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이 첩자의 시신을 살펴보니, 그의 팔 안쪽에 작은 문신 하나가 있었다. 언뜻 보면 태반처럼 보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문신이었다. 봉구안은 그 문양을 종이에 옮겨 그려보았다. 마치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한 마리 뱀처럼 생긴 그림. 그 문양,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듯하였으나,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 후 각 방면으로 탐문하여 알아본 끝에, 이 문양이 조 나라의 초기 토템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조 나라는 남제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로, 수십 대에 걸쳐 토템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이 원시 토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조 나라의 정왕뿐이었다. “부맹주, 이로 보아 첩자는 틀림없이 조 나라 사람이옵니다!” 평안 전당포의 주인이 마침내 실마리를 잡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맹주께서 눈썰미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늙은 소인이야 어찌 이 조그마한 것을 알아보았겠사옵니까.” 방향을 잡았으니 이제 일이 풀릴 조짐이 보였다. 봉구안은 곧장 말을 몰아 동쪽으로 떠났다. ……이틀 후. 황성 교외의 한 객잔. 진한길이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황제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폐하, 평안 전당포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사옵니다.” 소욱은 창가에 서서 손을 뒤로 하고 멀리 산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엄숙하였고, 분위기는 한겨울보다도 더 서늘하였다. “기다려라.” 진한길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소환조차 찾지 못할까 우려되옵니다.” “우리 쪽 사람들은 어찌 되었느냐?” 소욱은 여전히 창밖을 응시한 채 물었다. 진한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사옵니다.” 사방으로 그물을 넓게 쳐 놓았으나, 확실한 정보를 얻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소욱은 한동안 침묵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옆머리카락이 헝클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명령을 내렸다. “서왕과 이 장군을 부르거
진길은 중상을 입은 소환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다가 황제의 시위인 자신의 신분을 기억해내고 황제의 안위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제 자리로 돌아갔다.“소 공자, 의원을 불러올까요?”소욱 신변의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진길도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사람이 다쳤는데 의원을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덤덤한 얼굴로 의중을 묻다니.봉구안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께 전해주십시오. 폐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였다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죽첩으로 된 서신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진길은 곧장 그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아뢰었다.“폐하, 소 공자가 돌아왔습니다.”곧이어 문이 열렸다.소욱은 그가 오기 전까지 한창 서왕, 이 노장군과 함께 새로운 방어진을 상의하고 있었다.그는 소환의 복귀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지만 소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진길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등을 돌린 사이에 사라지다니!그는 더 생각할 여유 없이 소환이 건넨 죽첩을 황제에게 건넸다.죽첩을 펼친 소욱은 바로 그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잃어버린 방어도였다.남제 변경의 방어도가 완전하게 그 안에 들어 있었다.소환이 그것들을 모두 되찾아온 것이다.서왕과 이 노장군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폐하, 잃어버린 방어도를 찾아온 사람이 누굽니까?”아무런 단서도 없는 정황에서 단 5일만에 방어도를 되찾아왔다는 건 일반인은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그들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남제까지 살린 영웅이었다.소욱은 신속히 방어도를 보관한 후에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문밖에 나가도 소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단지 복도에 흘린 피만 있을 뿐이었다.소욱은 텅 빈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길에게 물었다.“중상을 입었더냐?”진길이 답했다.“그런 것 같습니다.”소욱의 눈빛이 착잡하게 변했다.정의로운 사람에게 면죄부 금패 정도 내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 시각, 객장 밖.봉구안은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그녀의 심복
서재.화려한 차림의 장공주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냉철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건조한 대하 지역에서 생활하다 보니 부드럽던 피부는 건조하고 누렇게 변했고 인상도 초췌하고 각박하게 보였다.“폐하, 과거 저를 화친을 보내면서 나중에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약조하셨지요. 그 동안 전 대하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소원을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그런 제가 지금 간청드리건대, 맹 소장군을 풀어주시지요.”소욱은 담담한 눈빛으로 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님은 그 여인과 아는 사이였습니까?”그게 아니라면 돌아오자마자 맹교먹 얘기부터 꺼냈을 리 없었다.장공주는 지나간 기억을 되돌리며 애틋한 표정으로 말했다.“한때 저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대하에서 도망쳐 남제의 북부로 간 적이 있습니다. 가는 내내 암살자들의 추격을 받았지요. 그런 저를 구해주신 사람이 맹 소장군이었습니다.”“이 은혜는 꼭 갚고 싶습니다. 하물며, 맹 소장군은 남제의 공신 아닙니까. 어찌 공신에게 이리 대하실 수 있나요? 변방을 지키는 장령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황후가 도착했다.장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봉구안을 바라봤다.완벽한 미모를 자랑하는 황후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이런 미인이니 폐하께 베개머리 송사를 했겠지!’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이긴 하지만 품계를 따지면 일국의 황후가 장공주에게 예를 올릴 이유는 없었다.법도를 따지면 장공주가 황후에게 예를 행해야 맞았다.하지만 장공주는 황후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못했다.알아본데 의하면 맹 소장군이 옥에 갇힌 이유도 황후 때문이라고 했다.사람들은 황후의 말을 믿었지만 장공주는 맹 소장군처럼 정의롭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황후를 습격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오히려 후궁에 사는 황후라면 온갖 속셈을 가지고 황제의 총애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장공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맹 소장군이
봉구안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맹교먹을 석방한 일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장공주가 나간 후,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에 다가가서 섰다. 그리고 제왕의 위엄을 내려놓고 평온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과거 짐이 즉위했을 때, 조정도 조용할 날이 없는데다가 외적들도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님이 자신을 희생해서 대하로 화친을 간 거야.”“짐은 누님께 많은 빚을 졌다.”“알고 있습니다.”봉구안은 땅바닥을 내려보며 덤덤히 답했다.너무도 평온한 그녀의 태도에 소욱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또 말했다.“짐이 약속을 어겼다고 치자꾸나. 사실 짐도 맹교먹을 그동안 가둬둔 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이 나라의 황후이니 아량을 베풀어야 마땅하지.”“맹교먹이 너의 행적을 발설한 건 약속을 어긴 행위이지만 이 나라의 대신으로서 황후의 행방을 짐에게 전한 것이니 충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너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짐은 그녀를 북부에서 황성으로 불러들이고 감옥에 가두었으니…”결국엔 여기서 이 일을 마무리짓자는 얘기였다.하지만 봉구안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소욱을 응시하며 정색해서 말했다.“신첩을 위한 일이 아니지요.”“맹교먹을 황성으로 부른 건 폐하께서도 그녀가 북부에서 패왕 행세를 하길 바라지 않고 북대영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그녀를 옥에 가둔 것은 북대영 쪽의 반응을 시험하고 결과에 따라 그녀를 중용할지 결정하기 위해서고요.”그녀는 쉽게 속아줄 마음이 없었다.일반 남자도 여인을 위해 이익을 양보하지 않는데 하물며 일국의 황제라면 여부가 있을까!소욱의 행보 모든 것은 결국엔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만약 맹교먹을 처벌하는 것이 그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이리도 쉽게 너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결국엔 서로 원하는 바가 같아서 행한 일을 마
자녕궁.태후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안고 눈물을 글썽였다.“내 아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 어미가 얼마나 그리워했다고… 드디어 하늘이 도우셔서 널 내 옆으로 보내준 거야…”녕비도 옆에서 반가움의 눈물을 훔쳤다.“언니, 고모께서 안 그래도 최근에 언니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날짜를 헤아려보니 돌아올 때도 되었는데 안 돌아온다고… 밤새 잠도 못 주무시고 기다렸답니다. 저도 너무 걱정했어요. 대하 쪽에서 갑자기 약속을 번복할까 봐…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장공주도 눈시울을 붉혔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대하에 있는 동안에 이미 눈물샘이 말라버린 그녀였다.“어마마마, 대하의 늙은 황제가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한 뒤로 저는 태비가 되었지요. 그런데 그 짐승 같은 놈이… 저를 능욕하려 했어요!”태후는 그 말을 듣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뭐라? 한 나라의 황제가 돼서 어찌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그래서 너는...”장공주는 고개를 젓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놈의 뜻대로 해주진 않았지요. 이번에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맹 소장군 덕분이에요.”“그녀가 용맹히 적을 무찌르고 양나라를 수복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압박을 주지 않았다면 대하에서도 쉽게 저를 보내줬을 리 없어요.”태후는 딸의 손을 잡고 감개무량해서 말했다.“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그 아이가 승전보를 울리면서 간접적으로 너를 구했구나. 제대로 된 포상을 내려야겠어!”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실 2년 전에 전 맹 소장군과 만난 적이 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죠.”녕비가 웃으며 말했다.“언니와 맹 소장군이 인연이 있었다니, 놀랍네요!”사정을 모르는 녕비와는 다르게 2년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아는 태후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그녀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장공주의 손을 다독이며 감격해서 말했다.“그 사람이었구나. 그럼 더욱 더 포상을 내려야겠네!”그러던 태후가 뭔가 떠오른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맹교먹이라… 내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와중에 장공주는 가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다.딱 봐도 후궁 여인은 같지 않았다.물론 장공주는 급하게 서재로 가느라 주변을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그런데 그 여인이 갑자기 다가와서 그녀에게 예를 행했다.“소신 맹교먹,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장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순간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처음 대하에 도착했을 때, 늙은 황제는 그녀를 꽤 총애하는 편이었다.하지만 두 달도 안 돼 황제는 또 새로운 여인을 후궁으로 들였다.후궁에서 황제의 총애도 없고 사람들과 어울릴 줄도 모르는 여인의 처지는 어떨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 몇 년 동안 장공주는 온갖 수모를 겪었다.나중에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그녀는 늙은 황제의 총비를 죽이고 심복의 보호를 받으며 대하를 탈출했다.그녀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그릇된 일을 저질렀고 자신의 행동이 남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오로지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으며 북부로 도망쳤지만 결국 늙은 황제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그녀를 추격한 자들이 받은 지시는 발견 즉시 비밀 리에 사살하라는 것이었다.이대로 죽는가 싶던 순간에 맹성주가 나타났다.그는 그녀를 구했고 앞장서서 대하와 담판을 짓고 친히 그녀를 대하의 변방까지 호송했다.참으로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함께한 시간은 고작 반 달이지만 장공주는 그의 자상함에 푹 매료되었다.작별할 때가 돌아오자 그가 말했다.“장공주께서는 남제의 공신이십니다. 장공주의 희생으로 남제는 2년 동안 숨을 고를 시간을 벌었지요. 언젠가는 남제가 강대국이 되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그가 약속했던 강성한 남제를 그녀는 지금 보았다.그런데 자신이 기억하던 용맹하고 준수하던 소장군이 여인일 줄이야.매일 밤 그의 용모를 상상했었지만 이런 결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소욱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장공주가 한 말은 아예 못들은 척할 생각이었다.소욱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황후가 나간 후, 장공주는 정색해서 황제에게 말했다.“폐하,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내 필히 황후가 맹 소장군을 모함한 죄증을 밝혀내겠습니다!”나쁜 일을 행하였다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장공주는 황후가 절대 결백한 사람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그녀는 황후가 다시 맹 소장군을 건들지 못하게 어떻게든 황제의 앞에서 황후의 가면을 벗기겠다고 다짐했다.감찰부.교먹은 몰래 정보를 수집하여 끝내 과거의 일에 대해 알아냈다.“또 구명의 은혜야?”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쳤다.‘언닌 참 사람을 구해주기 좋아한다니까.’하지만 그렇다 한들 봉구안도 장공주에게 감히 진실을 알리진 못할 것이다.장공주라는 장기말은 이용할 가치가 커 보였다.촛불 아래, 맹교먹의 미소가 음산하게 빛났다.영화궁.하루동안 잠만 자고 일어나니 봉구안의 피로도 어느정도 가셨다.다음 날, 그녀는 오백을 통해 면죄부 금패를 이미 확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소욱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이제 교먹의 죄증을 정리한 후에 연상과 아랫사람들의 갈 곳을 정해준 뒤에 교먹의 진짜 얼굴을 까발릴 일만 남았다.봉구안은 연상을 따로 불러서 물었다.“너는 집이 어디지? 아직 살아 계신 가족이 있느냐?”연상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소인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뭔가 이상함을 느낀 연상이 다급히 물었다.“마마, 소인을 버리시려는 겁니까?”봉구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살고 싶으면 내 지시에 따르거라.”이런 상황에서 정에 휘둘려 우물쭈물 시간을 지체하는 건 독이라 할 수 있었다.연상과 일년 같이 보내며 정이 든 것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연상은 황후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장공주의 끈질긴 추궁 끝에 교먹은 못이기는 척, 과거 황후가 도주를 시도한 적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자초지종을 들은 장공주는 큰 충격에 빠졌다.“그런 일이 있었다고?”‘정말 황당무계하군!’교먹은 짐짓 착한 척, 황후를 위해 변명했다.“황후께서도 일시적인 충동이었을 겁니다. 아마 폐하께서 돌아가신 영비마마를 그리워하고 있는 걸 보고 화를 참지 못했나 봅니다. 황후도 여인이니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요.”장공주는 화가 나서 헛웃음을 지었다.“이렇게 오만방자할 수가! 대체 폐하를 뭐로 생각하고 황후의 자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황후가 되어서 첩실이나 할 천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수치스럽구나!”교먹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장공주님,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절대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리셨거든요. 소신이…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장공주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너의 충심은 내 잘 알고 있다. 황후도 아마 여인인 네가 폐하의 중용을 받으니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일 게야. 너무 걱정 말거라. 내가 있는 한, 절대 황후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을 터이니!”교먹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하지만 곧이어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 될 일입니다. 장공주, 소신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는 마십시오.”“상대는 폐하의 총해를 받는 일국의 황후 아닙니까. 소신이 더 조심하면 됩니다. 아쉬운 건 전장을 누비던 제가 지금은 높은 담장 안에 갇히게 되었으니…”교먹의 의도는 장공주를 이용해서 북대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의 포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내가 아니라서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폐하께 간언을 올렸을 터인데.”교먹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날 믿지 못하는 건가?’그녀가 알아본 바로 장공주가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지만 대신들 중에 그녀를 옹호하는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