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주는 자신이 황후를 업신여긴다 여겼지만, 정작 이 죽화총의 도면을 그린 이는 다름 아닌 봉구안이었다. 그녀는 교먹이 반드시 개량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으나, 교먹은 처음부터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교먹은 그저 이 기회를 붙잡아 감옥을 벗어나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보니 주저함이 앞섰다. 특히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죄에 또 죄를 물게 될 것이다.” 소욱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교먹은 마음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그저 시험 삼아 해보겠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그녀의 이런 얕은 수작은 황제에게 절대 통하지 않을 터였다.장공주는 불안해하며 간청했다. “폐하, 맹교먹은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말하려던 순간, 교먹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할 수 없사옵니다.” 장공주는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먹이 방금 뭐라고 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기존의 도면에 몇 가지 기계를 더하는 것에 불과한데, 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던 교먹에게 어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교먹의 등에는 이미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죄를 더 짊어질 수 없었다. “폐하… 소인 확신할 수 없사옵니다.”봉구안은 냉랭한 눈빛을 보냈고, 소욱은 교먹에게 더욱 크게 실망했다. 이토록 위급한 순간에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다니… 그가 기억하던, 절망 속에서도 출구를 찾던 소년 명장은 사라진 듯했다. 장공주는 교먹을 감싸며 다시 나섰다. “폐하, 맹교먹은 그저 잘못될까 두려워 말한 것뿐이옵니다.” “제발 이 아이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옵소서.” “지금은 힘을 뭉칠 사람이 많을수록 득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녀는 그러면서도 봉구안을 노려보았다. “황후마마, 어쩌자고 맹교먹을 이토록 몰아붙이는 것입니까!” 소욱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북연 사신들은 연일 남제의 군기감에 머물며 기세등등하게 구는 중이었다. 그들은 한 군기고 앞에 이르렀으나, 출입을 금지당하자 크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사신을 대표하는 웅염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황제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죽화총을 보여주겠노라 약조하셨다. 너희 따위가 어찌 감히 이를 막겠단 말이더냐!” 군기감의 감장이 직접 나서 예를 갖추며 사죄했다. “대인, 죽화총은 아직 완전히 제작되지 않았사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청하옵니다.” 웅염은 남제가 이를 일부러 지연하고 있음을 눈치챘으나, 남제가 이미 몸을 낮춘 상황에서 북연이 지나치게 몰아붙였다가는 도리어 화를 부를 수 있음을 알았다. 며칠을 더 기다린다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떠나기 전, 웅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어차피 우리 북연에게 보여주게 될 터. 더 이상의 시간은 끌지 말거라!” 그가 떠난 뒤, 군기감의 관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분개했다. “북연의 횡포가 정말 도를 넘었군!” …저녁이 되자, 소욱은 영화궁에서 봉구안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조용히 말했다. “맹교먹의 죄가 산처럼 쌓여 있소.” “이번에 큰 공을 세운다 한들, 짐은 그 아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은 이어질 주제를 꺼내기 위한 서두였다. 그는 봉구안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장공주의 말도 맞소.”“짐은 맹교먹에게 감옥 안에서라도 도안을 그리게 할 것이오.” “그 아이가 성공한다면 당장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터…” “짐은 그대가가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번 일은 대의를 위한 것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아주시오.” 봉구안은 손을 빼내며 고개를 숙여 말했다. “신첩, 명심하겠사옵니다.” 등불 아래 비친 그녀의 옅은 미소를 본 소욱은, 잠시 감정이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협소한 공간, 침상 위에서 봉구안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소욱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그녀를 한 치의 여유도 없는 곳에 가둬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입맞춤을 피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 갑작스레 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왜 피하는 것이오?” 봉구안의 눈동자는 고요한 우물과도 같았다. 그녀의 두 주먹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소욱은 이를 갈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레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훑으며, 숨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숨결은 거칠어졌고,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허리띠에 닿아 단숨에 풀어버렸다. 여러 겹의 옷 위로 그의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매끈한 아랫배를 덮었다. 그는 그녀의 귀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자를 낳아주시오.아니, 황자를 낳거라.” 이것은 협상의 말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그녀의 옷을 마구잡이로 벗기기 시작했다. 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침상 너머의 휘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미간은 단단히 좁혀져 있었다. “폐하, 저는 동침하는 것을 원치 않사옵니다.” 이 말은 마치 평지에 벼락이 치는 듯했다. 소욱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몸을 약간 들어 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돌려 자신의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뭐라고 하였소?” 그의 눈에는 분노와 의문이 뒤섞여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상황에서 그녀는 도대체 무엇이 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거짓말을 문제 삼지 않으려 했는데도 말이다. 봉구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달빛처럼 차갑고, 소나무처럼 단단했다. “폐하께서 황자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낳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옵니다.” 소욱은 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는 차갑고 냉랭
어전.유사양이 황제의 화상약을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황후가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굳이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소욱은 자리에 앉아 책상 가장자리에 손을 올려두었다.봉구안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소매를 조심스레 걷어 올리며 화상 부위를 드러냈다.군영에서 약을 쓰던 경험이 풍부했던 그녀는 능숙하게 약을 발랐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다 끝났사옵니다.”소욱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이렇게나 빨리?”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는 쌓여 있는 상소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상소문을 가져오시오. 짐이 말할 테니, 그대가 대신 적어주시오.”봉구안은 놀란 기색으로 답했다.“폐하, 자고로 궁 안의 여인들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법도이옵니다.”더군다나 그녀가 대필까지 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소욱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전부 쓸데없는 내용들일 뿐이오. 신경쓰지 마시오.”매일 올라오는 상소문 중 정사를 논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대부분은 별 의미 없는 상소들이었다.봉구안은 황제가 과장한 줄 알았으나, 그의 요청대로 상소문을 열자 그것이 과언이 아님을 깨달았다.예컨대, 어떤 지방 관리의 상소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황제 폐하, 강성의 솜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사옵니다. 이는 모두 황제께서 부지런히 국정을 돌보신 덕택이옵니다. 신은 솜꽃을 한 송이 말려 폐하께 바치오니, 강성 백성들의 존경을 전하는 바옵니다.]그리고 상소 끝에는 말라 비틀어진 초라한 꽃 한 송이가 붙어 있었다.봉구안은 어이가 없었다.소욱은 익숙한 듯 말한다.“답장을 적어주시오… 말린 꽃이 참으로도 아름답구나. 하지만 다음에는 보내지 말거라.”봉구안은 망설였다.“신첩의 글씨체가 폐하와 다르옵니다.”“괜찮소.”이런 상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들이었다.그러다 봉구안은 더 이상한 상소를 발견했다.“황제의 용안은 태양처럼 빛나 만민을 비추고, 황제의
봉 부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단독으로 황제를 알현하게 되자, 불안감에 사로잡혔다.황제는 사람을 시켜 자리를 내어달라 했으나, 그녀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궁인이 차를 올렸으나, 그녀는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그녀의 긴장한 모습을 본 소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리 조심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짐이 묻고자 하는 건 단지 황후가 태어난 뒤 곧장 맹가로 보내졌던 일에 대해 너희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뿐이다.”그의 물음에 봉 부인은 더더욱 두려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정했다.“폐하, 누군가가 헛소리를 올린 것이옵니다! 황후는 줄곧 봉가에서 자랐고, 맹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소욱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더 이상 알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더 캐물었다간 봉 부인이 그대로 겁에 질려 기절할 게 뻔했다.그는 나지막이 명령했다.“봉 부인을 궁 밖으로 모셔라.”“명 받들겠습니다!”봉 부인은 혼미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상황을 봉 대인에게 상세히 전했다.봉 부인은 봉구안이 대체한 일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마음을 놓았다.그러나 황제가 이 일에 의심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봉 대인의 얼굴은 다시 창백해졌다.“이거 큰일이구나!”황제가 의심을 품었다면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봉 대인은 불안감에 땀을 흘리며 마음 졸였다.“황후가 아직 황자를 낳지 못한 탓에, 내가 이리도 마음을 졸여야 하다니!”…군기감.북연 사신은 초조해하며 소리쳤다.“며칠이나 지났는데, 죽화총은 아직도 제작이 끝나지 않은 것이오! 설마 일부러 시간을 미루는 것이오?”감장은 여전히 태연히 말했다.“곧 끝납니다. 곧이요.”지하 감옥.맹가의 교먹은 죽화총 개량을 명받아, 혼자 독방에 배치되었다.그곳은 주변에 다른 죄수도 없으며, 오직 그녀가 작업에 집중하도록 꾸려졌다.방 안에는 종이와 붓, 작은 책상 등이 마련되었으며, 장 공주의 세심한 배려 덕에 고문은 커녕 기운도 좋았다.정오, 한 간수가 음식을 들고 교먹의 방으
맹교먹이 갇혀있던 지하 감옥은 궁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감옥이었다. 그 곳은 황궁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중범죄자가 탈옥하면, 궁궐에서 즉시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곳이었다.이 시각, 감옥 앞 광장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맹교먹은 비응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퇴로를 뚫어냈다.지하 감옥을 빠져나와 이미 세 겹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정문만 돌파하면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다.관군은 병력으로 벽을 세우고 있었다.한 손에는 방패, 다른 손에는 창을 쥐고, 비응군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냈다.주변 성벽 위에서는 활을 든 병사들이 늘어서 있었고, 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비처럼 쏟아졌다.비응군 200여 명은 마치 강철의 방패처럼 뭉쳐 맹교먹을 보호하며 나아갔다.그들은 모두 전쟁터를 수차례 겪은 노련한 전사들이었다.죽음 따위는 이미 두려워하지 않았다.맹교먹은 그들을 보며 잠시 감동을 느꼈으나,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손에 쥔 비영령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이 비영령은 그녀가 황성으로 발령받기 전, 은밀히 복제해둔 것이었다.본래 스승 맹건에게 반납해야 했던 진짜 비영령은 이미 가짜로 바꿔치기한 상태였다.일찍이 사저가 자신을 모함하려는 기미를 느꼈던 그녀는, 이 복제된 비영령을 이용해 멀리 북대영에 주둔하던 비응군을 황성으로 불러들였다.그리고 이번이야말로 그녀가 이들을 활용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비응군은 점점 정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그리고 맹교먹은 문 밖에서도 비응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문 밖에 있던 그들은 문을 열고 있었다.그러나 관군 역시 대거 몰려들어 문을 닫으려 했다.비응군 몇몇이 문틀을 붙잡고 온몸으로 버티며 관군의 방해를 막아냈다.이들 중 몇몇은 등에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문을 지키고 있었다.그들은 외쳤다.“소장군! 어서 오십시오!”맹교먹도 탈출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그들의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교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성루를 바라보았다.그곳에는 황제가 서 있었다. 황제는 높은 곳에서 교먹을 내려다보며, 주인을 압도하는 기세로 군림하고 있었다.그는 활을 들고 있었으며, 눈은 매섭게 빛났고, 검은 안광 속엔 날카로운 살기가 담겨 있었다.완벽한 외모를 자랑하는 얼굴에는 짙은 분노가 덮여 있었다.모두가 알고 있었다.황제의 궁술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쏜 화살은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방금 날아온 세 발의 화살은 그가 얼마든지 교먹을 직접 겨눌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이것은 분명 경고였다.뒤로 물러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하지만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면, 곧바로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소욱은 활을 내려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즉시 참하라.”“명심하겠사옵니다!”교먹은 황제를 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자신의 끝이 어떻게 될지를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살기 위해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비응군은 강했지만, 천군만마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들은 압도적인 열세에 처해 있었다.소욱이 이끈 친위대가 이미 그녀와 비응군을 철저히 포위한 상태였다.하지만 비응군은 여전히 그녀를 목숨 걸고 보호하며 외쳤다.“소장군, 어서 가십시오!”교먹의 눈은 오직 성문만을 향하고 있었다.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그것은 그녀에게 유일한 생명의 길이었다.그러나 이제 문 밖에는 온통 적군뿐이었다.나가더라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바로 그때, 그녀는 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그녀가 심어둔 또 하나의 패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폐하!”장공주가 어딘가에서 달려나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며 외쳤다.소욱은 그녀를 보자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친위대장은 즉각 명령을 내렸다.“활을 내리거라! 공주마마께 해를 입히지 마라!”장공주는 성루 아래 넓은 광장에 서서 황제를 향해 큰 소리로
교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한 걸음만 더 가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할 수 있었건만, 갑자기 어디선가 긴 창 한 자루가 나타나 그녀를 다시 물러서게 만들었다.성문 안과 성벽 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스러워하였다.그리고 천천히, 긴 창을 들고 나타난 자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그 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예전의 맹 소장군과 흡사했다.비응군 병사들은 멍하니 서 있었고, 주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그 자가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교먹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빗줄기가 퍼져 나가며 그녀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교먹은 눈앞의 가면을 쓴 이가 다름 아닌 봉구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성벽 위에서는 황제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교먹은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그녀는 봉구안의 곁에 빈틈을 발견하곤 곧바로 옆으로 몸을 틀었다.그러나 봉구안은 긴 창을 가볍게 던져 그녀의 길을 막아버렸다.교먹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길을 비켜라!”봉구안은 말없이 손을 풀어 긴 창을 손에서 떨어뜨렸다.그 모습을 본 교먹은 의아했다.‘언니가 이렇게 쉽게 나를 놓아줄 리가 없어. 그렇다면… 이건 도전이야!’교먹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그녀는 봉구안을 향해 돌진하며 주먹을 휘둘렀다.하지만 봉구안은 단 한 손으로 그 주먹을 받아내며 교먹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그리고는 한 번 힘을 주었다.뚜둑!교먹의 팔은 순식간에 탈구되고 말았다.그러나 그녀는 반응이 빨랐다.곧바로 스스로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이제 무기를 손에 넣은 교먹은 더욱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빗물은 사방으로 튀었고, 봉구안은 발을 들어 그녀의 하단을 노렸다.교먹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몸을 돌려 반격에 나섰다.그들은 몇 번의 강렬한 주고받기를 이어갔다.…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장공주의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