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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깨진 잔 위에 남은 두 해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7 12:08:12

방 안에서 한동안 이어지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복도 끝에 서 있던 장미는 담배를 몇 개째 태웠는지 셀 수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던 가드들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미는 결국 담배를 비벼 끄고 문 앞으로 갔다.

똑똑.

두 번.

평소 같으면 노크 따위 하지 않았을 방이었다.

잠시 뒤 안에서 도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장미는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깨진 술병과 잔 조각이 널려 있었다. 테이블 위도 엉망이었다.

도진은 소파 옆에 서서 바지를 주섬주섬 여미고 있었고, 햇살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속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장미의 얼굴이 굳었다.

“오햇살.”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게 더 속을 뒤집었다.

“너 괜찮아?”

“응.”

“진짜?”

“응.”

햇살은 흩어진 흰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정리하고 원피스를 집었다.

장미는 도진을 한 번 노려봤다.

도진은 태연하게 셔츠 단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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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5화. 붉은 구두가 돌아온 밤

    앨리의 문이 열리자 카운터에 있던 장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새빨간 드레스. 새빨간 구두. 입술까지 붉게 칠한 햇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햇살?” 햇살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갔다. 장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두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언니.” “너 여기 왜 왔어.” 장미의 목소리가 바로 낮아졌다. “내가 2년 동안 오지 말랬지? 아니, 네가 안 온다며.” 햇살은 장미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까르륵 웃었다. “나 오늘 손님이야.” “뭐?” “손님.” 고개를 든 햇살이 눈을 휘었다. “도진 오빠도 올 거야~.” 장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햇살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너 장례식 갔다 왔지.” “응.” “무슨 일 있었어.” “많았지.” “울었어?” 햇살은 웃었다. “아니.” 그 대답이 장미의 얼굴을 더 굳게 만들었다. “진짜 하나도?” “응.” “오햇살.” “언니.” 햇살이 다시 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묻지 마.” 장미의 손이 천천히 햇살 등을 감쌌다. “……그래.” “술이나 줘.” “너 술 처먹으려고 여기까지 왔냐.” “응. 비싼 걸로.” “미친년.” “손님한테 서비스가 왜 그래?” 장미가 결국 코웃음을 쳤다. “돈은 있냐?” “우리 도진 오빠 돈 많아.” “남의 돈으로 큰소리는.” “애인 포함비.” 햇살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단골방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 써도 돼?” “오늘만.” “역시 우리 언니.” 햇살은 장미 팔에 매달린 채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자기가 손님을 받던 방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소파 가운데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상하다.” 장미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가.” “맨날 저쪽에 앉았는데.” 햇살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오늘은 여기 앉으니까.” 장미는 아무 말 없이 잔을 꺼냈다. 햇살은 붉은 구두를 벗어 소파 아래로 밀어놓았다. 맨발이 되자 그제야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4화. 너무 늦게 무너진 사람

    붉은 구두 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빈소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태만은 햇살이 사라진 쪽만 바라봤다. 열여덟. 그 어린 나이에 자기 집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태만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구석에 서 있던 진주의 오빠였다. 남자도 태만의 눈을 마주친 순간 얼굴이 굳었다. 태만이 걸어갔다. “태만아.” 누군가 불렀지만 듣지 않았다. 다가간 태만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남자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야!” 다시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니가 사람 새끼야!!!” 주먹이 또 날아갔다. 진주가 비명을 지르며 태만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 지금 뭐 하는 거야!” 태만이 진주를 거칠게 밀어냈다. “놔.” “우리 오빠야!” 그 말에 태만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진주가 숨을 삼켰다. “네 오빠지.” 태만은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봤다. “내 딸이 열여덟이었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어린애 방에 들어가서 그 짓을 해?” 진주의 부모가 당황해 다가왔고 태만의 부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주는 울먹이며 태만을 붙잡았다. “나는 몰랐어.” 태만이 웃었다. “몰라?” “진짜 몰랐어!” “햇살이는 네가 협박했다던데.” 진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태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박진주.” “태만 씨.” “빛나 자리 네가 뺏었으면.” 빈소가 조용해졌다. “조용히 살았어야지.” 진주의 입술이 떨렸다. “뭐?” “내가 너 사랑 안 하는 거 알면서 결혼했잖아.” “그걸 지금—” “그래도 버텼어.” 태만은 양가 부모를 차례로 바라봤다. 오래전 자신과 빛나를 갈라놓기 위해 협박하고 압박했던 사람들. 그때 그는 물러났다. 빛나와 햇살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믿었다. “저희 이혼합니다.” 진주가 눈을 크게 떴다. “진태만!” “끝낼 겁니다.” “건이 장례 중이야!” 진주의 절규에 태만이 천천히 돌아봤다. 눈빛은 차가웠다.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3화. 붉은 입술 끝에 남은 말

    빈소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햇살은 영정사진 앞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박진주와 태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두 사람?”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햇살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먼저 태만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대로 영정사진 속 진건에게 향했다. “내 소중한 두 사람을 두 사람이 없앴는데.” 말끝이 가벼웠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 햇살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자기 배를 가리켰다. “아니다. 셋이네.” 태만의 눈이 흔들렸다. “진건이 계진성 죽인 날, 내 아이까지 잃었지.” 박진주의 입술이 벌어졌다. 햇살은 웃었다. 눈물은 없었다. “근데 한 사람 가지고 왜들 죽으려고 해?” 조문객 몇 명이 숨을 죽였다. 진주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햇살을 노려봤다. “너 지금 우리 건이 장례식장에서 무슨—” “아빠.” 햇살이 그 말을 잘랐다. 태만의 어깨가 움찔했다. 몇 년 만에 들은 호칭이었다. 하지만 따뜻함은 하나도 없었다. 햇살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아직도 모르겠지?” “뭘 말하는 거야.” “저 여자 오빠.” 태만의 눈이 진주에게 향했다. 진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햇살은 그걸 보고도 웃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조용한 목소리가 빈소를 천천히 갈랐다. “아빠 없는 날마다 내 방에 들어왔어.” 태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뭐?” “내가 싫다고 해도.” 햇살은 잠깐 손목을 쓸었다. 아주 오래전 문고리가 돌아갈 때마다 몸부터 굳었던 기억이 스쳤다. 그래도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날 끌어안고 짐승처럼 헐떡였어.” “햇살아.” 태만이 한 걸음 다가왔다. 햇살도 바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지 마.” 태만의 발이 멎었다. 햇살이 진주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근데 저 여자가 나한테 그랬어.” 진주가 입술을 떨었다. “그만해.” “아빠한테 말하면 아빠까지 죽게 만들겠다고.” “거짓말이야!” 진주의 목소리가 터졌다. 햇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2화. 붉은 구두가 멈춘 곳

    다음 날 저녁. 도진은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 안방 쪽을 바라봤다. 한참 전부터 드레스룸 안에서 옷걸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뭐 하냐.” 대답은 없었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도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햇살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선을 따라 떨어지는 긴 원피스에 새빨간 구두. 입술에도 짙은 붉은색을 발랐다. 하얀 머리와 피부 때문에 색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장례식 간다며.” “응.” 햇살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래서?” “그 꼴로?” “예쁘지?” “장례식이라고.” 햇살은 작게 웃었다. “알아.” 검은색을 입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진건을 위해 슬퍼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햇살은 작은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오빠, 나 갔다 올게.”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응.” “같이 가.” 햇살이 뒤를 돌아봤다. “왜.” “너 거기 누구 있는지 알잖아.” “알지.” 박진주. 그리고 진태만. 햇살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도진이 재킷을 집으려 하자 햇살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오햇살.” “오빠까지 가서 뭐 하게.” 햇살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내가 죽였소? 하고 인사하게?” 도진의 손이 멈췄다. 햇살은 까르륵 웃었다. “그러니까 있어.” “웃기냐.” “안 웃으면 뭐 해.” 구두를 신은 햇살이 현관문을 열었다. 도진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연락해.” “응.” “문제 생기면 바로.” “알았어.” “내가 데리러 갈 거야.” 햇살이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금방 와~.” 문이 닫혔다. 도진은 한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다 담배를 깊게 빨았다. “진짜 미친년.” 하지만 차 키를 집지는 않았다. 햇살이 혼자 가겠다고 했으니까.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시선이 몰렸다. 검은 옷 사이를 걸어가는 붉은 드레스. 새빨간 구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1화. 복수 끝에 남은 빈자리

    며칠 뒤.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온 햇살은 교문 맞은편에 세워진 검은 차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차였다. 햇살은 어깨에 멘 가방을 고쳐 매며 피식 웃었다. “저 아저씨 또 왔네.”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자 익숙한 담배 냄새가 났다. 도진은 운전석에 기대 앉아 있었다. “학교 어땠어.” “죽을 것 같아.” “누가 건드렸어?”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과제가.” “그건 못 죽이는데.” “아쉽네.” 햇살은 가방을 뒷좌석에 던졌다. “근데 웬일이야? 오늘 바쁘다며.” 도진은 대답하지 않고 시동부터 걸었다. 차가 교문 앞을 빠져나간 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끝냈다.” 햇살이 창밖을 보던 얼굴을 돌렸다. “뭘?” 도진은 한 번 쳐다봤다.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햇살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진건?” “응.” 짧은 대답. 차 안이 조용해졌다. 도진은 햇살의 표정을 살폈다. 울지도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앞유리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뒤 햇살이 입을 열었다. “오~ 능력자.” 도진의 눈썹이 움직였다. 햇살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어디 장례식이래?” “……뭐?” “장례식장.” 도진이 햇살을 한 번 더 봤다. “가게?” “응.” “왜.” 햇살은 창문에 턱을 기댔다. “확인해야지.” “내 말을 못 믿어?” “그건 아니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직접 봐야 진짜 끝난 것 같을 것 같아서.”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가도 돼.” “왜?” “보고 나서 기분 더러울 수도 있으니까.” 햇살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 기분이 더 더러워질 데가 어디 있다고.” 도진의 손이 운전대 위에서 굳었다. 햇살은 그걸 보지 못한 척했다. “어디야?” “진태만 쪽에서 장례 치르고 있어.” 그 이름이 나오자 햇살의 눈빛이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아빠. 한때는 그렇게 불렀던 사람. 그리고 다시는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0화. 오래 묻어둔 이름

    한동안 창밖만 바라보던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도진은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찰칵. 붉은 불빛이 잠깐 그의 얼굴을 비췄다. 햇살은 도진의 가슴에 손가락을 올렸다. “오빤 누구였어?” 도진의 시선이 내려왔다. “뭐가.” “아까 생각난다며.” 햇살은 손끝으로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톡 건드렸다. “여기 깊숙이 박힌 사람.”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뒤 도진이 입을 열었다. “여자.” 햇살이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알아.” “평범한 여자였어.” “오빠랑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인데.” “그러니까 좋아했겠지.” 햇살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도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꽃집 했어.” 햇살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 “꽃집?” “응.” “이름은?” 도진은 담배를 입에서 뗐다. “서연.” 짧은 이름 하나가 방 안에 떨어졌다. 햇살은 그 이름을 따라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고 만났어. 그냥 사업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 “나중에는?” “알았어.” “도망갔어?” 도진이 피식 웃었다. “안 갔어.” “간 큰 언니네.” “미친년이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햇살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봤다. “결혼하려고 했어?” 도진의 손이 멈췄다. 그것만으로 답은 충분했다. 햇살이 작게 말했다. “했구나.” “반지도 샀어.” 도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주지는 못했고.” 햇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끝내 건네지 못한 반지. 내일이면 말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음. 도진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렀다. “나 때문에 죽었어.” 햇살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정확히는 내 옆에 있어서.” “누가 죽였는데.” “그때 붙어 있던 놈들.” 도진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담담했다. 오래전에 너무 많이 되씹어서 감정조차 닳아버린 사람처럼. “겁주려고 데려간 거였는데 일이 틀어졌어.” 햇살은 더 묻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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