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건 왜 물어?”“그냥 궁금해서. 누가 우리 이쁜 유영이한테 눈을 선물했는지.”소은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고 이유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 후로 두 사람은 강이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점심을 먹은 뒤, 이유영은 더 이상 소은지 곁에 머물지 않았다. 월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렇게 오랫동안 소은지와 함께한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소은지는 말리지 않았고 그녀가 문을 나서려던 순간,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우와 엔데스 가문의 넷째 사모님이었지만 이제는 이혼한 송연미였다.송연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현우에게 매달리고 있었다.“현우야, 그 여자는 보내줘!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현우 씨.”송연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이 앞으로 나섰다.순간,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기더니 송연미와 현우의 시선이 일제히 이유영을 향했다.송연미의 눈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정을 이유영은 분명히 감지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현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점심 먹었어요?”“아직이에요.”“빨리 오지 그랬어요. 저와 은지는 벌써 먹었는데.”이유영을 향한 현우의 눈빛이 순간 미묘하게 부드러워졌다.그 변화는 옆에 있던 송연미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송연미는 현우를 쳐다보다가 다시 이유영을 쳐다보았다.‘이제 지금 무슨 상황이지?’송연미의 가슴은 마치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그러나 이유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먼저 들어가세요. 전 가봐야 해서요.”“벌써 가요?”“네, 가볼게요.”“사람 불러서 바래다 드릴게요.”현우의 목소리에는 깊은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 요즘에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부드러움이었다.이유영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지금은 잘 보이니까, 필요 없어요.”“색깔도 구분할 수 있어요?”“물론이죠.”이유영은 자연스레 웃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잘됐네요.”“그럼 이제 가볼게요. 소은지가
“현우!”그 이름을 부르며 송연미의 입술이 떨렸다. 가슴은 답답하고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소은지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불안했는데 이제는 이유영까지.현우가 이유영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떠올리며 송연미는 더욱 위기감에 휩싸였다.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왜 현우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거지?’‘그럼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난 대체 뭐가 되는 거야?’“여기는 네가 넷째 사모님이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송연미의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마주하며 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넷째 사모님’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미 창백했던 송연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가 느낀 것은 단순한 공기의 차가움이 아니라 손끝에서부터 가슴속 깊이, 나아가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냉기였다.눈빛만 차가운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도 차가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따뜻했던 눈빛이었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온도로 변해 있었다.왜 하필리면 정씨 가문 아가씨지?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현우는 이미 돌아서 버렸고 그녀는 차가운 바람 속에 서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모든 생각이 바람에 휩쓸려 버린 듯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지금 상황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소은지와 이유영...예전엔 소은지가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유영이 자신의 걸림돌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이 있잖아. 왜 현우와도 관계가 생겼지? 어떻게...’방 안에서 소은지는 소파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돌아왔어요? 점심 먹었어요?”대답 대신 현우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았고 소은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우천시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돌아온 후로 현우는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둘 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랑 같이 좀 먹을래요?”“전 유영이랑 이미 먹었어요.”“조금만 더 먹어요.”현우는 혼자 밥을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소은지는 마지못해 현우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송연미는 현우가 소은지와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머릿속이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혼란스러웠다.그는 완전히 변해버렸다.누구에게나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유독 송연미에게만큼은 냉담했다. 이번에 돌아온 현우는 마치 과거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 생각에 가슴이 더 답답해졌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감정이 온몸을 짓눌렀다.송연미는 항상 현우를 기다려왔다.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지난 세월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지금에 와서 그 기다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송연미는 여전히 비바람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결국 그녀는 비바람 속으로 쓰러졌다.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왜, 왜 이렇게 된 거야?’한편, 현우와 소은지는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송연미가 밖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소은지는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현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살을 찌푸렸다....다른 한편.이유영이 반산월을 나와 백산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신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수화기 너머로 신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서주가 완전히 뒤집혔어요. 정말로 모든 걸 박연준에게 넘겨주고 떠났어요. 유영 씨가 말한 것처럼 별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 같진 않아요.”이유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조금 전, 반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마치 예전에 한지음을 위해서라면 이유영의 각막을 빼앗으려 했던 것처럼.하지만 나중에 강이한은 말했다.그건 정말로 그렇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사실,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진심이었다.나중에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이유영은 확신하고 있었다.강이한이 나중에 무슨 변명을 했든 그런 것들은 이유영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때, 전화 너머로 신지수가 말했다.“지금 그 아이뿐만이 아니에요. 강이한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서주에서 사라졌어요.”이유영은 순간 멈칫하며 물었다.“모두요?”“네. 제가 말했잖아요. 강이한이 모든 걸 박연준에게 넘기고 떠났다고.”그렇다면 강이한은 서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걸까?왜?박연준이 우천시에 왔을 때, 강이한은 떠났다.그때,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이 무슨 거래를 했을 것이고 강이한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얻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박연준이 전기봉에 대한 정보를 강이한에게 넘겨줬고 그래서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난 것이라고 추측했었다.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우천시를 떠나고 그는 서주로 돌아왔지만, 그 이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지금 보니,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난 이유는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박연준이 정보를 제공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떠났던 걸까?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이론적으로 강이한은 우천시를 떠난 후 서주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야 했다.그런데 왜, 그는 박연준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떠난 걸까?이유영은 돌아오는 길에 여진우에게 박연준이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박연준은 서주에 있어요?”“강이한이 모든 걸 맡겼는데, 당연히 서주에 있죠.”신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이유영의 질문에 신지수가 짧게 대답했다.“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강이한 씨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후로, 박연준 씨에게 많은 것을 넘기기 시작했어요.”우천시에서 돌아온 뒤부터 박연준에게 넘기기 시작했다?그렇다면 그들의 거래는 대체 뭐였을까?이유영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겠습니다.”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이미 지나간 일인데,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유영에게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자꾸 과거 일에 읽히는 이유가 너무 편하게 살아와서일까?“네.”신지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고 통화가 끝났다.하지만 이유영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전기봉의 정보 때문에 우천시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떠났을까?그리고 서주로 돌아와서는, 왜 또...신지수의 말을 곱씹으면서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뭔가 큰 음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정말로 음모일지도 모른다.어쨌든, 그 두 사람은 연서를 위해 오랫동안 계략을 꾸며왔다.이번에 이렇게 큰 움직임을 보인 것도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쾅!”“끼익!”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차가 급정거했다.다른 차를 들이받고 만 것이다. 문이 열리고, 벤츠 지바겐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차 문이 열리고 다시 닫기는 순간, 이유영은 잠깐 엔데스 가문의 셋째 아들, 엔데스 신우를 본 것 같았다.‘아니, 그럴 리가 없어.’엔데스 신우에게서 저렇게 차가운 기운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방금, 그 남자의 윤곽이 주는 냉랭한 분위기를 똑똑히 보았다.엔데스 가문의 셋째 아들은 바보라는 소문이 돌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분명 착각이겠지.’그저 우연히 한 번 본 얼굴이니 순간적인 오해였을 것이다.‘그래, 분명 착각일 거야.’바보라고 불리는 그가 그런 분위기를 풍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설마 그 소문들이 모두 가짜란 말인가?.
엔데스 가문의 일은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역시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야.”“당연하지.”임소미는 혀를 차며 핀잔을 주면서도 눈길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다.하지만 연애 문제만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둘은 서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품고 있는 증오를 떠올리면, 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유영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임소미는 생각했다.그렇기에 임소미는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월이한테 가볼게.”이유영이 말하자, 임소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유영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임소미는 혼자 남아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휴...”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 대해 도저히 어떻게 설명해야 몰라 답답한 심정만 내비쳤다.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이유영이 방으로 들어오자 월이는 젖병을 문 채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졸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유영은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곁에 있는 월이의 모습을 보니 더없이 마음이 말랑해졌다.“졸려?”“응, 엄마랑 같이 잘래.”“그래, 옷 갈아입고 올게.”이유영은 옷장으로 가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방에서 나오니 월이는 이미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늘 그렇듯, 이유영이 곁에 있으면 유난히 잠드는 속도가 빨랐다.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눈빛이 부드러워진 이유영은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가 월이를 품에 안았다.그 순간,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내 사랑...”속삭이듯 말하며 품 안의 작은 체온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월이는 이유영의 품에 파묻힌 채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던 이유영은 문득 깨달았다.월이의 작은 코가 유난히 그 사람을 닮았다.이제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그 사
이유영은 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살아왔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묻지 않았다.그때 이유영이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다.여진우의 물음은 곧 이유영이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는 뜻이었다.“회사에 나가서 일해야지. 근데 난 더 이상 경영은 하고 싶지 않아.”그 말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과거, 여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열 글로벌의 모든 무게가 이유영의 어깨를 짓눌렀다.특히 그때는, 정유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오빠가 있고 그 덕에 선택지도 훨씬 많아졌기에 더 이상 예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뭔가 하긴 해야지.”여진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이유영은 곧장 물었다.“그럼 뭐 하면 좋을 것 같아?”“네가 하고 싶은 건?”“네 비서!”그 말에, 여진우는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건 아무리 봐도 재능 낭비였고 아버지가 이유영을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비서를 하겠다고?여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야망이 없네.”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신이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없는 건가?사실 이유영은 높은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무언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개 있다던데, 내가 디자인해 볼까?”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예전, 청하시에서 로열 글로벌로 정식 복귀하기 전, 오로라 스튜디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여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람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이유영은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후에 시간 있어?”“왜?”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흰색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엄격함은 타고난 것이었다.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려고.”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떨어지자, 맞은편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이 그의 동요를 말해주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유영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익힌 소고기를 집어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 응?”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그러나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치 그때의 강이한처럼.이유영은 강이한의 세계에서 한지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때, 미친 듯이 이혼을 요구했었다.그때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단호하게 행동했다.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정씨 가문이 있다.이유영의 결심은 박연준에게 거대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몸이 멀어지는 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너랑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박연준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난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균열이 깊어져 있었다.박연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나랑 이혼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과거, 강이한과 이혼하려 했을 때, 강이한은 이유영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날 떠나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아?”전생이든 현생이든, 그 질문은 반복되었다.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은 그의 곁에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지금, 박연준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마치 이유영이 하는 모든 선택이 신중해야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