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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10 15:58:21

유희는 대문을 나서기 직전,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녀의 눈에 안채 마당을 쓸고 있던 노 씨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눈빛이 음흉하니, 적당한 자야.’

“이리 와 보거라.”

고귀한 아기씨의 부름에 노 씨가 허둥지둥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그의 앞에 주머니를 던졌다. 묵직한 은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내 대인이 이곳에 계시는 동안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어서 말이다.”

유희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나, 그 눈빛은 독사를 닮아 있었다. 노 씨가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머니를 주워서 들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몇 년간 죽어라 일해서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만 만져볼 수 있는 큰돈이라는 것을.

“무엇이 문제인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싹 해결하겠습니다. 이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저입니다.”

“그 계집 말이다. 천한 것이 감히 주인의 침상에 오르려 드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내 부군이 되실 분 곁에 그런 추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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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42화

    밤이 깊어지자, 침향각의 묵직한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싸늘한 밤공기와 함께 연호가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숨을 죽인 내관들이 쟁반을 받쳐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방 한가운데 놓인 검은 목재 탁자 위로 황제를 위한 야회상(夜會床)을 차려냈다.얇게 저며 꽃 모양으로 화려하게 말아낸 육포와 꿀에 재워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연근 정과, 그리고 속을 호두로 꽉 채워 정갈하게 썰어낸 곶감쌈이 담긴 청자 찬합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 곁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향의 곡차가 든 백자 호리병이 자리를 잡았다.내관들은 방 안쪽, 침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옥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며 침향각에는 완벽한 고립과 정적이 내려앉았다.미옥은 얇은 침의 하나만을 걸친 채 단정히 앉아있었다. 고개를 들자, 황제든 사내든 기꺼이 취해버리겠다는 그 오만한 낯빛 그대로였다.연호는 미옥에게 다가가는 대신, 탁자 앞에 놓인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여유롭게 몸을 묻었다.“…….”그는 미옥을 투명 인간 취급하듯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붉은 육포 한 점을 입에 물고는 스스로 술잔을 채웠다. 쪼르륵, 맑은 액체가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높게 천장을 울렸다. 쌉싸름한 곡차의 향과 달큰한 정과의 향이 묘하게 뒤섞여 방 안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가까이 오라.”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연호가 나직하게 명했다.미옥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연호의 앞,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그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는, 나른하고도 서늘한 눈동자로 미옥을 내려다보았다.“벗어라.”“……예?”“못 들었느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전부 벗으라 명했다.”미옥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당장이라도 짐승처럼 달려들어 제 몸을 유린하며 분노를 토해낼 줄 알았건만. 연호는 그저 질 좋은 구경거리를 산 귀족처럼 나른하게 등받이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 환관의 비   41화

    새벽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 편전(便殿)에서 아침 조회(朝會)를 마친 연호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의 뒤를 따르는 상시와 내관들이 숨을 죽인 채 잰걸음으로 그 묵직한 보폭을 쫓았다.침향각(沈香閣)이었다.싸늘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걷는 연호의 입가에는 희미한 호선이 걸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간밤에 홀로 남겨두었던 한 여인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너는 지금쯤 어찌하고 있을까.’연호는 궐내의 여인들이 보이는 빤한 생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황제가 다른 여인의 처소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아침이면, 후궁들은 으레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질투심에 눈이 멀어 밤새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 처연하게 훌쩍이고 있거나.아니면, 어떻게든 황제의 눈길을 한 번 더 끌어보겠다며 평소보다 두껍게 분을 바르고 가장 화려한 비단옷을 꺼내 입은 채 애타게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거나.‘하지만 너는 내 옷자락 한 가닥도 쥐지 못하겠지.’제 주인의 숨결 하나에도 목숨이 달린 듯 맹목적으로 복종하던 너.‘그래. 분명 하륜에게 버려질까 두려워 발버둥 쳤던 것처럼, 내게서도 이대로 버려질까 무서워 바들바들 떨고 있겠지.’주인이 다른 꽃을 꺾으러 간 밤.감히 원망조차 하지 못한 채, 방구석에 웅크려 있겠지.‘그 겁에 질린 떨림,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를 보여다오.’그 맹목적인 공포야말로 미옥이 이제 하륜이 아닌 자신을 완벽한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가장 달콤한 증거일 터였다.“폐하, 드시옵니다.”조심스러운 고함이 침향각의 정적을 갈랐다.연호는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칠 겁에 질린 눈동자를 기대하며 서늘한 눈을 내리깔았다.그러나, 열린 미닫이문 너머의 풍경은 연호의 예상을 완벽하게 배반했다.“…….”방구석에서 두려움에 떠는 여인은 없었다.버림받을까 애태우는 짐승의 눈빛도, 제 옷자락을 쥐려 망설이는 초라한 손길도 없었다.미옥은 그저 정갈하고 소박한 평상복 차림으로 방 한가운데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치 황제가 어느 처

  • 환관의 비   40화

    제조상궁이 쏟아부은 차가운 향유가 유희의 은밀한 곳을 타고 눅진하게 흘러내렸다. 수치심에 눈물조차 마른 유희는, 천장을 응시한 채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이윽고 연호가 그녀의 메마른 몸 위로 무겁게 몸을 겹쳐왔다.기녀에게 배웠던 서막은 없었다. 달콤한 입맞춤도, 살을 애무하는 부드러운 손길도.그는 그저 짐승의 털을 벗겨내듯 유희의 하얀 적삼을 거칠게 벗겨냈다..“아악……!”비명 섞인 신음이 유희의 파리한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그것은 기녀가 말했던 쾌락의 서막이 아니었다.몸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파고드는 날 것 그대로의 통증.묶여있는 다리는 어쩌지 못하고 침상 기둥에서 바들바들 떨려왔다.홧홧하게 타오르는 통증은 골반을 타고 척추까지 붉게 물들였다.월향이 그랬던가.사내는 낮에는 군자이나 밤에는 짐승이 된다고.하지만 제 위의 사내는 짐승조차 아니었다.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움직이는, 감정 없는 조각상이었다.정사가 이어지는 내내, 연호는 유희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그의 무심한 눈동자는 여전히 방안의 어느 한구석, 혹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쳐다보지도, 만지지도, 소리 내지도 말라는 제조상궁의 호령에 갇힌 유희는, 제 몸을 뚫고 들어오는 육중한 통증만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살이 찢기는 통증이 밤새 마마를 짓누를 것이옵니다.]그제야, 차 상시가 했던 말의 뜻을 깨달았다.유희는 통증으로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들며 요를 부여잡은 주먹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으나, 무너지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가슴이었다.‘나도 필요한 건 당신의 씨일 뿐이니. 이 치욕의 대가로 네놈의 아이를 배어, 내 아비의 칼자루 위에 이 제국을 올려놓으리라.’유희는 마지막까지 꼿꼿하게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수치심과 아픔은 독기로 변해 그녀의 혈관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들었다.정사가 끝나자, 연호는 일말의 여운도 없이 유희의 몸에서 물러났다. 그는 침상 옆에 던져두었던 흑단색 침

  • 환관의 비   39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연호의 육중한 흑룡포 깃을 향해 천천히 들이밀어지는 찰나.“문밖의 제조상궁을 들여라.”나직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과 함께 유희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제조상궁을……? 갑자기 왜?’유희가 당황하여 고개를 들자, 연호는 그녀를 투명한 유령 취히듯 무심한 시선으로 흑단목 문 너머를 응시했다.“어서.”그의 재촉에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상궁이 춘화첩을 든 채 침소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평생을 궐의 법도에 얽매여 살아온 노상궁의 눈동자는 감정이라곤 한 줌도 남지 않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그녀는 황제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과 잠자리를 관리하며, 임신의 시기와 체위, 그리고 황실의 법도를 감독하는 최고 상궁이었다.연호는 유희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제조상궁을 향해 무심하게 명했다.“천 씨 가문의 여식이 아직 궐의 법도를 모르니, 황실의 대통을 품기 위한 예법을 하나부터 열까지, 소상히 일러주어라.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야 할 것이다.”“……폐하?”유희의 눈동자가 수치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동의는 처음부터 필요치 않았다.연호의 명이 떨어지자, 제조상궁은 춘화첩을 내려두고 품에서 붉은 비단 끈과 두꺼운 법도서를 꺼내들었다.“천 귀인 마마. 합궁(合宮)은 춘정(春情)을 나누는 천박한 유희가 아니라, 제국의 대통을 잇는 가장 신성하고 엄숙한 의식이옵니다. 하여, 지금부터 마마께서 지키셔야 할 법도를 일러드리겠사옵니다.”제조상궁의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넓은 침전에 메아리쳤다. 연호는 흥미조차 없다는 듯, 창가의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그 굴욕적인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첫째, 합궁이 시작되면 마마께서는 오직 천장만을 응시하셔야 하옵니다. 함부로 고개를 돌려 지존하신 용안(龍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불경이옵니다.”유희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그러나 제조상궁의 건조한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둘째, 옥체(玉體)에 함부로 손을 대거나 안으려 들어서는 아니 되옵니

  • 환관의 비   38화

    밤이 깊어지자, 대전(大殿)의 침전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문이 열리고, 황제의 수발을 드는 지밀상궁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와 옥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받쳐 든 은쟁반 위에는 후궁들의 이름이 새겨진 옥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폐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어느 처소로 발걸음을 하시겠사옵니까.”지밀상궁은 속으로 당연히 오늘 갓 입궐한 실세, 천 귀인(유희)의 명패가 선택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태후의 입김과 천 장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이토록 무심한 황제라 할지라도 형식적인 절차나마 경화전으로 향할 것이 뻔했다.그러나 턱을 괸 채 서류를 내려다보던 연호의 서늘한 시선이 은쟁반 위를 무심하게 훑더니, 곧 길고 하얀 손가락이 뻗어 나와 가장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패 하나를 툭, 건드렸다.지밀상궁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천 귀인의 화려한 옥패가 아닌,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나무패.“이건 뭐지?”“……저, 송구하오나 폐하. 새로 들어오신 숙원께서는 성이 없는 관계로 아직 온전한 명패가 없사옵니다. 하륜 대인의 식솔이었다 하였으니, 편의상 ‘하(河)’ 씨 성을 붙여 명패를 새로 파 올릴까요?”지밀상궁이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묻자, 서류를 넘기던 연호의 손이 우뚝 멈췄다.‘하륜의 식솔이라, 하씨라.’연호의 차가운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아니다, 없는 것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겠나.”연호가 나직하게 읊조리며 나무패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없을 무(無) 자를 써서 무씨(無氏)로 하여라.”“무…… 무 숙원이옵니까?”“그래. 오늘 밤은 무 숙원의 처소, 침향각으로 간다.”연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지밀상궁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성씨조차 가질 수 없었던 비천한 계집이, 황제가 직접 내린 성을 하사받는 기이한 순간이었다.연호는 무심한 걸음으로 침전의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내관이 황급히 다가와 무거운 흑단목 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그러

  • 환관의 비   37화

    눅눅한 탕약 냄새를 뒤로하고 나오자, 초겨울의 시린 바람이 유희의 달아오른 뺨을 서늘하게 식혔다. 황후가 내뱉은 마지막 경고가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으나, 유희는 제 발걸음 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화려한 노리개를 보며 오만하게 입술을 깨물었다.‘흥,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지. 오늘 밤이면 이 궁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온 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유희는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자신의 처소인 경화전(慶華殿)으로 향했다.경화전의 마당은 이미 새로 입궐한 실세 귀인에게 줄을 대려는 하급 후궁들로 가득 차 있었다.김 희빈, 이 숙의…… 저마다 뼈대 있는 가문의 성씨를 내세우며 앉아 있는 여인들을 훑어보던 유희의 시선이 돌연 한곳에 꽂혔다.상좌와 가장 먼 구석, 분명 주인이 있어야 할 방석 하나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저긴 누구 자리지?”차가운 목소리에 근처에 서 있던 궁인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이마를 붙일 듯 조아렸다.“……그게, ‘미옥’이라 하는 숙원의 자리이옵니다.”미옥.김씨니 천씨니 하는 당당한 성씨 하나 없이 그저 이름만 덜렁 불리는 그 명칭에 유희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성을 가질 자격조차 없었던 근본 없는 노비 출신이라는 낙인이 그 짧은 이름 두 글자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것이 감히 내 첫인사를 망쳐?’유희의 눈썹이 파르르 떨릴 즈음, 마당 끝에서 초라하리만치 수수한 차림의 미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죽은 사람처럼 정적인 걸음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미옥, 귀인 마마를 뵙사옵니다. 도착이 늦어 송구하옵니다.”“송구하다?”유희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후궁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유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미옥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화려한 비단 치마가 물결치며 월향의 짙은 향기를 흩뿌렸다.“출신조차 불분명한 천한 것이 폐하의 은애를 입었다 하여,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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