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윤이 일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해경은 바닥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챙겼다.
“저도 방금 알았어요. 그런데 누구 일이면 달라지는데요?”
“사람 피곤하게 하는 타입이에요.”
“그건 여기서도 적응했어요.”
한별이 해경을 봤다.
“나랑은 달라요.”
“그러겠죠. 배우님 같은 분이 또 계시면 곤란하죠.”
그는 탁자에 놓았던 도시락 통을 집어 들었다. 해경은 화면을 껐다.
“두 분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배우님이 싫어한다고 저도 싫어할 순 없어요.”
“싫어하라고는 안 했어요.”
“그럼 일해보고 제가 판단할게요.”
잠깐 조용해졌다. 한별이 통 뚜껑을 맞췄다.
“그래요. 해보고.”
그가 옆방으로 돌아갔다.
해경은 닫힌 문 앞에서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저녁 이야기는 끝난 걸까.
'지가 먼저 물어봐놓고.'
다시 불러서 묻기는 싫었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저녁에 뭘 먹자고 하려던 건지 궁금했다.
다음 날, 해경은 서진이 보낸 차량을 타고 리조트에 도착했다.
작업실 문 앞에서 강도윤과 마주쳤다.
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오늘 오시기로 한 실장님이시죠? 강도윤입니다.”
도윤이 손을 내밀려다 컵을 내려다봤다.
“잠깐만요. 제가 지금 손이 두 개밖에 없네요.”
한 잔을 다른 손으로 옮기자 뚜껑 사이로 커피가 올라왔다.
해경이 얼른 컵 하나를 받았다.
“악수는 나중에 하셔도 돼요.”
“첫인사부터 일을 시켰네.”
도윤은 컵을 돌려받으며 웃었다.
한별이 말한 피곤한 타입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적어도 첫인사는 어렵지 않았다.
서진이 안쪽에서 두 사람을 불렀다.
“커피 내려놓고 시작하죠. 해경 씨는 이 재킷부터 봐줘요.”
도윤은 갈아입을 옷을 받아 탈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커튼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이거 맞게 입은 건가요?”
도윤이 나온 모습을 본 해경은 허리 쪽을 봤다.
얇은 벨트가 재킷 아래가 아니라 위에 매여 있었다.
“허리에 하신 건 바지 벨트예요.”
“어쩐지 숨이 안 쉬어지더라.”
서진이 태블릿에서 눈을 들었다.
“내가 준 그림에는 그렇게 안 돼 있는데.”
“그림보다 과감하게 해봤어요.”
“과감하게 풀어요.”
해경이 웃으며 벨트를 받아 들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별이었다.
[아침 먹고 갔어요?]
해경은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어디까지 갔냐거나 일을 시작했냐고 물을 줄 알았다.
'아침은 왜.'
서진이 다음 옷을 꺼내는 동안 짧게 답했다.
[네. 왜요?]
[그쪽 빵도 눌려 있나 해서.]
해경이 피식 웃었다.
[여기는 사람 안 앉았어요.]
[맛없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도 웃음이 남았다.
도윤이 거울로 그녀를 봤다.
“좋은 소식이에요?”
“아뇨. 쓸데없는 소리요.”
그녀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쓸데없다고 말하면서도 답을 안 할 생각은 못 했다.
세 번째 옷을 입은 도윤이 팔을 들자 재킷 뒤판이 당겼다.
해경은 움직임을 확인하고 서진에게 수정할 부분을 짚었다.
서진은 잠깐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봐요. 핀은 이쪽에 있어요.”
그 한마디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도윤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이제 손 들고 항복할 수 있겠네요.”
“촬영 중에 항복하실 일 있어요?”
“서진 실장님한테 매일 하는데.”
서진이 옆에서 받아쳤다.
“항복하면서 말이 왜 이렇게 많아.”
해경은 핀을 입에 물려다가 손에 그대로 쥐었다.
웃다 삼킬 것 같았다.
피팅이 끝날 무렵 서진이 시계를 봤다.
수정한 재킷을 촬영 전에 한 번 더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오후에도 있을 수 있어요? 추가 시간은 정산하고요.”
해경은 잠깐 일정표를 열었다.
기존 팀 샘플 반납은 오후 두 시였다. 정리는 끝냈지만 인계는 직접 해야 했다.
“두 시에 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해요. 반납 끝내고 네 시쯤 다시 올 수는 있습니다.”
“그럼 촬영 순서 바꿀게요. 가능한 시간만 해줘요.”
서진이 촬영팀에 전화를 걸었다.
도윤은 재킷을 벗으며 해경에게 물었다.
“네 시에 다시 오시면 끝나고 저녁도 같이 먹죠. 오늘 팀 식사할 건데.”
해경은 대답하려다 휴대폰을 봤다.
한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저녁은 된다고 했죠?]
한동안 그 문장만 봤다.
어제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지려는 걸 도윤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못 먹는 음식 있어요?”
“아, 아직 저녁은…….”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한별의 전화였다.
해경은 잠깐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갔다.
“메시지 봤어요?”
받자마자 돌아온 질문에 해경은 벽에 기대 섰다.
“봤어요. 답하기 전에 전화하셨잖아요.”
“그렇게 오래 걸릴 대답이에요?”
“어제는 배우님이 먼저 가셨거든요. 제가 된다는데도.”
“된다곤 안 했어요. 오전에만 바쁘다고 했지.”
“그 말이 그 말이죠.”
“그럼 된다는 거네요.”
한별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듣고 싶은 말만 잘 듣지.'
그런데 어제보다 덜 얄미웠다.
“저 오후에 다시 와야 해요. 식사 시간까지 끝날지는 모르겠어요.”
“끝나면 연락해요.”
“늦어도요?”
“밥은 늦게 먹어도 돼요.”
별말도 아닌데 발끝이 멈췄다.
도윤과 서진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조금만 더 통화하고 싶었다.
“배우님 배고프면 더 까칠해지시잖아요.”
“그건 실장님도 그래요.”
“제가 언제요?”
“아침 빵 뺏기기 전에.”
해경이 웃었다.
한별은 그 웃음이 끝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도윤이 새 컵에 커피를 따라주고 있었다.
“식사 안 되시면 다음에 해요.”
“네. 오늘은 먼저 한 얘기가 있어서요.”
해경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약속이 생겼다는 걸 실감했다.
도윤이 컵을 내밀었다.
“한별이죠?”
해경의 손이 컵 앞에서 멎었다.
“아까 이름 뜨는 걸 봤어요. 그 친구가 먼저 밥 먹자고도 하는구나.”
그는 웃으면서 물었다.
“두 분, 같이 일만 하는 사이 맞아요?”
“두 분, 같이 일만 하는 사이 맞아요?”해경은 도윤이 내민 컵을 받았다.“배우님하고도 같이 일만 하는 사이죠.”도윤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맞는 말이네요. 제가 너무 빨리 물었죠?”“네. 첫날인데요.”“그럼 다음 질문은 좀 아껴둘게요.”그가 옷을 챙겨 탈의 공간으로 들어갔다.해경은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뭘 다음까지 물어.'같이 일하는 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나니 한별과의 저녁 약속이 괜히 설명해야 할 일이 된 것 같았다.그냥 밥을 먹는 건데.해경은 가방을 챙기면서 그 말을 한 번 더 생각했다.오후 두 시 샘플 반납을 마치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왔다.수정한 재킷은 잘 맞았다. 서진이 확인하고 다음 옷을 넘기는 동안 해경은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빨리 끝내고 싶어서 서두르면 오히려 실수할 것 같았다.다섯 시 반, 마지막 컷을 찍기 시작할 때 비가 왔다.테라스 촬영을 안으로 옮기느라 시간이 밀렸다. 해경은 젖은 바닥에 옷이 닿지 않도록 행거를 옮겼다.'오늘도 길어지네.'아까는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볼 때마다 마음이 급해졌다.한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비 때문에 늦어져요. 먼저 드셔도 돼요.]답은 금방 왔다.[얼마나 늦어요?][아직 몰라요.][그럼 나도 아직 안 먹어요.]해경은 화면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미안하다는 말부터 써야 하는데 웃음이 먼저 나왔다.'배고프다면서 화내기만 해봐.'그녀는 촬
“도윤이 일이라고는 안 했잖아요.”해경은 바닥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챙겼다.“저도 방금 알았어요. 그런데 누구 일이면 달라지는데요?”“사람 피곤하게 하는 타입이에요.”“그건 여기서도 적응했어요.”한별이 해경을 봤다.“나랑은 달라요.”“그러겠죠. 배우님 같은 분이 또 계시면 곤란하죠.”그는 탁자에 놓았던 도시락 통을 집어 들었다. 해경은 화면을 껐다.“두 분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배우님이 싫어한다고 저도 싫어할 순 없어요.”“싫어하라고는 안 했어요.”“그럼 일해보고 제가 판단할게요.”잠깐 조용해졌다. 한별이 통 뚜껑을 맞췄다.“그래요. 해보고.”그가 옆방으로 돌아갔다.해경은 닫힌 문 앞에서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저녁 이야기는 끝난 걸까.'지가 먼저 물어봐놓고.'다시 불러서 묻기는 싫었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저녁에 뭘 먹자고 하려던 건지 궁금했다.다음 날, 해경은 서진이 보낸 차량을 타고 리조트에 도착했다.작업실 문 앞에서 강도윤과 마주쳤다.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오늘 오시기로 한 실장님이시죠? 강도윤입니다.”도윤이 손을 내밀려다 컵을 내려다봤다.“잠깐만요. 제가 지금 손이 두 개밖에 없네요.”한 잔을 다른 손으로 옮기자 뚜껑 사이로 커피가 올라왔다.해경이 얼른 컵 하나를 받았다.“
“윤서진 실장님이요?”해경이 가방을 다시 열었다. 휴대폰에는 서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근처 리조트 화보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제작팀에 협찬 샘플을 전달할 일이 생겨, 해경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저 먼저 정리하고 갈게요.”해경이 보조에게 가방을 넘겼다. 옆에 있던 한별이 물었다.“방금까지 정리한 건 뭐예요?”“다 했는지 확인하는 거죠.”“확인도 다 했는데.”“배우님은 대본 확인 한 번만 하세요?”한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요. 누가 못 가게 했나.”말투가 이상했다. 해경은 그를 봤다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지금은 왜 저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호텔 작업실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세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언니, 여기까지 와서도 일해?”“오늘은 짐만 전해주고 쉴 거야. 너도 끝났다며.”해경이 들어서자 서진이 먼저 일어났다.“류해경 실장님?”사진으로만 봤던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렀다.해경은 악수를 하다가 손바닥에 핀이 없는지 괜히 확인했다.'아니, 손에 꽂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보내주신 사진 잘 봤어요.”“감사합니다. 원본은 정리해서…….”“사진부터 다시 볼까요? 이쪽 앉아요.”서진이 태블릿을 돌렸다. 해경이 보낸 세 장이 떠 있었다.어떤 옷이 예쁘다는 말보다, 왜 그 옷을
“그 질문은 이따 대답해요.”한별이 해경의 뒤에서 말했다.해경은 감독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음을 빨리했다.'연기 잘해서 싫냐니.'그게 싫은 거라면 이렇게 답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그가 세린을 바라보는 얼굴을 본 뒤, 아침에 자신에게 웃던 얼굴까지 의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말로 꺼내면 우스워질 생각이었다.테이블 위에는 방금 찍은 장면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제작팀 직원이 한 장을 골라 들었다. 한별과 세린의 얼굴이 가까운 컷이었다.“숙소 건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요. 오늘 밤 티저를 하나 올리면 관심이 작품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요.”세린이 사진을 봤다.“키스 장면을 벌써요?”“짧은 스틸 한 장입니다. 두 분 의견 듣고 결정하려고요.”한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이 먼저 사진을 내려놓았다.“저는 다른 사진이면 좋겠어요.”“노출이 부담스러우세요?”“노출보다 순서요. 아직 첫 티저도 안 나왔는데 키스신부터 보여주면 인물 관계를 다 아는 것 같잖아요.”해경은 세린을 봤다.정확한 말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불편했던 건 자기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경은 의상팀으로서 덧붙였다.“이 장면 옷은 앞 장면의 사건을 겪고 나서 바뀐 스타일이에요. 먼저 공개되면 이야기 흐름도 보일 거예요.”제작팀 직원이 사진을 다시 봤다.“그럼 대체 컷을 오늘 찍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요.”재하가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앞 테라스 빛 아직 살아 있어요. 두 분 각각 한 컷씩 찍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벽 얇다던데.”“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아직 안 왔겠지.'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