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 뭐라고요?”허경빈은 두 사람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오면서 추궁을 당하거나 호되게 꾸지람을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그런데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지아가 누구에게나 깍듯하고 상냥해서 웬만한 일은 다 좋게 넘어갈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원칙이 아주 뚜렷한 애야. 한번 마음먹은 일은 쉽게 굽히지도 않고. 설도윤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잖아…”그 말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송지아가 허경빈의 집에 남아 하룻밤을 보낸 것은, 그녀 역시 마음속으로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송지아가 거듭 허경빈의 행동을 받아 주고 눈감아 준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송씨 부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토록 빠르게 진전됐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송지아가 허경빈에게 보이는 태도가 더욱 뜻밖이었다.허경빈도 바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뜻을 알아차리자 얼른 다짐하듯 말했다.“삼촌,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아는 제가 반드시 책임질게요. 평생 아끼고 잘해 줄 겁니다. 정말 맹세해요!”그는 기다렸다는 듯 충성 맹세를 늘어놓았다.송씨 부자도 오늘 밤 허경빈이 보여 준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그가 송지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보호하려 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그토록 오랫동안 애지중지 키운 꽃을 웬 돼지 한 마리가 홀랑 채 가 버렸으니 말이다.세 사람이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내내 마음을 졸이던 허씨 부부와 송지아도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민정이는?”송윤재는 딸이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아내가 대답했다.“민찬이가 데리고 갔어. 또 어디서 둘이 놀고 있겠지.”“쟤는 왜 그렇게 민찬이랑 노는 걸 좋아해?”송윤재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민정이는 원래 또래 친구가 별로 없잖아. 게다가 민찬이는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재미있는 장난감도 선물해 주니까, 우리 딸
강정한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꾹 눌렀다. 다행히 모두의 관심이 허경빈에게 쏠려 있어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이윽고 생일 연회가 시작되자 장내에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설도윤의 어머니가 일으킨 소동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하지만 허경빈과 송지아가 교제한다는 소식은 사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양쪽 집안의 배경도 걸맞고, 두 사람 모두 빠지는 데 없는 최고의 결합이라고.한편으로는 허경빈이 송지아 덕을 보게 생겼다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설씨 집안을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심지어 설씨 집안과 사업적으로 얽혀 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불똥이 튈까 두려워 밤새 서둘러 관계를 끊었다.설도윤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따지려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에는 뜻밖에도 남편이 와 있었다.“당, 당신이 병원엔 어떻게…….”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병상에 앉아 있던 설도윤 역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감히 입도 열지 못했다.“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설조경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오늘 아주 대단한 일을 벌였더군. 육씨 집안의 생일 연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다니, 당신 제정신이야?”그는 성큼 다가가 아내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거센 손찌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이미 송씨 집안의 원한을 산 것도 모자라 육씨 집안과 허씨 집안까지 건드렸어. 이제 우리 집안은 끝이야. 완전히 망했다고!”설조경의 이마에서는 굵은 핏줄이 불거졌고, 얼굴은 분노로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그걸 어떻게 나만 탓해요? 그 계집애가 허경빈과 그런 사이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나는…”“입 닥쳐!”설조경은 머리가 터질 듯 화가 치밀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병상에 누운 아들을 노려보았다.“넌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어?”설도윤은 아버지의 호통에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설조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아들이 왜
강지택은 육수린을 품에 꼭 안은 채 좀처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서은주는 웃으며 외숙모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야 낯선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외할아버지가 새로 들였다는 제자가 여자였어?강지택은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장인이었다. 요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보석이 점점 귀해지고 있었다. 그런 기술을 제대로 익히려면 고생도 적잖이 감수해야 했다.서은주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손에 굳은살이 가득 박혀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말수는 적었고, 맑고 서늘한 목소리에서는 쉽게 다가가기 힘든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와 대조적으로 얼굴은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차갑고도 화려한 미인이었다.수다스럽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방주헌은 장차 장인이 될 강지택을 보자마자 얼른 곁에 달라붙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경빈을 두고 아첨꾼이라며 놀려 대더니, 정작 자신도 이제는 차를 따르고 물을 챙기며 시중을 들기에 바빴다.강지택은 박명숙이 앉은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자리를 옮기기 전, 그는 강정한에게 단단히 당부했다.“내 제자 잘 챙겨라.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했다가는 네가 책임져야 할 게야!”강정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옆에 앉은 여자를 힐끗 바라보며 남몰래 골머리를 앓았다.그도 성격이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편인데, 이 여자는 자신보다도 말이 없어 보였다.강정한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골동품 시장에서 만났어요.”강정한은 작게 웃었다. 집안 어르신이 골동품 시장을 돌아다니며 진귀한 물건을 찾아다니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어쩌다 제자가 되신 겁니까?”“어르신께서 기어이 저를 제자로 삼겠다며 따라다니셨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무덤덤하게 덧붙였다.“경찰에 신고하고 나서야 사기꾼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요.”강정한은 하마터면 마시던 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그래서 제자가 되신 겁
생일을 축하하러 온 손님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박명숙의 주변은 인사를 건네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하지만 허씨 집안과 송씨 집안이 함께 앉은 테이블만큼은 예외였다. 그곳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은 연회장의 경사스러운 분위기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그야말로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어, 누구도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허경빈은 평소 사교계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멋대로 활보하는 인물이었다. 조금 전 설도윤의 어머니를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거침없는 기세로 연회장을 휘어잡지 않았던가.그런데 막상 송씨 집안 사람들과 마주 앉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극명하게 달라진 모습에 주변에서는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중에서도 가장 기가 막힌 사람은 허진강이었다.허경빈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송씨 집안 딸을 괴롭혀 울린 적이 있었다. 당시 허진강은 송씨 부부를 찾아가 낯간지러운 웃음을 지으며 연신 사과해야 했다.그랬던 아들이 이제는 남의 딸이 사는 집에 들어가 함께 밤까지 보냈다.심지어 설씨 집안의 소동 탓에 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결국 허진강은 또다시 체면을 내려놓고 송씨 부부 앞에서 웃어 보여야 했다.그는 송지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제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함께 밤을 보낸 일도 분명 아들 녀석이 먼저 저질렀을 터였다.허진강은 문득 생각했다.이 아들을 낳은 뒤로 자신의 체면은 진작 헐값이 되어 버렸다고.“오늘 육씨 집안에서 준비한 차가 꽤 괜찮네요. 두 분도 한번 드셔 보십시오.”허진강은 송씨 부부를 향해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목을 축이는 척 차를 한 모금 마셨다.“차에도 조예가 있으십니까?”송현근이 물었다.“조예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두 분만큼 전문적이지도 않고요. 그저 겉핥기식으로 조금 아는 정도죠.”허진강은 애써 화제를 이어 갔다.“경성에 괜찮은 찻집이 몇 군데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내 아들이 나를 속일 리 없다고요!”설도윤의 어머니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거짓말하는 거죠? 전부 가짜잖아요! 당신이 어떻게 저 여자와 사귈 수 있어요…”그녀는 무너져 내리는 이성을 붙잡으려는 듯 같은 말만 쉴 새 없이 되풀이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앞의 현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아, 그러고 보니 하나 더 알려 드릴 게 있네요.”허경빈이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그는 설도윤의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느긋하게 휘어진 입매에는 어딘가 서늘하고 불온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설씨 집안을 건드린 건 송씨 집안이 아닙니다.”잠시 말을 끊은 허경빈이 또렷이 덧붙였다.“바로 나예요.”연회장 안에 다시 한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내 여자 친구를 괴롭혔잖아요. 삼촌과 이모는 너그러우셔서 참고 넘어가셨지만, 난 그렇게 착하고 관대한 사람이 아닙니다.”허경빈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그런 일이 벌어진 뒤에도 설씨 집안에서는 사과하러 찾아오기는커녕 설도윤을 용서해 달라고 했죠? 낯짝이 두꺼워도 정도가 있지,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군요. 송씨 집안에서는 설씨 집안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꼴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었어요.”그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처럼 서늘하게 연회장을 가로질렀다.“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죠. 앞으로 누가 내 여자 친구나 그 가족을 건드린다면, 송씨 집안은 마음이 너그러워서 넘어갈지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허경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나는 이기적이고 속도 좁은 사람이거든요. 그자를 무너뜨릴 방법쯤은 수백, 수천 가지도 더 찾아낼 수 있습니다.”평소의 허경빈은 늘 웃음을 달고 다녔다. 능청스럽고 붙임성이 좋아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아무리 가볍게 행동해도, 그에게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원칙과 선이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모든 사람에게 선포
송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송지아를 바라보았다.가족들조차 저토록 놀랐으니, 다른 이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새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송지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평범한 누군가가 남자를 집에 들여놓고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했다면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상대는 송지아였다.이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귀한 공주님.우아하고, 지적이며, 영리한 여자.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를 늘어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그런 송지아가 젊은 남자를 집에 들여놓고 뒷바라지한다니.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다들 믿지 못하시겠죠? 하지만 내게는 증거가 있어요!”설도윤의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냈다. 마침 허경빈이 가장 가까이에 서 있었기에, 그녀는 사진을 그의 손에 건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세요.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사람들은 사진에 대체 무엇이 찍혀 있는지 궁금해하며 허경빈의 반응을 기다렸다. 숨죽인 시선들이 그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허경빈은 서두르지 않고 사진을 한 장씩 천천히 넘겨 보았다.대부분은 송지아가 라비엘 레지던스를 드나드는 모습이었다. 그와 송지아가 함께 찍힌 사진도 몇 장 섞여 있었다.문제는 그의 모습이었다.대체 어떻게 찍었는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뿌옇게 찍혀 있었다.사진을 모두 살펴본 허경빈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설 사모님, 사람을 시켜 송지아를 미행한 겁니까?”설도윤의 어머니는 작게 헛기침했다.남을 몰래 미행하는 행위가 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흐려졌다.“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저 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집에 들여놓고 뒷바라지한 게 맞는지만 말씀해 주세요.”“아니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허경빈은 사진을 가볍게 흔들었다.“이 사진은 누가 찍었습니까?”“사설 탐정을 고용했어요.”“돈깨나 쓰셨겠네요.”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