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서진 실장님이요?”
해경이 가방을 다시 열었다. 휴대폰에는 서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근처 리조트 화보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제작팀에 협찬 샘플을 전달할 일이 생겨, 해경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저 먼저 정리하고 갈게요.”
해경이 보조에게 가방을 넘겼다. 옆에 있던 한별이 물었다.
“방금까지 정리한 건 뭐예요?”
“다 했는지 확인하는 거죠.”
“확인도 다 했는데.”
“배우님은 대본 확인 한 번만 하세요?”
한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요. 누가 못 가게 했나.”
말투가 이상했다. 해경은 그를 봤다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금은 왜 저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
호텔 작업실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세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니, 여기까지 와서도 일해?”
“오늘은 짐만 전해주고 쉴 거야. 너도 끝났다며.”
해경이 들어서자 서진이 먼저 일어났다.
“류해경 실장님?”
사진으로만 봤던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렀다.
해경은 악수를 하다가 손바닥에 핀이 없는지 괜히 확인했다.
'아니, 손에 꽂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보내주신 사진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원본은 정리해서…….”
“사진부터 다시 볼까요? 이쪽 앉아요.”
서진이 태블릿을 돌렸다. 해경이 보낸 세 장이 떠 있었다.
어떤 옷이 예쁘다는 말보다, 왜 그 옷을 골랐는지 묻는 질문이 먼저 나왔다.
해경은 조금씩 말을 길게 했다.
몸에 붙는 옷을 피했던 이유, 인물이 긴장했을 때 손을 숨길 수 있게 소매를 남긴 이유.
설명하다 보니 말이 빨라졌다.
서진은 중간에 끊지 않았다.
“다른 걸 시키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네요.”
그 말에 해경의 등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어떤 작업인가요?”
“내일 오전 화보 피팅이 있어요. 보조 인원이 하나 비어서. 지금 일에 지장 없으면 반나절 같이 해볼래요? 급여랑 시간은 따로 보내줄게요.”
내일은 의상팀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샘플 반납 정리는 남아 있었다.
해경은 바로 대답하고 싶었지만 일정을 먼저 펼쳤다.
“오후 반납 준비까지 끝내고 갈 수 있는지 확인할게요. 오늘 안으로 답드려도 될까요?”
“좋아요. 대신 여기 팀에 무리해서 떠넘기진 말고요.”
해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연결문이 열렸다.
한별이 나오다 세 사람을 보고 멈췄다.
“아직 계시네요.”
“오랜만이에요, 한별 씨.”
서진이 반갑게 인사했다. 세린이 의자를 밀었다.
“오빠, 언니 갈 때 짐 좀 들어줘. 샘플 전해주고도 가방이 두 개야.”
한별은 가방을 보고 손잡이를 잡았다.
“이건 벽돌이에요?”
“신발. 벽돌보단 비싸요.”
서진이 답하자 해경이 웃었다.
한별은 그녀를 보더니 다른 가방도 들었다.
“그럼 벽돌처럼 다루면 안 되겠네.”
서진을 보내고 돌아오자 보조 둘이 샘플 목록을 펼쳐놓았다.
해경은 내일 오전에 다른 현장 일을 제안받았다고 설명했다. 그전에 반납 정리를 끝내겠다고도 했다.
“그러면 저희는 내일 오후에 모이면 되죠?”
“응. 오늘 나눠서 끝내고. 너희 쉬는 시간은 그대로야.”
세린이 자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실장님, 언니랑 일하면 배우는 거 많을 거예요.”
“아직 답은 못 드렸어요.”
“할 것 같은데. 지금 얼굴이.”
해경이 웃었다.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세린은 웃는 그녀를 보다가 가방을 챙겼다.
“끝나면 연락해요. 저는 저녁 먹으러 내려갈게요.”
그 말이 전보다 편하게 들렸다. 해경은 꼭 그러겠다고 답했다.
한 시간 뒤, 반납 상자의 마지막 테이프를 붙였다.
보조들을 먼저 보내고 서진에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쓰려는데, 연결문에서 노크가 났다.
“아직도 해요?”
한별이 빈 도시락 통을 들고 있었다.
“저도 이제 끝났어요.”
해경이 메시지를 전송했다. 한별의 시선이 화면에 잠깐 머물렀다.
“좋아요?”
“네. 좋아요.”
너무 빨리 답했다. 한별이 웃는 대신 탁자에 통을 놓았다.
“아침에 빵 준 사람한테도 그 정도로 웃어봐요.”
해경이 그를 돌아봤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세요?”
“현지 방식이 인상 깊어서.”
그제야 웃음이 났다. 한별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바로 그 얼굴.”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해경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남이랑 웃을 때마다 왜 이래.'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배우님도 사람 가려서 웃으시잖아요.”
“내가 누구한테요?”
해경은 순간 세린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걸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팬들한테요. 시장에서 사진 찍어달라는 분들한테 얼마나 다정하시던데.”
“실장님도 찍어줄까요?”
“됐어요.”
“일단 줄은 서요.”
해경이 빈 종이컵을 그의 손에 쥐여줬다.
“줄 서는 동안 이거 버려주세요.”
한별은 컵을 보고 황당한 듯 웃었다. 해경도 같이 웃었다.
쓰레기통으로 가던 그가 바닥의 테이프 조각을 밟았다.
신발을 들었는데 길게 늘어진 테이프가 반납 상자까지 따라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해경이 급히 그의 발 앞에 앉았다.
한별은 한 발을 든 채 탁자를 짚었다.
“왜 실장님 일 도와주면 자꾸 묶여요?”
“쓰레기 버리는 걸 일 도와줬다고 하시니까요.”
테이프를 떼다가 손등이 그의 발목에 닿았다. 한별이 자세를 바꾸려 하자 해경이 발목을 가볍게 잡았다.
“조금만요.”
그가 그대로 멈췄다.
해경은 테이프 끝을 말아 붙였다. 손을 놓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내일도 바빠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오전에만요. 왜요?”
“저녁에 밥 먹으려고 했는데.”
해경은 잡지도 않은 테이프를 한 번 더 눌렀다.
'지금 약속 잡는 거야?'
“오전에만이라고 했잖아요.”
한별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럼 저녁은 돼요?”
해경이 대답하려는 순간 서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도착 시간과 현장 주소, 피팅 대상의 이름이었다.
강도윤.
한별은 해경이 내려다보는 화면을 보고 웃음을 거뒀다.
“도윤이 일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윤서진 실장님이요?”해경이 가방을 다시 열었다. 휴대폰에는 서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근처 리조트 화보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제작팀에 협찬 샘플을 전달할 일이 생겨, 해경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저 먼저 정리하고 갈게요.”해경이 보조에게 가방을 넘겼다. 옆에 있던 한별이 물었다.“방금까지 정리한 건 뭐예요?”“다 했는지 확인하는 거죠.”“확인도 다 했는데.”“배우님은 대본 확인 한 번만 하세요?”한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요. 누가 못 가게 했나.”말투가 이상했다. 해경은 그를 봤다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지금은 왜 저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호텔 작업실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세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언니, 여기까지 와서도 일해?”“오늘은 짐만 전해주고 쉴 거야. 너도 끝났다며.”해경이 들어서자 서진이 먼저 일어났다.“류해경 실장님?”사진으로만 봤던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렀다.해경은 악수를 하다가 손바닥에 핀이 없는지 괜히 확인했다.'아니, 손에 꽂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보내주신 사진 잘 봤어요.”“감사합니다. 원본은 정리해서…….”“사진부터 다시 볼까요? 이쪽 앉아요.”서진이 태블릿을 돌렸다. 해경이 보낸 세 장이 떠 있었다.어떤 옷이 예쁘다는 말보다, 왜 그 옷을
“그 질문은 이따 대답해요.”한별이 해경의 뒤에서 말했다.해경은 감독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음을 빨리했다.'연기 잘해서 싫냐니.'그게 싫은 거라면 이렇게 답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그가 세린을 바라보는 얼굴을 본 뒤, 아침에 자신에게 웃던 얼굴까지 의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말로 꺼내면 우스워질 생각이었다.테이블 위에는 방금 찍은 장면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제작팀 직원이 한 장을 골라 들었다. 한별과 세린의 얼굴이 가까운 컷이었다.“숙소 건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요. 오늘 밤 티저를 하나 올리면 관심이 작품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요.”세린이 사진을 봤다.“키스 장면을 벌써요?”“짧은 스틸 한 장입니다. 두 분 의견 듣고 결정하려고요.”한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이 먼저 사진을 내려놓았다.“저는 다른 사진이면 좋겠어요.”“노출이 부담스러우세요?”“노출보다 순서요. 아직 첫 티저도 안 나왔는데 키스신부터 보여주면 인물 관계를 다 아는 것 같잖아요.”해경은 세린을 봤다.정확한 말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불편했던 건 자기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경은 의상팀으로서 덧붙였다.“이 장면 옷은 앞 장면의 사건을 겪고 나서 바뀐 스타일이에요. 먼저 공개되면 이야기 흐름도 보일 거예요.”제작팀 직원이 사진을 다시 봤다.“그럼 대체 컷을 오늘 찍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요.”재하가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앞 테라스 빛 아직 살아 있어요. 두 분 각각 한 컷씩 찍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벽 얇다던데.”“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아직 안 왔겠지.'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
“아뇨. 못 들었어요.”한별이 답했다.해경은 준비실 문을 닫았다. 세린은 안쪽에서 자기 옷을 챙기고 있었다.“그럼 이제 들으셨으니까 배우님도 조심해주세요.”“승재한테 내가 얘기할게요.”“저한테 잘해주라고 하시라는 뜻 아니에요.”전화 너머에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 때문에 실장님한테 그런 말 한 거잖아요.”“같이 나갔는데 저만 말 들은 게 싫어요. 배우님이 먼저 나가자고 하셨고요.”말하고 나니 꼭 따라가기 싫었는데 끌려간 사람 같았다.해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물론 저도 가고 싶어서 갔어요.”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작아진 게 더 짜증 났다.한별이 물었다.“나랑요?”“지금 그게 중요해요?”“그것도 중요하죠.”해경은 휴대폰을 귀에서 잠깐 뗐다가 다시 댔다.'끝까지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지.'“다시 말씀드릴게요. 주의사항 있으면 두 사람한테 똑같이 알려주세요.”“알았어요.”“그리고 제 차는 제가 정해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내 마음대로 한 거 맞아요.”예상하지 못한 인정이었다. 해경은 다음 말을 준비하다 멈췄다.“짐 챙겨요. 내가 승재랑 얘기할게요.”통화가 끝났다.세린은 휴대폰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저 이
“괜찮으니까 나왔죠.”한별의 대답은 빨랐다.해경은 그의 뒤로 멀어지는 관광객들을 봤다.“저분들이 사진 올리면요?”“내 사진인데요.”“같이 다닌 사람 얘기도 하실 수 있잖아요.”“그럼 같이 다녔다고 하면 되죠.”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려웠다.한별에게는 평소처럼 사진 한 장 찍어준 일이었다. 해경은 방금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허둥댔다.“배우님은 익숙하시겠지만 저는 처음이라서요.”그제야 한별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승재였다.“어. 아직 근처야.”몇 마디 듣던 한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디까지 들어왔는데?”해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촬영팀 단체 대화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있었다.〈숙소 로비에 외부 방문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복귀 시 정문 이용을 피해주시고, 제작팀 연락을 기다려주세요.〉'벌써?'조금 전 만난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한별이 통화를 끝냈다.“승재가 데리러 온대요.”“저희 때문에 호텔까지 온 거예요?”“아직 몰라요. 여기서 기다려요.”그는 해변 안쪽을 가리켰다. 해경은 따라 움직이면서도 단체 대화방을 놓지 못했다.승재는 차를 세우자마자 뒷문을 열었다.승재는 한별이 타는 걸 확인하고 주변을 살폈다.“두 분 다 타세요. 숙소 바로 못 들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