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 정도야?”허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못 믿겠으면 직접 알아보세요. 지금 빈방 있는 호텔이 어디 있나. 길가에 있는 작은 여관까지 방이 다 찼어요.”어찌 됐든 오늘 밤 두 사람이 한 방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피할 수 없게 됐다.이미 한 침대에서 함께 잠든 적도 있었으니 송지아도 괜히 내숭을 떨 생각은 없었다.무엇보다 몸이 너무 피곤했다. 뻐근한 어깨와 목덜미를 주무르던 송지아는 경성보다 훨씬 높은 기온 탓에 몸에 땀이 밴 것을 느끼고 캐리어를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나 먼저 씻을게.”허경빈은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문 너머로 쏴아 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무심코 그쪽을 바라본 허경빈은 뒤늦게 황당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이 호텔은 욕실과 침실 사이의 벽이 하필 반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유리 너머로 송지아의 흐릿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선명하게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에 허경빈은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듯했다.그는 황급히 호텔에서 제공한 생수를 따서 들이켰다.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달아오른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나 다 씻었어. 너도 가서 씻어.”욕실에서 나온 송지아는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열린 창문 사이로 밤바람이 불어들자 부드러운 천이 몸에 살짝 달라붙으며 가느다란 실루엣을 드러냈다.허경빈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도 모자라 눈길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한참 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허경빈은 송지아가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행까지 와서도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너 진짜 일 중독이다.”허경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급한 일 들어온 거 있나 확인만 하려고.”송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계속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이렇게 한가해지니까 오히려 적응이 안 되네.”“어깨 뻐근해?”허경빈은 그녀의 뒤로 다가가 양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송윤재 가족이 떠나고 나자, 허경빈과 송지아의 여행도 본격적으로 일정에 올랐다.목적은 벚꽃 구경. 일정은 3박 4일이었다.두 사람은 고속열차를 타고 경성을 떠났는데, 가는 길에 뜻밖의 충격적인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다.설도윤의 부모가 이혼했다는 것이었다.허경빈에게 이야기를 들은 송지아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예상했던 일이네.”“근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어. 설조경이 밖에서 여자를 하나 두고 있었대. 듣기로는 대학생이라는데, 임신한 지도 한 달이 넘었고.”송지아의 눈이 커졌다.“그럼 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거잖아?”“그전까진 그냥 바람만 피운 거겠지. 별생각 없이 만났을 수도 있고.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이 저 지경이 됐으니 그 여자한테도 기회가 생긴 거야. 뱃속 아이가 아들이면 설조경은 분명 그 여자랑 결혼할걸.”허경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설도윤 어머니가 친정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그 여자를 두들겨 팼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는 안 떨어졌는데, 설도윤 어머니는 경찰에 잡혀갔어. 상대가 절대 합의해 줄 생각이 없다니까 며칠은 안에서 지내야 할 것 같더라.”송지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뭐라고 평해야 할지조차 난감한 일이었다.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마침 현지에서 지내는 허경빈의 친구가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었다.“경빈이 형!”남자는 멀리서부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송지아를 보자마자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형수님, 안녕하세요!”송지아는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형수님’이라는 호칭을 들었다.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귓불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친구는 직접 운전해 두 사람의 짐부터 호텔에 가져다 놓은 뒤,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제가 여기서 일한 지도 몇 년 됐거든요. 어디가 재밌고 어디가 좋은지는 빠삭해요. 제가 가이드까지 해 드릴 테니까 두 분은 그냥 마음 편하게 즐기시면 돼요.”그는 신이 나서 말을 이어 갔다.“그
그리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게 아직도 공주님 소리를 듣다니.듣기만 해도 역겨웠다!그래도 요즘 들어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있었다. 경찰이 드디어 오빠 하이준에 대한 감시를 풀었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자신도 머지않아 경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온유란이든 송지아든 두고 보라지.자신이 돌아가는 순간, 둘 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한편 허경빈은 요즘 출근할 때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색도 유난히 좋아 보여 누가 봐도 좋은 일이 있는 사람 같았다.하지만 그의 실상을 아는 사람은 장 비서뿐이었다.대표님은 요즘 출근만 하면 몰래 딴짓을 하고 있었다.그것도 여행 계획을 짜느라!솔직히 장 비서는 허경빈이 무언가에 이토록 진지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심지어 허진강마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네가 학창 시절에 이것만큼만 열심히 했어도 명문대는 갔겠다.”“아빠, 제가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명문대는 못 갔어요.”“왜?”“머리가 안 좋잖아요. 전 원래부터 공부할 머리는 아니에요. 장사는 그럭저럭 잘하는데, 책만 펴면 졸려서요.”허진강은 말문이 턱 막혔다.대체 어떻게 저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저토록 태연하게 할 수 있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허경빈과 송지아가 여행을 떠나기 전, 마침 송윤재 가족도 세 식구가 경성을 떠날 예정이었다.출발을 하루 앞둔 저녁, 허경빈은 송씨 집안의 초대를 받아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도착했을 때, 송민정은 빌라 단지를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허경빈을 발견한 아이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다시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는 데 열중했다.허경빈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잔뜩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송윤재의 얼굴이었다.송지아가 남몰래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그제야 허경빈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송윤재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육강민네 네 식구와 함께 봄나들이를 다녀왔다고 했다. 일정은 무려 2박 3일이었다.원
생일 연회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온 송지아는 부모님과 오빠 부부에게 둘러싸여 한바탕 취조 아닌 취조를 받아야 했다.다들 사고가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야 오늘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내일 당장 혼인 신고를 하는 커플도 있는 법이었다.다만 아무리 그래도 귀한 딸이 혹여 상처라도 입을까 걱정되는 부모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런저런 당부가 한참이나 이어졌다.아버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딸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어느새 이렇게 다 커서는 내 눈앞에서 허페파랑 몰래 정분까지 나고.”라비엘 레지던스는 송씨 가족이 사는 빌라 단지와 그리 멀지 않았다.“아빠…”송지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경빈이한테 자꾸 페파라고 하지 마세요.”“그럼 저팔계라고 부를까?”저팔계?그럴 바엔 차라리 페파가 나았다.송지아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저 며칠 뒤에 휴가 좀 내려고요.”“연휴 끝나고 계속 바빴잖니. 며칠 쉬는 것도 좋지.”어머니는 쉴 새 없이 일만 해 온 딸이 안쓰러운 모양이었다.“경빈이가 같이 여행 가자고 했어요.”그 말을 듣자 송윤재가 곧장 끼어들었다.“그 자식, 분명 흑심이 있어.”“오빠, 경빈이를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 마.”“나도 남자야. 남자 속은 남자가 안다고.”송윤재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곁에 있던 아내가 태연하게 한마디 던졌다.“그래서 대학 다닐 때 그렇게 나랑 여행 가려고 했구나?”졸지에 과거가 탈탈 털린 송윤재는 할 말을 잃었다.아니, 나도 체면이란 게 있는데!송지아는 슬쩍 형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은근한 눈빛이 오갔다.처음부터 끝까지 형수는 한결같이 송지아의 편이었다.송윤재는 그런 아내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아주 오냐오냐 끼고 살아라.방으로 돌아온 송지아는 휴대폰부터 확인했다.허경빈은 벌써 여행지 몇 곳을 추려 관련 정보를 잔뜩 보내 놓고는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보라고 했
“뭐, 뭐라고요?”허경빈은 두 사람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오면서 추궁을 당하거나 호되게 꾸지람을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그런데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지아가 누구에게나 깍듯하고 상냥해서 웬만한 일은 다 좋게 넘어갈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원칙이 아주 뚜렷한 애야. 한번 마음먹은 일은 쉽게 굽히지도 않고. 설도윤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잖아…”그 말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송지아가 허경빈의 집에 남아 하룻밤을 보낸 것은, 그녀 역시 마음속으로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송지아가 거듭 허경빈의 행동을 받아 주고 눈감아 준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송씨 부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토록 빠르게 진전됐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송지아가 허경빈에게 보이는 태도가 더욱 뜻밖이었다.허경빈도 바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뜻을 알아차리자 얼른 다짐하듯 말했다.“삼촌,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아는 제가 반드시 책임질게요. 평생 아끼고 잘해 줄 겁니다. 정말 맹세해요!”그는 기다렸다는 듯 충성 맹세를 늘어놓았다.송씨 부자도 오늘 밤 허경빈이 보여 준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그가 송지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보호하려 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그토록 오랫동안 애지중지 키운 꽃을 웬 돼지 한 마리가 홀랑 채 가 버렸으니 말이다.세 사람이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내내 마음을 졸이던 허씨 부부와 송지아도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민정이는?”송윤재는 딸이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아내가 대답했다.“민찬이가 데리고 갔어. 또 어디서 둘이 놀고 있겠지.”“쟤는 왜 그렇게 민찬이랑 노는 걸 좋아해?”송윤재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민정이는 원래 또래 친구가 별로 없잖아. 게다가 민찬이는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재미있는 장난감도 선물해 주니까, 우리 딸
강정한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꾹 눌렀다. 다행히 모두의 관심이 허경빈에게 쏠려 있어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이윽고 생일 연회가 시작되자 장내에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설도윤의 어머니가 일으킨 소동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하지만 허경빈과 송지아가 교제한다는 소식은 사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양쪽 집안의 배경도 걸맞고, 두 사람 모두 빠지는 데 없는 최고의 결합이라고.한편으로는 허경빈이 송지아 덕을 보게 생겼다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설씨 집안을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심지어 설씨 집안과 사업적으로 얽혀 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불똥이 튈까 두려워 밤새 서둘러 관계를 끊었다.설도윤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따지려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에는 뜻밖에도 남편이 와 있었다.“당, 당신이 병원엔 어떻게…….”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병상에 앉아 있던 설도윤 역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감히 입도 열지 못했다.“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설조경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오늘 아주 대단한 일을 벌였더군. 육씨 집안의 생일 연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다니, 당신 제정신이야?”그는 성큼 다가가 아내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거센 손찌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이미 송씨 집안의 원한을 산 것도 모자라 육씨 집안과 허씨 집안까지 건드렸어. 이제 우리 집안은 끝이야. 완전히 망했다고!”설조경의 이마에서는 굵은 핏줄이 불거졌고, 얼굴은 분노로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그걸 어떻게 나만 탓해요? 그 계집애가 허경빈과 그런 사이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나는…”“입 닥쳐!”설조경은 머리가 터질 듯 화가 치밀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병상에 누운 아들을 노려보았다.“넌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어?”설도윤은 아버지의 호통에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설조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아들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