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2화, 64화, 92화에 등장하는 장님 책사의 예언이 등장합니다.
이상하리만큼 낯이 익었다.겹겹이 둘러싼 산세와 풍경.오랜 기억의 궤적을 밟는 듯한 착각이 엄습했다.분명 생전 처음 발을 내딛는 땅이건만, 거리 곳곳에 흩어진 모국의 흔적 탓이었을까.익숙함의 탈을 쓴 불안이 뱀처럼 허리를 감아들며 묘한 불쾌감을 불어넣었다.그때 맞은편 길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웅성거림에 무심코 시선이 돌아갔다.군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그 중심에 선 조선총독의 모습이 보였다.아…… 이래서 불편했나.괜한 잡음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요스케는 급히 경성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몸을 피했다.거칠게 모퉁이를 돌아선 바로 그 순간.“악!”둔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지는 중년의 덩치 큰 아낙. 그리고 뒤를 따르던 가녀린 소녀가 연쇄적으로 중심을 잃고 길바닥으로 쓰러졌다.그는 황급히 소녀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申し訳ありません。大丈夫ですか?」“죄송합니다. 괜찮습니까?”요스케의 커다란 손이 소녀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하지만 소녀는 사내가 건넨 도움의 손길을 차갑게 무시해 버렸다.살짝 벗겨진 쓰개치마 자락 사이로 소녀의 싸늘한 시선이 요스케를 정확히 꿰뚫었다.어려 보이는 소녀의 꽤나 오만한 시선.그는 픽 실소가 나왔다.조선의 양반가 규수라는 거지.낡아 빠진 전통에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오만하군.바로 그 찰나.바람을 탄 하얀 쓰개치마가 바닥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골목 틈새로 들이친 붉은 햇살 아래.눈처럼 새하얗고 아기같은 작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깊고 커다란 유리알 눈동자가 반짝였다.황금빛…… 눈동자……!쿵ㅡㅡㅡ!영혼의 밑바닥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정체 모를 충격.요스케는 손을 뻗은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피부 밑바닥에서부터 뜨겁고 아찔한 전율이 오한처럼 솟구쳤다.심장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때 그녀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가녀린 손길로 자신의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며 넘어진 유모를 살폈다.“유모 괜찮아? 허리는? 일어날 수
문득, 함께 들어 주셨으면 하는 음악이 있습니다.작년 이맘때 제가 유독 깊이 빠져들었던 노래입니다.쓸쓸한 가을과도 너무도 어울리는.‘ONF, Bye My Monster’요스케의 마지막을 읽은 뒤 이 노래를 들어 보세요.어쩌면 그가 끝내 하지 못했던 말과,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마음이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그리고……두 사람이 처음 만난 청사의 10화를 함께 읽으시면 요스케가 그토록 바라던 마지막 숨결이 어떤 의미였는지 확실히 아실 거예요.*111화 마지막 문장에 첫번째 운명이라는 단어에 눈치 채셨을 겁니다.다음 회부터 두 번째 생으로 넘어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첫 번째 생의 비극을 핏빛 운명의 낙인처럼 마주하게 될 겁니다.같은 선택으로 다시 비극을 맞이할지, 아니면 다른 선택으로 운명을 바꿀지.기대해 주세요.장담컨대 똑같은 전개의 복붙은 아닙니다.저는 통쾌한 복수보다는 슬픔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그렇다고 무작정 비극도 절대 아닙니다.재미 포인트로 88화를 다시 보시면, 이들의 운명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확인해 보셔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여담으로, 제 작품들은 같은 두 주인공들이 다른 세계관에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다른 장르, 다른 결말, 다른 소재로 세계관을 구축해 오고 있습니다.여기서 유진과 요스케의 기본 세팅값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사실 이름 자체에 기본 세팅이 있습니다.요스케(洋介)는 바다 즉 국경을 건너는 매개, 즉 선을 넘는 자.그에 반해, 유진(維珍)은 보물을 지키는, 즉 선을 지키는 자.요스케라는 이름은 유진의 감정을 뜻하기도 합니다.이 작품과 결이 비슷한 제 전작 중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을 보신 독자분들이라면, 요스케라는 이름이 얼마나 애절한 의미였는지 확실히 아실 겁니다.*사실 이 작품은 연재가 가장 늦어졌지만, 제 작가 인생의 첫 작품이자 전체 세계관의 태동이 되는 **‘최종 보스이자 본체’**입니다.
장구한 팔 년의 세월을 지났다.그렇게 돌고 돌아 마침내 청사의 그 검은 몽돌 해변에 서 있었다.하얗게 새어버린 긴 은빛 머리카락이 거친 바닷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렸다.한때 파괴의 신이라고 불렸던 괴물 같았던 남자의 어깨는 초라하게 야위어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다.철썩이는 파도 위로 일몰의 핏빛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이제야 왔다.유진, 이곳에 오니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구나.자네가 나에게 두 번째 삶을……아니,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비참한 짐승이 아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원의 기회를 선물해 주었던 이 청사의 몽돌 해변이 너무도 그리웠다.너를 만난 이후로, 이곳은 나에게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다.유진과 함께 이미 사라져 버린 초가집.그 자리를 바라보는 요스케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됐다.미치도록 보고 싶은 나의 여인.맹인 책사는 틀렸다.너는 나에게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었다.단 한 번밖에 느끼지 못한 행복이었다.너를 몰랐다면 너를 안지 않았다면 절대로 몰랐을 안식이었다.요스케는 마른 손을 떨며 봇짐 구석에서 오래된 핏자국으로 얼룩진 낡은 칼자루 하나를 가만히 꺼내 들었다.팔 년 전.자신의 아내와 마지막 아이를 무자비하게 베었던 살수가 쥐고 있던 바로 그 검.세월이 흘러 둔탁하게 굳어버린 칼날 위의 검붉은 핏자국들.그는 떨리는 거친 손가락으로 마치 연인의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지듯 아련히 어루만졌다.이제……이곳은 나의 무덤이 될 것이다.요스케는 잠시 차가운 바닷바람 사이로 몽돌이 구르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참 징그럽지 않느냐.너를 죽여 놓고도 네가 있는 곳을 찾아와 너와 함께 묻히기를 바라는 내가……이런 한심한 나란 놈은 죽어서조차 너를 끝내 포기하지 못할 터이니.비겁하게 청한다.제발 부탁이다.나에게 오지 마라.다가올 그 어떤 생에도 내 앞에 다시는 너의 그 고결한 자태를 보이지 말아다오.그의 붉어진 눈시울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다시는 나 같은 괴물이 널 붙잡을 수
어둠 속에 파묻힌 채.쇼는 그저 멍하니 자신을 혐오하고 도륙해 내는 가혹한 말들만 매일 밤낮으로 되풀이하며 되뇌었다.타카오는 주군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천황.최고 상궁과 그녀의 황자를 처형하라는 교지 위에 넋이 나간 천황의 손가락을 잔뜩 움켜 쥐었다.천황은 그에게 질질 힘없이 끌려다녔다.천황의 손을 쥔 타카오의 손아귀가 거대한 옥새를 대신 찍어 눌렀다.이제 타카오에게는 어떤 온기도 자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결국 그는 아내 유키를 배신하고 가정을 버렸다.그 또한 황후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그의 온화했던 인간성을 잃고 말았다.복수의 척결.타카오는 반역자들의 무리 앞에 죽음의 사신처럼 군림하듯 섰다.“최고 상궁의 더러운 피, 반역자의 자식에게 사약을 먹여라.”겨우 2살이 채 안된 아이의 입이 강제로 벌어졌다.최고 상궁은 자식인 황자가 사약을 마시는 것을 눈앞에서 발악하며 바라봤다.어린 황자가 피를 토하고 죽자, 타카오는 천황의 검은 장검을 대신 들었다.이내 그 칼날에 최고 상궁의 목이 날라갔다.그 후, 그녀의 배후 무리들을 모조리 처참하게 척결해 내었다.그들의 목이 황궁과 도성 안팍에 걸렸다.처참하게 도륙당한 그들의 머리가 새들에게 쪼아 먹혀 피로 엉켜붙은 살점들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그들의 사체에 손을 대지 못했다.그날 이후로도.사츠마 내 모든 정사의 결정권과 권력의 칼날은 오직 타카오의 몫이었다.그렇게……지옥의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마침내 황세자 렌이 성인이 되는 16세의 탄생일이 다가왔다.육신을 묶어두던 가혹한 사슬을 풀어내듯.쇼는 황세자에게 천황의 옥좌를 온전히 물려주고 선황제로 쓸쓸하게 물러났다.지난 가혹했던 8년의 세월.황후의 곁에서 그러했듯이.타카오는 그림자처럼 황세자의 곁을 보필하며 지켜왔다. 그리고 변함없이 16세 소년 군주의 곁에 단단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쇼는 기다렸다는 듯, 단 하나의 소박한 봇짐만을 꾸려 어디론가 홀연히
어두컴컴한 천황의 침소.폭군의 광기마저 잃어버린 채.쇼는 넋을 놓아버린 몰골로 곡기조차 끊어버렸다.그녀를 죽인 가해자 무리를 향한 복수조차 떠올리지 못했다.오직 유진의 하얀 재가 담긴 백자 항아리만을 가슴이 터져라 품에 끌어안았다.매일 밤낮 자신의 품 안에서 끊임없이 피를 토하며 유진이 차갑게 죽어 나갔다.끔찍한 악몽이 뱀처럼 그의 목덜미를 조여왔다.그저 가혹한 숨을 끊고 죽고만 싶었다.타카오는 사츠마의 황궁으로 다시 복귀했다.황후의 복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파멸해 가던 천황의 침상 앞으로 다가섰다.“황후마마를 끔찍하게 죽인 자객 놈들에게서 고문으로 받아 낸 자백과 명백한 배후의 증좌들이옵니다, 폐하. 렌 황세자를 음독하려 했던 극악무도한 최고 상궁과 그녀의 황자 역시, 훗날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 완벽하게 척결해 주십시오.”타카오가 황후의 시해 조사 문서를 내밀었다.하지만 천황은 넋이 나간 시선으로 그 증좌들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그의 쩍쩍 갈라진 입술 새로, 그 어떤 음절도 터져 나오지 못했다.“폐하. 혹여…… 황후 마마를 시해한 그 추악한 무리들을 용서하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 최고 상궁과 황자를 살려두시고 싶으시냐고 묻습니다.”타카오의 말투 위로 천황을 향한 거대한 분노와 불신이 잔인하게 실려있었다.쇼는 가만히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심복을 바라보았다.“그들을…… 용서하고 싶냐고. 타카오, 자네는 정녕 몰라서 묻는가.”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이 두 사내 사이를 난도질했다.“황후가 온 몸의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게 만든 그 만악의 근원…… 그 무리들이 감히 그런 추악한 도모를 할 수 있게 만든 건 나다. 바로 내가 그들의 배후다.”순간, 타카오의 눈빛이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무섭게 번뜩였다.“자네는…… 그런 나를 정녕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정작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바로 나이니…… 차라리 자네가 그 장검을 뽑아 날 죽이는 건 어떤가, 타카오. 날 먼저 도륙 낸 다음
자신의 유일한 태양이 꺼져버린 그 참혹한 청사(靑蛇)의 해변.다음 날 새벽이 밀려올 때까지.그녀의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을 품에 안은 채.하루를 꼬박 단 한 치도 움직이지 못했다.매정하게 밀려온 파도가 그의 무릎을 적셨고, 핏빛으로 물든 몽돌 해변은 시리도록 차가웠다.마침내 바다 저 멀리서 잔인하도록 눈부신 일출의 붉은 햇살이 밀려들었다.그제야 요스케는 영혼이 나간 몰골로 유진의 가녀린 몸을 조심스럽게 받쳐 안았다.십일 년 전.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살려내며, 두 사람의 지독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그 해안가 초가집의 침상 위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그의 커다란 몸이 쓰러질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다시 세상이 떠나갈 듯한 울부짖는 사내의 포효가 그녀의 식은 몸 위로 쏟아졌다.한참 후에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막을 내리고 문 밖으로 홀로 나왔다.두 사람의 모든 정념과 인연이 잉태되었던 그 불멸의 공간에 기어이 제 손으로 거친 불씨를 당겼다.화아아악ㅡ!순식간에 붉은 화염이 낡은 초가집의 지붕과 벽면을 집어삼키며 하늘 높이 웅장하게 치솟아 올랐다.유진의 거대한 관이자 무덤이 된 초가집.그 불길은 일몰의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쓰러져 내릴 때까지 계속 됐다.마침내 초가집 전체가 새하얀 재로 변해 청사(靑蛇)의 강한 바닷바람에 허망하게 흩날려 사방으로 사라졌다.요스케는 한시도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망부석이 되어 그 자리를 지켰다.그날 밤 역시 차가운 몽돌 해변에서 밤을 지새우는 그의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저 텅 비어 무너져 있을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요스케는 해변에 흩뿌려진 유진의 하얀 재를 손으로 정성스레 모았다.그녀의 고결하고 단아한 성품을 쏙 빼닮은 여민국의 백자(白磁) 항아리 안에 고이 담아 사츠마로 돌아왔다.황궁으로 돌아온 천황.대신들의 조의도, 황세자 렌의 울음소리도 전부 거부한 채.그저 유진의 재가 담긴 백자 항아리를 가슴이 부서져라 끌어안은 채로그는 어두컴컴한 대전의 침소에 쳐박혀 단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