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엘로디아 르메르는 그날 밤, 황궁에 몰래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황궁 자체에 몰래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엄연히 내일부터 시작되는 황태자비 선발전에 참가하기 위해 황궁 서쪽 별궁에 머무르고 있는 후보자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황궁에 있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면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푹신한 침대가 놓인 후보자용 방이지, 황궁 북쪽 끝에 버려지다시피 한 도요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조금만 더.” 엘로디아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걷어 들고 담장을 따라 걸었다. 다른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낮에는 황금빛 지붕과 하얀 대리석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던 황궁도 밤이 되자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긴 회랑 너머로 달빛이 내려앉았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북쪽 구역에는 풀벌레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엘로디아의 시선은 그런 낭만적인 풍경에는 조금도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눈앞의 건물만 보고 있었다. 낡은 돌벽. 검게 그을린 굴뚝.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녹슨 철문. 그리고 그 위에 거의 지워져가는 글씨. 황실 제3도요원. 엘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찾았다.” 황태자비 후보가 한밤중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처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격에 차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 황궁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곳을 찾고 있었다. 황태자비 선발전? 물론 중요했다. 정확히는 빨리 떨어져 나가기 위해 중요했다. 그러나 엘로디아가 황궁에 도착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황태자의 얼굴도, 앞으로 경쟁해야 할 후보들의 이름도 아니었다. 황궁에는 천년화로가 있다던데.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아르젠 제국의 초대 황제가 황궁을 세우며 함께 만들었다는 화로. 황실에서 사용하는 최고급 도자기와 마도도자기가 모두 그 화로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까지 있었다. 도예가에게 황궁은 황제가 사는 곳이기 전에 천년화로가 있는 곳이었다. 적어도 엘로디아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시녀에게 무심한 척 물어본 결과, 뜻밖의 정보를 하나 얻었다. 과거 황실 도요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북쪽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 현재는 대부분의 작업을 남쪽의 신도요원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 거기까지 들은 순간부터 엘로디아에게 잠이라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철컥. 낡은 문이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엘로디아는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아무도 없죠?”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있으면 곤란했다. 엘로디아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등불을 높이 들자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공방의 모습이 하나둘 드러났다. 벽을 따라 늘어선 선반.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업대. 천을 뒤집어쓴 오래된 물레들. 한쪽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 거대한 가마가 있었다. 엘로디아는 숨을 삼켰다. “…세상에.” 방금 전까지 조심조심 움직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빠르게 가마 앞으로 달려갔다. 등불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가마의 외벽을 훑었다. 오래된 벽돌 사이로 검은 그을음이 깊게 배어 있었다. 수없이 불을 먹은 흔적이었다. 엘로디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건 적어도 백 년은… 아니, 더 됐겠는데.” 손끝으로 벽돌을 두드렸다. 텅. 낮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좋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훨씬 괜찮았다. 엘로디아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봤다. “장작은….” 가마 뒤편에 장작이 쌓여 있었다. 문제는 거의 바닥났다는 것. 엘로디아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걸로는 부족한데.” 그녀가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는 구경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별궁에 짐을 풀 때 가장 먼저 숨겨놓은 것이 있었다. 작은 천 보따리. 고향에서 가져온 흙이었다. 황태자비 선발전에 흙을 가져온 영애는 아마 제국 역사상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엘로디아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드레스보다 흙이 중요했다. 보석보다 유약이 중요했고. 황태자보다 좋은 가마가…. 엘로디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비교하기 전에는 모르겠지만.” 황태자의 얼굴도 아직 제대로 본 적 없으니까. 그러나 가능성은 낮았다. 좋은 가마는 귀했다. 엘로디아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일단 불부터 살려볼까.” 바로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엘로디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달빛이 열린 창문을 통해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키가 컸다. 검은 머리카락은 밤보다 짙었고, 길고 단정한 몸에는 검은색 셔츠와 바지가 걸쳐져 있었다. 화려한 제복도 없었고 귀족을 나타내는 장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아니. 정정해야 했다. 엄청나게 눈에 띄었다. 엘로디아는 잠시 말을 잊었다. 잘생겼다. 그것도 조금 불공평할 정도로. 곧게 뻗은 콧날과 선명한 턱선, 달빛 아래에서도 유난히 깊어 보이는 금빛 눈. 황궁에서는 사람도 얼굴을 보고 뽑나? 엘로디아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남자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가 먼저 질문한 것 같은데.” “아.” 정신이 돌아왔다. 엘로디아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낮에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밤에 몰래 들어왔다?” “…구경이라는 게 원래 조용할 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잖아요.” 남자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은 건가? 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은요?” “나?” “여기서 뭐 하세요?” 남자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상한 질문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그러더니 되물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엘로디아는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검은 옷. 장식 없음. 호위도 없음. 황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하인은 아닌 듯했고, 손을 보니 노동을 하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관리인가?’ 그것도 꽤 한가한 관리. 엘로디아가 결론을 내렸다. “황궁 관리 아니세요?” 남자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쳤다. “…비슷하지.” 역시. 엘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뭐가?” “저 좀 도와주세요.” 남자가 이번에는 확실하게 멈췄다. “내가?” “네.” 엘로디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마 뒤편을 가리켰다. “장작이 부족해요. 저쪽 창고에 더 있는 것 같은데 몇 묶음만 가져다주세요.” 침묵이 흘렀다. 남자가 장작을 바라봤다. 다시 엘로디아를 바라봤다. “…나보고 장작을 나르라고?” “혹시 허리가 안 좋으세요?” “아니.” “그럼 괜찮겠네요.” 엘로디아는 다시 가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는 그동안 불길을 확인할게요.” 남자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엘로디아가 다시 돌아봤다. “왜요?”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남자는 정말 창고로 향했다.저녁이 가까워졌을 때 라시엘이 찾아왔다.엘로디아는 작업대에서 에밀의 주문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오늘은 표정이 좋은데.”라시엘이 말했다.“왜요?”“무슨 일이 잘됐나 봐.”엘로디아는 웃으며 영수증 사본을 들어 보였다.“두 번째 주문 납품했어요.”라시엘의 입가가 올라갔다.“축하해.”“감사합니다.”“기념해야겠네.”“이미 했어요.”“어떻게?”“로제랑 차 마셨어요.”라시엘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나는?”엘로디아가 웃었다.“전하는 늦게 오셨잖아요.”“그럼 늦은 사람을 위한 기념은?”“없는데요.”라시엘은 조금 억울한 얼굴을 했다.엘로디아는 그 표정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어요. 저녁 같이 먹어요.”“좋아.”그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혹시 그 말 들으려고 그러신 거예요?”“조금.”“전하.”“응.”“황태자가 그렇게 쉽게 속마음을 말해도 돼요?”라시엘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당신한테는.”엘로디아는 잠깐 말을 잃었다.정말.이 사람은.가끔 너무 반칙이었다.그녀는 괜히 주문 기록표를 정리했다.“오늘 기록관리국에서도 새로운 걸 알아냈어요.”라시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제17호?”“네.”엘로디아는 오늘 확인한 내용을 차례로 설명했다.시험 종료 후 혼인도공에게 인계할 예정이었다는 것.하지만 잔류 마력결이 안정화되지 않아 이동이 제한됐다는 것.임시 보관 접수까지는 확인됐지만 최종 수령란에는 서명이 없었다는 것.라시엘은 끝까지 들은 뒤 물었다.“그럼 에델리아에게 실제로 전달됐다는 증거는 없는 거네.”“네. 적어도 오늘 본 문서에는요.”“마지막으로 보관한 사람은?”“보관 책임자는 확인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실물을 본 사람인지는 몰라요.”라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다음 기록을 찾는 거구나.”“맞아요.”엘로디아는 수첩을 펼쳤다.“보관 장소 변경 지시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옮겼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요.”라시엘은 문서
“안정화 재검사 기록도 있나요?”기록관리관이 색인을 확인했다.“관련 시험 기록이 별도로 분류되어 있습니다.”“이번에 볼 수 있을까요?”“검사 시행 여부와 결과 분류까지만 가능합니다.”“그것부터 보겠습니다.”안정화 재검사는 세 차례 예정되어 있었다.첫 번째 검사.시험 종료 후 사흘째.결과.잔류 마력결 기준치 초과.두 번째 검사.시험 종료 후 열흘째.결과.감소 확인. 기준치 초과 상태 유지.세 번째 검사.시험 종료 후 스무째 날.엘로디아의 시선이 멈췄다.검사 미실시.그녀는 비고란을 확인했다.보관 장소 변경에 따른 일정 재조정.“보관 장소가 바뀌었어요?”기록관리관은 원본의 다음 부분을 확인했다.“장소 변경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재되어 있습니다.”“실제로 옮겼다는 뜻인가요?”“그것은 별도의 이송 확인 기록을 봐야 합니다.”엘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또 구분해야 할 것이 생겼다.장소 변경 지시.실제 이동.이동 완료 확인.서로 다른 절차다.그녀는 수첩에 적었다.제17호 안정화 재검사 — 1·2차 기준치 초과, 3차 미실시.3차 미실시 사유 — 보관 장소 변경에 따른 일정 재조정.그리고 다음 줄.실제 이동 여부 미확인.엘로디아는 기록관리관을 바라봤다.“보관 장소 변경 지시서도 신청할 수 있나요?”“예. 다만 당시 보안구역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어 열람 범위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그럼 실물의 이동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만 신청하겠습니다.”그녀는 신청서를 받아 적었다.보관 장소의 구조나 보안 설비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제17호 갑발이 실제로 어디까지 이동했는지.그 사실만 확인하면 됐다.점심시간이 되자 엘로디아는 열람실 밖으로 나왔다.로제가 챙겨준 빵을 꺼내자 조금 웃음이 났다.두 개.역시 하나 더 넣어두었다.엘로디아는 첫 번째 빵을 먹으며 오늘 확인한 내용을 정리했다.시험 종료 확인자는 오르텐 베일.임시 보관 접수자는 레이몬드 크레인.혼인도공에게 인계할 예정이었
황실 기록관리국에서 열람 승인서가 도착한 것은 신청서를 제출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엘로디아는 봉투를 열기 전에 먼저 작업대 위에 놓인 물잔을 확인했다. 에밀 하르트에게 전달할 예정인 잔이었다. 최종 소성을 마쳤고, 제작자 자체 검사에서도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자가 직접 펜촉을 씻어보는 시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오늘은 기록관리국에 가시겠네요?”로제가 봉투를 보고 물었다.“승인이 났으면.”엘로디아는 조심스럽게 봉인을 뜯었다.제17호 갑발 시험 종료 후 관리 책임 및 인계 상태 확인서 — 감독하 부분 열람 승인.그 아래에는 열람 제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당시 시험관리 담당자의 직책과 업무상 서명은 확인할 수 있지만, 다른 사건과 연결된 비공개 부속 기록은 열람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엘로디아는 승인서를 끝까지 읽은 뒤 숨을 내쉬었다.“됐어.”“찾으시던 문서예요?”“응. 그런데 이걸 본다고 갑발이 어디 있는지 바로 알게 되는 건 아니야.”“그래도 보러 가실 거죠?”“당연하지.”로제는 웃으며 외투를 가져왔다.“그럼 점심도 챙겨드릴게요. 지난번처럼 기록 읽다가 식사 시간을 놓치시면 안 되니까요.”“이번에는 안 놓칠 거야.”“아가씨가 그 말씀 하실 때마다 제가 빵을 하나 더 넣게 되더라고요.”엘로디아는 대답하지 못했다.대신 얌전히 가방을 열었다.로제는 빵 두 개와 작은 과일 상자를 넣어주었다.“기록은 도망가지 않지만 아가씨 배는 고파지니까요.”“알았어.”엘로디아는 웃으며 가방을 닫았다.그러고는 작업대 위의 물잔을 한 번 더 돌아봤다.자기가 만든 물건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전달할 것인지도, 언제 검수를 받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백 년 전 만들어진 제17호 갑발은 달랐다.시험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혼인도공에게 인계한다는 기록도 있다.하지만 실제 인계가 완료됐다는 확인은 없다.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물건을 보관했을 것이다.적어도 마지막으로 확인된 순간까지는.오
저녁 무렵 라시엘이 찾아왔을 때, 엘로디아는 수첩을 두 권 펼쳐놓고 있었다. 하나는 황실 기록. 다른 하나는 앞으로 확인할 민간 거래 기록. 라시엘은 작업대 앞에 서서 두 권을 번갈아 봤다. “오늘은 장부가 둘이네.” “네.” “내일은 셋이 되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어요.” 라시엘이 웃었다. 엘로디아는 그에게 오늘 확인한 내용을 설명했다. 계약 종료 당시 반환된 도구. 황실에 남은 시설. 정산된 재료. 그리고 별도 관리 대상으로 분류된 제17호 갑발. “제17호가 있었어?” 라시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목록에 이름은 있었어요. 그런데 실물이 어디 있는지는 안 나와요.” “르메르로 돌아간 건 아니고?” “그것도 몰라요.” 엘로디아는 수첩을 펼쳤다. “반환·인계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것만 확인했어요. 별도 관리 상태였다고요.” 라시엘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그 관리 기록을 찾아야겠네.” “네. 문서 번호는 신청해뒀어요.” “잘했어.” 엘로디아는 그를 보다가 조금 웃었다. “전하, 오늘은 왜 안 놀려요?” “뭘?” “또 기록 찾는다고.” 라시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잖아.” “그릇 만드는 걸 더 좋아해요.” “알아.” 그는 작업대 위의 에밀 물잔을 봤다. “그건 완성됐어?” “아직요. 사용 확인을 받아야 해요.” “잘됐으면 좋겠네.” “저도요.” 엘로디아는 잠시 잔을 바라봤다. 그러다 말했다. “전하, 저 오늘 조금 기뻤어요.” “왜?” “에델리아가 자기 도구를 돌려받았더라고요.” 라시엘은 그녀를 가만히 봤다. “그게 그렇게 좋았어?” “네.” 엘로디아는 웃었다. “황실에서 더 이상 주문하지 않더라도, 자기 도구가 있으면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잖아요.” “가마는 필요하겠지만.” “맞아요. 그래서 그다음 기록도 찾아보려고요.” 라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기록?” “르메르가 황실 밖에서 그릇을 팔았는지요.” 그녀는 조금 신이 나서 말을
예외 처리 목록은 생각보다 짧았다.처음 두 항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파손되어 반환할 수 없는 측정 기구.사용 과정에서 소모된 시험편.각각 처리 사유와 정산 여부가 적혀 있었다.그리고 세 번째.엘로디아의 시선이 멈췄다.고내화 갑발 제17호.드디어.나왔다.그녀는 숨을 멈춘 채 다음 칸을 읽었다.반환·인계 대상 제외.사유.별도 관리 상태.엘로디아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별도 관리.그 말은 너무 넓었다.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다른 기관으로 이관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시험 결과를 검토하는 동안 실물을 따로 두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엘로디아는 다음 칸을 봤다.실물 소재 — 본 목록에서 확인 불가.“…….”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찾았다.그런데.아직 찾지 못했다.제17호 갑발이 반환·인계 목록에서 빠진 이유는 확인했다.별도 관리 상태였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별도 관리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이 문서만으로 알 수 없었다.엘로디아는 수첩에 적었다.제17호 갑발 — 계약 종료 당시 반환·인계 대상 제외.사유 — 별도 관리 상태.실물 소재 — 해당 목록에서 확인 불가.그리고 마지막에.르메르 사문서고에 실물이 있다는 증거는 아님.펜을 내려놓았다.조금 아쉬웠다.솔직히 말하면.많이.아쉬웠다.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없는 답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엘로디아는 문서를 다시 살폈다.예외 처리 목록의 오른쪽 끝.아주 작은 칸.처리 근거 문서.번호가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옮겨 적었다.“이 번호로 별도 문서를 신청할 수 있나요?”기록관리관이 확인했다.“가능합니다. 다만 현재 어느 기록군에 보존되어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엘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소재부터 확인하겠습니다.”갑발의 소재가 아니라.갑발에 관한 문서의 소재.지금은 그 순서가 맞았다.그다음에 확인한 것은 시험기물과 관련된 기록류였다.엘로디아는 여기서 또 하나의 차이를 발견했다.실물과 문서는
황실에서 돌려받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과 닮아 있었다.엘로디아는 황실 기록관리국에서 도착한 열람 승인서를 세 번 읽었다.황실 혼인도공 지정 계약 종료 당시 제작시설 및 시험기물 반환·인계 목록 — 부분 열람 승인.마침내 허가가 났다.지난번 에델리아의 계약 갱신 신청 철회서를 읽은 뒤, 엘로디아가 가장 궁금해했던 문서였다. 황실과의 계약이 끝났을 때 르메르가 어떤 물건을 돌려받았는지, 어떤 물건을 남겨두었는지, 그리고 그중에 제17호 갑발과 관련된 것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엘로디아는 바로 외투를 집어 들지 않았다.작업대 위에는 에밀 하르트의 물잔이 놓여 있었다.재벌 소성을 마친 잔이었다.“기록보다 그릇이 먼저.”그녀는 혼잣말을 하고는 잔을 들어 올렸다.유약은 예상했던 대로 얇고 균일하게 녹아 있었다. 안쪽에 유약이 고여 생긴 턱도 없었고, 입구 가장자리에도 거친 부분이 없었다. 다만 바닥에 가까운 곡면 한쪽에서 아주 작은 빛의 차이가 보였다.엘로디아는 창가로 이동해 잔을 기울였다.빛이 미끄러지듯 지나갔다.표면의 두께 차이였다.눈으로만 보면 흠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손끝에 걸리지 않았고 물을 담았을 때 세척을 방해할 정도도 아니었다.그녀는 검사표에 적었다.유약 두께 편차 — 경미. 사용성 영향 여부 확인 필요.그다음 물을 부었다.잔의 절반쯤 채우고 작업대 위에 놓았다. 바닥이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한 뒤 펜촉 모형을 물에 담갔다. 입구를 조금 넓힌 덕분에 손목을 지나치게 세우지 않아도 펜촉이 안쪽에 닿았다.“좋아.”이번에는 물을 비웠다.안쪽에 남은 물방울이 어디에 맺히는지 확인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닦았다. 좁은 입구 때문에 천이 걸리거나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어야 하는 문제는 없었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작자의 시험이었다.에밀이 실제로 사용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엘로디아는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교수님께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