이틀째에는 좋아하던 국수가, 사흘째에는 입맛 없을 때 먹던 죽이 올라왔다.“요즘 메뉴가 많이 바뀌었네요.”옆에 있던 스태프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그러게요. 업체에서 바꿨나 봐요.”서연은 맞은편 끝자리를 바라봤다. 도윤은 다른 배우와 대본을 맞추느라 이쪽을 보지 않았다.묻지 않았다.누가 메뉴를 바꿨는지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들킬 것 같았다.그날 야간 촬영이 끝난 건 자정을 넘긴 뒤였다. 서연이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는 꺼져 있었지만 실내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다음 날에도 같은 차가 있었다.그다음 날에도.서연이 밴에 올라타고 촬영장을 벗어나면 뒤늦게 불이 꺼졌다. 사흘째 되는 밤, 서연은 결국 차 가까이 다가가 운전석에 앉은 기사에게 물었다.“누구 기다리세요?”“네. 사람 기다리는 겁니다.”“누구요?”기사는 난처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그것까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서연은 더 묻지 않았다. 돌아서면서도 차 안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도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척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었다.정작 촬영장에서는 달랐다.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유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마주치면 필요한 말만 했으며 촬영이 끝나면 각자의 차로 향했다.그 거리가 서연을 더 흔들었다.차라리 따져 물었다면 미안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유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면 어떻게든 답을 찾았을 텐데, 도윤은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은 채 서연과 유나의 주변만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유나의 생일날,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엄마, 내 거야?”“이름은 유나라고 되어 있네.”상자
서연은 도윤이 돌아선 자리를 한참 바라봤다.유나가 품 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걸음을 옮겼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말이 맴돌았다.‘네가 말하고 싶을 때, 네가 직접 말하겠지.’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왜 숨겼느냐고, 왜 자신에게 아이의 존재조차 알리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도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그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유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도윤은 서연이 가장 걱정했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지도 않았고, 양육권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도 않았다.촬영장에서는 오히려 한 발 더 멀어졌다.예전 같으면 지나가며 한마디쯤 건넸을 순간에도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서연이 먼저 인사를 하면 짧게 고개를 숙였고, 유나가 촬영장에 와 있을 때도 직접 다가가기보다 매니저에게 필요한 것을 부탁했다.처음에는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그 거리가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도윤이 보내던 작은 선물도 더 이상 직접 전해지지 않았다. 매니저를 통해 도착한 상자 안에는 유나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들어 있었지만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유나는 상자를 열어보며 신이 났다.“엄마, 이것도 아저씨가 보낸 거야?”서연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아마도.”유나는 금세 다른 장난감에 관심을 옮겼지만, 서연은 상자를 닫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도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한마디조차 그가 세워놓은 선을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도윤은 이틀 동안 촬영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매니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형, 무슨 일 있어요?”“스케줄이 조금 바뀌었어.”실제로 도윤이 간 곳은 지방 행사장이었다. 대단한 일정도 아니었다. 굳이 그가 직접 갈 필요가 없는 자리였고, 서연은 촬영장에 있던 사람에게서 우연히 그 소식을 들었다.“도윤 씨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