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스 명우는 그냥 미친 게 아니라 단단히 미쳤다.다급해하는 이유영과 달리, 소은지는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본 듯 담담했다. “원래부터 미친 사람이었어.”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엔데스 명우는 딴지를 걸어서 소은지를 방해했을 것이다. 소은지는 이제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의외긴 했지만 소은지는 곧 정신을 차렸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청하시에서 안건을 맡을 때마다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았다. 아무리 이혼 소송이라고 해도 성격 차이, 혹은 집안 내부 문제로 이혼하는 건 관여하지 않았다.소은지가 맡은 안건은 다 엄중한 사건들이다. 그러니 소은지가 맡는 안건은 다 중요하고 무거운 안건이다. 그리고 지금 이 안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하지만 엔데스 명우가...“네 말이 맞아. 엔데스 명우는 단단히 미쳤어.”아무리 엮이고 싶다고 해도 이런 방식을 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은지와 더 가까이, 더 오래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이다.소은지뿐만이 아니라 이유영도 이 재판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꼈다.소은지는 어떻게 이유영과의 전화를 끊은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소은지는 지금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오전에 이수연이 또 돌아왔다.소은지의 상태는 어제와 달랐다.어제는 그저 상대의 전적을 대충 파악한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으니...하지만 이수연 얼굴에 난 상처를 본 소은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또 때렸어요?”“좋은 변호사를 구했다고 신나하더니...”“...”소은지의 눈동자에 깊은 어둠이 서렸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지금의 소은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저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곧 끝날 거예요, 네?”아무리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해도 소은지는 이수연을 위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수연도 소은지를 믿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은지를 안았다.소은지는 사실 낯선 사람과 가깝게 닿지 않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수연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수연의 몸
이수연이 떠났다.소은지는 책과 관련 판례들을 더 샅샅이 훑었다. 아무래도 허술하게 준비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수연은 지면 안 되니까.소은지는 이번 재판이 예전에 맡았던 그 어느 재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그날 저녁.엔데스 명우가 왔다.소은지는 여전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하지만 문을 사이 두고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의 그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 좋은 말로 할 때 문 열어. 그렇지 않으면 더 끔찍한 곳에서 보게 될 거니까.”아직은 참을만했다.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엔데스 명우는 정말 참지 못할 것이다.소은지는 그런 엔데스 명우를 무시해 버렸다. 엔데스 명우가 밖에서 찬 바람을 맞든, 눈을 맞든, 상관하지 않았다.“도련님, 먼저 돌아가시죠.”강혁이 엔데스 명우의 뒤에서 얘기했다.“...”엔데스 명우가 이를 갈았다.요 며칠 엔데스 명우는 치미는 화를 꾹 누르고 소은지를 찾아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철옹성 같은 소은지의 차가운 태도였다.엔데스 명우가 떠났다. 소은지의 몸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안 엔데스 명우는 그제야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엔데스 명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짜증스레 연기를 내뿜어냈다.강혁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백미러의 엔데스 명우를 쳐다보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별장에 도착했다.엔데스 명우가 차에서 내릴 때 강혁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도련님.”“왜?”“소은지 씨는 혼인을 배신한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 계획은... 안됩니다.”강혁이 겨우 용기 내 얘기했다.소은지가 예전에 법조계에서 얼마나 눈부시게 빛났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가 재판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소은지가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는 결국 이수연 남편의 일에 끼어들고 말았다.강혁은 소은지가 그런 엔데스 명우를 더더욱 증오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사흘 전, 소은지 쪽으로 접수 통지가 도착했다. 담당 기관에서 정식으로 사건을 받아들였고, 재판 날짜는 보름 뒤로 잡혔다.그래서 지난 일주일 내내, 소은지는 집에 틀어박혀 이 지역의 혼인 관련 법령과 판례를 샅샅이 훑었다.그 사이, 엔데스 명우는 틈이 날 때마다 들이닥쳤다.하지만 올 때마다 소은지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마침 외출 길에 마주쳐도 얼음장 같은 태도로 단 한 뼘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일주일 동안 다섯 번을 왔지만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그리고 뒤이은 사흘 동안, 엔데스 명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잠잠해졌구나 싶던 참에 엔데스 명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은지의 세계에 끼어들었다.이수연이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쳤다.“정말로 변호사를 데려왔대요.”이수연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으로 얘기했다.소은지의 미간이 좁아졌다.“괜찮아요.” 변호사를 선임해도 상관없다.하지만 이어서 이수연이 변호사의 출신과 학교 시절의 수상 경력들을 줄줄이 읊자, 이번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빌라주 국제법학원.예전에 소은지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이자 마지막 커트라인에서 아깝게 낙방한 학교였다.그런 무뢰한이 그렇게 대단한 변호사를 데려오다니.“소, 소은지 씨...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이수연은 눈물을 훔치면서 얘기했다.지고 싶지 않았다.여기서 무너지면 삶은 더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이혼 결심을 굳게 한 지는 오래지만, 수년간의 학대가 남긴 두려움은 뼛속 깊이 심겨 있었다.정말로, 무서웠다.“이긴다고 했죠. 그 말,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빌라주 출신이든, 어떤 변호사든, 소은지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다.이만한 상대는 예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소은지는 매번, 물러서지 않고 버텨 냈다.“다만,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질 수 있어요.”소은지가 이수연을 보면서 얘기했다.상대 변호사가 양심적인 변호사라면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 테지만, 만약 돈에 눈이 먼 쪽이라면 재판
엔데스 명우가 돌아가고, 집안에 소은지 혼자만 남자 겨우 마음이 놓였다.문밖에 세워 두고 마주하지 않는 편을 택하긴 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해의 세월 동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의 세계에 남긴 트라우마는 너무 깊고 무거웠다는 것을.엔데스 명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뼛속 어딘가에서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그때의 악몽들이 틈만 나면 되살아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가슴 한편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오후.창밖에 눈이 내려 쌓이는 것을 보면서, 오늘은 바깥에 나갈 수 없겠다고 판단한 소은지는,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온라인으로 제출했다.감기 기운 때문인지, 이수연이 계속 마음을 놓지 못했고, 결국 오후가 되어 다시 찾아왔다.얼굴빛이 확연히 좋아진 걸 확인한 이수연이 말했다.“약은 제대로 챙겨 드셨네요.”“네. 신청은 전부 올려놨어요.”저쪽에서 답이 오면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터였다.신청이 접수됐다는 말을 듣자, 이수연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번졌다.“정말 다행이에요. 이날만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그전에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도 못 했다.그 지옥 같은 나날 속에서, 폭력 속에서 죽어 나갈 거라고 체념했던 순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운명을 받아들이려던 밤도 수없이 많았었다.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끝내 체념하지 못했다. 그래서 버텼고, 마침내 원하는 목표에 가까이 닿았다.곧 저 남자를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짙어졌다.이수연의 눈빛 속 희망이 더욱 짙어졌다.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소은지는 문득 파리에서의 지난날이 생각이 났다.그 시절 소은지도 지금의 이수연과 다르지 않았다.수차례 죽음을 떠올렸고, 그러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그런 자의 손에서 꺾이는 것만은 평생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길을 뚫고 나왔다.그렇기에 지금도 믿고 있었다.이수연 역시 해낼 수 있다고.“
소은지는 너무 차갑다.한때 소은지를 곁에 붙들어 보복하던 시절, 엔데스 명우가 봐 온 건 소은지의 차가운 자존심 정도였다.그런데 지금의 차가움은 도가 지나쳤다.“소은지.”엔데스 명우가 더욱 무거운 목소리로 소은지의 이름을 불렀다.그러자 소은지는 손목을 강제로 비틀어 빼냈다.눈동자는 한 점의 물결도 없이 투명하고 건조했다. 온기나 감정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말을 붙이려다 마주한 그 눈동자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그대로 삼켜졌다.정말이지, 너무 차가웠다.쾅.문이 눈앞에서 닫혔다.문 하나가 두 세계를 딱 가르는 듯했다.조금 떨어진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강혁의 가슴이, 바깥의 눈처럼 싸늘하게 식었다.눈송이가 흩날리며 엔데스 명우의 머리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게 영영 얼어버린 듯 차가웠다. “도련님.”강혁이 조심스레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눈치를 살폈다.소은지의 연이은 거절 앞에서, 엔데스 명우의 세계 또한 얼어붙어 가는 듯했다.그리고 이 순간 무언가가 선명해졌다.“강혁.”“예.”“지금... 소은지는 날 증오하고 있는 건가?”증오.엔데스 명우에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단어.예전에 소은지를 향해 퍼부은 보복도, 결국은 증오 때문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 증오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몰랐다.그런데 지금은...“일단 돌아가자.”눈이 더 세게 내렸다. 산길은 더 사나워지고, 시간이 갈수록 매서운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들 터였다.그 질문에 강혁은 뭐라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여자의 증오라는 건 한 번 시작되면 지워내기가 힘들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증오한다는 걸, 주위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다만, 증오하는 방식이 달랐다.소은지는 가장 차갑고 가장 고요한 차가운 침묵과 무시로 대응하고 있었다.지금의 소은지는 냉정함 그 자체였다.“말해.”강혁이 대답을 망설이자 엔데스 명우가 답을 재촉했다.“...”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강혁이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지금 소은지 씨 태
소은지의 핸드폰 화면에 이유영의 이름이 떴다.이유영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은지야.”“네가 해 준 밥이 먹고 싶어.”소은지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서운함이 묻어난 한마디였다.지금의 소은지가 이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상대는 이유영뿐이었다.파리에 있을 때도, 사람들이 권력 다툼으로 들끓던 순간에도 둘은 서로에 대한 신뢰만큼은 놓지 않았다.그리고 그 신뢰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전화기 너머의 이유영이 잠깐 멈칫했다.“감기 걸렸어!?”이유영은 목소리만으로도 소은지의 이상함을 단번에 알아챘다.“응.”먹먹한 목소리가 소은지의 우울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이유영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럼 내가 갈까? 옆에 있어 줄게.”“오지 마.”“내가 해준 밥 먹고 싶다며?”“그냥... 말해 본 거야. 네 목소리만 들어도 돼.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다시 떠올릴 수 있게.”“...”혼자가 아니라는 것.항상 곁에 있었다고 믿어 왔지만, 지금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유영의 가슴도 뭉근하게 저렸다.“넌 혼자가 아니야.”언제나, 단 한 번도.이유영은 비록 긴 세월 동안 강이한의 아내로 살았어도, 소은지만큼은 절대 혼자 두지 않았다.“응.”이유영의 단단한 확신이 전해지자,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혼자라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그 무서움을 다시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 세계에는 이유영이 있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소은지는 이번에는 문을 열러 가지 않았다. 방금 이수연이 다녀간 참이라 이수연이 돌아올 리 없었으니까 말이다.몇 분 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성급하게 바뀌었고, 남자의 분노가 함께 밀려왔다.“소은지, 안에 있는 거 알아!”말에서 위험한 협박이 묻어났다.소은지는 못 들은 척 계속 죽을 먹었다. 그저 미친놈을 만난 것처럼 엔데스 명우를 무시할 뿐이었다.문밖의 엔데스 명우가 다시 말했다.“안 열면 부순다!”흥분은 또다시 최고조로 치솟았다.문짝은 이미 군데군데 찍히고 패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