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월의 작달비가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던 밤이었다. 사방이 캄캄한 커다란 전원주택은 숨소리조차 삼킨 듯 고요했다.
톡, 톡, 톡….
거센 빗줄기가 정한의 실루엣이 비친 거실 통 창을 집요하게 두드렸다.
습하고 눅눅한 공기가 실내로 스며들어 그의 발목을 천천히 휘감았다.
그럼에도 그는 미동도 없이 서서, 그저 내리는 비를 메마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한참 만에야 그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무심히 쓸어 넘기자 가늘게 좁혀진 눈매가 서늘하게 빛났다.
차가운 공기, 숨 막히는 정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속에서조차 감출 수 없는 버려진 더러운 기분까지.
운치 있는 집은 주인의 성미를 닮아 고독과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
감각을 더듬듯, 기억을 끌어올려 자연스레 해야 할 일처럼 온몸의 감각들을 일제히 일깨우려 애썼다.
“…진혜서.”
입술 사이로 나온 이름이 유난히 조용하고, 애달프게 흘러나왔다.
귓가에 맴돌던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 앞서 걷지만 느렸던 발소리와 불안할 때면 뜯던 손톱 끝의 작은 소리.
그가 기억하는 그녀는 늘 소리로 남아 있었다.
이내 거슬리는 빗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접으라 채근했다.
정한의 눈이 거칠게 떠졌다.
일그러진 시선이 창 너머 정원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나무를 사납게 때리고 있었다.
이래서 비 오는 날이 싫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방식을 모조리 흐트러뜨리니까.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점점 더 짙게 가라앉았다.
“……진혜서.”
이번엔 조금 전과는 달리 단단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가에는 지워지지 않는 쓸쓸함이 걸려 있었다.
다시 그 계절에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넌 여전히 그대로일까.
이런 나의 곁에 넌 또 다가와 머물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오지 않으면 제가 가면 그만이었다.
*
“…온광고등학교 건배!”
비가 갠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술집 안에서 일곱 남녀의 목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야, 너희는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동창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술자리는 내내 자연스럽게 10년 전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혜서는 전주에서 짧게나마 다녔던 온광고등학교 동창회에 처음 참석했다. 남자친구이자 곧 약혼자가 될 현민 역시 같은 동창이었다.
“너희 둘은? 어떻게 지냈어? 혜서는 더 예뻐진 거 같아.”
친구 주영이 함께 나란히 앉아 손을 잡은 혜서와 현민을 보며 신기해했다.
어린 시절 아역배우와 모델 경험이 있는 혜서는 그만큼 야리야리한 몸매와 큰 키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비슷하게 지냈어.”
“현민이 너도 잘나가더라?”
시선이 쏠리자, 혜서가 부자연스럽게 잡힌 손을 슬며시 빼냈다. 그 순간, 현민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야, 얘네 말도 마. 곧 결혼한대.”
혜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의 모든 러브스토리를 꿰고 있는 새롬이 대화에 불쑥 끼었다.
“진짜? 만난 지 얼마 안 됐다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언제?”
“가을쯤? 아직 서로 부모님 정도만 뵀어. 날짜 정해지면 말할게.”
결혼 얘기에 난감해 하는 혜서 대신 현민이 나서서 대변했다.
“그래도 축하해. 둘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다.”
“놀랍다. 난 혜서 네가 그렇게 다정한이랑 죽고 못 살길래 걔랑… 아, 왜!”
“…쉿!”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꺼내선 안 될 이름을 꺼낸 듯 나온 이름에 일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방심할 틈도 없이 마주한 그의 이름에 잔을 들던 혜서가 주춤거렸다.
다정한.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오랜만에 듣게 되자 지금껏 차분했던 혜서가 동요했다.
“내가 뭐 죽은 애 얘기 꺼낸 것도 아니고, 뭘 그러냐?”
“조용히 해라… 박태형.”
“오히려 네들이 이러는 게 혜서한테 더 불편한 거야, 안 그러냐. 진혜서?”
“아, 적당히 하라고.”
항변하는 태형의 행동을 막으려 새롬이 복화술과 함께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댔지만 한번 터진 태형의 입은 멈출 새를 몰랐다.
“맞아, 네 말대로 죽은 사람도 아닌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들었던 잔을 가볍게 비워 낸 혜서가 도로 차분함을 되찾은 듯 웃어 보였다.
이런 상황을 아예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막상 닥친 상황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잊고 싶은 이름. 잊어야 할 사람. 잊히는 기억.
다시 앞에 놓인 술잔으로 손을 뻗는 혜서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오직 현민만이 눈치챌 뿐 아무도 그녀의 새카만 속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윤미가 비릿한 미소를 억지로 지었다.“그만들 해. 겨우 밥 한 번 먹는 자리가지고 불편하게 만들지 마라.”“아버지!”근현의 말에 태현이 욱해 소리쳤다.“겨우 밥 먹는 자리라니요? 그래도 태현이가 이번에 열심히 해서 상무자리까지…!”“그게 본인이 열심히 해서야? 어디가서 그런 얘기 꺼내지도 마. 얼굴 들기 창피하니까.”“…여보!”태현의 능력을 괄시하는 근현을 향해 윤미까지 함께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마주앉아 얼굴이라도 보면 된 거다. 늦게 까지 고생이다, 정한아.”“앞으로 진행 될 거래가 많으니 당연합니다.”“아직도 난 네가 백화점으로 간 게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경험삼아 갔던거라면 충분하니까 다시 본사로 들어와.”“…….”정한과 근현의 대화에서 밀려난 태현이 이를 악물고 버텼다.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윤미의 눈빛에는 근현을 향한 원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다 회장이 만족스러운 듯 정한을 바라봤다. 정한과 두 사람 사이를 빤히 바라보던 윤미는 놓인 냉수만 벌컥 마셨다.짝!둔탁한 마찰음이 다 회장이 자리를 비운 다이닝룸에 울려 퍼졌다.아직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정한의 앞으로 다가온 윤미가 그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어머니?”정한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를 곱씹듯 되뇌던 윤미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내 이를 악문 채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더러운 입에서 잘도 어머니라는 소리가 나오는구나.”“중요시하는 가족놀이에 맞춰드린 것 뿐입니다.”“못 본 사이 많이 가증스러워졌구나.”“요즘 아버지 믿고 존나 까분다니까, 이새끼.”옆에서 지켜보던 태현이 비웃듯 끼어들었다.“어머니도 싫다, 아줌마도 싫다. 저더러 어쩌라는 건…!”탁.윤미의 손이 다시 올라오자 이번엔 정한이 맞아주지 않고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네가 감히.”“언제까지 제가 젖비린내나는 애새끼로 보이세요?”“뭐?”“야, 너 그 손 안 놔?”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한을 보고
‘첫사랑? 고작 어린 애들 소꿉놀이였는데 뭐.’‘고작 그 소꿉놀이… 엄청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은데.’‘뭐?’‘왜 그렇게 신경 쓰고 있냐고. 고작 그 첫사랑으로.’현민을 따라 정한이 웃음을 거뒀다.‘그만해라. 재미없다.’‘왜 그렇게 떨어?’‘그만하라고.’‘뭐라도 들킬까 전전긍긍대는 쥐새끼 마냥.’‘무슨 말을 하는…!’‘지금을 즐겨. 잠시나마 혜서가 네 곁에 남아있을 때.’네가 뭘 했든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그 확신에 찬 눈빛이 짜증났다. 혜서는 끝까지 네 곁에 남을 수 없다는 그 확고한 말이 계속해서 현민을 괴롭혔다.“씨발….”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꽉 쥔 주먹을 더욱 꽉 움켜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분했다.들키고 싶지 않은 것.과거 정한이 떠나고,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던 혜서는 마치 겨울잠을 자는 사람처럼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현민아, 네가 혜서 좀 옆에서 많이 챙겨줄래?’걱정을 가득 품고, 그녀의 집에 찾아 갔을 때 혜서의 모친 은숙이 눈물을 글썽였다.‘제가 혜서 잘 챙길게요.’‘그리고 이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갖고는 있었는데.’‘이건….’해외에서 정한이 보낸 편지들이었다. 받는이가 모두 진혜서라고 적혀있었다.그토록 그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한의 연락들이었다.‘알잖니. 서로 다시 만나서 좋을 거 없다는 거. 혜서도 정한이도 모두 죽을 뻔 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제발 도와줄래, 현민아?’현민의 양손 가득 그녀가 건넨 편지들이 채워졌다.혜서가 애타게 정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정한이 수도 없이 혜서에게 닿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수많은 갈등과 고민 속 현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짧은 순간 판단이 서질 않았다.‘걱정마세요. 절대 다시는 둘이 만나는 일 없을 거예요.’그래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했다.‘앞으로도 저한테 주세요. 제가 잘 해결할게요.’그렇게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일 년이 됐다. 일 년은 곧 3년이란 커
“너 하나 보고 달려왔어.”무례하고 비정하게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다정해졌다.“이유는 천천히 말해 줄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진혜서.”혜서의 어깨를 부여잡은 정한의 손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마주한 눈빛 안에는 말로 설명하지 못할 애처로움 마저 담겨 있었다.“널 다시 만난 이후로 거짓은 아무것도 없었어. 보고 싶었어, 진혜서.”“…이거 놔.”“이미 네가 상처 받는 걸 피할 방법은 아무데도 없는 것 같거든.”함부로 말하는 정한을 향해 눈을 치켜세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혜서는 무력함을 느꼈다.“다른 새끼 주느니 내가 가지는 게 낫지.”“넌 내가 그렇게 쉬워?”혜서에게서 손을 땐 정한의 눈빛의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이처럼 마음을 가라앉히면 정한은 또 어김없이 혜서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마치 계속 화를 내라고 채근 하듯 그는 번번히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유도 들을 수 없고, 그저 묵묵히 기다리라는 그의 말은 더 이상 혜서에게 통하지 않았다.“넌… 넌 뭐가 그렇게 매번 쉬워?“…….”“사라지는 것도 나타나는 것도 다 제멋대로야.”“쉬운 적 없었어.”갈라진 그의 음성이 깊이 말하지 않아도 제 속을 알아달라는 듯 애처롭기까지 했다.“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을 거면 흔들지도 마.”“…….”“네가 원하는 게 내가 이렇게 화내고 망가지는 거라면 계속 해봐.”“…….”“뭐든 네가 원하는대로 안해 줄 거야. 난 망가지지 않을 거고, 네가 숨기는 걸 반드시 찾아낼 거야.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왜 이러는지 진짜 이유를 너무 알고싶어졌거든.”무심하게 번진 정한의 눈동자가 더욱 혜서의 눈동자를 향했다. 꼭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갈게.”서둘러 혜서가 짐을 챙겨 카페를 빠져나갔다.그런 혜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한이 앞머리를 거칠게 넘겼다.떠나는 혜서를 뒤쫓으려던 발걸음이 얼마 못가 우뚝 멈춰섰다.‘…그러니 부탁할게 정한아. 우리 혜서 다시는 찾아오지마.’머릿속에서 간
이 순간 이유가 어찌됐든 자신에게 의지한 채 품에 안긴 혜서를 놓고 싶지 않았다.품속에서 혜서는 작은 몸짓으로 무력하게 떨고만 있었다. 처음 적의가 가신 혜서의 눈동자가 애처로웠다.늘 제 앞에서 당돌하게 달려들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이런 눈빛과 모습은 즐겁지 못했다.예전에도 이랬을까. 내가 없는 빈 시간동안 넌 늘 이렇게 혼자 아파하고 있었을까.사무치는 미안함과 아무말도 해주지 못하는 말들만 입안 가득 곱씹어지다 삼켜졌다.정한의 팔을 손끝으로 겨우 붙잡아 바들바들 떠는 혜서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한은 몸속 깊은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름을 느꼈다.늘 당차던 모습에 10년 전의 아픈 기억들은 모두 지우고 잘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저처럼 그녀 역시 제자리였다.같은 아픔을 알고 공유하는 이 순간 두 사람 주변은 무엇하나 침범하지 못했다.“마셔.”진정을 되찾은 혜서의 앞으로 따뜻한 캐모마일 차 한 잔이 테이블위에 놓였다.“……미안해.”“미안할 짓 한 거 없어.”“그래도 미안.”카페에 마주보고 앉은 혜서가 고개를 작게 숙였다.정한의 뺨에 보이는 생채기가 정작 혜서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팝업 스토어 입점에 필요한 서류 목록들이랑 가계약서야. 꼼꼼히 읽어봐.”역시나 정한은 팝업 스토어 건으로 만남을 자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 앞에 놓인 서류봉투를 혜서가 힘없이 들어올렸다.“응.”“브랜드 소개서가 가장 중요해. 필요하면 전문가도 붙여 줄게.”“아니야, 우리가 알아서 할게.”잠잠히 봉투를 내려다보는 혜서의 눈빛에 힘이 없자 정한이 짧은 숨을 속으로 삼켰다.무슨 일이었는지 묻지 않아도 어둠속에서 떨고있던 혜서와 눈을 맞췄을 때 듣지 않아도 모든 정황을 알 수 있었다.여전히 조일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애써 괜찮냐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어설픈 위로가 더 자극을 하는 법이니까.“처음엔 원망했어.”천천히 시선을 정한의 눈에 맞춘 혜서가 조용히 속내를 끄집어냈다. 눈빛에는 감정을 담아두
6개월 동안 일상을 망가뜨릴 만큼 집요하게 따라다녔고, 심지어 집 앞까지 찾아왔던 남자.결국 견디지 못한 혜서는 대인기피증까지 겪었고, 치료를 받으며 모델일과 아역배우 생활을 모두 그만둬야 했다.시간이 흐르며 잊었다고 생각했다.때때로 누군가 뒤에서 따라 걷거나, 비슷한 체격의 남자를 마주칠 때 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몇 번이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도움을 받은 이후로, 혜서는 어두운 길을 피하게 됐다.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소름 돋는 목소리와 얼굴이 여전히 혜서를 괴롭혔다.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야.다른 사람의 발걸음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급격히 손이 떨렸다.한동안 괜찮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다.‘네가 먼저 친절하게 굴어놓고, 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그를 피해 살던 전주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조일관은 집 안으로 무단 침입해 미성년자였던 혜서를 납치까지 하려 했다.날카로운 칼을 들이밀며 강압적으로 자신의 위로 덮쳐 바닥에 찍어누르던 그 소름끼치던 얼굴과 힘이 자꾸만 생각나자 혜서는 완전히 걸음을 멈춰세웠다.그 과정에서 정한이 혜서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싸우면서 대신 흉기에 찔렸다.그 당시 스토킹으로는 형량이 낮았으나 정한이 흉기에 의해 다치면서 살인 미수죄가 성립 돼 높은 형량을 받아 복역중이었다.아마도 정한의 뒤에 한성의 뒷배가
“팝업 스토어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까.”“……네. 단기간 화제성을 만들어 고객 유입을 끌어내는 이벤트… 죄송합니다.”설명을 이어가던 윤 비서가 스스로 말을 끊었다.이미 여운은 그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퍼스트 메모리는 단 한번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향수였다. 그와 더불어 그 향수를 사용했던 디자이너의 영향력까지.반응이 워낙 좋았던지라 한성의 서포트를 받는다면 더욱 화제성이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운이 성과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을때의 이야기였다.굳이 한성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여운만큼의 화제성은 없지만 튼튼한 후보 기업들이 충분했으니까.“중단된 재료야 비슷한 재료를 찾아 대체하면 되는 문제이고, 우리 한성이 지원해 TF팀까지 붙여서 자체 개발까지 이어가면 그 다음으로 성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죠.”담담했지만 확신에 찬 말투였다.“잘되면 장기적으로 끌고 가면 되는 거고.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윤 비서의 시선이 흔들렸다.“업계에서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오혜선 디자이너 이름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요. 젊은 여성층, SNS 파급력에 강한 인물이라 못해도 중간은 가겠죠.”단순히 여운에게 집착하는걸로만 보였던 정한에게 큰 계획이 있음을 알아차린 윤 비서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ld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