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은 안으로 들어온 후, 장공주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장공주 역시 황후의 신분을 의심해서 추궁하러 왔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폐하, 벌써 조회가 끝난 것입니까?”장공주가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누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그는 어젯밤 맹교먹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을 협박하던 누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참으로 아둔한 행위였다.장공주는 소욱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봉구안을 바라보았다.“황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었는데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폐하께서 납셨지 뭡니까.”소욱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그럼 짐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단 말입니까?”그의 말투에서는 은근한 적의가 풍겼다.장공주는 왜 황제가 자신을 이토록 경계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하지만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맹 소장군의 진실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조사할 것이다.장공주는 봉구안에게 예를 행한 뒤에 조금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말했다.“황후마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 만류하려고 하지 않았다.장공주가 나간 후, 소욱은 정색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누님은 집요한 사람이니 쉽게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또 와서 말로 떠볼 수도 있으니 힘들면 짐에게 보내도록 하거라.”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예.”자리에 앉은 소욱이 무심한듯 말했다.“맹교먹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퍼져나갔고 짐이 충직한 장수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아침 조회에서 대신들이 아주 난리도 아니더군. 특히나 무장들 말이다.”“아마 얼마 안 있어 소식을 접한 북대영에서도 난리가 날 테지.”봉구안은 그의 옆에 앉아 침착하게 답했다.“북대영은 맹건 장군이 계시니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장기양이 최근에 수차례 공을 세우고 있고 맹 소장군의 명성을 대체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장령들 사이에서 여인인 맹 소장군에게 불만이 많은
그날 오후, 자녕궁.장공주는 다시 영화궁으로 가려다가 황제가 황후와 함께 출궁했다는 전갈을 받았다.“황후께서 돌아오시면 꼭 나한테 알리거라.”장공주는 싸늘한 목소리로 궁인들에게 지시했다.궁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맹 소장군의 죽음이 황후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그게 아니라면 맹 소장군의 죽음에 애도해야 할 장공주가 급하게 황후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물론 궁녀는 장공주가 맹교먹의 죽음이 너무 늦어서 자신이 진실을 늦게 알아차렸다고 통탄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잠깐.”장공주는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창고로 가서 그 팔찌를 가져오너라.”“혹시 맹 소장군을 위해 직접 제작하셨다가 도중에 부러진 그 팔찌 말씀입니까?”장공주는 아련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래, 바로 그것이다.”황궁 밖.황제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능연이는 마치 혼례식을 준비하는 신부처럼 정성들여 자신을 단장했다.하지만 발목 관절이 이미 손상되고 빛도 안 드는 곳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왕년의 고혹스러운 눈동자는 혼탁하게 변해 있었다.얼굴도 망가져서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예전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 잔인한 현실을 늦게 인지한 그녀는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과 메마른 몸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안 돼, 이런 모습으로 폐하를 뵐 수는 없어.“소욱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길은 밀실 문앞에 서서 공손히 아뢰었다.“폐하, 능연이는 안에 있습니다.”“들어오지 마세요! 폐하! 제 모습이 너무 추합니다…”능연이의 갈린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과거의 은방울 굴러가는 것 같던 청아한 목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소욱은 걸음을 멈추고 싸늘한 시선으로 안쪽을 바라보았다.능연이가 현재 어떤 꼴이 되었는지 이미 진한길을 통해 보고받은 바가 있었다.태생이 인정미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능연이가 죽을 죄를 자초해서 그런 건지, 그는 딱히 그녀가 가엾다는 마음은
봉구안은 줄곧 방 밖에서 능연이의 고함을 듣고 있었다.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진 그녀는 스스로 나서기로 했다.능연이는 죽어서도 절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인간이었다.처음에는 고생 좀 시키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능연이를 살려두는 것은 더 큰 화근을 남겨두는 일 같았다.봉구안은 한 사람의 원한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황후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능연이가 거칠게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저리 비켜! 폐하랑만 얘기할 거야!”“천한 것, 폐하께 간청드려 널 죽여버릴 거야! 폐하가 싫다고 하시면 내 친히 네 목을 비틀어… 악!”순간 능연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가슴에 박힌 단도를 바라보았다.움직임이 너무도 빨라서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칼을 맞아버린 것이다.능연이가 아니라 옆에 있던 소욱과 진한길마저도 봉구안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진한길의 앞을 바람처럼 지나쳐 능연이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었다.진한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소욱은 인상을 찌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능연이는 본능에 이끌려 손으로 단도를 잡고 겁에 질린 눈으로 눈앞의 인영을 바라봤다.황후와 흡사한 목소리와 체형을 가진 사람이 눈앞에 있지만 그녀는 지금도 황후가 이렇게 강한 검법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너… 누구야!”봉구안의 서늘한 눈에서 살기가 용솟음치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능연이에게 말했다.“기억하거라. 너를 괴롭히고 죽인 건 봉장미의 쌍둥이 언니 봉구안이다. 네가 악귀로 변해 나를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으마.”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손바닥에 내력을 불어넣어 강하게 밀었고 날카로운 단도는 능연이의 몸을 관통했다.능연이는 충격에 눈을 부릅뜨고 외마디 비명만 질렀다.“봉… 구… 안…”
소욱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정색해서 말했다.“왜 짐에게 능연이를 품은 적 있는지 묻지 않았느냐?”다른 건 모를 수 있어도 석녀가 사내와 합방을 할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봉구안은 솔직히 답했다.“폐하, 그건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고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석녀와 합방을 불가능해도 총애는 줄 수 있지요. 저는 그것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없습니다.”순식간에 소욱의 살기등등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남자 행세를 오래 하더니만 남녀 사이의 일에 아주 능통한 모양이군.”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과찬이십니다, 폐하.”소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진심으로 칭찬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수상한 침묵이 잠깐 유지되던 와중에 소욱이 말했다.“능연이는 한 번도 시침을 하지 않았다. 귀비로서 대접을 해준 것은 4년 사이 그 여자가 심방혈로 짐의 천수독을 억제해 주었기 때문이다.”봉구안이 놀라는 기색이 없자 소욱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너는 진작에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저는 진작부터 능연이의 작용을 알고 있었습니다.”소욱은 그녀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그의 독을 해독해 준 이후로 능연이가 유배형에 처해진 경과를 떠올리자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는 불쾌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너는 처음에 천수독을 해독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단번에 짐을 위해 해독을 해주었지. 짐이 완전히 능연이를 버리기를 바라고 한 일이더냐?”봉구안은 그의 예리한 시선을 마주하고 혹시 모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침착하게 답했다.“예. 맞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독을 해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능연이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내력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며 해독을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진실을 알게 된 소욱은 벌레를 목에 삼킨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그는 줄곧 그녀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해독을
진한길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황후가 황제의 허벅지에 앉아 황제의 두 손을 꽉 잡고 황제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이 무슨…’진한길이 본능적으로 든 생각은 황제를 호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고개를 돌린 황후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그는 소름이 돋았다.그 짧은 순간에 그는 본능적으로 가림막을 다시 내렸다. 살기 위한 생존 본능이었다.그리고 폐하도 즐기고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그래, 그런 걸 거야!’소욱 본인마저도 자신이 한 여인의 손에 이런 자세로 제압을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눈앞의 여인을 노려보았다.그녀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입술도 부어 있었다.목에는 그가 남긴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물론 그는 자신의 상대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고귀한 용포는 잔뜩 구겨져서 흐트러져 있었고 목에도 날카로운 이빨자국이 남았다.그것은 애무의 결과물이 아닌, 맹수 사이에 싸우다 남긴 흔적과 흡사했다.봉구안은 바짝 화가 난 사자처럼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아무리 폐하라도 싫다는 사람을 이렇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전에는 그의 앞에서 신분도 숨겨야 하고 고려할 게 많아서 참을만큼 참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그녀는 전력으로 그에게 반항할 수 있었다.자세만 정확하다면 그를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지금도 그녀가 두 손을 꽉 잡고 있으니 그는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소욱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지금 내가 너를 강요한다 하였느냐? 하지만 짐이 하고 싶은 것이 어디 고작 이뿐일까!”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개 같은 황제를 죽이자!”“인정머리도 없는 황제! 맹 소장군을 죽인 복수를 하러 왔다!”“맹 소장군은 북부를 수호한 영웅인데 감히 그런 사람을 죽이다니!”조금 전까지 팽팽하게 대치하던 두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고 마차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통나무가 앞길을 막고
강림은 그동안 한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오늘도 주루에서 밥을 먹다가 옆방에서 개 같은 황제를 죽이자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동해 그쪽으로 다가갔다.그들의 입을 통해 맹 소장군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치미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지인을 통해 그는 맹 소장군이 소환과 막역한 사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적 있었다.그러니 무조건 힘을 보태고 싶었다.강림은 친우의 친우는 내 친우라는 사상을 가진 자였다.물론 그의 그런 생각은 봉구안이 보기에 멍청하기 그지없었다.대체 왜 안락한 삶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이 사단을 일으킨단 말인가!그녀는 달려오는 강림을 보자 소욱의 지시를 기다리지도 않고 한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은 채 몸을 날렸다.쾅!강림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이러면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동료들 손에서 칼을 빼앗고 이를 갈았다.“죽여라!”봉구안은 순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멍청한 자식 같으니!’다급한 상황에 그녀는 은침을 꺼내 뿌렸다.쾅!드디어 강림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봉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얼마 안 가 소동을 부린 강호 인사들은 끌려서 관부로 행했다.뒤늦게 도착한 관료들은 황제의 마차 밖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사죄를 빌었다.“폐하,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소신 바로 저것들을 철저히 조사하고 엄벌을 내리겠습니다!”강호의 떨거지들 주제에 감히 군주의 목숨을 노리다니!마차 안에서 봉구안은 소욱에게 권유하듯 말했다.“폐하, 이는 맹교먹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일이고 민심이 흉흉한 와중에 저들의 목숨을 취한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하지만...”관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되었든 황제를 시해하려 시도한 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소욱이 입을 열었다.“황후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참수는 면하고 며칠 가둬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널렸고 그 역시도 이 정도 자객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하물며 황후가 말한 것처럼 저들을
장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황후가 과거 자신을 구했던 그 맹 소장군이라니!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일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맹교먹의 말만 믿고 황후에게 시비를 걸고 황후가 가짜라는 것까지 끄집어내려 했다니!맹교먹 같은 사칭범에게 속아서 하마터면 진짜 구명 은인을 죽일 뻔했던 것이다.장공주는 깊은 후회가 몰려와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봉구안은 손목에 끼워진 팔찌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스치는 생각이 있어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장공주는 착잡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황후…”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졌다.“소장군의 팔목 굵기는 내가 직접 쟀습니다. 지금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까?”장공주는 절박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말했다.봉구안도 미간을 찌푸렸다.“장공주…”장공주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제가 참 바보였습니다. 맹교먹 같은 간신배의 말을 믿고 황후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요. 저를 탓하시고 못 믿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러서 더 이상 황후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네요!”장공주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봉구안은 애써 침착하며 장공주를 불렀다.“장공주…”장공주가 재차 그녀의 말을 잘랐다.“당신은 분명한 맹 소장군입니다. 그런데 여태 부인하고 계시는 이유가 군주를 기만한 죄 때문입니까? 하긴, 폐하는 고집스러운 분이라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필히 용서하지 않을 테지요.”“걱정하지 마세요.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평소의 교만하고 고고했던 장공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팔찌를 빼서 상대에게 돌려주었다.장공주는 팔찌의 갈라졌던 부분을 매만지며 추억에 잠겨 말했다.“그러고 보니 참 이상합니다. 멀쩡하던 팔찌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파열되었어요. 흠집이 있어서 창고에 두고 맹교먹에게 선물하지
장공주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맹교먹이 순조롭게 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비영령 덕분이었다.사실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황제가 이렇게 빨리 알아낼 줄은 뜻밖이었다.게다가 자신에게 심문 어조로 캐묻고 있는 황제의 태도도 처음이었다.곧이어 소욱은 화제를 돌려 정중하게 그녀에게 경고했다.“누님, 이 일로 누님의 죄를 캐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영화궁에는 적게 걸음하셨으면 합니다.”장공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녀는 소욱을 빤히 쳐다보며 당당히 말했다.“폐하, 즉위한지 7년 정도 되었지요? 아직도 자식을 보지 못한 게 이상합니다. 할마마마께 들었는데 황후가 회임을 하기 전에는 다른 후궁을 품지 않겠다고 하셨다면서요?”“누이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폐하께선 능연이에게 총애를 주셨고 정비도 품었지요. 하지만 회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가 후궁에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누이의 착각일까요?”소욱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장공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잔소리하듯 말했다.“누이인 나니까 폐하께 이런 간언도 드릴 수 있는 거지요. 지금은 황후를 괴롭힐 것이 아니라 옥체부터 잘 보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다가는 회임을 하더라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토양이 좋아도 종자가 제 구실을 해야 말이지요.”황제의 등 뒤에 선 유사양은 그 말을 듣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아무리 황제의 누이라고 할지언정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소욱의 주변으로 차가운 기운이 퍼져나갔다.다른 사람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면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짐이 명하노니, 내일부터 장공주를 위해 부마 후보를 알선하도록 하거라.”장공주의 안색이 급변했다.“폐하! 어찌…”소욱이 냉소를 지었다.“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여인이라면 계속 친정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물며 누이는 장공주의 신분이지 않습니까.”말을 마치 그는 장공주를 지나쳐 영화궁으로 들어갔다.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