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4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09 12:10:03

“사흘,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희는 연호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그동안 고모님을 뫼시고 대인을 다시 뵐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고모님?’

미옥은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유희를 바라보았다. 장군의 여식인 저 아기씨가 '고모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시는 분이라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귀부인이란 말인가. 아마도 저 아기씨처럼 번쩍이는 비단을 휘감고, 서슬 퍼런 위세를 떨치는 무서운 분이겠지.

미옥은 제 비천한 신세가 새삼스레 쓰라렸다. 어제 그와 나누었던 국화 향 섞인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고모님이니 준비니 하는 그들만의 대화 속에 자신만 이방인처럼 툭 떨어져 나온 기분이었다.

‘내가 잠시 돌았었구나. 나와 저분을 똑같이 생각했다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유희는 말을 마치고 미옥을 한 번 흘긋 내려다보았다.

“대인께서도 몸을 잘 갈무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강렬한 멸시였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환관의 비   45화

    궁전 모퉁이를 돌려던 미옥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성한 동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기 때문이다."그거 알아? 천 귀인이 황후 마마께 완전 납작 엎드렸다고 하더라.""어머머, 어째서? 그 콧대 높은 천 귀인이?""왜긴. 폐하와 첫날밤을 그리 치렀으니, 제 몸으론 후사를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게지. 불쌍히 여겨달라며 어찌나 울고불고 매달렸는지 모른대. 아무튼 앞으론 자기가 황자 마마를 잘 모시겠다며, 지금 곧장 경현당으로 갔다는구나.“경현당. 황자의 처소.그 단어들이 뇌리에 꽂히는 순간, 미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천 유희가 후사를 걱정해 고개를 숙였다고?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제 아비의 군세를 등에 업고 황후마저 겁박하던 요물이었다.그런 독사가 이빨을 숨기고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미옥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허억, 헉……!“경현당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미옥의 두 눈이 매섭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이미 유희가 갓난 황자를 품에 안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머, 숙원 아니냐. 어찌 이리 급하게 오느냐.“유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미옥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희의 품에 안긴 황자를 살피며 단숨에 그 앞을 가로막았다."……그러는 귀인 마마께서 어찌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황후 마마께서 허락하셨단다. 내가 후사를 보기 힘든 처지이니, 황자 마마라도 제 자식처럼 품으며 정을 붙이라시더구나.“유희는 품에 안은 황자의 포대기를 고쳐 안으며, 비어있는 한 손으로 당황한 미옥의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그녀의 넓은 소매 자락에서 묘하게 짙고 달큰한 향내가 훅 끼쳐왔다."다행이다, 미옥아. 네가 곁에 있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유희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다정하고 나긋했다."나는 귀하게만 자라 누군가를 돌보거나 시중을 드는 일에는 참으로 서툴지 않니. 행

  • 환관의 비   44화

    태후전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화려한 자수가 놓인 병풍 뒤에서 태후의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와 유희의 정수리에 꽂혔다.“폐하께 씻김을 당했다지? 첫날밤부터 그런 수모를 겪어서야, 내 네게서 이 나라의 후사를 볼 수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구나.”바닥에 납작 엎드린 유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사향탕에 몸을 씻어내며 느꼈던 그 지독한 멸시가 다시금 상처를 헤집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차분한 목소리를 골라냈다.“신첩이 자만하였습니다, 태후 마마. 폐하의 성심을 얻으려다 오히려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하오나 밤은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이 남지 않았사옵니까.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그 밤이 백 번, 천 번 온다 한들 어제와 같다면 아무 소용도 없거늘!”태후의 매서운 질책에 유희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설령…… 제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다 해도, 지금 계신 황자 마마를 제가 친자식처럼 품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마마를 위하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황후께 머리라도 조아려 제 진심을 보이겠나이다.”죽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황자를 차지하겠다는 유희의 가증스러운 집념에, 태후의 눈매가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졌다.“황후의 친정인 조(趙)씨 일가가 두 눈을 뜨고 살아있거늘. 내 사람인 줄 뻔히 아는 네게, 그들이 순순히 황자를 넘겨줄 성싶으냐?”태후의 비웃음 어린 질책에 유희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대꾸했다.“폐하께서는 황후가 서거하는 즉시, 그 일가를 모조리 숙청하실 것이옵니다. 어린 황자를 등에 업은 외척을 살려두어 훗날의 화근을 만드실 분이 아니시니까요.”유희의 단호한 확신에 태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걸 네가 어찌 장담하느냐.”“폐하의 서늘한 정(情)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지 않았사옵니까. 지금 조씨 일가는 제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몰라 숨죽인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을 것이옵니다.”유희는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을 바짝 세우며 말을 이었다.“그들이 살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황자를 제게 넘기고,

  • 환관의 비   43화

    순간, 연호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신의 모순을 그 발칙한 입술이 정확히 찔러들어온 것에 대한 당혹감, 그리고 제 품에 안겨오는 나신의 아찔한 열기에 이성이 마비되는 듯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저를 내려다보는 주인이 아니라, 제 열기를 삼켜줄 사내입니다. 제 몸이 싫으시다면…… 지금 당장 물러가라, 내치시면 됩니다.”툭-.연호의 이성을 꼿꼿하게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속절없이 끊어지는 소리였다.와장창-!연호가 짐승처럼 팔을 휘두르자, 탁상 위의 화려한 주안상과 백자 호리병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방바닥으로 처박혔다.그는 단숨에 탁자 위를 기어오던 미옥의 허리를 낚아채듯 들어 올려 거칠게 침상으로 몰아넣었다.“하아, 읏……!”미옥의 등이 차가운 침구 위로 닿는 순간, 연호의 뜨거운 육체가 그 위를 집어삼키듯 덮쳐왔다. 그는전희 따위는 생략한 채, 미옥의 다리를 거칠게 벌려 당장이라도 그 사이를 파고들 듯 거세게 몰아붙였다.그러나 그 짐승 같은 폭력이 미옥을 꿰뚫으려던 찰나.미옥은 상체를 유연하게 비틀어 연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을 뒤집어, 당황한 연호의 골반 위로 대담하게 올라탔다.“……무슨 짓이지.”“저와의 잠자리에서 주인 노릇은 그만두십시오.”미옥이 흐트러진 흑룡포 사이로 드러난 연호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내리누르며 나른하게 속삭였다.“오늘은 제가 당신을 취할 겁니다. 그러니 얌전히 기다리세요.”황제를 제 아래에 깔아뭉갠, 불경하고도 아찔한 역전이었다.미옥은 제 안으로 당장 그를 받아들이는 대신, 꼿꼿하게 달아오른 사내의 중심 위로 제 젖은 아래를 천천히 비벼대기 시작했다.질척, 찌억-.노골적이고도 음탕한 마찰음이 고요한 침향각의 공기를 때렸다. 연호의 단단한 복근이 터질 듯 수축했고, 그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짐승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미옥은 황제를 한낱 쾌락에 허덕이는 수컷으로 전락시켰다는 기묘한 승리감에 젖어 들었다. 그녀는 위에서 연호를 내려다보며, 달아오른 그의 귓가에 조

  • 환관의 비   42화

    밤이 깊어지자, 침향각의 묵직한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싸늘한 밤공기와 함께 연호가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숨을 죽인 내관들이 쟁반을 받쳐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방 한가운데 놓인 검은 목재 탁자 위로 황제를 위한 야회상(夜會床)을 차려냈다.얇게 저며 꽃 모양으로 화려하게 말아낸 육포와 꿀에 재워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연근 정과, 그리고 속을 호두로 꽉 채워 정갈하게 썰어낸 곶감쌈이 담긴 청자 찬합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 곁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향의 곡차가 든 백자 호리병이 자리를 잡았다.내관들은 방 안쪽, 침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옥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며 침향각에는 완벽한 고립과 정적이 내려앉았다.미옥은 얇은 침의 하나만을 걸친 채 단정히 앉아있었다. 고개를 들자, 황제든 사내든 기꺼이 취해버리겠다는 그 오만한 낯빛 그대로였다.연호는 미옥에게 다가가는 대신, 탁자 앞에 놓인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여유롭게 몸을 묻었다.“…….”그는 미옥을 투명 인간 취급하듯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붉은 육포 한 점을 입에 물고는 스스로 술잔을 채웠다. 쪼르륵, 맑은 액체가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높게 천장을 울렸다. 쌉싸름한 곡차의 향과 달큰한 정과의 향이 묘하게 뒤섞여 방 안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가까이 오라.”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연호가 나직하게 명했다.미옥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연호의 앞,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그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는, 나른하고도 서늘한 눈동자로 미옥을 내려다보았다.“벗어라.”“……예?”“못 들었느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전부 벗으라 명했다.”미옥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당장이라도 짐승처럼 달려들어 제 몸을 유린하며 분노를 토해낼 줄 알았건만. 연호는 그저 질 좋은 구경거리를 산 귀족처럼 나른하게 등받이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 환관의 비   41화

    새벽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 편전(便殿)에서 아침 조회(朝會)를 마친 연호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의 뒤를 따르는 상시와 내관들이 숨을 죽인 채 잰걸음으로 그 묵직한 보폭을 쫓았다.침향각(沈香閣)이었다.싸늘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걷는 연호의 입가에는 희미한 호선이 걸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간밤에 홀로 남겨두었던 한 여인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너는 지금쯤 어찌하고 있을까.’연호는 궐내의 여인들이 보이는 빤한 생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황제가 다른 여인의 처소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아침이면, 후궁들은 으레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질투심에 눈이 멀어 밤새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 처연하게 훌쩍이고 있거나.아니면, 어떻게든 황제의 눈길을 한 번 더 끌어보겠다며 평소보다 두껍게 분을 바르고 가장 화려한 비단옷을 꺼내 입은 채 애타게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거나.‘하지만 너는 내 옷자락 한 가닥도 쥐지 못하겠지.’제 주인의 숨결 하나에도 목숨이 달린 듯 맹목적으로 복종하던 너.‘그래. 분명 하륜에게 버려질까 두려워 발버둥 쳤던 것처럼, 내게서도 이대로 버려질까 무서워 바들바들 떨고 있겠지.’주인이 다른 꽃을 꺾으러 간 밤.감히 원망조차 하지 못한 채, 방구석에 웅크려 있겠지.‘그 겁에 질린 떨림,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를 보여다오.’그 맹목적인 공포야말로 미옥이 이제 하륜이 아닌 자신을 완벽한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가장 달콤한 증거일 터였다.“폐하, 드시옵니다.”조심스러운 고함이 침향각의 정적을 갈랐다.연호는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칠 겁에 질린 눈동자를 기대하며 서늘한 눈을 내리깔았다.그러나, 열린 미닫이문 너머의 풍경은 연호의 예상을 완벽하게 배반했다.“…….”방구석에서 두려움에 떠는 여인은 없었다.버림받을까 애태우는 짐승의 눈빛도, 제 옷자락을 쥐려 망설이는 초라한 손길도 없었다.미옥은 그저 정갈하고 소박한 평상복 차림으로 방 한가운데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치 황제가 어느 처

  • 환관의 비   40화

    제조상궁이 쏟아부은 차가운 향유가 유희의 은밀한 곳을 타고 눅진하게 흘러내렸다. 수치심에 눈물조차 마른 유희는, 천장을 응시한 채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이윽고 연호가 그녀의 메마른 몸 위로 무겁게 몸을 겹쳐왔다.기녀에게 배웠던 서막은 없었다. 달콤한 입맞춤도, 살을 애무하는 부드러운 손길도.그는 그저 짐승의 털을 벗겨내듯 유희의 하얀 적삼을 거칠게 벗겨냈다..“아악……!”비명 섞인 신음이 유희의 파리한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그것은 기녀가 말했던 쾌락의 서막이 아니었다.몸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파고드는 날 것 그대로의 통증.묶여있는 다리는 어쩌지 못하고 침상 기둥에서 바들바들 떨려왔다.홧홧하게 타오르는 통증은 골반을 타고 척추까지 붉게 물들였다.월향이 그랬던가.사내는 낮에는 군자이나 밤에는 짐승이 된다고.하지만 제 위의 사내는 짐승조차 아니었다.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움직이는, 감정 없는 조각상이었다.정사가 이어지는 내내, 연호는 유희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그의 무심한 눈동자는 여전히 방안의 어느 한구석, 혹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쳐다보지도, 만지지도, 소리 내지도 말라는 제조상궁의 호령에 갇힌 유희는, 제 몸을 뚫고 들어오는 육중한 통증만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살이 찢기는 통증이 밤새 마마를 짓누를 것이옵니다.]그제야, 차 상시가 했던 말의 뜻을 깨달았다.유희는 통증으로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들며 요를 부여잡은 주먹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으나, 무너지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가슴이었다.‘나도 필요한 건 당신의 씨일 뿐이니. 이 치욕의 대가로 네놈의 아이를 배어, 내 아비의 칼자루 위에 이 제국을 올려놓으리라.’유희는 마지막까지 꼿꼿하게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수치심과 아픔은 독기로 변해 그녀의 혈관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들었다.정사가 끝나자, 연호는 일말의 여운도 없이 유희의 몸에서 물러났다. 그는 침상 옆에 던져두었던 흑단색 침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