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다음 날 아침 일찍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억수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비가 너무 많이 와.”안전을 고려해 전연우는 일정을 미루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운무 마을은 사계절 내내 봄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비가 잦았다. 장소월은 처음 이틀 동안은 적응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비가 내린 뒤 상쾌해진 마을을 거니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오후가 되자 하늘은 빠르게 맑아졌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만류로 장소월은 오늘 떠나지 않기로 했다. 전연우가 어제 이미 오늘의 모든 일정을 준비해놓았다는 것을 장소월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주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꽃이나 과일을 따러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운무 마을 근처 언덕 위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었다. 시야가 훤히 트여 멀리 산맥도 보이고, 청록색 초원에 몸을 맡기고 새소리와 꽃향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운무 마을은 면적은 작았지만, 구석구석 풍경 하나하나가 장소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아주머니가 하얀 면사포를 장소월의 눈앞에 드리우자, 그녀는 그제야 서프라이즈가 준비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주머니가 그녀를 잡아끌며 말했다. “사모님, 먼저 옷 갈아입으러 가요.”이 모든 건 며칠 전 전연우가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전연우의 눈에 멀리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미 정장 차림으로 두 손을 꼭 쥔 채 단정히 서 있었다.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장소월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전연우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코끝에 또다시 남자의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전연우는 직접 그녀의 눈을 가린 면사포를 벗겨주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는 재빨리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눈을 뜬 장소월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늘에는 영롱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고, 들에는 장미꽃이 만발했으며, 하얗고 분홍빛 하트 풍선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기 그지없
전연우가 담담히 설명했다. “둘 다 너한테 맞지 않아.”장소월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빨리 몸이 회복되면 좋을 텐데. 그럼 떠올리려 하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예전의 기억들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한밤중, 그 기억들은 악몽처럼 그녀를 휘감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서철용을 불러 진찰하게 하거나... 아니면 돌아갈까?’ “요즘 몸이 많이 회복된 것 같아. 이제 그런 눈으로 나 보지 않아도 돼.”장소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며칠간, 그녀는 전연우의 다정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별이를 떠올리자 그녀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전연우는 그녀의 말을 한 자 한 자 귀 기울여 들었다. “내가 너를 너무 답답하게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장소월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야, 내 말은...”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전연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장소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길 바랐다. 수많은 밤, 그는 자신을 자책하며 장소월에게 더 잘하겠다고 다짐해왔다.장소월은 지금 이 순간 둔한 자신의 입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조각난 기억 때문에 답답하긴 했지만, 전연우가 화내는 건 원치 않았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 탓하는 거 아니야. 당신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인 거지.”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 해도 마찰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난 괜찮아.” 전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소월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깊은 애정을 본 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연우를 끌어안았다. 이 품에는 익숙한 향기가 깃들어 있었다.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그 향기 말이다. 그녀는 전연우와의 사이가 불편해지는 걸 조금도 원치 않았다.“전... 연우.” 장소월이 그의
일주일이 드디어 평온하게 지나갔다. 전연우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한 일이든 복잡한 인간관계든, 그는 언제나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소월 앞에서는 예외였다.그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은 운무 마을에서 산과 강을 오가며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장소월의 백지장처럼 하얗던 얼굴에도 점차 건강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작은 언덕 위, 그녀는 낫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파고 있었다. 얼굴에 진흙이 묻었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소월은 힘껏 낫을 돌리며 옆에 있는 윤씨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이 감자 정말 익은 거 맞아요? 너무 작아 보이는데요!”윤씨는 낫을 잠시 내려놓고, 장소월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사모님, 이 감자 작아도 정말 맛있어요!”윤씨의 얼굴에는 농사꾼 특유의 자부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재주는 없어도, 농사짓고 요리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다. 운무 마을에서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장소월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딘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약간 풀이 죽어 낫을 내려놓았다. “아주머니, 이 낫 망가진 거 아니에요?”원래 이 작은 낫은 아주머니의 손자가 쓰던 것이었다. 그녀도 어쨌든 어른이니 편할 리가 없었다. 아주머니가 대답하기 전, 돌연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보기엔 딱 좋아.” 전연우가 낫을 들고 두어 번 휘둘러보고는 장소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꼭 말아쥐었다. 겉으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이건 분명히 애들 용이에요.”윤씨가 급히 설명했다. “이런 작은 감자는 작은 낫으로 파는 게 딱 맞아요.” 그녀는 잠시 멈추고 조심스럽게 전연우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사모님, 이제 좀 쉬셔야죠.”전연우도 그 말에 동의했다. “맞아, 이제 쉬어.”그의 시선이 다
장소월은 발꿈치를 들어 전연우의 어깨에 묻은 초록 잎사귀를 털어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때문에 일 미룰 필요 없어. 당신에겐 중요한 일이 있잖아.”그녀 자신도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왜, 내가 싫어?” 전연우는 장소월에게 바싹 다가가며 그녀의 귀걸이에 달린 수정 장식을 만지작거렸다.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 여자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지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대표님, 사모님.” 현지 요리사 아주머니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과일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오늘 오후 제가 직접 딴 블루베리예요. 아주 신선하답니다!”장소월은 도망치듯 전연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 여자, 또 내 질문 피하려고 하네!’장소월은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가 블루베리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현지에서 요리사 아주머니로 불리는 윤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너무 친절하시네요. 오늘 저희가... 저 남편이랑 같이 풍경 구경 다녀왔어요.”남들 앞에서 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건 여전히 쑥스러웠다. 윤씨는 두 사람이 신혼부부처럼 다정하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전연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장소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장소월이 들고 있던 블루베리를 집어 입에 넣고 한 입 베어 문 순간,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평가를 내놓으려던 찰나, 장소월이 그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 세기는 세지 않았지만, 경고의 의미는 강렬했다. 장소월은 전연우의 직설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눈치도 없이 솔직하기 그지없는 평가를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그런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 그녀는 아주머니가 기분이 상해할까 봐 전연우에게 주의를 준 것이었다. 그의 표정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윤씨가 뭔가 눈치챈 듯 설명했다. “대표님, 사모님, 정말
기분이 가라앉으며 태블릿을 넘기던 손도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전연우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와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장소월의 손을 잡았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묘한 무력감이 담겨 있는 그 말에 전연우는 장소월이 또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장소월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모든 걸 혼자 하려 하지 마. 난 너 힘든 거 싫어.”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더욱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지?”예정된 여행 일정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오랫동안 열렬히 사랑해온 사람과 함께 있으니 장소월은 너무나 행복했다.“여기 환경 진짜 힐링 돼.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다면...” 장소월은 여기 머무르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전연우는 일 때문에 항상 바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연우의 현재 능력이라면, 모든 걸 내려놓고 편히 지낸다 해도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전연우는 턱을 장소월의 머리 위에 살짝 얹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다정한 미소였다.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살아도 돼. 얼마나 오래 있든 상관없어.”그는 분명 장소월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나친 애정은 민감한 그녀에게 약간의 혼란을 안겼다. 그의 무한한 사랑이 싫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경험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장소월이 더는 말하지 않자 전연우는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걱정스레 물었다. “뭐 때문에 망설이는 거야?”장소월은 몸을 돌려 눈을 살짝 감고 두 팔을 벌린 채 자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려는 찰나, 갑자기 몸이 그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잡고 넓고 단단한 등짝을 툭툭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내려놔, 전
전연우는 문득 장소월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길을 세어보면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진심으로 장소월에게 잘해준 순간은 결코 많지 않았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그녀에게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그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장소월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전연우의 얼굴 윤곽은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남자다.그녀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나아가 월계화 앞에 멈춰선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 어디든 가도 괜찮아?”전연우가 다가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고 단호히 말했다. “당연하지.”사실 장소월은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그저 전연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놓쳤던 시간들을 이제라도 되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처럼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조금은 도도한 척하며, 장소월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당신이 가기 싫어하는 곳 말하면 어떻게 해?”너무나 유치한 질문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전연우 앞에서 이렇듯 당당함을 가질 수 있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끌어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그럴 리가.”장소월은 그의 따뜻한 품에 폭 안긴 채 조용히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장소월은 아직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건 꿈속에서 밥 냄새가 풍겨온다는 것이었다. 여행 일정을 확정하기 위해 전연우는 오늘 아침 회사에 가지 않고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도우미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도록 시켰다.장소월은 약간 흐리멍덩한 상태로 물었다. “당신 지금 밥 먹는 거야?”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아침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임을 깨닫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엔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서로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던 장면을 떠올리니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