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희의 안색이 변하더니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좋긴 뭐가 좋아?” “…….” 왕숙은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 강서희는 맛있게 먹다가 못 다 먹은 떡을 쟁반 위에 던졌다. “조…… 조금 더 드세요!” ‘겨우 만든 건데 반 조각밖에 먹지 않다니.’ 강서희는 일어서며 말했다. “안 먹어.” 그러자 왕숙의 눈에 서운한 빛이 스쳤다. “아가씨, 사실 제가 진씨 가문의 도련님도 뵌 적이 있는데 외모와 성격이 괜찮아서 아가씨랑 잘 되면…….” “닥쳐!” 왕숙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서희에게 끊겼다. “아가씨 마음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진영숙의 반응을 떠보아서, 왕숙은 강서희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다. 만의 하나라도 진영숙의 귀에 들어간다면 지금 가진 것도 모두 없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서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왕숙을 보며 물었다. “다 안다고?” “전 어릴 때부터 아가씨를 지켜보았어요. 아가씨 마음속의 서러움을 제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왕숙의 말에 강서희의 마음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인도 아는 걸 자신을 친딸처럼 생각한다는 사람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사모님은 서로 걸맞은 사람끼리 결혼하는 걸 선호하는 데다가 강씨 집안이 대가족이다 보니 가문의 이익 위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 “사모님이 아가씨를 키우다시피 했지만…….” 왕숙은 말을 다 하지 않고 잠깐 멈칫했다. 강서희는 왕숙을 째려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 “사모님은 아가씨가 눈에 차지 않는 것 같아요.” 왕숙의 말을 들은 강서희는 원래 안 좋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숙의 말이 좀 듣기 거북하지만 강서희도 모두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영숙은 확실히 강서희가 눈에 차지 않았다. 이유영에 대한 태도의 변화도 모두 이유영 외삼촌의 지위와 그가 국제에서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강서희의 눈엔 원망이 스쳤다. 그녀는 진영
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지현우도 이유영의 처리수단에 대해 만족했다. 그는 상대방이 누구든 지금의 자리에 앉았으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맞받아칠 박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 또한 정국진이 원하던 것이었다. 예전에 정국진이 이유영을 여론 속에 내버려 둔 건 그의 성질과 기개를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로열 글로벌의 미래 타수로서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 지현우가 나가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유영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이한이 위험한 기운을 풍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유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남자는 문에 기대고 말했다. “주동적으로 말할 거야? 아님 내가 심문할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유영은 화가 나서 강이한에게로 펜을 던졌다. ‘해명은 그렇다 치고 심문은 너무 오버 아니야? 왜? 고문하고 사형까지 내리지 그래?” 남자는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이유영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 때문에 잘생긴 얼굴에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이유영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품속에 고정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이유영은 그의 호흡을 피하며 말했다. “비켜!” “내가 네 외삼촌을 더 바빠지게 할까? 아님 로열 글로벌을 무너뜨릴까?” “흥, 네가 그렇게 대단해?” 이유영은 더 이상 듣기 싫었다. ‘로열 글로벌을 무너뜨린다고? 허세는.’하지만 이유영은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손에 로열 글로벌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도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유영은 화가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강이한은 그녀의 턱을 잡고 음침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주는 느낌이 바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넌 이런 수단 말고
분명히 물어본 사람은 강이한이었는데 이유영의 답을 들으니 그는 더 화가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의자에 던지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이유영. 너 참 대단하다.”그는 계속 말했다.“네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날 도발할 수 있을까?”“경고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이유영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강이한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날 도발할 수 있는 것도 네 뒤에 외삼촌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그의 말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협박이라는 건 확실했다.이유영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눈가의 위험한 눈빛도 순간 더욱 짙어졌다.강이한이 계속 말했다.“난 정말 그렇게 해보고 싶어.”“그래. 나도 네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보고 싶네.”이유영이 말했다.그녀는 강이한이 계속 외삼촌으로 협박을 하니 꼭대기에서 겨룰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위험한 압박력을 지닌 키스가 이유영의 입술에 떨어졌다.이유영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손톱으로 강이한의 목을 그어 핏자국이 생기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강이한은 화가 나서 이유영을 놓고 핸드폰을 그녀의 앞에 던지며 물었다.“이 번호 알아?”강이한의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이유영은 어리둥절해졌다.그녀는 강이한을 째려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보았다. 한 눈만 보았을 뿐인데 그녀의 눈에는 위험한 눈빛이 스쳤다.이유영은 강이한도 조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몰라.”이유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유영!” 강이한은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이유영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내가 강서희의 번호라고 하면 믿을 거야?” “너 무슨 일이나 서희와 엮지 마.” “그럼 몰라. 나는 강서희와 상관있다고 생각해. 모호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강이한의 선택이야.’ 이유영이 말을 마치자 강이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그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마치 강이한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강이한이 떠난 뒤, 이유영은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려고 심호흡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돌았다. 박연준이 했던 말처럼 그는 절대 곱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외삼촌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벌인 일이었다.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 억울하고 분이 내려가지 않았다.“유영아.”“일은 어떻게 되었나요?”이유영이 물었다.지금도 그 남자를 생각하면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정국진이 말했다.“걱정 마. 잘 처리했어.”“외삼촌.”“그래.”“로열 본사 내부에 다른 문제는 없죠?”그녀는 크리스탈 가든에 생긴 것과 비슷한 문제가 로열 글로벌 내부에 존재할까 봐 걱정했다.비록 그녀가 한 일은 아니지만 이미 기업의 수장이 되었으니 책임을 피해갈 수 없었다.이미 전임 대표가 만들어 놓고 간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만 해도 그녀는 골머리가 아팠다.“본사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 설마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거니?”정국진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정국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짜증을 숨겼다.그녀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을 토로했다.“이번 일, 강이한이 주도한 거예요.”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넌 진작에 알고 있었고?”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국진이 물었다.“네.”“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말을 꺼내는 거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 했어!”정국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최근 로열 글로벌 내부에 생긴 문제는 그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내부에서만 생긴 문제라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갈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면 앞뒤가 설명이 됐다.“죄송해요, 외삼촌.”“그 인간이 너 협박했어?”“외삼촌….”“이유영,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외삼촌도 못 미더웠다 그거지?”“그게 아니라….”
‘비겁한 자식!’유영이 말했다.“외삼촌,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유영은 정국진에게 계획 전부를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방향은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정국진은 그녀의 생각을 듣고 바로 의도를 알아챘다.“알았어. 크리스탈 가든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하지만 회사에 영향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거야. 알겠니?”“네, 외삼촌.”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이 원하는 건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당한 게 있는데 되돌려주지 않으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을 정국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하는 일을 막고 싶지 않았다.“곧 한 해가 지나가는데 박 대표랑 같이 파리로 와서 같이 보내는 건 어때?”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외삼촌, 사실 저랑 박 대표 사이는….”“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적응해 보도록 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어디 쉽겠어? 하지만 박 대표는 좋은 사람이야. 외삼촌 안목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어.”결국 유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사실 외삼촌을 만난 뒤로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눈빛이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매번 그런 눈빛을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하고 씁쓸했다.전화를 끊은 유영은 홀로 사색에 잠겼다.강이한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미친 짓의 의도는 결국 그녀를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다.유영은 그가 지나간 그들의 10년을 내려놓지 못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그녀는 그들이 옛날처럼 서로를 사랑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에게 미련이 남았다면 박연준이 떠나 있는 동안에 벌써 흔들렸을 것이다.매번 강이한과 함께 있을 때면 지난 생에 자신을 억지로 수술실에 들여보내던 광기 어린 얼굴과 자신의 목숨을 앗아갔
비록 해외로 도망가긴 했지만 유영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대략 어디쯤으로 갔는지 알아냈으니 슬슬 범위를 좁히며 수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호언장담하는 사설 탐정의 얘기를 들으며 유영은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잘했어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 주세요.”“그럼요.”수화기 너머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그녀의 주변은 또다시 평온이 찾아왔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면 그녀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정국진에게 사실을 알린 뒤로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을 이루어냈다.퇴근 시간에 그녀를 찾아온 강이한에게 그녀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이제 순정동으로 돌아가야겠어.”“이유영!”“이 게임, 이제 끝이야.”“게임? 여태 이걸 놀이로 알았어?”“그게 아니면 뭔데? 강이한, 억지 부리지 마. 내가 이렇게 하면 바보처럼 네 진심을 믿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니?”유영은 강이한이 진심으로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잡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정말 그녀가 소중했다면 전생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보기에 그가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건 한지음의 상황이 그 정도로 최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다면 이 남자는 결국 망설임 없이 그녀를 수술대에 올렸을 것이다.이 점에서 그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남자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이유영, 감히 네가 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유영은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그 성격은 여전했다.“내가 못할 게 뭐가 있어? 평생 당신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줄 알았니?”전생의 그녀는 그랬다.그때 그녀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결국 시력
하지만 조형욱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남달랐다.얼마 전부터 조형욱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유영은 기억에 조형욱에게 불만을 살만한 일을 한 적 없었다.설마….그녀는 전에 한지음이 강이한의 본가에 찾아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조형욱이었다.‘남자 홀리는 재주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조 비서, 태도 똑바로 해.”강이한은 불손한 그의 태도를 보고 경고 섞인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조형욱은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히 화제를 돌렸다.“배준석 씨 오셨습니다. 지금 접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준석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드리웠다.최근 그는 줄곧 배준석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한 원인도 배준석이 수술 당일에 환자를 버리고 갔기 때문이었다.배준석이 집도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수술이었다.솔직히 말해 이번 일에서 강이한은 배준석을 원망했다.그가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일단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난….”“조 비서, 도망 못 가게 잘 지키고 있어. 놓치면 조 비서 너도 옷 벗을 줄 알아!”말을 마친 사내는 씩씩거리며 접대실 방향으로 갔다.유영은 떠나는 그의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사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비서실 직원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세강은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여직원은 어렵게 구한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에게 싸늘한 두 갈래의 시선이 쏠렸다. 조형욱과 유영이었다.유영은 여직원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조형욱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그러고는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조형욱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커피 가져왔습니다.”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영은 나가려는 조형욱을 불러세웠다.“조 비서님.”“네. 무슨 일이시죠?”조형욱은 끝까지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유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조 비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조 비서는 그 감정 잘 숨겨야 할 거예요.”강이한은 딴 맘을 품은 인간을 절대 곁에 둘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조형욱이 자신 몰래 한지음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큰 소란이 일 것이다.조형욱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유영 씨, 원래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요?”“뭐라고요?”“아무리 못나도 피를 나눈 동생이잖아요.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한지음 씨의 불행은 다 이유영 씨 때문이잖아요.”유영은 그제야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에게만 전 재산을 물려준 일을 두고 한지음이 조형욱이나 강이한 앞에서 불쌍한 척을 적지 않게 해댄 모양이었다.“당장 내 앞에서 꺼져!”“이유영 씨!”“꺼지라고!”유영은 더 이상 조형욱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한지음의 출생의 비밀에 대하여 알게 된 이후로 유영은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한지음은 그녀에게 치욕과도 같은 존재였다.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말을 마친 조형욱이 뒤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이제 대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가셨잖아요. 한지음 씨는 시력을 잃은 불쌍한 인생에 불과해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신 분이 계속 약자를 괴롭히는 건 세간에 보기도 좋지 않아요.결국엔 유영이 속이 좁다는 얘기를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유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말했다.“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조 비서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요.”조형욱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유영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입에서 한지음이 불쌍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막혔다.조형욱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졌는지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