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송씨 집안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가장 먼저 감정을 참지 못한 사람은 송지아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그 모습을 본 송만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당신은 손녀를 시집보내기가 그렇게 서운해? 지아가 결혼한다는 말만 나오면 울잖아. 아이들이 보고 웃겠어.”“지아가 정말 시집간다고 생각하니 섭섭해서 그렇죠.”송지아의 할머니는 눈물을 머금은 채 웃었다.허경빈도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할머니, 저희도 계속 경성에서 살 거예요. 지아와 자주 찾아뵐게요.”“그래, 안다. 네가 참 좋은 아이라는 걸.”*그날 식사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식사가 끝난 뒤, 허경빈과 송지아는 둘만의 산책을 나갔다.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라비엘 레지던스 앞에 도착해 있었다.허경빈은 한동안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 그래도 가사도우미가 정기적으로 찾아와 청소한 덕분에 집 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요즘 송지아는 유난히 허경빈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그가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품속에 파고들어 앉은 채, 손목에 달린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렸다.통화를 마친 허경빈이 시간을 확인했다.“이제 늦었어.”“나 집에 가기 싫어.”송지아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응석을 부렸다.결국 허경빈은 송씨 집안에 전화를 걸어 송지아가 오늘 이곳에서 머물겠다고 알렸다. 가족들도 별다른 말 없이 그러라고 했다.나란히 침대에 누운 송지아는 덥다며 계속 몸을 뒤척였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꼼지락거리자 허경빈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한 번만 더 움직여 봐.”그의 눈매가 짙게 휘었다.“그럼 오늘 밤은 안 재울 거야. 둘이서 인체 구조나 제대로 연구해 보자고.”“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물리 교과서에서 남녀의 신체 구조를 배웠던 거 기억나? 그림까지 있었잖아. 그 나이에는 수업 시간에 그런 걸 배우는 것만으로도 괜히 민망했는데.”송지아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그건 생물 교과서거든? 물리가 아
허경빈은 송씨 집안 식구들과 한 사람씩 인사를 나누었다.“형.”그가 송윤재를 바라보았다. 송지아에게 일이 생긴 뒤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경성에서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한동안 송윤재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한참이나 못 본 것 같은데요.”송윤재가 고개를 끄덕였다.“경성을 떠나서 처리할 일이 좀 있었어. 오늘 저녁에 한잔할래?”“저 내일 볼일이 있어서 출국해야 해요. 그래서 많이는 못 마셔요.”“괜찮아. 조금만 마시자.”“경빈 삼촌…”송민정이 품에 안아 달라며 달려왔다.아이는 허경빈을 무척 좋아했다. 그의 품에 매달려 함께 소꿉놀이를 하자고 졸랐다.송지아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식사 전, 송지아는 손을 씻으러 갔다.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허리를 감싸는 힘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익숙한 품과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자 긴장해 있던 온몸이 저절로 느슨해졌다.“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송지아는 웃으며 허리에 감긴 그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보면 좀 어때. 우리 연인 사이잖아.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너 정말…”원래도 가느다란 허리가 요즘 들어 더욱 야위어 있었다.허경빈은 고개를 숙여 송지아의 어깨에 턱을 기댄 뒤, 목덜미를 살며시 문질렀다. 코끝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송지아는 간지러운 듯 목을 움츠렸다.이윽고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 위로 내려앉았다.민감한 곳을 건드리는 감촉에 온몸이 저릿해지며 힘이 풀렸다. 송지아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허경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그만 장난쳐.”송지아는 눈을 흘기며 타박했지만, 목소리에는 조금도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너 오늘은 좀 다르다?”송지아는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어, 눈동자에 스쳐 간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흐트러진 호흡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뭐가 다른데?”“예뻐.”허경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원래도
바로 그 순간, 온유란은 끝내 참아 왔던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갑자기 연우진을 품에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연우진은 깜짝 놀라 군밤 봉지를 손에 꼭 쥔 채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워낙 일찍 철이 든 아이라 조그만 손을 뻗어 온유란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리며 달래 주었다.하이석은 옆에 서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뒤따라 들어온 연위성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눌 뿐이었다.온유란은 어린아이 앞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그때 연우진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유란 이모, 저 방금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어요…”“무슨 사실?”“예쁜 사람은 울 때도 예쁘네요. 이게 바로 전설로만 듣던 선녀의 눈물인가요?”하이석과 연위성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저 녀석은 대체 누구에게 저런 능글맞은 말을 배운 걸까.반면 온유란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선녀의 눈물은 무슨.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이제 울지 마세요. 제가 군밤 까 드릴게요.”연우진은 군밤 하나를 까서 온유란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손을 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종종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해 뛰어갔다.손을 씻고 돌아온 연우진이 배가 조금 고프다고 하자, 현정민도 아이에게 국 한 그릇을 떠 주었다. 연우진은 온유란의 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었다.“유란 이모, 심심하시면 제가 학교 끝나고 보러 올게요.”온유란은 고개를 끄덕였다.바라볼수록 의젓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식사를 마친 연우진은 온유란과 함께 산책까지 했다.연우진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동생이 태어난 뒤로는 제법 듬직한 형의 모습까지 갖추었다.하이석과 연위성은 마당을 거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연위성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설도윤과 그 어머니, 당신이 데리고 있죠?”“아니요.”“경찰이 그 두 사람을 찾느라 발칵 뒤집혔는데도 흔적조차 못 찾았어요. 경성 전체를 통틀어도 그런 일을 할
하이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하채린을 바라보았다.“지금 당장 떠나. 곧바로 출국해.”“오빠, 저 이제 막 돌아왔는데…”하채린은 더 말해 보려 했지만, 하이준의 얼음장 같은 눈빛에 눌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박윤희는 이제 막 돌아온 딸을 곧장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아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보낼 거라도 집에서 밥 한 끼는 먹게 해 주지 그랬니.”“집에 붙잡아 두라고요?”하이준이 차갑게 비웃었다.“그러다 밥도 못 먹고 죽을까 봐 그러죠.”*박윤희는 감히 아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직접 하채린을 배웅하러 나섰다.공항에서도 두 모녀는 애틋한 작별 인사를 나누며 진한 모녀애를 과시했다.하지만 하채린은 애초부터 경성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온유란이 가슴이 찢어지는 듯 괴로워하는 모습과 송지아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언제까지고 저들만 행복에 겨워 살게 둘 수는 없었다.공주님이라고?웃기고 있네.그나저나 송씨 집안과 허씨 집안의 능력은 대단했다. 그런 일을 이토록 철저하게 숨기다니.허경빈은 송지아에게 정말 한결같았다. 하채린은 당연히 그가 송지아를 버릴 줄 알았다.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허경빈이 그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송지아가 고통받을 때 그 역시 더욱 괴로울 테니까.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데 자신만 고통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하채린은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졌다.그들은 자신의 아이까지 없애 버렸다.“가서 몸조심하고, 네 몸 잘 챙겨.”박윤희는 거듭 딸에게 당부했다. 하채린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몸을 돌려 공항을 떠났다.*묘원 안.휴대전화가 진동하자 허경빈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지금 어디 있어?”“같은 비행기에 탔습니다. 곧 이륙할 예정입니다.”“계속 붙어 있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내고, 가능하면 평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요. 다만 외국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아서요.”“그럼 돌아오…”박윤희는 말을 잇다 말고 아들을 흘끗 바라보았다.하이준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자, 딸에게 귀국하라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삼켜졌다.“그럼 한국인 요리사를 한 명 고용해서 네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달라고 해.”하채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겁먹은 눈으로 오빠를 살폈다.“서재에서 기다릴게.”하이준은 그 말만 남기고 휠체어를 돌려 서재로 향했다.하채린은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네 오빠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 가서 말조심해.”박윤희가 딸에게 당부했다.두 모녀는 하이준 몰래 허경빈을 함정에 빠뜨린 이후로 줄곧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다.하채린은 하이준이 즐겨 마시는 차를 우려 서재로 가져갔다.“오빠…”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며 찻잔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그러나 하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채린이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서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끓는 물의 열기가 찻잔을 뚫고 전해져 손끝이 타들어 가듯 아팠지만, 하채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무릎 꿇어.”하이준은 무릎 위에 덮인 얇은 담요를 태연히 매만졌다.하채린은 순간 굳어 버렸다.“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음산하리만치 차가웠다.“네가 스스로 무릎 꿇기 싫다면, 사람을 시켜서라도…”결국 하채린은 찻잔을 든 채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비굴하게 허리를 숙인 모습이 꼭 천한 몸종 같았다.오빠라고?그의 앞에서 자신은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하채린은 때때로 의심했다. 저 남자의 몸에는 피가 아니라 얼음이 흐르는 게 아닐까 하고.그제야 하이준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는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천천히 불어 내며 물었다.“갑자기 왜 귀국했지?”“그, 그냥 오빠랑 엄마가 보고 싶어서…”하이준의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우리가 보고 싶었다고? 그
하채린이 허경빈에게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가족에게 강제로 끌려가 낙태한 뒤로 그녀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하채린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더없이 의기양양했다.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러 돌아온 듯했다.하채린은 곧장 온유란의 앞으로 걸어갔다.“형수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지금은 홀몸도 아니니 꼭 건강을 잘 챙기세요.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오실 수는 없잖아요.”온유란은 하채린이 나타난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하채린을 상대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일부러 장례를 훼방하러 온 것만 아니라면 그뿐이었다.하채린은 영정사진을 향해서도 허리를 숙여 절했다.온유란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쉽고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하지만 도정숙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채린도 알고 있었다.온유란에게 그 늙은 가사도우미는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온씨 집안의 협박에 굴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채린은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가사도우미는 어디까지나 가사도우미일 뿐, 아무리 정이 깊다 한들 천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좋은 집안에 태어나지 못한 자신들의 팔자를 탓해야지.그런데도 온유란은 도정숙의 장례를 친어머니와 같은 격식으로 치러 주었다.요즘 사교계 사람들은 온유란을 두고 기구한 삶을 살면서도 정이 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겪은 일까지 안타까워하며 온통 칭찬만 늘어놓았다.하채린은 속으로 비웃었다.가식적이고 위선적이기 짝이 없었다.그래도 온유란의 안색이 좋지 않은 모습을 직접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하채린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온유란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잠긴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그 옆에 선 송지아의 눈에서도 생기가 사라진 것을 보자 더욱 통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