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
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
“실장님.”
한별이 불렀다.
“네?”
“그거 두고 가요?”
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
“나중에 먹으려고요.”
“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
해경은 봉투를 챙겼다.
'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
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
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
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
“많이 붙어요?”
세린이 물었다.
“네?”
“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
“아. 잠깐만요.”
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
'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
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
“이제 괜찮아요.”
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다 됐어요.”
“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구겨진 데가 없어서요.”
그가 제 소매를 내려다봤다.
“어제는 없어도 펴주던데.”
해경은 핀 통을 닫았다.
“오늘은 안 구겨지게 잘 입으세요.”
대꾸가 너무 딱딱했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 말을 붙이면 어제 왜 그랬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촬영이 시작되자 한별은 다른 사람이 됐다.
늘 한마디씩 이기려 들던 사람이 세린의 말을 끝까지 기다렸다. 손을 잡는 동작도 서두르지 않았다.
세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보는 한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해경은 모니터 옆에 서서 그 얼굴을 봤다.
'잘하네.'
처음 보는 연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잘한다는 생각 뒤에 자꾸 다른 말이 붙었다.
저렇게 보면 누구라도 진짜인 줄 알겠다.
아침에 자신을 보던 것도 별 뜻 없었겠지.
그 생각을 하자 괜히 속이 상했다.
한별이 세린의 뺨 가까이 손을 올렸다.
해경은 고개를 돌리려다 그대로 있었다.
피하는 게 더 이상했다. 의상도 봐야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컷! 좋습니다. 각도 바꿔서 한 번 더 갈게요.”
현장이 다시 분주해졌다.
해경은 세린의 등 쪽 주름을 펴고, 한별의 셔츠 밑단을 정리했다.
“괜찮았어요?”
한별의 질문에 손을 뗐다.
“네. 연기 잘하시네요.”
“칭찬인데 기분이 좀 이상하네.”
“기분 좋게 받으세요.”
해경이 돌아서자 그가 잠깐 뒤를 봤다.
'저건 또 왜 기분이 나쁜데.'
한별은 방금 들은 말을 되짚었다. 아침에는 빵 한 조각에도 웃더니.
세린은 잠깐 그늘에 앉아 물을 마셨다. 컵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해경은 그녀 옆에 티슈를 놓았다.
“립 묻었어요. 컵에.”
“아, 고마워요.”
세린이 웃고는 다시 대본을 폈다. 해경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그만뒀다.
자신만 이상한 아침을 보내는 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세린에게는 평소처럼 옷이 불편하지 않은지만 물었다.
재하가 도착한 건 두 번째 촬영이 끝났을 때였다.
그는 촬영 감독과 동선을 확인하고 카메라를 꺼냈다. 해경에게는 짧게 손만 들었다.
그 정도 인사가 오히려 편했다.
해경도 손을 들고 하던 일을 마쳤다.
쉬는 시간이 되자 재하가 테라스 끝을 가리켰다.
“해경아, 저기 잠깐 서줄래? 빛만 확인하게.”
해경이 표시된 자리에 섰다.
재하는 카메라를 들다가 바로 내렸다.
“거기 말고 한 발 왼쪽.”
그녀가 옮기자 그가 웃었다.
“너 지금 머리 위에 뿔 났어.”
벽 장식의 사슴뿔이 정확히 해경의 머리 양옆으로 솟아 있었다.
화면을 본 해경이 헛웃음을 냈다.
“지워.”
“아직 안 찍었어.”
“찍을 얼굴이었어.”
“잘 아네.”
익숙한 농담에 어깨가 조금 풀렸다.
재하가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표정 안 지어도 돼. 이건 저장 안 할 거야.”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게 나와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니 바람도 느껴졌다.
난간에 손을 올렸을 때, 뒤에서 한별의 목소리가 났다.
“거기 내 자리 아니에요?”
재하가 카메라를 내렸다.
“배우님은 다음 컷입니다. 지금 빛 보고 있어요.”
“나로 보면 되죠.”
해경은 비켜섰다.
“그러세요. 전 뿔이 나서.”
한별이 같은 자리에 서자 재하가 잠깐 말을 멈췄다.
해경은 카메라 화면을 보고 참지 못했다.
큰 키 때문에 뿔 대신 벽의 작은 꽃 장식이 한별의 정수리에 얹혀 있었다.
“왜 웃어요?”
“잘 어울리세요.”
재하가 화면을 돌려줬다. 한별은 꽃을 확인하고 해경을 봤다.
“실장님보다 낫네.”
“제 건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뿔보다 꽃이 낫죠.”
그 뻔뻔한 얼굴에 또 웃음이 났다.
한별은 그제야 촬영 위치를 옮겼다.
해경이 장비 가방을 챙기는데 그의 그림자가 겹쳤다.
“아까보다 기분 좋아 보여요.”
“배우님 꽃 피셔서요.”
“그 전부터 웃던데.”
해경은 고개를 들었다. 한별은 재하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었어?'
갑자기 핀 통의 뚜껑이 잘 안 맞았다.
“친구랑 웃는 것도 안 돼요?”
“나한테는 안 웃길래.”
해경은 뚜껑을 누르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냥 투정처럼 들렸으면 바로 받아쳤을 텐데. 한별의 표정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아까 칭찬도 해드렸잖아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그가 몸을 조금 낮췄다. 주변 소리에 묻힐 만큼 목소리도 낮아졌다.
“내가 연기 잘해서 싫어요?”
해경은 숨을 들이켰다.
웃어넘기면 될 말을, 바로 웃어넘기지 못했다.
방금 모니터에서 본 얼굴과는 달랐다. 해경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 조급해 보였다. 그게 더 곤란했다.
그때 재하가 두 사람을 불렀다.
“배우님, 실장님. 감독님이 다음 촬영 얘기 같이 듣자시는데요.”
해경이 먼저 돌아섰다.
한별은 따라오며 덧붙였다.
“그 질문은 이따 대답해요.”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벽 얇다던데.”“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아직 안 왔겠지.'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
“아뇨. 못 들었어요.”한별이 답했다.해경은 준비실 문을 닫았다. 세린은 안쪽에서 자기 옷을 챙기고 있었다.“그럼 이제 들으셨으니까 배우님도 조심해주세요.”“승재한테 내가 얘기할게요.”“저한테 잘해주라고 하시라는 뜻 아니에요.”전화 너머에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 때문에 실장님한테 그런 말 한 거잖아요.”“같이 나갔는데 저만 말 들은 게 싫어요. 배우님이 먼저 나가자고 하셨고요.”말하고 나니 꼭 따라가기 싫었는데 끌려간 사람 같았다.해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물론 저도 가고 싶어서 갔어요.”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작아진 게 더 짜증 났다.한별이 물었다.“나랑요?”“지금 그게 중요해요?”“그것도 중요하죠.”해경은 휴대폰을 귀에서 잠깐 뗐다가 다시 댔다.'끝까지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지.'“다시 말씀드릴게요. 주의사항 있으면 두 사람한테 똑같이 알려주세요.”“알았어요.”“그리고 제 차는 제가 정해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내 마음대로 한 거 맞아요.”예상하지 못한 인정이었다. 해경은 다음 말을 준비하다 멈췄다.“짐 챙겨요. 내가 승재랑 얘기할게요.”통화가 끝났다.세린은 휴대폰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저 이
“괜찮으니까 나왔죠.”한별의 대답은 빨랐다.해경은 그의 뒤로 멀어지는 관광객들을 봤다.“저분들이 사진 올리면요?”“내 사진인데요.”“같이 다닌 사람 얘기도 하실 수 있잖아요.”“그럼 같이 다녔다고 하면 되죠.”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려웠다.한별에게는 평소처럼 사진 한 장 찍어준 일이었다. 해경은 방금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허둥댔다.“배우님은 익숙하시겠지만 저는 처음이라서요.”그제야 한별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승재였다.“어. 아직 근처야.”몇 마디 듣던 한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디까지 들어왔는데?”해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촬영팀 단체 대화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있었다.〈숙소 로비에 외부 방문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복귀 시 정문 이용을 피해주시고, 제작팀 연락을 기다려주세요.〉'벌써?'조금 전 만난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한별이 통화를 끝냈다.“승재가 데리러 온대요.”“저희 때문에 호텔까지 온 거예요?”“아직 몰라요. 여기서 기다려요.”그는 해변 안쪽을 가리켰다. 해경은 따라 움직이면서도 단체 대화방을 놓지 못했다.승재는 차를 세우자마자 뒷문을 열었다.승재는 한별이 타는 걸 확인하고 주변을 살폈다.“두 분 다 타세요. 숙소 바로 못 들어가요.”
36화 알아보면 어떡해요해경은 서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한별 배우와 상관없는 사진.'세린의 원피스를 보고 연락했다면서 왜 한별을 빼달라는 걸까.방에 돌아와 사진 폴더를 열었다. 예전에 맡았던 촬영도 있었고, 배우 없이 옷만 찍은 사진도 있었다.해경은 보내기 전에 먼저 물었다.〈어떤 부분을 더 보고 싶으신 걸까요?〉답은 금방 왔다.〈특정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것 말고, 다른 체형이나 분위기도 어떻게 잡는지 보려고요. 세린 씨 사진처럼요.〉괜히 혼자 어려운 시험지를 받은 기분이었다.해경은 사진 세 장에 자신이 맡은 범위를 적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도 다른 사람이 고른 옷이면 뺐다.전송을 누르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휴대폰 위로 한별의 메시지가 떴다.〈내일 끝나면 연락해요. 먼저 안 갈게요.〉해경은 답을 쓰다가 지웠다.〈옷 반납부터 하고요.〉그가 바로 답했다.〈옷 다음 차례로 기다릴게요.〉'이제 제 순서도 아네.'해경은 웃으며 화면을 껐다. 다시 켜서 알람을 맞출 때도 그 문장이 먼저 보였다.다음 날 촬영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세린은 해경이 준비한 낮은 구두를 신고 마지막 장면을 마쳤다. 반납하면서 발이 훨씬 편했다고 말했다.해경도 고맙다고 답했다. 오늘은 쓸데없이 눈치를 보지 않았다.그런데 옷을 다 정리하고 나자 거울 앞에서 시간이 걸렸다.
“닦고 가세요.”해경은 그의 발끝을 가리켰다.“이쪽도요?”“제가 반짝이게 해드릴게요.”한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반대쪽 신발을 벗었다. 해경은 받은 신발을 천으로 문질렀다. 구두약도 없으니 아까보다 반짝여질 리 없었다.'뭐 하는 거야, 류해경.'“그렇게 잡고 있으면 팔 아파요.”“괜찮아요.”“종일 서 있었잖아요.”그 말을 듣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배우님도 종일 서 계셨는데요.”“나는 중간에 앉았죠. 실장님이 신발 닦아주실 때.”“지금도 앉아 계시잖아요.”“그래서 미안해하는 중이에요.”한별이 의자 옆의 낮은 탁자를 밀어주었다. 해경은 그 위에 신발을 올렸다.어색했던 침묵이 조금 누그러졌다.“제가 오늘 좀 피했어요.”해경이 먼저 말했다. 한별의 무릎이 멈췄다.“왜요?”“생각할 게 있어서요. 배우님이 잘못하신 건 아니에요.”세린의 이야기를 대신 전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다.“무슨 생각인데요?”“아직 정리가 안 됐어요.”이 말은 조금 힘들었다.한별은 그녀가 내려놓는 신발을 받아 신었다.“그럼 정리하고 얘기해요.”“뭘 얘기할지도 모르시면서요.”“그러니까 들어봐야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