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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Penulis: 노에빌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2 16:46:40

서울중앙지방법원. 

오전 9시 55분. 강태준은 법정 앞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상대방 측 변호사 아직 안 왔습니까?”

“아니요. 방금 도착했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태준은 고개를 들었다.

“누구죠?”

“차해린 변호사입니다.”

태준의 손이 멈췄다. 그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차해린. 최근 몇 년 사이 굵직한 사건마다 이름을 올린 변호사였다. 승률은 높았다. 수단은 가리지 않는다는 평도 있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협상보다 소송을 선호했다. 의뢰인의 사정 따위보다 자신이 이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변호사. 태준과 비슷했다.

그래서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상대였다. 그런데. 법원 복도 끝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재킷. 정돈된 셔츠. 높은 구두. 한 손에는 판례집이 들려 있었다. 차해린이었다.

태준은 그녀를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이 먼저 반응했다.

낯선 호텔. 붉은 조명. 술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여자. 그리고 아침. 눈을 떴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던 여자. 그 여자였다.

태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설마.”

해린 역시 그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왔다. 태준은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해린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차해린입니다.”

태준은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웃음이 나왔다.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군. 그는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강태준입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해린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빼냈다.

 

“이번 사건 상대방 대리인이시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태준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해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썹을 살짝 올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요.”

태준이 웃었다.

“그냥 처음 보는 사람 같아서.”

해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처음 보는 사람 맞는데요.”

“그래요?”

“네.”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네.”

그가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아닌데.”

해린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기억 안 납니까?”

“뭘요?”

“3년 전 출장.”

정적.

해린은 그를 바라봤다.

“출장은 많이 다녀서.”

“호텔.”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태준이 낮게 웃었다.

“그날 아침에 사라졌잖아요.”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확신했다. 역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일부러 아주 태연하게 물었다.

 

“그날 밤 일도 기억 안 납니까?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강렬하고.”

해린이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변호사님.”

“네.”

“법정 들어가기 전에 상대방 변호사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는 취미가 있으세요?”

 

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왜요?”

해린이 그의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저는 일할 때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는 걸 싫어해서.”

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차해린 변호사.”

해린이 멈췄다.

“네?”

“저도 그래요.”

그녀가 돌아봤다. 태준이 웃고 있었다.

“일할 때는 감정 같은 거 안 끌어들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철저하게 일만 합시다.”

해린도 웃었다.

“좋죠.”

그리고 법정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날 재판은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태준은 상대방 측 준비서면에서 해린이 숨겨놓은 허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해린은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았다. 즉석에서 논리를 뒤집어 반박했다. 판사가 다음 쟁점을 제시하자 태준은 이미 준비해둔 자료를 꺼냈고,해린은 그 자료의 반대편 논리를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수를 읽고 있었다.

재판이 끝난 뒤. 의뢰인들이 먼저 빠져나갔다. 복도에 남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해린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태준이 웃었다.

“차 변호사님도.”

“칭찬으로 들을게요.”

“칭찬 아닙니다.”

해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요?”

태준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경고예요.”

“무슨 경고요?”

“앞으로 재미있겠다고.”

해린이 웃었다.

“저는 재미없는 재판을 싫어해서.”

“저도요.”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섭섭하네요.”

“뭐가요?”

“그날 밤에는 그렇게 솔직하더니.”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 태준이 웃었다.

“오늘은 너무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서.”

해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태준 변호사님.”

“네.”

“그날 밤은 실수였어요.”

태준의 눈빛이 변했다. 해린은 웃었다.

“그러니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태준이 낮게 말했다.

“실수라.”

해린이 멈췄다.

“그럼 다행이네요.”

“뭐가요?”

태준이 웃었다.

“나만 실수한 건 아니었나 보니까.”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여자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피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 태준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법정에서는 상대방. 사적으로는 모르는 사람. 그런데 하필이면, 자꾸만 눈이 가는 여자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차 변호사.”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네.”

“오늘 저녁 시간 있습니까?”

해린이 천천히 돌아봤다.

“업무적인 질문인가요?”

“아뇨.”

“그럼 없어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태준이 웃었다.

“역시. 맞네요.”

“뭐가요?”

“나 피하는 거.”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착각 아닙니다.”

“그럼 자신감이 너무 과한 거고.”

“그럴 수도 있죠.”

태준은 여유롭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뭔데요?”

“차해린 씨.”

그가 처음으로 존칭을 뺐다. 해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

“당신도 나 기억하고 있어.”

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태준이 천천히 웃었다.

“그날 밤.”

한 걸음.

“당신이 먼저 내 넥타이를 잡아당겼던 것도.”

또 한 걸음.

“내가 키스했을 때 도망가지 않았던 것도.”

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아침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것도.”

태준이 그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전부 기억나죠?”

해린은 그를 올려다봤다.

“기억나요.”

처음으로 인정했다. 태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런데 왜 모르는 척했어요?”

“끝난 일이니까.”

“나는 안 끝났는데.”

그 말에 해린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맞아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알아서 할 겁니다.”

“뭘요?”

“안 끝난 걸 끝내든가.”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면 다시 시작하든가.”

해린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강 변호사님.”

“네.”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태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걸 이제 물어봅니까?”

“확인하는 거예요.”

“그럼 대답해드리죠.”

그가 조금 몸을 숙였다. 귓가에 닿을 듯 낮은 목소리였다.

“관심 있습니다.”

해린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생각보다 많이.”

태준은 그대로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해린이 뒤를 돌아봤다.

“뭘요?”

태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업무에는 감정 안 섞을 테니까.”

“…….”

“대신.”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업무가 끝난 뒤에는 장담 못 합니다.”

***

그날 저녁.

해린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오늘 재판 기록이 떠 있었다. 하지만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그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관심 있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미쳤나 봐.”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해린은 한참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누구세요?”

잠시 후.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해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제 번호를..”

“변호사잖아요.”

태준이 웃었다.

“찾으려면 못 찾을 건 없죠.”

“강태준 씨.”

“네.”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거 불쾌합니다.”

“그럼 끊어요.”

 

해린은 바로 끊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을 태준이 알아챘다.

“왜 안 끊어요?”

“…….”

“나도 궁금했거든.”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날 밤 당신은 왜 도망갔는지.”

해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태준이 천천히 말했다.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는지도.”

뚝. 전화가 끊겼다. 해린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비서가 급하게 들어왔다.

“차 변호사님.”

“네?”

“내일 재판 관련해서 상대방 측에서 추가 자료를 보내왔는데요.”

해린이 자료를 받아들었다. 첫 장을 넘긴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맨 아래 적힌 담당 변호사 이름. 강태준. 그리고 그 밑에 손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내일 봅시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말고. 해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

 

“재밌네.”

그녀가 서류를 덮었다.

“이번엔 내가 안 도망가.”

하지만 해린은 아직 몰랐다. 내일 법정에서 벌어질 일이, 단순한 기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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