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많이요.”
해경이 대답했다.
한별은 문손잡이를 내려다봤다가 손을 놓았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식당에 원한 있으신 줄 알았어요.”
그가 짧게 웃었다. 해경은 웃어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속은 이미 조금 들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밥을 먹는 게 싫었단다.
'그래서 어쩌라고.'
속으로라도 퉁명스럽게 대꾸해야 했다.
“싫으셔도 제 약속에 심술부리지는 마세요.”
“심술까지는 아니고.”
“그럼 무슨 술인데요.”
한별이 대답을 못 했다. 해경은 그 틈에 복도로 나왔다.
“그런 기분 드신 건 알겠는데, 제가 맞춰드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rdq
“본인은 뭘 했는지는 말 안 했을 텐데.”도윤이 의자에 앉았다. 한별은 물잔을 제 쪽으로 당겼다.“네가 얘기하면 되겠네.”“감독님 앞에서 사람 무안하게 한 건 기억하지?”해경은 숟가락을 들다가 내려놓았다.도윤이 그녀를 봤다.“같이 찍던 작품에서 제가 동선을 좀 바꿨어요. 감정이 그렇게 가길래. 그런데 이 친구가 감독님 듣는 데서 합의한 대로 하자고 딱 잘라버리더라고요.”“좀 바꿨다고?”한별이 물었다.“카메라 다시 놓고 조명 다시 잡았어요. 그날 두 시간 더 찍었는데.”“결과는 좋았잖아.”“다른 사람들 시간도 네 감정 따라가야 돼요?”도윤은 웃었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짧았다.“그 말을 따로 해도 됐다는 거지.”해경은 두 사람 사이의 물병을 옆으로 옮겼다. 어느 쪽 손에도 걸리지 않게.도윤이 물었다.“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저 그 현장에 없었는데요.”“그냥 얘기 듣고 판단해보라는 거죠.”“그럼 두 분 다 피곤하신 걸로 할까요? 저 지금 밥 먹다가 심사위원 됐어요.”한별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식사를 너무 방해했네요.”“네. 식기 전에 먹으려고 골랐는데 식었어요.”서진이 도윤의 의자 등받이를 두드렸다.“그러니까 그만하고 네 자리 앉아. 사람 밥 앞에서 옛날 얘기
“두 분, 같이 일만 하는 사이 맞아요?”해경은 도윤이 내민 컵을 받았다.“배우님하고도 같이 일만 하는 사이죠.”도윤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맞는 말이네요. 제가 너무 빨리 물었죠?”“네. 첫날인데요.”“그럼 다음 질문은 좀 아껴둘게요.”그가 옷을 챙겨 탈의 공간으로 들어갔다.해경은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뭘 다음까지 물어.'같이 일하는 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나니 한별과의 저녁 약속이 괜히 설명해야 할 일이 된 것 같았다.그냥 밥을 먹는 건데.해경은 가방을 챙기면서 그 말을 한 번 더 생각했다.오후 두 시 샘플 반납을 마치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왔다.수정한 재킷은 잘 맞았다. 서진이 확인하고 다음 옷을 넘기는 동안 해경은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빨리 끝내고 싶어서 서두르면 오히려 실수할 것 같았다.다섯 시 반, 마지막 컷을 찍기 시작할 때 비가 왔다.테라스 촬영을 안으로 옮기느라 시간이 밀렸다. 해경은 젖은 바닥에 옷이 닿지 않도록 행거를 옮겼다.'오늘도 길어지네.'아까는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볼 때마다 마음이 급해졌다.한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비 때문에 늦어져요. 먼저 드셔도 돼요.]답은 금방 왔다.[얼마나 늦어요?][아직 몰라요.][그럼 나도 아직 안 먹어요.]해경은 화면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미안하다는 말부터 써야 하는데 웃음이 먼저 나왔다.'배고프다면서 화내기만 해봐.'그녀는 촬
“도윤이 일이라고는 안 했잖아요.”해경은 바닥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챙겼다.“저도 방금 알았어요. 그런데 누구 일이면 달라지는데요?”“사람 피곤하게 하는 타입이에요.”“그건 여기서도 적응했어요.”한별이 해경을 봤다.“나랑은 달라요.”“그러겠죠. 배우님 같은 분이 또 계시면 곤란하죠.”그는 탁자에 놓았던 도시락 통을 집어 들었다. 해경은 화면을 껐다.“두 분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배우님이 싫어한다고 저도 싫어할 순 없어요.”“싫어하라고는 안 했어요.”“그럼 일해보고 제가 판단할게요.”잠깐 조용해졌다. 한별이 통 뚜껑을 맞췄다.“그래요. 해보고.”그가 옆방으로 돌아갔다.해경은 닫힌 문 앞에서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저녁 이야기는 끝난 걸까.'지가 먼저 물어봐놓고.'다시 불러서 묻기는 싫었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저녁에 뭘 먹자고 하려던 건지 궁금했다.다음 날, 해경은 서진이 보낸 차량을 타고 리조트에 도착했다.작업실 문 앞에서 강도윤과 마주쳤다.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오늘 오시기로 한 실장님이시죠? 강도윤입니다.”도윤이 손을 내밀려다 컵을 내려다봤다.“잠깐만요. 제가 지금 손이 두 개밖에 없네요.”한 잔을 다른 손으로 옮기자 뚜껑 사이로 커피가 올라왔다.해경이 얼른 컵 하나를 받았다.“
“윤서진 실장님이요?”해경이 가방을 다시 열었다. 휴대폰에는 서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근처 리조트 화보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제작팀에 협찬 샘플을 전달할 일이 생겨, 해경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저 먼저 정리하고 갈게요.”해경이 보조에게 가방을 넘겼다. 옆에 있던 한별이 물었다.“방금까지 정리한 건 뭐예요?”“다 했는지 확인하는 거죠.”“확인도 다 했는데.”“배우님은 대본 확인 한 번만 하세요?”한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요. 누가 못 가게 했나.”말투가 이상했다. 해경은 그를 봤다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지금은 왜 저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호텔 작업실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세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언니, 여기까지 와서도 일해?”“오늘은 짐만 전해주고 쉴 거야. 너도 끝났다며.”해경이 들어서자 서진이 먼저 일어났다.“류해경 실장님?”사진으로만 봤던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렀다.해경은 악수를 하다가 손바닥에 핀이 없는지 괜히 확인했다.'아니, 손에 꽂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보내주신 사진 잘 봤어요.”“감사합니다. 원본은 정리해서…….”“사진부터 다시 볼까요? 이쪽 앉아요.”서진이 태블릿을 돌렸다. 해경이 보낸 세 장이 떠 있었다.어떤 옷이 예쁘다는 말보다, 왜 그 옷을
“그 질문은 이따 대답해요.”한별이 해경의 뒤에서 말했다.해경은 감독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음을 빨리했다.'연기 잘해서 싫냐니.'그게 싫은 거라면 이렇게 답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그가 세린을 바라보는 얼굴을 본 뒤, 아침에 자신에게 웃던 얼굴까지 의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말로 꺼내면 우스워질 생각이었다.테이블 위에는 방금 찍은 장면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제작팀 직원이 한 장을 골라 들었다. 한별과 세린의 얼굴이 가까운 컷이었다.“숙소 건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요. 오늘 밤 티저를 하나 올리면 관심이 작품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요.”세린이 사진을 봤다.“키스 장면을 벌써요?”“짧은 스틸 한 장입니다. 두 분 의견 듣고 결정하려고요.”한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이 먼저 사진을 내려놓았다.“저는 다른 사진이면 좋겠어요.”“노출이 부담스러우세요?”“노출보다 순서요. 아직 첫 티저도 안 나왔는데 키스신부터 보여주면 인물 관계를 다 아는 것 같잖아요.”해경은 세린을 봤다.정확한 말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불편했던 건 자기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경은 의상팀으로서 덧붙였다.“이 장면 옷은 앞 장면의 사건을 겪고 나서 바뀐 스타일이에요. 먼저 공개되면 이야기 흐름도 보일 거예요.”제작팀 직원이 사진을 다시 봤다.“그럼 대체 컷을 오늘 찍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요.”재하가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앞 테라스 빛 아직 살아 있어요. 두 분 각각 한 컷씩 찍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