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결혼 5년째, 반년 동안 출장을 떠났던 남편 강호준이 첫사랑 고다은을 집으로 데려왔다. 고다은은 임신 3개월이 넘은 상태였다. 강호준은 고다은의 형편이 어렵다며,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거절하자 강호준은 고마운 줄도 모른다며 나를 나무랐다. 말투에는 혐오감마저 묻어 있었다. 정작 이 별장이 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집이라는 사실은 잊은 모양이었다. 자기 집안 식구들은 전부 내 돈으로 먹고 살고 있으면서. 이번 기회에 그 집안에 대주던 생활비와 각종 지원을 모조리 끊기로 했다. 나는 웃으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이혼 합의서 준비해요. 데릴사위 주제에 어디서 감히 상간녀를 집에 들여?”
Mehr anzeigen나중에야 알았다. 그 며칠 사이에 수많은 거래처가 강호준과 계약을 끊었고, 수백억 원의 위약금까지 물렸다는 사실을.강호준이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 갚지 못할 엄청난 액수였다.강호준은 배상금으로 내놓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내놨다.하지만 그에게 남은 재산이 얼마나 있었겠는가?불과 며칠 만에 강호준은 안하무인이던 대표에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는 파산한 사업가로 전락했다.사업이 망한 뒤에도 강호준은 마지막 희망만큼은 놓지 않았다. 큰 병원이란 병원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검사를 받았다.하지만 어느 병원에서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이 냉정했다.그토록 오만하던 강호준도 결국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고다은은 몰래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지웠다. 그런 뒤 강호준에게 문자 한 통 남기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그래도 손가락에 낀 비둘기 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라면 남자 친구와 한동안 먹고사는 데는 별로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내가 집에서 쫓아낸 강호준과 그 부모는 그 뒤로 정처 없이 떠돌았다. 편한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집도 없이 궁핍하게 사는 걸 어떻게 견디겠는가?툭하면 부잣집 친척이라고 떠벌리던 세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져서 결국 각자 다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강호준이 내게 전화했을 당시에는 세원그룹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고 한다.무슨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대답이 그의 마지막 희망마저 꺾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비서가 보내 준 소식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했다.그때 엄마의 말을 듣고 강호준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띵!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교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심서연 학생, 어제 제출한 디자인 과제가 정말 훌륭했어요. 한 디자인 회사에서 그 시안을 구매하고 싶다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고 싶다는데, 생각 있어요?][물론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요.]답장을 보낸 뒤, 창밖의 연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졸업한 지 오래됐지만, 다행히 그동안 그림 그리는 취미를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수업은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공부하는 게 강호준 가족들에게서 벗어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국내에 없어도 상황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다만 양재민이 그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며 내게까지 피해가 오지 않도록 막아 주고 있을 뿐이었다.틈이 날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지난 세월 우리 사이에 쌓인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가족 같은 정이었을까?’‘우정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었을까?’고민 끝에 결국 답을 찾았다.정말 사랑이었다면 이런 의문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어느 날 수업을 마친 뒤, 나는 평소처럼 한 폭의 유화 같은 풍경 속을 걸으며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국내 번호였다.출국한 뒤 번호를 바꿨고, 새 번호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누가 건 전화인지 짐작이 갔다.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피한다고 다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심서연, 드디어 찾았다.]역시 평생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전화기 너머로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해도 그랬다.강호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말해. 무슨 일인데?”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갑게 물었다.[SNS 실시간 검색어... 봤지? 요 며칠 뉴스에 나온 거 말이야.]강호준의 말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예전의 오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응, 봤어.”부정하지 않았다.강호준이 그렇게 크게 소란을 피웠는데 못 봤다고 하면 거짓말처럼 들릴 터였다.[서연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강호준은 더 변명하지 않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사과했다.“너... 그렇게 애써서 내 연락처까지 알아낸 게 고작 그 말을 하려던 거였어?”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되물었다.강호준이 전화로 내게 사과하다니.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잘못한 건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양재민은 나를 데리고 해외로 떠났다.물론 휴가를 가는 건 아니었다.예술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양재민은 내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디자인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다만 강호준 때문에 예술가의 꿈을 접었을 뿐이었다.게다가 나는 외동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경영을 배워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다.강호준이 회사를 맡은 몇 년 동안 미술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때마다 강호준은 계속 반대만 했다.강호준은 내가 속이 좁다며, 돈 많은 집 딸이라 유난을 떤다고 했다.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가망도 없는 공부를 해서 뭐 하겠느냐고 했다.나는 그의 생각을 존중했다. 그래서 공부는 계속 미뤄뒀다.강호준과의 일이 일단락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인생은 한 번뿐인데 꿈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룰 수도 있으니까.어제 양재민에게 넌지시 얘기했을 뿐인데, 그는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비행기에서는 간식과 귀마개까지 세심하게 챙겨줬다.내가 조용한 걸 좋아하고, 차나 비행기에 타면 곧잘 잠든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비행기 멀미가 났다. 그것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양재민은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다정하게 뒷정리를 도와줬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 있었다.비서에게서 온 메시지도 몇 개 있었다. 강호준이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회사 앞에서 난동을 부려서 취재진까지 몰려왔다고 했다.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양재민이 곧바로 핸드폰을 가져갔다.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몇 마디 당부하더니 곧바로 돌아와서 말했다.“앞으로 이런 골치 아픈 일은 나한테 맡겨.”짧은 한마디였지만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강호준과 결혼한 뒤 집안의 많은 일을 내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누군가에게 이렇게 배려받고 다정한 대접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강호준은 지난
“저 남자가 심서연이 몰래 만나는 남자예요! 저게 바로 바람을 피운 증거라고요! 불륜남이 집까지 찾아왔으니 이제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 아시겠죠!”양재민이 왔는데도 고다은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져서 목청을 높였다.양재민은 체격이 건장하지만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임신한 자신에게는 절대 손대지 않을 거라는 걸 고다은도 알고 있는 듯했다.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법이었다.계속 말로 몰아붙이기만 하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누구도 자기를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예상대로 고다은의 자극적인 말은 다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이웃들이 양재민을 보며 혀를 찼다. 사람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고다은 씨, 여기 현관 앞에는 영상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전부 녹화되고 있어요.”“그런 거짓말을 퍼뜨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다고요!”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재민은 당당하게 고다은 앞으로 걸어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양재민이 오른손을 꽉 쥐었다가 푸는 걸 봤다.이번에도 고다은이 그 점을 노리고 나선 셈이었다. 양재민은 임신한 여자에게 절대 손을 대지 않을 테니까.“심서연, 참 대단하다. 더러운 짓은 자기가 해 놓고 불륜남을 앞세워서 날 겁주려고 해?”양재민이 당당하게 맞서자 고다은도 조금 겁이 난 모양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나를 바라봤다.“마침 당사자들이 다 있으니 한 번 기회를 줄게.” “둘이 무슨 더러운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남들이 모르게 하고 싶으면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해. 안 그러면 온 동네에 다 퍼뜨릴 테니까!”고다은이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봤다.벌써 이겼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천천히 고다은 앞으로 갔다.“고다은, 내 욕은 얼마든지 해. 하지만 양재민까지 건드리진 마.”짝!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높이 들어 고다은의 뺨을 힘껏 후려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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