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4장
엘리베이터가 부드러운 알림음을 내며 1층에 도착했다. 헬레나는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긴장감을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비좁은 자신의 아파트로 곧장 돌아가는 대신,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세우고 목적지를 하나만 말했다. Herry의 집. 헬레나는 내일 아침 카엘 윌리안의 아내라는 신분이 될 자신이 다른 남자와의 미련을 남긴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관계는 오늘 밤 끝내야 했다. 택시는 지난 3년 동안 사랑과 그리움을 가득 품은 채 찾아갔던 집 앞에 멈췄다. 하지만 오늘 밤, 현관문을 향해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낯설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똑. 똑. 똑. 헬레나는 나무로 된 현관문을 꾸준히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Herry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플란넬 셔츠는 가슴 부분의 단추조차 제대로 잠그지 않은 상태였다. “헤, 헬레나?” 그가 말을 더듬으며 불안하게 시선을 굴렸다. “이렇게 늦은 밤에 여긴 왜 왔어, 자기야?” 한때는 달콤하게 들렸던 그 애칭이 이제는 헬레나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역겨운 단어처럼 느껴졌다. 집 안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헬레나는 Herry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겨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침실 문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다. Jessica가 2층 복도에 서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축 늘어져 있었고, 그녀는 Herry의 큼지막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헬레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가장 친한 친구였던 Jessica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Herry는 다급하게 몸을 옮겨 헬레나의 시야를 가리려 했고, 그의 표정에는 점점 더 초조함이 드러났다. “우리 헤어지고 싶어.” 헬레나는 아무런 서론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Herry가 입을 떡 벌렸다. “뭐?” “우리 헤어지자고.” 헬레나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위해 흘릴 눈물은 이제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시간 전, 아픔은 이미 감각을 잃었다. “왜, 헬레나?” Herry가 황급히 따져 물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헤어지자고 하면 끝이야? 너 미쳤어?” 헬레나는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더 이상 폭발할 듯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오직 피로뿐이었다. 깊고도 압도적인 피로감. “이제 너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 그게 전부야.” Herry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분명히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감정이 없다고? 헬레나, 우리 3년이나 만났잖아! 그 3년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겠다고?” “그리고 그 3년이면 내가 진실을 깨닫기에 충분했어.” “무슨 진실을 깨달았는데?” Herry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나랑 지금 장난하는 거야?” 헬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녀는 일부러 조금 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Herry와 Jessica의 불륜을 폭로하지 않았다. 두 배신자 앞에서 따지고 울어대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겨우 되찾은 자신의 존엄을 다시 내던지는 일일 뿐이었다. 헬레나는 내일의 계약 결혼 역시 비밀로 하기로 했다. “고작 감정이 없어졌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 때문에?” Herry가 비웃듯 웃었다. “우리 관계를 장난감처럼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해?” 헬레나는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조용한 조롱이 담긴 미소였다. “그동안 나한테 했던 게 정확히 그거 아니었어, Herry?” Herry의 몸이 굳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가슴을 정통으로 찔러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헬레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코트를 몸에 더욱 단단히 여몄다.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 잘 자.” “헬레나!” 갑자기 Herry가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난 동의 못 해! 우리 헤어질 수 없어!” 헬레나는 자신의 손목을 감싼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 놓아, Herry.” 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평소 순종적이고 인내심 많던 헬레나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Herry는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의 턱은 분노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너무하잖아!” 헬레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돌려 밤거리로 걸어갔다. 현관 앞에서 Herry가 계속 그녀를 부르는 소리도 철저히 무시했다. 그녀의 뒤에서 Herry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루한 여자든 아니든, 헬레나는 지난 3년 동안 믿음직한 여자친구였다. 언제나 인내심이 있었고. 언제나 충실했으며.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 풍만한 여자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Herry의 자존심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헬레나... 그렇게 쉽게 나를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다음 날 아침, 수도는 매서운 추위에 휩싸여 있었다. 시계가 정확히 오전 8시 55분을 가리킬 때, 헬레나를 태운 택시가 관공서 혼인신고소 앞에 멈췄다. 헬레나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건물 기둥 근처에 서 있는 카엘 윌리안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짙은 회색의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다. 영국 Savile Row 스타일로 정교하게 재단된 정장은 그를 격식 있고 강력하면서도 위압적인 남자로 보이게 했다. 카엘은 백금색 시계를 잠시 확인한 뒤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5분 늦었군.” “9시 전에 도착했어요, 카엘 씨. 어젯밤에 약속한 대로요.” 헬레나가 정중하게 정정했다. “난 내 말에 토를 다는 걸 좋아하지 않아, 헬레나.” 헬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괜한 말다툼을 시작하기보다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카엘이 한 걸음 다가오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남성적인 우디 향수 냄새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확실히 해둘 게 있어.” “뭔가요?” “어젯밤에 네가 했던 그 싸구려 수법, 다시는 쓰지 마.”제87장카엘의 오른손 마디에서 붉고 진득한 피가 계속해서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옅게 물들였다. 남자는 피부를 파고드는 쓰라린 통증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경직된 발걸음으로 텅 빈 침실을 나온 그는 정적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 어둡고 넓은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후원 테라스로 향했다.가랑비가 그친 뒤, 젖은 흙냄새를 머금은 밤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카엘은 테라스 구석에 놓인 라탄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눈앞의 작은 유리 탁자 위에는 반쯤 비어 있는 레드 와인 한 병과 높다란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잔을 사용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카엘은 왼손으로 와인병 목을 잡아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대었다. 쓰디쓴 알코올의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뜨겁게 타올랐지만, 가슴속을 집어삼킨 압도적인 공포와 공허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남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무심히 바라보았다."내 나이에..." 밤바람에 실려 퍼진 카엘의 저음이 지독히도 쉰 소리를 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트라우마라는 차가운 감옥 속에 수년간 나를 가두고 살다가... 마침내 내 안의 모든 두려움을 녹여주고 대책 없이 사랑에 빠지게 만든 여자를 만났는데... 왜 결말이 이 모양이어야만 하는 거지?"카엘은 눈을 감았다. 헬레나의 진심 어린 미소, 자신을 놀릴 때마다 터뜨리던 밝은 웃음소리, 그리고 조금 전 식당 밖에서 보였던 눈물겨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이 제어할 수 없이 뇌리를 스쳤다. 그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죄어왔다.테라스로 이어지는 복도의 어둠 속에 저택의 늙은 집사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수십 년간 스미스 가문의 저택을 지켜온 노인은 깊은 우려가 담긴 눈빛으로 도련님의 넓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사의 날카로운 시선에 카엘의 오른손등에서 바지 위로 연신 떨어지는 붉은 피가 포착되었다.집사는 느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도
제86장빗길을 질주하는 택시는 밤이 남겨놓은 참혹한 비극의 침묵하는 목격자가 되었다. 헬레나는 차가운 습기가 서린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카엘의 잔상은 유리창 외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 속으로 천천히 번지며 사라져 갔다.카엘은 거칠게 몰아쉬는 숨의 마지막 파편을 모아 택시를 쫓아 수려하게 몇 걸음을 달려왔었다. 하지만 속도를 올리는 택시의 가속은 남자의 희망을 완벽하게 산산조각 내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카엘은 걸음을 멈추고, 텅 빈 보도블록 한가운데에 길쭉한 체구를 우두커니 방치했다.가랑비 속으로 그의 무거운 숨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카엘은 택시가 사라져 버린 빈 도로를 똑바로 응시하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적어도... 아직은 내 비서로 남아주겠다고 했으니까." 카엘이 지독히 쉰 저음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창백한 입술 위로 공포에 찬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내일 아침이면 회사로 출근할 거야. 여전히 그녀를 볼 수 있고, 매일 곁에 있을 수 있어... 비록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남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한 길고 무거운 숨을 내쉬며,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죄책감의 상처를 차가운 밤바람에 내맡겼다.한편, 택시는 도시 외곽의 밀집 주거 지역에 마침내 차를 세웠다. 헬레나는 요금을 지불한 뒤, 몇 달 전 떠났던 2층짜리 임대 건물 쪽으로 여행 가방을 끌며 내렸다.소박한 건물이 으스스한 정적 속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헬레나는 가방에서 낡은 열쇠를 꺼내 약간 삐걱거리는 나무 문고리를 돌린 뒤, 자신의 낡고 좁은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희미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크리스털 샹들리에도, 부드러운 킹사이즈 침대도, 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키던 카엘의 냄새도 이 방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평범한 이불이 깔린 소박한 원목 침대 하나와 구석진 곳에 놓인 작은 책상만이 있을 뿐이었다.헬레나는 희미한 노란색 전구를 켜고,
제85장젖은 보도블록 위로 여행 가방을 끌고 가던 헬레나의 발걸음이 뒤에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에 툭 멈춰 섰다. 그녀가 돌아서기도 전에, 강인한 두 팔이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몸을 거칠게 감싸 안았다. 절박함과 소유욕이 한데 얽힌 격정적인 포옹이었다.카엘은 온몸을 심하게 떨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는 헬레나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슴을 집어삼키는 압도적인 공포를 토해냈다. 그 포옹이 어찌나 가혹하고 절망적인지, 헬레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이것 놓으세요, 사장님! 숨을 못 쉬겠어요!" 헬레나는 목구멍에 걸린 목소리로 소리치며, 남편의 억센 팔을 풀어내려 발버둥 쳤다.숨이 턱 막힌 그녀의 애원을 들은 카엘은 즉시 팔을 가다듬었다. 그는 헬레나를 돌려세워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마치 손을 놓으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듯 그녀의 양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쥐었다.가랑비에 젖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카엘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친 눈가에 눈물이 차올라,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존재 같았던 대표이사로서의 위엄과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제발... 내 설명부터 들어줘, 응? 제발... 딱 한 번만 내 말 좀 들어줘." 카엘이 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깊은 저음이 떨리고 있었다.헬레나는 눈물로 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차갑고 느릿한 손길로 카엘의 손을 자신의 손목에서 털어냈다. 그녀는 평복을 정돈한 뒤 고개를 돌려버렸다. 방금 자신의 심장을 부숴버린 남자의 눈을 직시하기를 거부한 것이다."좋아요. 말씀하세요." 헬레나가 감정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은 5분입니다, 사장님."카엘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길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약간 젖은 얼굴을 문지른 그는, 그 귀중한 몇 분이 허망하게 흘러가 버릴까 봐 가능한 한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어제... 어머니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셨어." 카엘이 목소리에 서린 패닉을
제84장점차 잦아든 가랑비가 살끝을 파고드는 차가운 한기를 남긴 채 밤이 깊어갔다. 헬레나가 탄 택시는 야외 야시장 식당가 앞에 차를 세웠다. 밤하늘 아래 늘어선 노란 알전기 불빛들이 정갈하게 놓인 나무 탁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헬레나는 다른 손님들과 떨어진 가장 조용한 구석 자리를 찾아, 중간 크기의 여행 가방을 끌며 택시에서 내렸다.자리에 앉자마자 헬레나는 손을 들어 셰프나 서빙 직원을 불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메뉴판의 여러 요리를 지목했다. 꿀을 발라 구운 큼직한 소갈비 구이, 매콤한 양념의 바삭한 치킨, 따뜻한 소고기 스튜 한 그릇,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두 공기, 그리고 시원한 음료까지. 헬레나에게 무너진 마음을 달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든 고통을 음식 밑으로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속을 갉아먹는 빈집 같은 허기짐을 채워, 배라도 부르면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기를 바랐다.오래 지나지 않아 주문한 모든 요리가 나무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양념 구이의 먹음직스러운 향을 품은 하얀 김이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 헬레나는 숟가락과 포크를 들고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과 경주라도 하듯 고기 조각을 빠르게 씹어 넘기며 밥을 크게 한 술씩 퍼 넣었다.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넘기려 애써도, 혀 끝에 감도는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늘 위안을 주던 밥맛조차 무미건조하게 느껴졌고, 부드러운 고기마저 퍽퍽해서 삼키기가 힘들었다.그녀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들려 있던 숟가락이 공중에서 멈춰 섰다.바로 그 순간, 그녀의 모든 의연함이 무너져 내렸다.헬레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쥐었다.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야외 식당 한구석에서 그녀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눈물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고통이 깊었다. 마치 가슴속에서 심장이 강제로 꺼내어져 수많은 사람 앞에서 무참히 짓밟힌 것만 같았다. 실망과 수치심, 그리고 가장 잔
제83장헬레나가 나선형 계단을 따라 1층 거실로 내려오자, 긴 소파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한셀 부인과 비비안 휠러는 여전히 파티 때 입었던 우아한 드레스 차림으로 차분하게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헬레나의 경직된 발소리가 두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비비안이 먼저 돌아서더니, 헬레나의 손에 들린 가방을 발견하자마자 얼굴 가득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나...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네." 비비안이 온 거실에 울려 퍼지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비꼬았다. "그래도 아직 염치는 조금 남아 있나 봐? 드디어 이 집에서 나가는 걸 보니 말이야."한셀 부인은 유리 탁자 위에 도자기 찻잔을 내려놓고는, 한때 늘 감싸고 아껴주던 시어머니로서의 따스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표정으로 헬레나를 바라보았다."드디어 자각했다니 다행이구나." 한셀 부인이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차갑게 말했다. "카엘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미래에 맞는 여자를 선택했어. 이곳은 너 같은 여자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단다."헬레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퍼져나갔지만, 그들 앞에서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들의 조롱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적은 기력마저 낭비하는 일일 뿐이었다. 헬레나는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욕을 무시한 채 현관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헬레나! 기다려!"거친 목소리가 거실의 팽팽한 정적을 깨뜨렸다. 흰 셔츠가 약간 어지럽혀지고 뺨에는 여전히 희미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카엘이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현관문 손잡이에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둔 헬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패닉으로 크게 흔들렸다.그는 아내를 따라잡아 막아서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지만, 한셀 부인이 즉시 소파에서 일어나 아들의 건장한 팔을 낚아채 잡았다."카엘! 멈춰라!"
제82장스미스 가문 저택의 마스터 베드룸 안으로 헬레나가 발을 들여놓았을 때, 방 안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창밖의 보슬비는 한층 더 세차어져, 마치 통통한 여인의 산산조각 난 심장을 함께 슬퍼해 주기라도 하듯 창문 유리창을 부드럽게 두드렸다.헬레나는 약간 젖어버린 네이비 벨벳 드레스 자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침실 불을 켰다. 여전히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가진 가장 단순한 평복인 헐렁한 면 티셔츠와 무난한 긴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의 흔적도, 진주 귀걸이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붉게 부어오른 동그란 두 눈을 한 창백한 얼굴뿐이었다.헬레나는 옷장에서 중간 크기의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수수한 옷가지들을 하나씩 접어 캐리어 안에 차곡차곡 담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카엘이 사주었던 그 많은 사치품이나 고급 드레스, 보석류에는 단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옷장 안에 있던 그 모든 옷과 장신구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이제 떠날 시간이야." 헬레나가 적막한 방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체념이 깔려 있었다. "사장님과의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를 끝내야겠어."견딜 수 없을 만큼 씁쓸하고 옅은 미소가 헬레나의 입술 위로 번졌다. 캐리어 안에 쌓인 옷가지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위로 다시금 눈물이 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카엘 말이 맞았어... 내가 정말 너무 멍청했지."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슬픔으로 가득 찬 텅 빈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 위에서 속삭이던 그 달콤한 말들, 따뜻한 속삭임, 사치스러운 약속들을 그렇게 쉽게 믿어버리다니. 내가 무슨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잠깐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에 불과했던 거야."헬레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비록 심장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의 이성은 여전히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