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부사령관님, 오셨습니까?”
낙성 부촌 자락에 위치한 유서 깊은 사대부 저택의 웅장한 대문.
침략으로 원래의 주인들은 잔혹하게 도륙당해, 이제는 사츠마군의 임시 본거지에 당도했다.
그때 기괴한 인상의 사내가 그림자처럼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사츠마군의 책사이자, 기괴한 영감(靈感)을 지닌 눈먼 사내.
그는 맹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타카오의 손아귀에 결박당한 채 서 있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탐색하듯 코를 끙끙거렸다.
사방에 진동하는 비릿한 전장의 피비린내 사이로 기묘하게 피어오르는 고결한 향취.
“여인이군요. 그것도 아주 귀한 기운을 품은…”
눈먼 사내의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여인을 훑자, 소름이 돋은 그녀가 몸을 바싹 웅크렸다.
“오늘 밤 쇼군(將軍)을 모실 포로입니까?”
책사의 음산한 질문에, 타카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쥔 손아귀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쇼군의 심기만 괜찮으시다면 그리되겠지. 그러니 자네는 서둘러 처소를 준비해 주겠나?”
“그런데 이상하군요.”
책사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허공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여인에게서 짙은 피비린내가 나는데, 혹시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입니까?”
잠시 당황한 타카오가 입에 재갈을 물고 떨고 있는 그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핏기가 사라진 그녀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선홍색 핏방울이 그녀의 하얀 턱을 타고 흘러 회색 승복을 적시고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부사령관님. 상처 입고 피를 흘리는 여인은 불운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모름지기 몸에 단 하나의 흉도 없는 깨끗하고 정결한 여인이어야만 쇼군의 그 강한 운기에 드는 액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사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이 공간의 모든 공기와 비밀을 꿰뚫어 보듯 집요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이 여자에게선 단순한 계집의 것이 아닌 기묘하도록 고결한 향내가 나는데… 도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기운이 범상치 않습니다.”
책사의 집요한 추궁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타카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수려한 얼굴 위로 서늘한 살기가 스쳤다.
타카오는 여인의 앞으로 큼지막한 체구를 성큼 내밀어 책사의 기묘한 무속적 감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을 내뱉어냈다.
“아무도 아니네. 그저 전쟁통에 굴러먹던 흔한 계집일 뿐이지. 다친 여인이 쇼군께 액운을 부른다면 어쩔 수 없군. 그럼 이 여인은…… 내가 갖지.”
“……예?”
“귀한 제물인 줄 알았으나 흠집이 난 물건이라면, 쇼군께 바칠 수 없는 법 아닌가. 내 처소로 데려가 몸종으로 부리며 내가 직접 데리고 있겠네.”
장님의 책사는 눈이 보이는 것처럼 타카오의 얼굴을 끈질기게 읽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단호한 타카오의 태도.
이내 책사가 고개를 숙였다.
“부사령관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책사는 찝찝한 안색을 감추지 못한 채, 천천히 저택 반대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책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타카오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장 서둘러 여인을 이끌고 저택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자신의 안채로 향했다.
그때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부하 중 하나가 결국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바짝 다가와 낮게 물었다.
“부사령관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민국의 공주를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분명 부사령관님의 거대한 공로가 아닙니까? 어째서 저 늙은 책사에게 거짓을 고하시고 공을 숨기시는지……”
타카오는 부하의 질문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안채의 묵직한 목조 문 앞에 다다랐다.
타카오는 슬그머니 주위를 살핀 후, 그녀와 자신 그리고 함께 온 여섯 명의 부하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키이익ㅡ. 탁ㅡ.
둔탁하게 대문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바로 그 순간.
쉬이익―! 서걱―! 서거억―!
눈 깜짝할 사이였다.
타카오의 허리춤에서 번개처럼 뽑혀 나온 명검이 허공을 갈랐다.
“아……! 읍! 웁!”
입에 물린 재갈에 가로막힌 공포의 비명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찢기듯 터져나왔다.
순식간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뜨거운 피.
방금까지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서로의 뒤를 봐주던 전우이자, 그의 부하 여섯의 목이 연달아 잘려 나갔다.
천황의 완강한 거부 속에서도.황후는 기어이 사츠마 전역에서 간택된 세 명의 후궁을 내전으로 들여놓고야 말았다.얼마 후.중궁전의 내뜰로 들어선 후궁들은 하나같이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사츠마에서 내노라하는 귀족 출신의 영애들.화려한 비단 복색을 두른 그들의 자태는 마치 날개를 펼친 공작새 같았다.저마다 미모를 뽐내려 가슴과 엉덩이의 곡선을 부자연스럽게 부각시키며 교태를 부렸다.그에 비해 그들 앞에 선 유진은 핏기가 사라진 새하얀 눈꽃 같았다.은은한 옥빛 의복을 둘러 입은 유진은 그들의 파릇파릇한 미모를 단아한 시선으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다들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천황께서 흡족해하실 용모들이십니다. 부디 폐하를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네. 황후 마마.”그 모습을 한 발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타카오는 침통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황후를 이겨보겠다 잔뜩 화려하게 꾸민 여인네들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어찌해도 너희들은 황후마마를 따라가지 못한다. 너희가 가진 젊음 조차도 마마의 기품에 그대로 기가 죽는구나.]“그럼 폐하께 어서 인사를 드리고 오십시오. 타카오 상, 부탁드리겠습니다.”그는 굳은 표정으로 새 후궁들을 모시고 대전으로 향했다.천황에게 바칠 화려한 진상품을 손에 든 세 여인이 일렬로 서서 배례를 올렸다.그러나 대전의 굳게 닫힌 문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장막 너머에서 서슬 퍼런 천황의 차가운 일갈이 내리꽂혔다.“다들 썩 물러가 있거라.”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타카오는 후궁들을 대전에서 쫓아내듯 물렸다.밤이 깊도록 천황은 용상 위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지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타들어 가는 가슴을 움켜쥔 채 핏빛 어둠을 지새웠다.이윽고 삼경을 알리는 음침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그제야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천천히 일어나 중궁전으로 향했다.콰앙—!중궁전 내전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호롱불 아래, 유진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쇼를 맞았다.그러자 쇼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억세게 틀
하늘이 내린 잔인한 시험이었을까.가혹하고 슬픈 운명은 그들을 이대로 고요히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셋째 왕자를 피눈물로 가슴에 묻어낸 지 채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번에는 유진을 쏙 빼닮아 눈부시도록 예쁘고 순했던 둘째 황자마저 역병인 천연두(天然痘)를 앓기 시작했다.유진은 의원으로서 자신의 몸과 지식을 갈아 넣으며 밤낮으로 젖은 무명천을 쥐고 아기의 불덩이 같은 이마를 보듬었다.그러나 열병과 괴로운 신음 속에 불길처럼 번지는 역병의 마수를 끝내 잡지 못했다.자신의 품 안에서 자식의 가느다란 숨줄이 허망하게 끊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해야만 했다.“아아아아……! 안 된다, 내 아가……! 정녕 안 된다……!”연달아 들이치는 비참한 혈육의 죽음.그 지독한 충격이 전신을 난도질한 바로 그 순간.유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더니 정신을 잃고 비단 침상 위로 무참히 쓰러졌다.얇은 비단 치맛자락 너머로 붉고 진득한 하혈(下血)이 바닥을 적시며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하얗게 질린 뺨 위로 차가운 식은땀이 번지고 내실 안은 순식간에 검붉은 피비린내로 물들었다.떨리는 손길로 맥을 짚던 어의들의 안면이 사색이 되었다.천황은 주먹을 부서져라 쥔 채 핏발 선 안광으로 어의들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그제야 바들바들 떨던 어의가 결국 참담한 진단을 올렸다.“황후마마께서 태내에 품고 계시던 또 다른 아기 씨를 그만…… 유산(流産)하신 것 같사옵니다. 폐하,”순간 천황의 맥이 힘없이 풀렸다.“뭐라…… 또다시 회임을 하였단 말이냐.”“…… 외람되고 망극한 말씀이오나…… 짧은 기간 동안 연이은 회임과 사산, 그리고 계속되는 하혈로 인해 황후 마마의 내궁이 돌이킬 수 없이 상하셔서…… 장차 더 이상의 출산은 어려우실 듯싶사옵니다.”수태하였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넷째 아이의 허망한 유산.황후로서 가장 숭고한 임무인 회임의 문이 닫혀버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유진은 결국 처참하게 부서진 채 거대한 어둠 속으로
황후의 세번째 회임.연이은 회임과 황자의 출산으로 사츠마의 왕권은 신화처럼 공고해져 갔다.열 달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산달.산실청의 장막을 찢고 터져 나온 것은 축복이 아닌 핏물 가득한 절망의 비명이었다.“탯줄이…… 탯줄이 아기씨의 목을 단단히 가로감아 돌고 있사옵니다! 산도가 완전히 막혀 황후 마마와 태아 모두의 생명이 위급하옵니다!”유진의 자궁벽은 무서운 진통과 난산(難産) 앞에 파열되듯 비명을 질렀고.하얀 비단 이부자리는 순식간에 검붉은 피비린내와 선혈로 물들어갔다.의원으로서 태중 아기의 생사가 위태로움을 직감한 유진은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극통 속에서도 핏줄을 살려내려 의원들을 붙잡았다.“아기를, 내 배를 갈라서라도 먼저 꺼내어 살려주십시오……!”그때 산실청 장막을 부수고 들어온 천황 요스케 쇼의 서슬 퍼런 포효가 유진의 절규를 가차 없이 집어삼켰다.자신의 여인이 하혈을 쏟아내며 죽어가는 꼴을 목도한 사내는, 이미 이성의 고삐가 완벽히 타버린 몰골이었다.천황은 떨고 있는 의원들의 목덜미를 억센 손으로 움켜잡았다.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명을 내리꽂았다.“당장 황후의 목숨부터 구하거라! 내 눈 앞에서 황후가 잘못되는 날에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삼족을 멸할 터이니.”결국 어이는 황제의 무시무시한 명을 따랐다.유진의 내궁에서 아기를 강제로 사산(死産)시키고, 잿빛으로 변해버린 차가운 주검을 황후의 핏물 젖은 나신 밖으로 받아내었다.세상 빛을 보지 못한 셋째 황자의 비참한 출산이었다.이후, 중궁전 내실은 침통한 적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유진은 열 달 동안 자신의 배 속에서 살과 피를 나눠 키워낸 아이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깊은 자괴감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붉게 충혈된 황금빛 눈동자로 매일 밤낮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름시름 앓아누웠다.게다가 너무도 짧은 주기의 연이은 출산 탓에.유진의 자궁 내벽이 심각하게 약해져 있어.차후의 회임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어의의 비참한 진단을 전해 들었을 때.쇼는 제 가슴을
사츠마 황궁의 후원.붉은 단풍잎이 금빛 햇살 아래 비단처럼 가붓하게 나부끼는 가을날이었다.첫 황자 렌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도 어느덧 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네 살이 된 어린 황자 렌(蓮)은 제 아비인 천황을 가히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또렷하고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칠흑 같은 눈동자.어린 나이에도 만인을 압도하는 남다른 무사의 기백까지 고스란히 흘러넘치고 있었다.“어머니, 보십시오! 오늘 아버님께 배운 검법입니다!”조그마한 나무 목검을 쥔 렌이 신이 난 얼굴로 정원의 잔디 위를 쌩하고 뛰어다녔다.유진은 나비처럼 단아하고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적삼 소맷자락으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기의 하얀 이마를 다정하게 닦아주었다.“기특하구나, 렌. 하지만 너무 무리하면 몸이 상할 터이니 이리 와서 따스한 차를 마시려무나.”그때 묵직하고 당당한 발소리와 함께 칠흑의 곤룡포를 입은 천황 쇼 요스케가 후원으로 걸어 들어섰다.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상을 집어삼킨 절대 군주의 오만한 위엄과 훤칠한 자태는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완벽했다.“아바마마!”렌이 목검을 꼭 쥐고 달려가자.쇼는 커다란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툭툭 쓸어 넘겨주며 안아 들었다.그러나 쇼의 검은 안광은 이내 아기의 작은 얼굴을 지나쳐.주홍빛 단풍 그늘 아래.눈부시게 앉아 있는 유진의 하얀 살결과 발그레한 붉은 입술 위에 단번에 멈춰 섰다.사내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는.아니 날이 갈수록 더욱 농밀하고 깊게 익어버린 맹목적인 정욕과 독점욕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쇼는 렌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옆에 서 있던 상궁들에게 나직한 어조로 명령했다.“황자를 모시고 내실로 들어가거라. 보모와 함께 조용히 수라를 들게 하라.”“예, 폐하.”혜선이 렌의 손을 잡고 후원 밖으로 물러나자.쇼는 단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유진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억센 팔뚝으로 번쩍 들어 올리듯 바짝 끌어안았다.“폐하, 상궁들과 나인들이 지켜보고
중궁전 내뜰의 옥빛 정각.연분홍색 벚꽃 잎이 기분 좋은 봄바람을 타고 눈처럼 가붓하게 휘날렸다.유진은 고요한 햇살 아래 부사령관 타카오, 그리고 그의 아내 유키와 차분하게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싱그럽고 푸른 봄바람이 정전의 비단 장막을 은은하게 간지럽히는 평화로운 오후였다.유진의 바로 곁에는 갓 두 살이 된 어린 황세자가 비단 이부자리 위에서 새근새근 고운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황후 마마, 황세자의 용모가 갈수록 폐하를 쏙 빼닮았습니다. 분명 천황 폐하처럼 강건하고 대골한 자태로 자라나실 게 분명합니다.”유키가 수줍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아한 어조로 건네자.유진은 잠든 아기의 오동통한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서글프고도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이 아이가 절 살렸습니다. 이 아이의 용모가 둘째 황자처럼 저를 닮거나, 여민국의 오라버니라도 닮았더라면 저는 이곳 사츠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만약 그렇다고 했어도, 분명 폐하께서 마마를 반드시 지켜주셨을 것입니다. 저 또한 폐하의 뜻을 받들어 무조건 황후 마마의 안전을 제 일순위로 두었을 것입니다.”타카오가 묵직하고 강건한 의지를 보이며 굳은 표정으로 서약을 올리자.유진은 살짝 난처한 듯 유키를 돌아보며 그를 살그머니 나무랐다.“타카오 상의 충심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도 저도 유일하게 믿는 저희 사람이시니까요. 그러니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런 무거운 충심의 맹세는 매번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마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오라, 제 진심입니다.”“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계속 이렇게 눈치 없이 구시면, 제가 유키 상에게 면목이 없습니다.”그제야 타카오가 멋쩍은 듯 하얀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아내 유키를 바라보았다.“바깥일에 지나치게 진심인 남자는 참으로 남편으로서 꽝이지 않습니까, 유키 상?”유진이 은밀하게 농을 건네자, 유키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다행이지 않습니까. 타카오 상의 얼굴이 수려해서. 아니었으면 유키 상에게 벌써 몇
그 찬란한 평화의 정점에서.중궁전(中宮殿) 내실에는 또다시 기적 같은 경사가 났다.황후가 첫 왕자를 출산한 지 기껏해야 겨우 4개월 만에,또다시 천황의 핏줄을 또 한 번 연달아 회임하게 되었다.이 경이로운 연속 회임(懷妊) 소식에 사츠마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사츠마의 새 황실의 굳건한 번영을 증명해 낸 여민국의 공주는, 이제 그 누구도 감히 흠집 낼 수 없는 공공연하고 위대한 사츠마의 국모(國母)로 추앙받기 시작했다.회임으로 전신이 무겁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전란의 잔흔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이국의 백성들을 향한 구휼 활동과 의료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우리 황후 마마는 정녕 신이 내리신 성녀(聖女)이시다……!”천황의 무자비하고 잔혹했던 찬탈로 세워진 새 황실.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정재의 소용돌이 속에서.두려움에 떨던 사츠마 백성들은 유진의 어진 성정에 매일같이 뜨거운 찬사와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내었다.천하의 민심이 황후의 발밑에 완벽히 정착했다.정복 전쟁으로 건국된 위태로웠던 천황의 왕권과 지위도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을 만큼 무섭도록 견고하게 강화되었다.당초 대신들과 그들의 책사들이 예견했던 파멸의 우려는 마침내 사라졌다.이제 쇼의 황실은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츠마로 변모해 갔다.그것은 국경을 마주한 여민국 역시 마찬가지였다.괴물 쇼군과 세자 부안대군이 맺었던 비밀 조약아래.가혹한 피의 숙청이 끝난 여민국 강토 위에도.비로소 역사상 가장 안온하고 평화로운 치유의 시간이 도래했다.그렇게 다시 10개월이라는 축복 같은 세월이 흘러간 붉은 새벽녘.유진은 중궁전 침상 위에서 마침내 건강한 두 번째 황자를 무사히 순산해 냈다.사내를 끔찍하리만치 빼다 박아 묵직한 기백을 뿜어내던 첫째 황자와 달리.갓 태어난 둘째 황자는 눈부시도록 새하얀 피부와 수려한 골격, 유진을 쏙 빼닮아 천하절색의 용모였다.자신의 여인과 똑 닮은 핏줄을 품에 안은 천황의 심장은 또 한 번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사정없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