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그날 밤, 우지호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바로 서유리가 교통사고로 죽는 꿈이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속삭였다.“지호야, 우리... 이혼해. 다음 생에는 다시는 널 만나고 싶지 않아.”우지호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채 꿈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났다.창밖, L국의 달은 크고 둥글었지만, 어딘가 차갑고 슬픈 빛을 띠었다.그는 창가로 다가가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기자단이 보였다.서유리가 바로 저곳에 있었다.그가 더 이상 발을 들일 수 없는 세상에서 분발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다.‘이제 그만 놓아주자.’한 목소리가 우지호의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너는 이미 그녀의 반평생을 망쳤는데 설마 미래까지 망치려는 거야?’‘너는 그녀가 원하는 자유를 줄 수 없고 그녀가 원하는 존중도 줄 수 없어.’‘네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녀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거야.’우지호는 천천히 망원경을 내려놓았다.텅 빈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무력감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꼈다.세상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고, 부대 하나의 스케일이 되는 물자를 동원할 수 있지만, 서유리의 진심 어린 미소를 되살 수 없었고, 그녀가 한 번이라도 뒤돌아보게 할 수도 없었다.우지호는 크게 잘못했고 철저하게 실패했다.그는 몸을 돌려 휴대폰을 들고서 진 비서에게 전화했다.“진 비서.”목소리는 전례 없이 피로했고 잔뜩 갈라져 있었다.“국내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항공권 예약해.”이제 그만 놓아줘야 할 때가 되었다.L국을 떠나기 전날, 우지호는 선행을 하나 했다.바로 역외 재단을 통해 ‘전선 보도 연맹’에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한 것이다.그 돈은 특정 용도로 지정되었다. 엘리가 속한 사진 기자 소대를 위해 모든 장비를 최신형으로 교체하고 그들에게 최고 수준의 안전 보장과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모든 걸 마치고
한편, 우지호는 서유리에게서 거절당한 뒤에도 L국을 떠나지 않았다.그는 기자단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 거금을 들여 집을 임대한 후, 진 비서를 국내로 돌려보냈다.“공민준이라는 남자, 최대한 자세히 조사해.”진 비서는 우지호의 음울한 표정을 보며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밤새 국내로 날아갔다.곧이어 공민준의 자료와 그의 약혼녀 사진이 전달되었다.우지호는 사진 속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분노 대신 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국내에 약혼자가 있었어?”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가에는 병적인 기쁨이 번뜩였다.무언가를 깨달은 것만 같았다.서유리는 연기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공민준과 가깝게 지냈고 일부러 그에게 냉랭하게 굴었다. 자극하고 복수해야 했으니까.이 생각은 우지호의 마음속에 뒤틀린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그녀가 아직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고,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는 거라고 말이다.결국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서유리에게 강제로 돌아가자고 요구하는 대신 물 흐르듯 스며드는 방식으로 자신의 회유 계획을 시작했다.오늘은 약품을 보내고, 내일은 채소와 과일을 보내고, 모레는 또 발전기를 보냈다.꼭 마치 인심 좋은 산타클로스처럼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물품들을 끊임없이 이 척박한 종군기자단으로 공수했다.그러던 어느 날 오후, 또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방탄조끼와 헬멧을 가져왔을 때, 서유리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그녀의 다리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걸을 때마다 약간 절뚝거렸다.“지호야, 보내준 물품들은 정말 고마워.”서유리는 그의 앞에 다가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모두 일괄적으로 등록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드릴 거야.”그녀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전혀 상관없는 자선 단체 책임자와 대화하는 듯했다.우지호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유리야, 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지?”그는 한 발짝 다가서며 거리를 좁히려 했다.“내가 잘못했어. 더 이상 그 남자를 이용해서 날
서유리는 잠시 멍해졌다. 공민준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한편 공민준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사람이 흔들다리를 조마조마하게 건널 때,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게 돼. 만약 이때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런 상황이 유발한 심장 박동을 상대를 향한 설렘으로 착각하게 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다. 마치 평범한 심리학 개념을 설명하는 듯했지만, 서유리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그녀의 뺨이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졌다.그랬다. 공민준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에게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을 품었고 그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끄집어내거나 모호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품위 있고 온화한 방식으로 일깨워 주었다.그는 서유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그녀의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 생긴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이다.그것은 의존이자 존경, 그리고 전우애였지만 유독 사랑만은 아니었다.서유리는 마음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잠깐의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씻어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전례 없는 명확함과 해방감이었다.그녀는 공민준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그것은 솔직하고 편안한 웃음이었다.“민준 씨, 고마워요.”일깨워줘서도, 거절해줘서도 아닌 그저 단순하게 고맙다는 말만 건넸다.‘고마워요, 모든 남녀 관계가 모호함과 집착으로 흘러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서.’‘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힘으로 단단히 설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더 이상 어떤 남자도 구원의 동아줄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어요.’공민준도 웃었다. 그의 미소에는 약간의 칭찬이 담겨 있었다.“유리 넌 아주 훌륭한 기자야. 너의 재능과 끈기는 어떤 감정에도 얽매여서는 안 돼. 이곳에 온 것은 누구를 피하기 위해서도, 또 누구를 잊기 위해서도 아니야. 진정한 너 자신을 찾아야 해.”‘진정한 나
‘그러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민준 씨는 단지 리더로서 책임을 다했을 뿐이잖아.’서유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이런 자신이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남자의 상처로 마음이 부서질 대로 부서졌으면서 하찮은 선의에 어떻게 또 헛된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어쨌든 정말 고마웠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떠났다.떠나가는 서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공민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자신에게 붕대를 감아주던 팀 닥터에게 말했다.“좀 살살 감아줘요. 제 약혼녀가 보면 죽을병에 걸린 줄 알겠어요.”팀 닥터는 쾌활한 서양인이었다. 공민준의 말에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알았어요. 미스터 공은 정말 못 말리는 팔불출이라니까요.”그들의 대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춘 서유리의 귀에 고스란히 닿았다.‘약혼녀라... 민준 씨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구나.’서유리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아주 미세한 실망감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안도감이었다.‘잘됐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명확한 경계를 가진 리더는 서유리가 해서는 안 될 헛된 생각을 완전히 접게 해주었다. 또한 그를 존경할 만한 선배이자 함께 싸우는 동료로만 여기도록 더 명확하게 해주었다.그날 이후, 서유리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졌다. 뉴스 기사의 접근 방식부터 복잡한 정세 속 자기 보호 기술까지 적극적으로 공민준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공민준 역시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그녀에게 전수했다. 불타는 전쟁터의 어둠 속에서 마치 등대처럼 그녀에게 나아갈 방향을 비춰주었고 새롭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서유리는 꼭 마치 메마른 스펀지처럼 영양분을 미친 듯이 흡수했다. 그녀는 더 이상 우지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던 여린 꽃잎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고 있었다.그녀는 이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생명을 걸고 진실을 추구하는 이 느
서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민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괜찮아.”공민준은 그녀를 흘긋 보더니 담담하게 물었다.“그 사람 네 남편이야?”“전남편이에요.”서유리가 바로잡았다.이에 공민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우지호의 등장은 서유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업무에 쏟아부었고 종종 새벽까지 일하며 우지호의 집요한 괴롭힘을 피했다.“엘리, 그러다 몸 망가져요.”동료 기자 안서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서유리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자료를 정리했다.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도시 서쪽에 있는 임시 대피소가 습격당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모두 주목! 하차 후에는 경계를 늦추지 말고 두 명씩 짝을 지어 움직인다. 단독 행동은 금지야.”공민준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전해졌다.“엘리는 나랑 한 조로 움직여.”“네, 알겠습니다.”서유리는 간결하게 대답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카메라를 꽉 쥐었다.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서유리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참으며 카메라로 눈앞의 광경을 담았다.피투성이가 된 어린 소녀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을 안고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서유리는 눈가가 뜨거워진 채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비록 이곳에 온 지 석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잔혹함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굉음이 들려왔다!“엎드려!”공민준의 고함과 폭발음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서유리는 등에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힘을 느꼈고 몸 전체가 땅에 짓눌렸다. 익숙하면서도 희미한 담배 향이 그녀를 감싸며 공포 속에서도 한 줄기 안정감을 주었다.그녀는 귀가 윙윙거리고 눈앞은 온통 회색빛이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공민준이 그녀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그녀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서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속에서 따뜻한 기류가 차오르던 그때, 공민준의 왼쪽 팔뚝에
“그렇지만 내가 널 사랑하잖아!”우지호의 목소리는 절망에 가까웠다.“유리야, 난 평생 너만 사랑했어!”“뭐? 사랑?”서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넌 사랑이 뭔지나 아니?”그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백은채가 그녀를 함부로 해치는 것을 방치했다.또한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고 자만했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서유리는 마침내 똑똑히 보아냈다. 설령 우지호의 말대로 자신을 항상 사랑했더라도 이제 그 사랑이 서유리를 질식하게 했다.다행히 그녀에게는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서유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우지호를 향한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일말의 사랑도 남아 있지 않았다.어쩌면 환생했을 때쯤에는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지호를 돌이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또 어쩌면 납치되었을 때 우지호가 자신을 신경 써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지나간 일이다.“유리야,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아.”우지호는 그녀의 눈 속에 담긴 냉담함을 보며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너한테 상처 주고 실망시켰다는 걸 알아. 하지만 지금 네가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너무 걱정돼.”“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잖아.”우지호는 말을 이어갔다.“여자 혼자서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는 거야? 나랑 함께 돌아가자, 유리야. 여긴 너무 위험해. 우리 이만 집에 가자. 옛날 일은 전부 내 잘못이야. 진심으로 사과하고 천천히 보상해줄게.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 제발 나랑 돌아가자.”집에 돌아가자니?“야, 우지호.”서유리는 쓴웃음을 짓고는 마침내 시선을 올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 글자씩 또렷하게 말했다.“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 이름은 엘리야. 지금은 여기 기자이고. 그리고 또 하나, 우린 이미 이혼했어. 완전 남남이란 말이야.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