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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첫사랑

Author: 유다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30 12:05:43

그랬기에 덩달아 더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현민의 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역시 진혜서! 보기랑 다르게 예전부터 시원시원하다니까?”

술에 취했는지 눈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형의 행동에 모두들 험한 말을 속으로만 삼켜댔다.

“그래서 말인데 다정한은 오늘 안 오냐?”

“우리랑 급이 맞아 여길 오겠어?”

모두가 그를 떠올리며 자연스레 대기업 한성그룹을 따라 떠올렸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그가 학창 시절 뒤늦게 국내 재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성 그룹의 사생아로 밝혀진 후 온광고등학교는 한동안 정한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었다.

그랬던 그는 현재 핵심 계열사 한성 백화점의 대표에 위치해 있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 시골학교에서 재벌 아들에, 의사에, 아역배우까지… 이쯤 되면 그 학교에 뭐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넌 왜 그러냐 박태형?”

“뭐?”

새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남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눈치 없는 태형과 선혁이 분위기를 계속 건드릴수록, 술자리는 점점 불편해졌다.

“너희는 다정한 눈 안 보인다고 가장 무시해놓고 이제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뻔뻔하다 생각 안 해?”

결국 새롬이 터졌다.

“내가 언제 무시했어! 그냥 조금 장난만 친 거지.”

“장난은 서로가 좋아야 장난이지. 지금이었으면 학폭이야!”

“씨발! 그렇게 따지면 네들은? 네들은 뭐 다정한 무시 안 했냐? 솔직히 여기서 진혜서 말고 그때 다정한 상대나 한 놈 있어? 어? 있냐고!”

격양되어 소리치는 태형 덕분에 모두들 슬슬 자리를 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다정한은 자발적 왕따였잖아. 오히려 걔가 혜서 말고 우리 상대나 해줬냐.”

석현까지 거들자 분위기는 완전히 기울었다.

“그만.”

낮고 단단한 현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적당히 하자, 태형아. 좋은 날에 없는 사람 얘기로 분위기 흐리는 거 보기 안 좋다.”

“…그, 그래.”

현민의 차갑게 식은 얼굴을 확인한 태형이 움찔했다.

“역시 반장.”

반장이었던 현민을 향해 새롬이 애써 작은 농담을 던져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했지만 이미 흐트러진 공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외부 화장실을 핑계로 술집을 빠져나온 혜서는 비가 그친 뒤 말갛게 개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공기와 선선하게 스며드는 밤바람이 몸을 스쳤다.

결국 술집을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골목까지 무작정 걷기로 했다.

젖은 공기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잔머리를 끈적하게 간질였다.

‘…난 혜서 네가 그렇게 다정한이랑 죽고 못 살길래 걔랑….’

태형의 말이 마음속에 걸린 채 떨어지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겨우 비추는 골목 어귀에서 혜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래, 그랬었지.

고작 열아홉, 그가 스무 살.

오늘 같은 계절이었다.

다정한.

그 이름 하나로도 가슴이 다시금 조용히 내려앉았다.

어디선가 그의 따뜻했던 음성이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넘어질까 봐, 혜서 네가 조금 앞장서서 걷는 거지?’

세상을 볼 순 없어도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던 사람이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캄캄한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 속을 헤매던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무작정 괴한에게 달려들던 때가 떠올라 가슴 시렸다.

‘꼭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다른 남자 만나지 마, 진혜서.’

천지가 라일락 향이 번지던 5월에 만나, 숨 막히게 뜨겁던 여름을 지나 차갑게 식어버린 겨울에 끝나버린 관계.

결국 정한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 모든 기억들이 여전히 한 덩어리로 남아 혜서의 가슴을 짓눌렀다.

정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해 이날 이태껏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간절했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원망만이 남아버렸다.

“…정신 차려. 진혜서.”

스스로를 다그치듯 중얼거린 혜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잊어야 했다. 이미 그와의 관계는 끝난지 오래였다. 추억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혼자만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게 우스울 정도로.

애써 정한의 모든 걸 지우고 살았다. 불현 듯 떠오를 때면 안 하던 청소를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그랬다.

이제 곁에는 현민이 있다. 곧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러니 그때를 더 이상 떠올리면 안 됐다.

쓸쓸함이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혜서는 더 무너지기 전에 돌아서려 했다.

“안녕.”

“……!”

멀리서 익숙한 음성이 그녀를 붙잡아 세운 건 그때였다.

걸음을 옮기려던 혜서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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