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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깨진 잔 너머의 약속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6 12:10:45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이 내민 조건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가늠하듯 얼굴만 바라봤다.

햇살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 앞으로 갔다.

“왜요. 겁나?”

“내가?”

“표정이 그런데.”

햇살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도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햇살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가 아니었다. 숨이 섞일 만큼 깊게 입술을 맞댄 뒤에야 천천히 얼굴을 뗐다.

“오빠한테는 재수없었던 계진성.”

도진의 시선이 햇살 입술에 머물렀다.

“나한테는 소중했거든.”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햇살은 도진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누구.”

“우리 엄마. 오빛나.”

도진은 가만히 들었다.

“근데 모르더라.”

햇살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박진주도, 진태만도.”

아빠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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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6화. 깨진 잔 너머의 약속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이 내민 조건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가늠하듯 얼굴만 바라봤다. 햇살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 앞으로 갔다. “왜요. 겁나?” “내가?” “표정이 그런데.” 햇살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도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햇살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가 아니었다. 숨이 섞일 만큼 깊게 입술을 맞댄 뒤에야 천천히 얼굴을 뗐다. “오빠한테는 재수없었던 계진성.” 도진의 시선이 햇살 입술에 머물렀다. “나한테는 소중했거든.”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햇살은 도진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누구.” “우리 엄마. 오빛나.” 도진은 가만히 들었다. “근데 모르더라.” 햇살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박진주도, 진태만도.” 아빠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손끝이 도진의 가슴께에서 멈췄다. “오빠도 있었을 거 아냐?” 도진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뭐가.” “잃기 싫었던 사람.”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은 그 침묵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단추 하나를 천천히 풀었다. 도진이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건데?” 햇살이 눈을 휘었다. “계약금 입금 중?” 도진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진짜 미친년이네.” “아까 알았다며.” 햇살은 잡힌 손목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으로 도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대신 약속 하나 할게.” “뭔데.” “2년.” 햇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껍데기만 옆에 있는 거 아니야.” 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심으로 다할 거야.” “진심?” “응.” 햇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딴 놈 안 쳐다보고.”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여기도 그만둬야지?” 도진이 이번에는 피식 웃었다. “내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다 정하네.” “계약은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5화. 붉은 연기 너머의 약속

    햇살은 진성의 이름이 나온 순간에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잔을 채우던 손을 멈추고 맞은편 남자를 천천히 바라봤다. “흐음~.”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표정 보니 꽤 우리 오빠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그쵸?”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햇살은 테이블 위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인 뒤 천천히 연기 한 모금을 뱉었다.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햇살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오빠.” 그리고 남자의 입술 사이에 담배를 가볍게 끼워줬다. “이름은 뭐예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곁에 있던 두 남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햇살을 봤다. 가운데 남자가 갑자기 껄껄 웃었다. “나 안 무섭냐?” 햇살도 따라 웃었다. “몸 파는 년이 사람 무서워하면 돼요?” 남자의 웃음이 더 커졌다. 담배를 손가락으로 받아든 그가 햇살을 흥미롭다는 듯 훑었다. “강도진.” “도진.” 햇살은 일부러 한 번 굴려 부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도진 오빠.” 도진이 옆에 앉은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나가 있어.” “형님.” “나가.” 두 남자는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 서 있던 장미는 그 둘이 나오는 순간 몸을 굳혔다. 안쪽 상황이 더 나빠진 건지, 오히려 나아진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방 안에서는 햇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병을 들었다. 도진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오빠가 제일 세다며?” “누가 그러던데.” “보면 알죠.” “뭘.” “나머지 둘은 오빠 눈부터 보던데.” 도진이 피식 웃었다. “눈치는 빠르네.”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았거든.” 햇살은 자기 잔에도 술을 따랐다.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성의 반지는 지금 캐비닛 안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비어버린 자리까지 전부 거래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오빠.” “왜.” “나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4화. 붉은 불빛 아래 닫힌 문

    장미가 카운터에서 장부를 넘기고 있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 가드 하나가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누나.” 장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왜.” “햇살이 들어간 방 있잖아요.” 그제야 장미의 손이 멈췄다. 가드의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다. “거기… JS파인데요.” 장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방금 밑에 애한테 들었어요. 저 사람들 JS파 맞대요.” 장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JS파. 이 바닥에서 이름만 들어도 먼저 눈을 피하는 조직이었다. 기분이 틀어지면 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앨리에서도 몇 번 받아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방에는 아무 여자나 들이지 않았다. 장미가 직접 들어갔다. 술을 따르고 기분을 맞췄다. 그것이 가게를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햇살이 앨리에 오기 전 한 번은 신입 하나가 그것도 모르고 그 방에 들어갔다. 잠시 뒤 울면서 나온 아이의 입술은 터져 있었고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날 이후 장미는 직원들에게 못을 박았다. JS파가 오면 무조건 자기부터 부르라고. “누가 햇살이 넣었어.” 장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가드가 침을 삼켰다. “예약 이름이 다르게 들어왔어요. 애들도 몰랐고요.” “씨발.” 장미가 장부를 덮었다. 곧바로 복도로 향하다 두 걸음 만에 멈췄다. 당장 문을 열고 햇살을 끌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진성이 그랬던 것처럼 문을 열고 사람 하나만 빼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JS파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면 햇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가게. 직원들. 가드들. 여기 있는 사람 전부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장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명이야.” “셋이요.” “누가 제일 위야.” “가운데 앉은 사람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술 얼마나 들어갔어.” “아직 많이는 아닌 것 같아요.” 장미는 담배를 꺼냈다. 손이 떨려 불이 한 번에 붙지 않았다. 찰칵. 두 번째에서야 작은 불꽃이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3화. 웃는 얼굴 뒤에 남은 이름

    햇살은 다시 앨리로 돌아왔다. 처음 며칠은 직원들 누구도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진성이 늘 서 있던 복도 끝을 햇살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나갈 때마다 괜히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햇살은 웃었다. 손님 앞에서도 웃었고, 직원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면 더 크게 웃었다. “왜들 그래. 나 귀신 봤어?” 예전과 다를 것 없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잘 웃었다. 술잔이 비기 전에 채웠고, 손님이 농담을 던지면 누구보다 먼저 받아쳤다. 싫은 소리를 들어도 웃었다. 술에 취한 남자가 허리를 끌어당겨도 웃었다. 방문이 닫힌 뒤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야 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는 반드시 지켰다. 분장실 가장 안쪽 캐비닛. 햇살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왼손 약지의 은반지를 빼고, 목걸이 줄에 걸어둔 진성의 반지까지 함께 풀었다. 작은 천 주머니에 두 개를 나란히 넣었다. 그리고 캐비닛 가장 깊숙한 곳에 넣고 잠갔다. “오빠는 이거 보지 마.” 처음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린 뒤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가장 먼저 캐비닛을 열었다. 씻기도 전에 반지부터 꺼냈다. 하나는 다시 왼손 약지에. 다른 하나는 목걸이에. 그제야 담배를 물었다. 장미는 그런 햇살을 말리지 못했다. 대신 날이 갈수록 더 독하게 일을 받는 햇살을 볼 때마다 얼굴이 굳었다. “야, 오늘 그만해.” “한 방 더 남았는데?” “내가 빼.” “돈 아깝게 왜.” “오햇살.” 햇살은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나 괜찮아.” 장미가 혀를 찼다. “독한 년.” 햇살은 거울 속 장미에게 씩 웃었다. “언니가 키웠다니까.” 그 말까지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장미는 알았다. 예전의 햇살은 없었다. 웃음이 너무 쉬워졌다.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힘들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이 지쳐 휘청거리다가도 누가 쳐다보면 허리를 세웠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어느 늦은 오후. 출근한 햇살은 분장실에서 흰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2화. 손끝에 남은 은빛

    며칠 동안 햇살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식탁 위 반찬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말라갔고, 침대는 비어 있었다. 햇살은 진성의 후드를 끌어안은 채 거실 바닥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커튼도 열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모른 척했다. 그러다 현관문이 세게 흔들렸다. “오햇살! 문 열어!” 장미였다. 대답이 없자 한참 욕설이 이어졌고, 결국 햇살이 비틀거리며 문을 열었다. 장미는 햇살 얼굴을 보는 순간 눈부터 붉어졌다. “미친년아.” 햇살은 말없이 돌아섰다. “너까지 뒈질려고?!” 장미가 팔을 잡아 세웠다. “꼴이 이게 뭐야. 밥은 먹었어?” “안 고파.” “잠은?” “잤어.” “이걸 잔 얼굴이라고 우겨?” 장미는 들고 온 죽 봉투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어 숟가락까지 꽂아줬지만 햇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 숟갈이라도 먹어.” “나중에.” “그 나중이 언제인데.”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미는 이를 악물고 가방을 열었다. “나 이거 주려고 왔어.” 작은 상자 하나와 통장이 식탁 위에 놓였다. 햇살의 시선이 멈췄다. “뭐야.” “진성이가 나한테 맡긴 거야.” 손끝이 떨렸다. 장미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장식도 거의 없는 단순한 은반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너한테 들키기 싫다고.” 햇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 “네가 검정고시 붙고 얼마 안 됐을 때.” 장미가 코끝을 훔쳤다. “반지는 자기가 제대로 주겠다고 했어. 통장도 같이 맡겨놓고.” 햇살이 통장을 집어 들었다. 계진성. 익숙한 이름 세 글자. 페이지를 넘기자 조금씩 모인 돈이 줄마다 남아 있었다. 장미가 낮게 말했다. “네 대학 등록금이든, 나중에 둘이 집 옮기든 쓰려고 했나 봐. 내가 왜 나한테 맡기냐고 했더니 너는 서랍 뒤지는 버릇 있어서 안 된대.” 햇살의 입술이 떨렸다. 그 말투까지 너무 진성 같았다. “바보.” 통장을 가슴에 끌어안았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1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온기

    발인이 끝난 뒤에도 햇살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 장미가 검은 가방을 챙겨 햇살 곁에 섰다. “우리 집 가자.” 햇살은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래.” “보물.” “오빠 집에 가야 돼.” 장미의 입술이 굳었다. 그 집은 이제 진성이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햇살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게 두지 않았다. “나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 “그래도 가야 돼.” 결국 장미가 함께 택시를 탔다. 익숙한 골목에 도착했을 때 햇살은 한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현관문. 수없이 함께 들어갔던 곳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장미가 먼저 말했다. “같이 들어갈게.” “아니.” “오햇살.” 햇살은 희미하게 웃었다. “언니까지 있으면 나 계속 괜찮은 척할 것 같아.” 그 말에 장미는 더 붙잡지 못했다. 대신 햇살의 손을 꽉 잡았다. “전화해.” “응.” “새벽이어도.” “알았어.” 햇살은 혼자 계단을 올랐다. 열쇠를 넣고 돌렸다. 철컥. 문이 열렸다. “오빠, 나 왔—” 습관처럼 튀어나온 말이 중간에서 멈췄다. 집 안은 조용했다. 현관에는 진성의 운동화가 그대로 있었다. 그 옆에는 햇살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구두도 있었다. 햇살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방 안에서 진성이 나와 말할 것 같았다. 신발 똑바로 벗어. 문 잠가. 밥은 먹었어? “계진성.” 아무 대답도 없었다. 햇살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 등받이에는 진성이 입던 검은 후드가 걸려 있었다. 식탁에는 반쯤 마신 생수병. 세면대에는 칫솔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사람 하나만 없었다. 햇살은 침실 문을 열었다. 구겨진 이불까지 마지막으로 둘이 함께 잤던 모양 그대로였다. 침대에 걸터앉자 매트리스가 살짝 내려앉았다. 예전 같으면 그 움직임에 옆자리에서도 몸이 흔들렸을 텐데. 이번에는 햇살 쪽만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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