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미옥이 황급히 오색실을 소매 아래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 했다.그러나 연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그의 시선이 미옥의 손끝에 들린, 채 완성되지 못한 장명루에 가닿았다.“장명루라. 짐의 무병장수라도 기원하려던 참이었나?”입가에 짙은 호선을 그리는 연호의 가슴 언저리가 묘하게 간질거렸다.뜨겁게 달궈진 살결을 탐하고, 쾌락의 끝에서 거친 숨을 내뱉는 익숙한 유희와는 달랐다.‘……이상한 기분이군.’침향각으로 향할 때는 분명 보자마자 품어보려 했는데, 지금은 그저 이 광경을 조금 더 오래 지켜보고 싶었다.“들킨 것이 부끄러운가?”연호의 목소리에서 늘 묻어있던 서슬 퍼런 위압감이 가시고, 대신 장난기 어린 온기가 배어 나왔다. 그는 미옥의 손등 위로 제 커다란 손을 툭 얹었다. 거칠고 투박한 제 손가락과, 실타래를 쥔 미옥의 하얀 손가락이 겹쳐졌다.그저 손만 맞닿았을 뿐인데, 연호는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옷을 벗기고 살을 맞댈 때보다 더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치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소년처럼, 혹은 누군가에게 순수한 칭찬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미옥의 입술은 차갑게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그를 네 발아래 엎드리게 해.’간밤, 하륜이 남기고 간 서늘한 명령이 귓전을 때렸다.차마 그 팔찌가 당신이 아닌, 제 옛 주인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뱉을 수 없었다.미옥은 저항 없이 고개를 숙인 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그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연호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런 식의 기분도 나쁘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꽤 마음에 든다고.“……아직 미완성이라 보여드리기 민망할 뿐입니다.”겨우 내뱉은 미옥의 대답에 연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미옥의 손에서 오색실을 부드럽게 뺏어 들며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슬쩍 미옥의 뺨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제법 깜찍한 짓도 할 줄 아는구나.”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연심을 배운 남자의 생기가 일렁였다.“어서 완성하거라.
다음 날 점심.눈이 시리도록 화창한 햇살이 궁궐의 기와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유희의 처소인 경화전 후원의 공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화려하게 차려진 다과상 앞에 마주 앉은 미옥은 조용히 찻잔을 쥐었다. 같은 지아비를 모시는 처지이니 얼굴이나 보며 식사라도 하자는 유희의 갑작스러운 부름이었다.“손은 좀 괜찮은가.”차를 한 모금 머금은 유희가 불쑥 미옥의 손끝을 힐끗거리며 물었다.“그날은…… 내가 좀 과했지. 입궁 첫날, 예민해져 있던 터라 본의 아니게 험한 꼴을 보였네.”미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뺨을 내리치고 손을 짓밟던 그 서늘한 독기가 하루아침에 온정으로 바뀔 리 없었다.이 가식적인 사과의 이면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미옥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대장군의 여식이라 한들, 뭣 하겠나.”유희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화려한 비단 소매를 매만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이 구중궁궐에 들어와서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결국 저기 물을 긷는 궁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을. 안 그런가?”유희의 붉은 입술이 서글픈 듯, 혹은 비틀린 듯 호선을 그렸다.“품계가 귀인이면 무엇하고, 숙원이면 또 무엇하겠어. 결국 이곳 내명부의 서열은, 폐하와 누가 더 많은 밤을 보냈는가에 달려있는 것을 말이야.”그 뼈 있는 한탄 속에 담긴 것은 짙은 열등감이자, 황제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독기였다.미옥은 표정을 지워낸 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유희는 잠시 침묵하던 미옥을 살피더니, 이내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시녀가 조심스레 은쟁반 하나를 다과상 위로 올려놓았다.쟁반 위에는 황, 청, 백, 적, 흑색의 최고급 명주실이 달빛 대신 눈부신 햇살을 받아 번드르르하게 빛나고 있었다.“곧 황자 마마의 백일이 다가오지 않나.”유희가 목소리를 다정하게 꾸며내며 본론을 꺼냈다.“이 어미의 정성으로 직접 장명루(長命縷)를 엮어드리고 싶은데, 내 워낙 바늘이나 실을 쥐어본 적이 없
연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편전을 뒤흔들 만큼 강압적이었다.“짐이 이 옥좌에 앉기 위해 어찌했는지 잊었느냐. 아비가 다른 형제들의 목을 베고, 그 피를 밟고 올라선 자리다. 권력을 쥔 외척들이 제 핏줄을 황제로 만들겠다며 이 궁을 어떻게 피로 물들였는지, 네놈이 똑똑히 보지 않았더냐!”연호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챙그랑, 파열음이 편전을 갈랐다.“황실의 적통은 오직 황후의 소생뿐이다. 후궁의 몸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머리가 깎여 평생을 산사(山寺)에 갇혀 지내게 될 것이다.”연호의 턱관절이 서늘하게 튀어나왔다.“내 핏줄이 권력에 눈이 멀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꼴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니.”“신의 식견이 짧았사옵니다”그러나 대리석 바닥에 얼굴을 묻은 하륜의 입가에는 서늘한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여전히 확고하시군.’어릴 적 겪은 골육상쟁의 지옥.황제의 그 마음을 하륜이 모를 리 없었다.오늘 짐짓 그 상처를 헤집어 본 것은, 그 오만한 철칙이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황후가 어리석게도 천 귀인에게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판은 하륜의 뜻대로 굴러갔다.미옥은 죽어가는 황후의 유지를 받들어 ‘유일한 적통’의 양모로서 옥좌 뒤에 서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공들여 빚어낸 그 완벽한 비수의 몸에, 원수의 추잡한 씨가 잉태되는 꼴 따위는 보지 않아도 되는 가장 깔끔한 복수였다.하지만 천 유희가 황자에게 손을 뻗은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만에 하나, 비천한 노비 출신인 미옥이 권력 싸움에서 밀려 황자를 빼앗긴다면?‘후궁의 자식은 절대 황제가 될 수 없다 하셨지.’그렇다면 미옥에게는 두 번째 패가 없다.숙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황자를 잃는 순간 그녀는 언제든 버려질 물건에 불과했다.하륜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천 유희를 밟아 죽이고 저 오만한 황제의 목줄을 온전히 쥐고 흔들려면, 이제 애매한 후궁의 자리로는 부족하다.‘미옥아. 네가, 이 제국의 황후가 되
정전의 촛불이 음산하게 흔들렸다.인기척도 없이 침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하륜은, 침상에 누운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추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싹 말라가는 제국의 국모를 내려다볼 뿐이었다.“……그대인가.”황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으나, 하륜은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차가운 음성을 흘려보냈다.“어찌하여 문을 열어주셨습니까.”단 한 줄의 질문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황후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천 귀인의 손길이 황자에게 닿는 것을 어찌 허락하셨냔 말입니다. 마마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하셨던 핏줄을, 제 발로 독사의 아가리에 밀어 넣은 연유가 무엇입니까.”“……가문을, 조씨 가문을 살리겠다 하지 않았더냐. 천 장군의 약정서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내 핏줄을 지키기 위한 어미의 어쩔 수 없는…….”“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하륜이 황후의 변명을 단칼에 잘라냈다.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나직하고 평온했다.“한낱 종잇장 따위에 마마의 눈이 멀어버린 탓에, 이제 황자의 목숨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무, 무슨 소리냐! 미옥이가 있지 않느냐! 네가 빚은 그 아이가 내 아들을 지킬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황후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지만, 하륜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황후의 침상 앞까지 다가갔다.“마마께서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하륜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전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제가 부귀영화를 탐해, 핏덩이 황자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려 한 줄 아셨습니까? 십상시의 수장인 제게 이 궐 안의 재물과 권력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제가 아쉬울 것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황후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저는 그저 완벽하게 짜인 판을 즐기고 싶었을 뿐입니다. 헌데 마마께서 한순간의 어리석은 미련으로 그 판을 먼저 깨어버리셨지요. 천 귀인의 얕은수 때문에 제 계획에 티끌만 한 위협이라도 가해진다면…… 저는 언제든 사냥개
궁전 모퉁이를 돌려던 미옥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성한 동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기 때문이다."그거 알아? 천 귀인이 황후 마마께 완전 납작 엎드렸다고 하더라.""어머머, 어째서? 그 콧대 높은 천 귀인이?""왜긴. 폐하와 첫날밤을 그리 치렀으니, 제 몸으론 후사를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게지. 불쌍히 여겨달라며 어찌나 울고불고 매달렸는지 모른대. 아무튼 앞으론 자기가 황자 마마를 잘 모시겠다며, 지금 곧장 경현당으로 갔다는구나.“경현당. 황자의 처소.그 단어들이 뇌리에 꽂히는 순간, 미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천 유희가 후사를 걱정해 고개를 숙였다고?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제 아비의 군세를 등에 업고 황후마저 겁박하던 요물이었다.그런 독사가 이빨을 숨기고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미옥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허억, 헉……!“경현당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미옥의 두 눈이 매섭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이미 유희가 갓난 황자를 품에 안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머, 숙원 아니냐. 어찌 이리 급하게 오느냐.“유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미옥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희의 품에 안긴 황자를 살피며 단숨에 그 앞을 가로막았다."……그러는 귀인 마마께서 어찌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황후 마마께서 허락하셨단다. 내가 후사를 보기 힘든 처지이니, 황자 마마라도 제 자식처럼 품으며 정을 붙이라시더구나.“유희는 품에 안은 황자의 포대기를 고쳐 안으며, 비어있는 한 손으로 당황한 미옥의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그녀의 넓은 소매 자락에서 묘하게 짙고 달큰한 향내가 훅 끼쳐왔다."다행이다, 미옥아. 네가 곁에 있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유희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다정하고 나긋했다."나는 귀하게만 자라 누군가를 돌보거나 시중을 드는 일에는 참으로 서툴지 않니. 행
태후전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화려한 자수가 놓인 병풍 뒤에서 태후의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와 유희의 정수리에 꽂혔다.“폐하께 씻김을 당했다지? 첫날밤부터 그런 수모를 겪어서야, 내 네게서 이 나라의 후사를 볼 수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구나.”바닥에 납작 엎드린 유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사향탕에 몸을 씻어내며 느꼈던 그 지독한 멸시가 다시금 상처를 헤집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차분한 목소리를 골라냈다.“신첩이 자만하였습니다, 태후 마마. 폐하의 성심을 얻으려다 오히려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하오나 밤은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이 남지 않았사옵니까.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그 밤이 백 번, 천 번 온다 한들 어제와 같다면 아무 소용도 없거늘!”태후의 매서운 질책에 유희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설령…… 제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다 해도, 지금 계신 황자 마마를 제가 친자식처럼 품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마마를 위하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황후께 머리라도 조아려 제 진심을 보이겠나이다.”죽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황자를 차지하겠다는 유희의 가증스러운 집념에, 태후의 눈매가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졌다.“황후의 친정인 조(趙)씨 일가가 두 눈을 뜨고 살아있거늘. 내 사람인 줄 뻔히 아는 네게, 그들이 순순히 황자를 넘겨줄 성싶으냐?”태후의 비웃음 어린 질책에 유희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대꾸했다.“폐하께서는 황후가 서거하는 즉시, 그 일가를 모조리 숙청하실 것이옵니다. 어린 황자를 등에 업은 외척을 살려두어 훗날의 화근을 만드실 분이 아니시니까요.”유희의 단호한 확신에 태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걸 네가 어찌 장담하느냐.”“폐하의 서늘한 정(情)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지 않았사옵니까. 지금 조씨 일가는 제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몰라 숨죽인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을 것이옵니다.”유희는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을 바짝 세우며 말을 이었다.“그들이 살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황자를 제게 넘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