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부태현은 내가 더 이상 사사건건 제게 보고하듯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회사에서 출장을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절친이 결혼식에 꼭 연인과 함께 오라고 했지만, 혼자 참석해 넉넉한 축의금만 건넸다. 몸이 아파 입원하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조차 혼자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했다. 의사인 부태현은 그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 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진료 기록 줘 봐. 내가 일정 잡아 줄게.” 나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마워.” 말이 떨어진 순간, 나도 부태현도 동시에 굳어 버렸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부태현에게 달라붙어 살았다. 데이트할 때 어떤 옷을 입을지, 점심으로 뭘 먹을지.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메시지를 보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내가 이제는... 그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view more부태현은 식사를 마치고도 내게 알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물을 생각도 없었다.그때는 깊이 따지지 않고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그러다 부태현은 서서히 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게 됐다.이유를 물으면 차갑게 말했다. [넌 할 일도 없어?]...답장이 바로 오는지 따위로 고민할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그래도 임서강의 설명을 보자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기쁨이 피어났다.나는 예의를 갖춰 답했다.[괜찮아요. 하던 일 먼저 하세요. 제 메시지에는 답 안 하셔도 돼요.]그러자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한동안 아무 답도 오지 않았다.그러다 잠시 후, 길게 적힌 메시지가 한꺼번에 도착했다.[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도 연인에게 편지 한 통 쓸 시간은 있었고, 국제 스포츠 대회 해설자도 쉬는 시간에 여자친구에게 전화해요. 밴드 공연 중인 사람도 연주를 잠깐 멈추고 여자친구의 메시지에 답하고요.][그에 비하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메시지 하나에 답할 시간은 낼 수 있어요.][그러니 내가 이슬 씨 남자친구가 되어도 될까요?]...나는 일부러 일찍 퇴근해 임서강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임서강은 피했지만, 회사 건물 아래에서 꽃다발을 안고 기다리던 부태현과 마주쳤다.“이슬아,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하늘에서 가느다란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부태현은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말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매서운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예전에 네가 내게 해 줬던 일을 이제는 내가 할게. 이번에는 내가 달라붙고, 내가 네 하루를 묻는 사람이 될게.”나는 차분히 부태현을 바라봤다.“매일 붙어 지낼 때도 못 한 일을 두 도시를 사이에 두고 할 수 있을 것 같아?”부태현의 눈이 밝아졌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여긴 듯했다.“장거리 연애는 아니야.”“양청애가 병원 안에서 헛소문을 퍼뜨려서 분위기가 아주 나빠졌어. 난 사직서를 냈어. 조금만 기다려 줘. 이쪽 병원에 다시 자리를 알아
어느새 문 앞에 나타난 양청애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당직 선생님이나 지도교수한테 물어봐. 앞으로 나 찾아오지 마.”양청애는 당황했다. 입가의 웃음이 굳더니 도움을 청하듯 나를 바라봤다.“언니,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태현 선배를 그만 몰아붙이시면 안 돼요?”나는 가볍게 웃었다.“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둘이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어.”양청애의 눈에 은밀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정말 죄책감 들 것 같아요.”부태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똑 같은 책을 보는데 왜 다른 의대생은 다 이해하고 너만 못 알아듣지?”“이런 기초도 이해 못 한다면 의료계가 적성에 안 맞는다는 뜻이야. 늦기 전에 전공을 바꿔.”양청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언제나 자신에게 다정했던 부태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듯했다.“저는 실수할까 봐 걱정돼서 한 번 더 물어본 것뿐이에요.”부태현이 다시 말을 끊었다.“여기는 병원이지 네 보충 수업을 해준 강의실이 아니야. 난 의사지 네 개인 과외가 아니고.”“내 시간은 환자와 가족에게 쓰는 거야. 넌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마. 귀찮아.”양청애는 지난번처럼 울며 뛰쳐나갔다. 다만 이번에 양청애를 울린 사람은 부태현이었다.“그날 결혼식에서 신랑의 서약을 듣고 많이 생각했어.”부태현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나는 늘 반대로 행동했던 것 같아. 거리를 지켜야 할 사람한테는 오히려 친절하고 세심하게 굴면서, 가장 아껴야 할 사람에게는 지독할 만큼 엄격하고 인색했어.”“환자에게는 차분히 설명했고 양청애도 챙겨 줬지. 그게 예의고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정작 너한테는 가장 가혹한 기준을 들이댔어. 독립하라고,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내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라고...”“네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 모든 냉담함과 무관심을 견뎌야 한다고 여긴
“누군가에게 사소한 것까지 나누고 싶어지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해. 무슨 일이든 나한테 들려주고, 혼자 묵묵히 버티지 않았으면 해.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당신의 메시지였으면 좋겠어.”하객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부태현은 한눈에 들어왔다.부태현은 문가에 기대어 서약을 마친 신랑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내 시선을 알아챈 듯, 멀리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날과 닮았었다.입학식 날에도 부태현은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고개를 돌려 내 시선과 마주쳤다.하지만 그때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마음은 고요했다. 남은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예식이 끝난 뒤, 나는 식사를 하려고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그런데 좌석 배치에 착오가 생겨 어린이 테이블에 앉게 됐다.화동이 나를 자리까지 데려가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그러는데 여기 앉는 어른은 다 애인이 없대요.”“저기 우리 삼촌도 있어요. 둘이 솔로로 사는 법을 이야기해 보세요.”아이들이 빼곡한 테이블 한가운데 잘생긴 남자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눈에 확 띄는 새하얀 머리에 가느다란 은색 체인이 늘어진 안경을 썼고, 옷차림은 방금 패션위크 거리 촬영에서 빠져나온 사람 같았다.너무 힙해서 보고만 있어도 관절에 찬바람이 드는 듯했다.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둘 사이 공기가 몇 초 동안 멎었다.흰 머리의 잘생긴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 작은할아버지 외손녀의 사촌 오빠가 결혼하는데, 신부가 이슬 씨 절친이에요?”상사가 사석에서는 이렇게 파격적인 사람일 줄 몰랐다. 나는 어색하게 두어 번 웃었다.“본부장님, 정말 우연이네요. 여섯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는 말이 진짜였군요. 하하.”임서강은 옷자락을 당겨 보더니 흰 머리도 가리켰다.“결혼 잔소리를 피하려고 이렇게 꾸민 것뿐이에요. 아직 젊다는 증거죠.”“정말 아주 젊어 보이십니다.”놓쳐 버린 500만 원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절대로 돌려서 돈을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빈틈없이 해명하려는데임서강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나한테 힌트 주는 거예요?]곧 송금 알림 하나가 도착했다.500만 원이었다.[잘못 보낸 거 아니에요.][주말에 결혼식 같이 가 줘요.][내 작은할아버지 외손녀의 사촌 오빠가 결혼해요.][가족들이 또 결혼 얘기를 꺼낼 게 뻔해서 귀찮아요. 이슬 씨 애인 없죠? 특근 수당이에요.]내 절친 최다은의 결혼식도 토요일이었다.최다은과 쌓아 온 우정에 사상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나는 그 500만 원을 보며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치열하게 흔들렸다.끝내 ‘돈의 유혹’을 견뎌 냈다. 양심을 붙잡고, 찢어지는 마음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답했다.[감사합니다, 본부장님. 하지만 토요일은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라 꼭 가야 합니다.]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어디선가 애잔한 ‘석별의 정’이라도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그런데 결혼식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새벽 5시에 알람이 울렸다.이번에는 최다은과 아침 자율학습을 하러 가는 날이 아니라 최다은의 결혼식에 가는 날이었다.최다은은 고등학교 아침 자율학습 때처럼 잠을 못 이긴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가 꾸벅꾸벅 떨어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턱을 받쳐 주지 않았다면 화장대에 이마를 찧었을 것이다.나는 사탕 하나를 뜯어 최다은의 입에 넣어 줬다.눈도 뜨지 않은 채 최다은이 나를 알아봤다. “이슬아!”최다은은 고개를 돌리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향해 웃었다.“왔구나!”고등학교 때 쉬는 시간, 몰래 최다은의 책상 서랍에 사탕을 넣어 줬을 때 돌아보던 표정과 똑같았다.최다은이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않았다면, 곧 둘이 나란히 문제집을 꺼내 고개를 파묻었을 것만 같았다.어제까지만 해도 수학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것 같은데, 오늘 최다은은 결혼을 한다.눈가가 뜨거워지며 시야가 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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