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는 아직도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아무도 내려가서 구해주지 않았다.장공주는 봉구안의 팔목을 잡고 강압적으로 말했다.“빠뜨린 사람이 구하러 가셔야지요!”이곳은 자녕궁이고 주변 시위, 궁녀들 모두 장공주의 사람들이었다.말을 마친 장공주가 봉구안을 밀치려 손을 뻗었다.아직 눈도 채 녹지 않은 3월이라 호숫물은 차디찼다.봉구안은 몸을 비틀어 장공주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장공주가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황후! 어찌…”이때, 봉구안은 고개를 돌리고 물에 뛰어들었다.장공주는 순간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사… 살려주세요…”헤엄칠 줄 모르는 정비는 옷이 물에 젖어 점점 물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죽음이 앞으로 다가오자 더 이상은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살려주세요!”절망의 순간에 누군가의 손길이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 순간은 마치 따뜻한 햇살이 싸늘한 호수를 비추는 기분이었다.정비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고개를 수면 위로 내민 그녀는 뒤늦게 황후를 알아보았다.황후가 그녀를 구한 것이다!장공주는 싸늘하게 식은 눈을 하고 수면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다가가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현장에 있던 녕비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권유했다.“언니, 적당히 하고 끝내는 게 좋겠어요.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나요…”그녀는 장공주가 자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상, 장공주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알아본 바에 의하면 귀족가에서 곱게 자란 봉장미는 헤엄칠 줄 모른다고 했다.하지만 눈앞의 황후는 능숙하게 헤엄을 치고 있으니 봉장미가 절대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장공주도 진짜 인명사고를 바라진 않았기에 황후가 정비를 끌고 뭍으로 나오는 순간에 사람을 시켜 도와주게 했다.정비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오들오들 떨며 장공주와 녕비를 바라봤다.사람이 죽어가는데 도움의 손길 한번 펼치지 않은 그들이었다.‘이 원한, 기억해 두겠어!’시종인
봉구안은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그대로 틀어올렸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치마가 흩날렸다.최 상궁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폐하께 변명이라도 해보지 그러셨습니까?”“이대로 폐하께서 마마를 오해하시게 그냥 둘 생각이십니까?”봉구안은 공허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답했다.“상관없다.”어차피 그녀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편전.태의가 정비의 진맥을 보고 있었다.창가에 선 황제는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비는 착잡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황후가 떠난 후, 황제는 줄곧 거기 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진맥을 마친 태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폐하, 마마께선 찬 기운이 몸에 침입하여 많이 허약해진 상태입니다. 소신은 한기를 쫓는 약을 처방할 테니 절대 다시 바람을 맞거나 하시면 안 됩니다.”“그래, 알았다.”소욱은 뒤돌아서 정비를 바라봤다.똑같이 물에 빠졌는데 한 사람은 이처럼 허약하고 황후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무공을 연마한 자라서 다르다는 건가.태의를 물린 후, 정비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폐하, 황후께서는…”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추홍이 마음에 걸렸다.두 사람의 말이 다르면 추홍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돌렸다.“호수가가 미끄러웠으니 황후께서 고의로 저를 민 것은 아닐 겁니다.”소욱은 이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정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넌 몸을 추스르는데만 집중하거라.”정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황제가 떠난 후, 추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마마, 왜 황후의 편을 들려 하셨습니까? 사실 장공주께서 직접 지목하셨으니 마마께선 모른 척만 하시면…”정비는 고개를 들고 싸늘한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았다.“폐하께서 그리 쉽게 속아넘어갈 것 같으냐? 정말 장공주의 말을 믿었다면 진작에 황후를 처벌하였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나까지 황후를 지목한다면 폐하께선 날 어떻게
영화궁.최 상궁은 깨 고소한 얼굴로 들어와서 아뢰었다.“마마, 흥혜궁 쪽에 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오랜만에 후궁을 찾으셔서 흥혜궁에 머물기로 하였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폐하께서 크게 화를 내고 돌아가셨답니다. 게다가 정비마마께 금족령까지 내리셨다는군요!”최 상궁은 신이 나서 말했지만 봉구안은 골치가 아팠다.그녀는 마지막으로 후궁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최 상궁이 옆에서 떠들고 있으니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나가 있거라.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말고.”최 상궁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연상이 떠난 후로 줄곧 옆에서 정성껏 시중을 들었는데 자신을 봐주지 않는 상전에게 서운하기도 했다.봉구안은 그런 최 상궁을 무시하고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안 나가?”뒤돌아선 최 상궁은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근엄한 표정을 황제가 그곳에 서 있었다.그녀는 재빨리 예를 행했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봉구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소욱의 기억에 영화궁은 항상 적막한 곳이었다.의자에 앉은 그는 탁자에 놓인 온갖 간식들을 바라보았다.아마 최 상궁이 준비했을 것이다.최 상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었다.그에 반해 황후는 지시를 기다리는 궁녀처럼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최 상궁이 말이 많을수록 황후의 과묵함이 더욱 도드라졌다.결국 짜증을 못 이긴 소욱이 차갑게 호통쳤다.“물러가거라.”최 상궁은 그제야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내전을 나가 문을 닫았다.소욱이 앞에 와서 앉은 뒤로 봉구안은 조용히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소욱은 펼쳐져 있는 후궁 장부를 보고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늦은 시간에 아직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있느냐?”봉구안은 공손히 답했다.“예.”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황후, 입궁한 이유가 무엇이냐?”봉구안의 눈가에 약간은 다른 감
소욱은 요즘 사방의 전란으로 인해 쉴 틈조차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궁의 침상에서 그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흥혜궁.같은 시각, 정비는 욕조 안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의 눈가는 이미 붉게 부어오른 상태였다.“결국, 나는…해내지 못했어.”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황제에게 깊은 총애를 받는다고 믿었으나, 사실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황자를 가질 수 있겠는가! 오늘 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황제에게 승은을 청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황제의 냉랭한 눈빛뿐이었다.황제는 그녀의 청을 단칼에 거절하였다.“분수에 맞지 않는 망상을 하지 말거라.” ‘분수에 맞지 않다…’ 그 말은 즉슨 정비는 황자를 낳을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 아닌가?“하하...” 그녀는 분노 끝에 그만 냉소를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황제를 향한 분노와 원망을 애써 억눌렀다.‘폐하께서는 정말로 무정하시구나…’ 욕실 밖에서 시중들던 추홍은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오늘 밤, 그녀가 모시던 정비는 승은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황제는 단호히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 영화궁.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봉구안은 잠을 청할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침상 위에는 이미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탓에 그녀는 작은 침상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궁 밖에서 긴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폐하, 북방으로부터 전갈이 왔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침상 위의 소욱 또한 눈을 떴다. 그는 한 손으로 휘장을 걷어내며, 맑고도 날카로운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작은 침상에서 잠들어 있던 봉구안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소 쉰 듯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침상에서 자거라.” 이후, 그는 이내 밖으로 나
소욱은 기꺼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황후의 말을 따르겠소.”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돌아온 황제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봉구안 역시 그가 이렇게 순순히 권유를 받아들일 줄은 예상치 못하였다. 그녀는 다만 황제가 과음하여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까 염려하였을 뿐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대신들은 감탄하며 말했다. “폐하, 이번에 조 나라가 크게 패하니 참으로 통쾌하옵니다!” “가짜 방어도를 이용하여 남제의 방어선을 뚫으려 했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옵니다.” “폐하, 북방에는 ‘장기양’이라 하는 소년이 있사온데, 이번 전투에서 공로가 지대하였으니 장차 크게 쓰일 인재이옵니다!” “장기양이라 하였소? 어딘가 익숙하군. 혹시 그 옛날 현영석을 바친 그 소년이 아니오?” “바로 그 아이가 맞사옵니다!” 봉구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소욱의 눈에 장기양에 대한 흥미가 번뜩였다. 소환의 제자라면, 필시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다. 그가 계속 조정을 위해 힘쓴다면, 조정도 결코 그를 홀대할 수 없었다.“짐의 뜻을 전하라. 오늘부로 장기양을 교위로 봉하노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대신들은 한 목소리로 축하하였다. “폐하께서 젊고 유능한 인재를 얻으셨으니, 이는 곧 하늘이 남제를 보우하심이옵니다!” 소욱은 평소의 냉엄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잠시 내려놓고 대신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연회가 끝난 후, 봉구안은 황제와 나눌 말이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소욱 역시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황후, 짐과 함께 자진궁으로 갑시다.” …자진궁. 그곳은 황제가 거처하는 곳인만큼, 엄숙하고도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봉구안이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최 상궁은 황후를 따라 황제의 침전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워하였다. 마치 처음 도성에 들어온 시골 여인처럼, 주변을 두리
소욱은 봉구안이 부정할 여지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광한선을 기억하느냐?” “예전에 그 여자 자객의 몸에 뿌렸던 광한선이, 그대 몸에서도 발견되었소.” 봉구안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이어 말했다. “광한선은 사람을 추적하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지. 일단 묻으면 삼일 안에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타인에게 옮겨가지도 않소.” 봉구안의 얼굴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마, 그렇게 일찍 정체가 드러난 것이란 말인가? 소욱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대는 날 구하기 위해 내공을 소모했소.”“또한, 내가 치명적인 약물에 중독되었을 때도 그대가 날 도와주었소.” “황후, 그대가 날 위해 한 일들을 나는 모두 알고 있소.” 봉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가 폐하를 구한 것은 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왕이시기 때문이옵니다.”“하지만 의심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깊은 규수에 갇혀 지내던 여인이 어찌 무공을 익힐 수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소욱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사람을 시켜 조사했소.” “심지어 의심하기도 했소. 그대가 진정 봉장미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소.”“추석 연회 그날 밤, 나는 그대와 그대의 부친이 혈연관계임을 증명하기 위해 친자 확인을 준비했었소.” “결과는 그대가 봉 대인의 친딸이라는 것이었소.” “그대는 비밀이 많지만, 나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소.” 말을 마치며, 그는 손바닥을 펴고, 그 금빛 찬란한 비녀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나는 단 하나를 원하오.”“내게 진심을 다하고, 후궁을 잘 다스릴 황후. 봉장미, 나는 그대가… 충분히 만족스럽소.” “그러니 나는 기꺼이 그대를 받아들여, 나의 아내로 삼고자 하오.” 황제로서 그가 이처럼 낮은 자세를 취해 마음을 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다른 여인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봉구안은 비녀를 받지 않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무거운 치마를 손으
봉구안은 굳건히 말했다. “전하, 소첩의 대체 혼인에 대하여 봉가에서는 실로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소욱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였다. 마치 그녀의 혼까지 꿰뚫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하자, 침전 안은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분노에 차오른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턱을 놓고 돌아섰다. 등진 채 두 손을 뒤로 하여 단단히 주먹을 쥔 모습에서, 그의 억누르는 분노가 드러났다. “이런 큰 일을 봉가에서 어찌 모른단 말이냐?” “대체 그대는 나를 얼마나 어리석게 본 것이오?” “아니면, 그대가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내가 그대를 용서하리라 확신한 것이오?” “하지만, 그대는… 그대는 오늘밤, 이 사실을 말해서는 아니 되었소.” “그대는 모든 것을 망쳐놓았소!” 그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며 등을 돌린 채,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내밀었던 봉황 비녀와, 애써 쌓아온 믿음과 마음이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소욱은 스스로 생각했다. 후궁들 간의 치열한 암투 속에서도 황후만큼은 다를 줄 알았다.그러나, 그녀도 결국 다르지 않았다. “폐하…” “그 입 다물거라! 지금 당장은 네 말을 듣고 싶지 않구나!” 소욱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질책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의 고요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문득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구하려고 독을 해독하며 중상을 입었고, 그를 품에 안고 말하였다. 당시 그녀는 그에게 분명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그 모든 장면은 가식 없는 진심이었음이 분명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소욱은 마침내 차분히 물었다. “그렇다면, 상처를 복원할 비밀 약재 또한 거짓이더냐?” 그는 그녀에게 얼마나 더 숨긴 진실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욱은 그녀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
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눈빛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황귀비를 잡아들인 것은 소인의 결정이옵니다. 그에 따른 죄책은 기꺼이 감수하겠사옵니다. 지금은 이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 때이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걸음 나아가 말을 이어갔다. “황귀비는 스스로 인정하였사옵니다. 그녀가 장미를 해하려 한 것은, 신비한 자에게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사옵니다.”“그 신비한 이는 그녀의 죄를 빌미로 협박했사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이곳에 있사옵니다.” 봉구안은 한 봉투를 내밀었고, 소욱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편지를 열었다. 봉구안은 이어 또 다른 봉투를 꺼내들었다. “몇 달 전, 정비도 이 신비한 자의 편지를 받았사옵니다.” “그 편지에는 소인의 아버지가 용화사 승려를 매수하여 명서를 조작한 사실이 적혀 있었사옵니다.” 소욱의 이마는 깊게 찡그려졌고, 그는 묵묵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정비마저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섞인 혼란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봉구안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소인과 정비는 힘을 합쳐 이번 정월 대보름날 밤, 그 신비한 자가 다시 방비전에 몰래 들어와 고발 편지를 남기려 할 때 그녀를 붙잡았사옵니다.” “그 신비한 자는 다름 아닌 맹교먹이었사옵니다.” 소욱의 눈썹이 떨렸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단호했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맹교먹이 정비에게 보낸 편지 역시 이곳에 있사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보시고 있는 두 편지와 그 편지를 비교하시면, 그 글씨가 모두 동일인임을 알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는 맹교먹이 봉장미를 해친 진범임을 증명하옵니다.” 소욱은 손에 든 편지들과 봉구안이 건넨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글씨체가 분명히 일치했다. 맹교먹, 그토록 신뢰하고 중용했던 그녀가 어찌 이런 끔찍한 음모의 주모자일 수 있는가? 봉구안은 소욱의 침
서여국에 오기 전, 봉구안은 이미 모든 대비책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소주와 정국은 이미 세작을 파견하여 서여국 황궁에 숨어들게 했다. 황제가 진짜 봉구안인지 탐색하기 위함이었다.뿐만 아니라 서여국 내부에서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무리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번 일은 오히려 그들의 계략을 역이용할 절호의 기회였다.봉구안은 송려에게 명했다.“내일 장미를 데리고 남제로 돌아가세요. 서여국은 저와 폐하가 남을 겁니다.”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송려는 더 바랄 것도 없었다.하지만 봉장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언니, 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어?”봉구안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만 무사히 남제로 돌아간다면, 난 그걸로 만족해. 난 걱정하지 말고, 우선 무사히 네가 남제에 돌아갈 방도를 생각해보자.”봉장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언니 말대로 할게.”입으로는 순순히 따랐지만, 마음은 어쩐지 허전했다.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녀는 입을 열고 말았다.“언니, 소주와 정국 일만 정리되면… 이 서여국의 황제는 누가 되는 거야?”그녀는 언니는 반드시 남제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주저함 없이 답했다.“서여국에 숙가 사람들 중 더 이상 남은 이는 없어. 이제는 현명한 이를 추대하여 황제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어.”봉장미는 그 말을 듣고 묘한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황제와 송려가 있는 앞에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날 밤 봉장미는 떠나기 전 호원아와 오양련을 따로 불러들였다.이 둘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언니께서 이미 서여국에 도착하셨어요. 앞으로 이 나라 황제는 언니가 될 거예요.”그 말에 두 사람은 놀라며 기뻐했다.하지만 봉장미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하지만 언니의 뜻은 이번 일은 소주와 정국의 반란을 정리하러 온 것이고, 그 후에는 황제 자리를 사양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두 분
궁궐 밖 어느 저택.봉장미는 그곳에서 그리운 언니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안으려던 순간, 언니의 불러진 배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언니, 이게 무슨...?" 봉장미는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임했어."봉장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정말?!"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자매는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할 말이 정말 많았다.옆방.소욱과 송려가 함께 있었다. 송려의 안색이 예전 같지 않았고, 눈 밑에는 검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근심이 얼굴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소욱이 눈치 없이 물었다. "황후의 지아비 역할은 어떠하냐?"송려는 고개를 떨구며 슬픈 표정으로 자조했다. "신은 재주가 없어 그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렸다.‘왜 저렇게 우울해 하지? 혹시 봉장미가 변심해서 새 남자를 들였나?’송려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욱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폐하, 감히 여쭙겠습니다만 이번에 황후마마께서 오신 이유가 황제의 자리를 맡기 위함입니까?"소욱은 부정하지 않았다. 송려는 완전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된다면 좋았다. 그러면 장미가 그와 함께 남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황제가 생각나 조심스레 물었다."폐하, 어찌하여 서여국까지 오셨습니까?"나라는 하루도 군주 없이 지낼 수 없는데, 황제께서 서여국에 오시면 남제에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할지 걱정됐다.소욱은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 "부부는 한 몸이니까."국사와 관련된 일, 예컨대 그가 소주와 정국의 반란을 해결하러 왔다는 등의 이야기는 굳이 송려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송려는 망설이다 결국 조언을 건넸다. "폐하, 이 황부의 역할은 확실히 쉽지 않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권합니다."소욱의 칼 같은 눈썹이 찌푸
봉장미는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눈앞의 두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와 지아비였다.누구보다 그녀의 편이야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믿지 않으니 그녀는 더욱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군주란 정치에 힘쓰는 자이니, 두통쯤이야 대수로운 일인가요?""고모님이 이 자리에 계셨을 때를 기억해보세요.""수많은 상처를 입으시고,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하셨어도 단 한 번도 이 자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왜 저더러 포기하라 하시나요?""언니가 대역을 준비했다는 건 알지만, 전 대역보다 더 잘할 수 있단 말이에요.""왜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요?""두 분은 정말 제 마음을 모르세요…""언니는 멀리 계시니 지금 서여국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 모르시죠.""소주와 정국은 현재 많은 세작들을 보내고 있어요. 궁중은 이미 그들의 침투를 받았고, 또한 그들은 이미 수만 군대를 주둔시켜 서여국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어요.""서여국의 흠이 있다면 바로 제가 황제의 자리에 앉은 것이겠죠.""만약 그들이 제가 가짜라는 것을… 제가 남제의 황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즉시 군대를 보낼 거예요! 대역만으로는 절대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그녀는 원래 성격이 온화하고 순종적이라 보통은 남이 무슨 말을 해도 반박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특별히 고집을 부렸다.송려는 왜인지 그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분명 황후를 모방해야 했기에 장미의 성격이 변한 것이라 생각하였다.송려는 그런 봉장미의 모습에 실망감이 들었다."그럼 나는? 송가는? 이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 거야?"그는 이 서여국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원래 자신은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으니 어디서든 자신의 큰 뜻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의술로 세상을 구제하고, 병을 치료해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그의 꿈이자 삶의 목표였다.하지만 이 서여국에 온 후에야 그는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편으로는 황후의 지아비로서
5월 초, 차가운 겨울이 가시고 꽃이 피는 계절이 다가왔다.봉구안과 소욱은 서여국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가볍게 채비하여 가는 길에 각 성읍을 순시했다. 열무신은 동산국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탈옥한 손추를 체포하고 약쟁이단을 뿌리째 뽑기 위해서였다. ...... 서여국. 봉장미는 이미 언니의 편지를 받았다. 대역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여국의 국사를 대역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해, 여전히 국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첫째는 대역이 실수하여 화를 부를까 걱정되었고, 둘째로는 서여국의 일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서여국 황실의 혈통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송려는 여러 번 그녀를 설득하며 함께 남제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진실을 밝히지는 못했다.그녀의 옛 병이 재발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날 조회를 마친 후, 봉장미는 갑자기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파왔다. 그녀는 손에 든 상소문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폐하!" 그녀 곁에 있던 송려는 상황을 보자마자 즉시 앞으로 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궁녀가 즉시 태의를 부르려 했지만, 그가 저지했다. "태의는 부를 필요 없다! 폐하의 몸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아." 말하면서 그는 봉장미를 침상으로 안아 눕히고, 곧바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 봉장미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당신... 왜, 제 머리가... 이렇게 아픈 거죠.""마치 폭발할 것 같아요... 정말 너무 아파요..." 그녀의 몸이 아프면, 송려의 마음도 아팠다. 은침을 잡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 괜찮을 거야. 나를 봐,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는 그녀를 위로하였다. 잠시 후 온 머리에 땀이 흘렀다. 봉 부인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딸이 이토록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급한 마음이 섞였다. 당시 그 짐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