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손만 찍는 건 검토해보신다고 해서요.”
프로듀서는 촬영표에서 해경의 이름을 짚었다. 해경은 그 손가락 아래에 펜으로 줄을 그었다.
“검토한다고 했죠. 하겠다고는 안 했고요.”
“그럼 일단 빼놓겠습니다. 재하 작가님께도 전달할게요.”
“제가 얘기할게요. 바뀐 촬영표만 보내주세요.”
얘기가 끝나자 옆에서 한별이 물었다.
“내일 아침엔 안 찍어요?”
“제 손만 안 찍어요. 준비는 해야죠.”
“손은 쓰는데 찍지는 마라.”
“배우님도 대본은 읽는데 제 말은 안 듣잖아요.”
한별이 펜 끝으로 지워진 이름을 톡 건드렸다.
“지금은 잘 들었어요. 실장님 말부터 하게 기다렸고.”
그건 맞았다. 아까부터 촬영표를 보고 있었으면서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걸 꼭 확인받아야 하나.'
“네. 앞으로도 그렇게 하세요.”
“잘했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배우님은 칭찬 받으면 꼭 한마디 더 하시던데요.”
“그러니까 해봐요. 이번엔 안 할게.”
해경은 펜 뚜껑을 닫아 촬영표 위에 올렸다.
“오늘 촬영 잘하셨어요.”
한별의 손가락이 펜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지금 대기 시간이 좀 길어졌네요. 들어가셔야죠.”
그가 해경을 잠깐 바라보더니 재킷을 정리했다.
“칭찬에 현장 복귀까지 넣어주시네.”
“한마디 더 안 하신다면서요.”
한별은 이번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 앞을 지나가면서 펜 뚜껑을 가리켰다. 덜 닫혀 있었다.
해경이 눌러 끼우자 멀어지는 그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저걸 또 보고 갔네. 얄미워.'
이튿날, 재하는 약속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 인쇄한 시안을 해경에게 건네고 의상 가방부터 받아 들었다.
“이쪽으로 옮기면 돼?”
“응. 안쪽 테이블. 무거워.”
“들고 나서 알려주는 건 뭐야.”
“미리 말하면 안 들어줄까 봐.”
재하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해경도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뺐다. 준비실에는 아직 둘뿐이었다.
재하는 시안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네가 고른 두 번째가 제일 낫더라. 대신 재킷 안감만 좀 보여주자.”
“그럼 배우가 팔을 들어야 해. 그냥 서 있으면 안 보여.”
“동작 하나 넣자. 네가 편한 걸로 잡아줘.”
해경은 재킷을 펼쳐 안감을 뒤집었다. 밤새 생각해둔 구도를 설명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그러면 얼굴 쪽은 내가 빼고 옷 쪽으로—”
“일 얘기할 때도 웃으시네.”
문가에 한별이 서 있었다.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언제 왔어?'
해경은 펼쳐둔 재킷을 다시 걸었다.
“배우님 오후에 오신다면서요.”
“커피 사러 나왔다가요. 인사하러 왔어요.”
한별이 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하도 자기 이름을 말하고 악수했다.
“해경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해경은 시안의 모서리를 맞추던 손을 멈췄다.
'많이 하진 않았는데.'
한별이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떤 얘기요?”
“옷 핏에 민감하시다고요. 그래서 테스트 때 직접 확인하시면 좋겠다고 했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경은 괜히 가방 지퍼를 열었다.
“오후에 확인하시면 돼요. 지금은 저희 준비 중이라.”
한별은 커피 한 잔을 빈 테이블에 놓았다.
“그럼 준비해요. 구경 좀 할게.”
'왜 굳이 여기서.'
해경은 못 들은 척 소매를 걷었다. 재하가 조명 위치를 잡고 손짓했다.
“해경아, 잠깐 여기 서줄래? 높이만 보게.”
그녀가 표시된 자리에 서자 한별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쪽 말은 잘 듣네요.”
“높이를 보는 거잖아요.”
“나도 소매 봐달라고 했었는데.”
“지금 팔 길이 재드릴까요?”
재하가 카메라 뒤에서 웃음을 삼켰다. 한별은 해경에게 대답하는 대신 걸려 있는 재킷을 집었다.
“이거 내가 입으면 되죠? 어차피 내 거잖아요.”
한별은 재킷을 입고 해경이 서 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옷이 몸에 맞자 시안에서 보던 구도가 금방 살아났다.
해경은 안쪽 소매를 접어 올렸다.
“이 팔만 조금 들어주세요.”
“얼마나.”
그가 팔을 들었다. 해경이 손끝으로 위치를 짚자 정확히 그 높이에서 멈췄다.
'시키면 이렇게 잘하면서.'
재하가 셔터를 눌렀다.
“좋아요. 실장님, 깃만 한 번요.”
해경은 한별의 옷깃을 펴려다 발밑의 선을 밟았다. 몸이 앞으로 쏠리자 그의 팔이 먼저 나왔다. 해경은 소매를 붙잡고 버텼다.
“저기 선 좀 빼주세요.”
한별은 그녀가 똑바로 선 뒤에야 팔을 내렸다. 해경은 아직 잡고 있던 소매를 놓았다.
“괜찮아요. 안 넘어졌어요.”
“알아요. 나도 봤어요.”
그의 팔꿈치에 방금 접은 자국이 어긋나 있었다. 해경은 그곳부터 다시 폈다.
'고맙다고 하면 되는데. 옷부터 만지고 있네.'
“감사합니다.”
한별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방금 뭐라고요?”
“들으셨잖아요.”
“다시 들으려고요.”
해경은 손을 떼고 옆으로 비켰다.
“촬영하세요.”
“칭찬도 고맙다는 말도 한 번씩만 되는구나.”
또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가 나기 전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해경은 시안으로 얼굴 아래를 가렸다.
'다쳤으면 어쩔 뻔했는데, 농담이 나와?'
테스트가 끝나자 재하가 화면을 확인하다 멈췄다.
“이건 지울게.”
해경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걸린 거야? 어디 봐.”
“넘어질 뻔했을 때 찍혔어. 흔들린 줄 알았는데 초점은 맞았네.”
작은 화면에 해경의 옆얼굴이 보였다. 한별의 소매를 잡은 손도.
그녀는 자기 얼굴보다 그의 얼굴을 먼저 확대했다.
방금 전까지 말끝마다 비꼬던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때 한별이 카메라 옆으로 다가왔다.
“그 사진, 나도 좀 봅시다.”
“제 일에는 문제 없었다고 발표했잖아요.”해경이 화면을 돌리자 제작팀 책임자가 그 문장을 읽었다.“소속사에서 보낸 안입니다. 아직 결정한 건 없어요.”“그럼 왜 인계까지 적혀 있어요?”“광고주가 국내 촬영에서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걸 걱정합니다. 촬영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대안을 달라고 했어요.”해경은 의상 가방이 놓인 쪽을 봤다. 옷마다 자신이 정한 수정 위치가 표시돼 있었다.'사람만 바꾸면 끝나는 줄 아나.'“대안이 필요하면 저도 같이 얘기하죠. 내일 회의에 제가 직접 갈게요.”“그렇게 하시죠. 기록은 제가 전달하겠습니다.”“보류를 결정한 사람은 아직 없는 거죠?”“네. 검토안이에요.”그제야 해경은 파일을 닫았다. 말 한 줄을 확인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공항으로 가는 차에서는 재하가 옆에 앉았다.“네 가방, 내가 위에 올릴까?”“내가 해. 너 카메라부터 챙겨.”재하가 두 손을 거뒀다.“이런 날에도 일은 잘 시키네.”“그럼 좀 도와줄래? 저 작은 상자만.”“말 바꾸는 속도가 빠르다.”그가 상자를 들었다. 해경은 웃다가 다시 휴대폰을 봤다. 기사 아래 새 댓글은 읽지 않았다.“내일 회의 있어.”“알아. 촬영 사진 필요하면 말해. 네가 현장에 있던 시간도 남아 있으니까.”“응. 고마워.”
“국내 촬영 전에 소속사랑 같이 만나야겠습니다.”제작팀 책임자의 말에 해경은 의자에 앉았다.“어떤 내용을 확인하시려고요?”“현장에 영향이 없도록 대응을 맞추자는 겁니다. 광고주 쪽에서도 연락이 왔고요.”“제가 일을 하지 않았다는 글도 확인하셨어요?”“네. 촬영표와 의상팀 인계 기록부터 정리하겠습니다.”해경은 그제야 가방에서 일정표를 꺼냈다.그날 마지막 옷을 반납한 시간, 보조들과 다음 촬영 준비를 마친 시간. 모두 적혀 있었다.사람들이 본 건 퇴근한 뒤의 몇 초였다.'이렇게 길게 일했는데.'그녀는 필요한 기록을 보냈다. 입장문에 자기 이름을 다시 적어 신원을 더 퍼뜨리지는 말아달라고 덧붙였다.책임자는 귀국 다음 날 오전에 만나자고 했다.통화를 마친 해경은 침대에 누웠다.잠들려고 눈을 감았는데 꽃 머리끈이 떠올랐다.그걸 고르며 웃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게 싫었다.그날은 좋았다. 누가 이상하게 붙여놓은 말 때문에 그 기억까지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다음 날 아침, 한별은 입국장을 나오기 전에 메시지를 확인했다.해경이 보낸 링크를 열었다. 승재는 옆에서 소속사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국내 홍보 담당자가 전화 너머로 사실관계 확인 내용을 설명했다.“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입장부터 내겠습니다. 두 분은 업무로만 접촉한 사이로…….”한별은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그건 아니죠.”“배우님, 일단 추측을 차단해야 해서요.”“같이 나간 건 맞아요
“끊기는 싫은데.”해경은 이불 끝을 만지던 손을 놓았다.“그럼 일 말고 다른 얘기 하세요.”“실장님은 뭐 하고 있었어요?”“사진 봤어요.”말해놓고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뗐다. 굳이 어떤 사진인지 해명하지는 않았다.한별이 물었다.“내 얼굴 늘려놓고 보는 건 아니죠?”“배우님 얼굴보다 제 얼굴이 더 작게 나와서요.”“작은 게 아니라 뒤에 숨었잖아요.”“키가 작으면 숨어도 되거든요.”그가 웃었다. 해경은 침대에 등을 기댔다.“도착하면 주무세요. 또 일 얘기하지 마시고요.”“실장님도 자요.”“네.”그런데 둘 다 바로 끊지 않았다.한별이 먼저 낮게 웃었다.“전화 끊는 건 실장님이 더 못하네.”“배우님이 끊기 싫다면서요.”그때 승재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가야 돼요. 도착하면 연락할게요.”통화가 끝났다.혼자 있는 방이 아까보다 덜 낯설었다.세린에게 전화가 온 건 십 분쯤 뒤였다.“실장님, 지금 혼자 있어요?”“네. 왜요?”“제가 보내는 거 먼저 봐요. 단체방에는 올리지 말고.”해경은 메시지의 링크를 열었다.시장 골목에서 찍힌 짧은 영상이었다.한별이 과자 봉투를 들고 있었고, 자신은 커다란 꽃 머
두 촬영이 같은 날이었다.해경은 단체방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초안이었다. 다만 자신이 맡은 작품의 남은 실내 장면을 찍는 날이라, 확인 없이 다른 일을 받으면 안 됐다.한별이 휴대폰을 보다가 그녀를 봤다.“표정이 왜 그래요?”“새로 제안받은 촬영이랑 겹쳐요.”“날짜 바꿀 수 있대요?”“물어봐야죠.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차가 도착했다. 해경은 먼저 타고 제작팀에 메시지를 보냈다.국내 촬영일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한별은 옆에 앉았다. 아까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 그의 화면에 떠 있었다.해경은 자기 메시지의 오타를 고치다가 잠깐 그쪽을 봤다.'저걸 아직 보고 있네.'그녀는 날짜 확인 메시지부터 마저 썼다.호텔에 돌아오자 승재가 한별의 짐을 받으러 왔다.해경은 프런트에서 핀 통을 찾아 작업실로 올라갔다.국내 촬영일은 세트와 배우 일정을 맞춰 잡은 날짜라 바뀔 가능성이 작다는 답이 왔다. 확정 공지는 다음 날이라고 했다.해경은 서진에게 바로 전화했다.“그날 기존 프로젝트 촬영이 잡힐 것 같아요. 날짜를 조정할 수 있을까요?”“도윤 씨 쪽은 그날밖에 안 돼요. 다음 날 지방 일정이 있어서.”서진은 잠깐 확인하고 돌아왔다.“확답은 오늘 안에 받아야 하는데, 아직 기존 쪽도 확정 전이죠?”“네. 하지만 그날을 비워드린다고 하긴 어려워요.”말하면서 해경은 달력을 봤다.“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 구할게요. 다음에 맞는 일이 생기면 다시 얘기해요
“그럼 내일 저랑 나가요.”해경의 말에 한별이 컵을 내려놓았다.“어디요?”“가보면 알아요.”“나한테 그런 대답 싫어한다면서.”해경은 접은 그림을 가방에 넣었다.“싫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갈 건데. 시간은 알려줘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여줬다. 화면 한쪽에 저장해둔 해안 전망대가 떴다.한별이 화면과 해경을 번갈아 봤다.“이미 골라놨네.”'그걸 꼭 말해야 돼?'해경은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아홉 시요. 늦지 마세요.”다음 날, 서진에게 귀국 후 촬영 날짜가 왔다.해경은 달력에 표시하고 여덟 시 오십 분에 로비로 내려왔다.한별이 먼저 앉아 있었다.평소보다 단정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가, 원래 저 사람은 늘 저렇게 입었다는 걸 떠올렸다.달라진 건 자기가 보는 방식인 것 같았다.“일찍 나오셨네요.”“늦지 말라면서요.”그가 일어나자 해경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어제 입었던 티셔츠 대신 얇은 셔츠를 골랐다. 갈아입다 구겨진 옷은 방 침대 위에 남겨뒀다.'그냥 구경 가는 건데 옷을 몇 번을 갈아입어.'한별이 그녀를 봤다.“오늘은 핀 없어요?”“있어요.”“쉴 때도 들고 다녀요?”해경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고 핀 통을 꺼냈다.정말 들어 있었다.한별이 웃었다.
모레 귀국.해경은 변경된 일정표에서 그 부분을 다시 봤다.남은 실내 촬영은 국내 세트에서 진행하고, 정확한 날짜는 귀국 후 공지한다고 했다. 당장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그런데 옆방에서 소리가 나면 누구인지 알던 생활은 끝났다.한별이 젖은 타월을 들고 다가왔다.“실장님은 짐 많겠네.”“정리해둬서 괜찮아요.”“벌써요?”“늘 정리해놓죠.”그는 타월을 바구니에 넣었다.“돌아가면 좀 쉬겠어요.”“서진 실장님 일정 맞으면 그쪽 일도 해보려고요.”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그 짧은 반응이 아쉬웠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자신도 몰랐다.“아직 확정은 아니고요.”덧붙이자 그가 그녀를 봤다.“좋은 일이라면서요.”“네. 그렇죠.”왜 그 말을 해놓고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일은 좋은데.'그 다음 말은 속으로도 끝내지 않았다.해가 지기 전에 야외 촬영이 마무리됐다.호텔 식당 한쪽에는 제작팀이 마련한 저녁 자리가 있었다. 내일은 장비를 포장해야 해서 송별 식사를 하루 당겼다고 했다.해경은 보조들과 옷을 정리하고 내려왔다.재하가 입구에서 마지막 촬영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끝났어?”“응. 너는?”“이거 보내면. 먼저 앉아.”해경은 빈자리를 찾았다.한별 옆 의자에는 그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누굴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