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강이한과의 전화를 끊은 이유영은 마치 얼음 저장고에 있는 것 같았다.머릿속에는 온통 강이한이 물어 본 ‘만약 소은지가 없었더라면 당신은 평생 먼저 나한테 보자는 얘기를 하지 않을 거야?’ 이 말만 떠올랐다.강이한의 말이 맞았다.소은지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평생 강이한을 다시 상대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이유영의 심리적인 문제를 만든 게 누군데?십 분 뒤, 강이한이 왔다.이시욱이 이유영을 모시러 올라왔다. 아까 그 유비서는 라벤더 사건의 영향을 받아 도통 이시욱을 들여보낼 엄두가 안 났다.“제발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저희 대표님은 그쪽을 절대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유 비서는 난감한 상황 때문에 거의 울 지경이었다.조민정 비서가 도와준 덕분에 겨우 붙잡은 직장인데 유 비서는 이 타이밍에 다시 이유영의 마지노선을 터치하고 싶지 않았다.이시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영이 걸어 나왔다.얼굴색이 별로 좋지 않은 이유영을 보고 유 비서는 이시욱 때문에 불쾌하신 줄 알고 말했다.“대표님, 이 사람이 계속 대표님을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저도…”“마저 일 보세요.”유 비서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은 차갑게 비서의 말을 끊었다. 이유영의 말은 유 비서에게 상이나 다름이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시욱은 이유영의 유니크한 안경을 힐끔 보았다.그러고는 차 키를 이유영에게 건넸다.“뭐에요?”“도련님 지금 술을 조금 드셨습니다.”그래서 지금 강이한이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이시욱은 당연히 함부로 낄 수가 없었다.이유영은 이마를 찌푸리며 결국은 차 키를 넘겨받았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이유영은 시각 효과가 선명하게 떨어진 것을 느꼈다. 2년 전 몸을 회복한 후, 이유영은 이런 지하 주차장에 오는 걸 제일 안 좋아했다.너무 어두웠다.지금 이유영의 삶에는 확실히 불편한 점들이 많았다. 너무 강한 불빛은 이유영의 시력에 상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아니면 우리 그냥 여기서 얘기해!”“싫어!”이유영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가슴은 벌렁벌렁했고 홧김은 온몸에서 불타올랐다. 진짜 소은지가 아니었다면 이유영이 이렇게 인내심 있게 강이한을 상대할 일이 전혀 없었다.차는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나오고서야 이유영은 밖에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심지어 비가 적지 않았다. 원래 시력이 안 좋은 이유영이 지금 이런 날씨에서 운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차는 아주 늦은 속도로 내 달렸다. 심지어 미등, 전조등까지 다 켰다.“나 속이 좀 불편한데 좀 더 빨리 가줘.”뒷좌석에 앉은 강이한은 이런 느릿느릿한 거북이 속도가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하지만 강이한의 속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술을 먹은 후라서 이유영의 운전은 그를 멀미 나게 했다.원래 표정이 안 좋은 이유영의 얼굴은 강이한의 불평불만을 듣고 더 안 좋아졌다.“그럼, 당신이 운전할래?”“당신 나랑 같이 콩밥 먹고 싶구나?”음주 운전해서 걸리면 엄청나게 처벌을 받아야 했다.이유영은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모든 집중력을 다 앞의 도로에 집중시켰다.비는 점점 더 세졌다.차 안의 내비게이션은 계속해서 앞쪽의 도로를 안내했고 와이퍼는 끊임없이 차창을 닦고 있었다.이유영은 바짝 긴장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특히 옆으로 차량이 ‘휭’ 하고 빠르게 지지 갈 때마다 이유영은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영의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이유영은 도원산 별장까지 어떻게 운전해 왔는지 모를 정도였다.차에서 내릴 때 그녀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오늘과 같은 날씨에 운전하는 게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심적 충격이 되었는지 안 봐도 뻔했다.그리고 이럴 때 면은 이유영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강이한의 별장은 독채였다. 다른 별장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테리어는 고풍스러웠고 좀 옛날 시대감이 있었다.
“내가 아주 미안해!”이 세 단어를 내뱉는 강이한의 말투는 아주 복잡했다.‘사과하는 건가?’이유영은 깜짝 놀라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강이한이 사과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이미 독단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강이한의 모든 말은 다 맞는 말이었고 맞든 틀리든 다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결국 이유영이 먼저 타협했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강이한에게 해장국을 끓여주었다.하지만 그녀의 타협은 강이한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서툴게 주방에서 분주한 이유영의 작은 뒷모습을 보고 속이 더 답답했다.‘결국 모든 것이 달라졌구나.’예전의 이유영은 주방에서 요리할 때 엄청 능숙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주방에 있는 이유영은 몹시 서툴렀다.심지어 물건을 찾느라고 서랍 문을 여는 소리가 쾅쾅 났다.그리고 강이한이 더 잘 알았다…! 지금의 이유영이 자기를 위해 주방에 들어간 건 더 이상 강이한 때문이 아니라 소은지 때문이라는 것을.‘지잉 지잉.’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강이한을 사색에서 빼냈다.이영이 해장국을 들고나왔을 때 마침 강이한이 전화를 받는 것을 보았다. 전화를 받는 순간, 이유영은 그 잠깐 사이 강이한의 입 모양에서 ‘지음’ 두 글자를 읽어냈다.이유영 입가의 쌀쌀함은 더 깊어졌다.전화 반대편에서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전화를 받은 강이한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리고 강이한은 전화에 대고 한마디 했다.“그래. 지금 바로 갈게.”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강이한의 눈에 들어온 건 멀리서 쌀쌀맞게 서있는 이유영의 얼굴이었다.그는 가슴이 바짝 조여들었다.하지만 강이한은 전화에서 한지음이 한 말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이유영에게 말을 건넸다.“나 지금 어디 좀 가야 하는데 당신이 운전 좀 해줘.”“당신을 한지음한테 보내달라고?”이유영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비록 이유영은 이제 이 남자랑 아무 사이가 아니지만, 그녀는 이렇게
“당신은 지금 은지 갖고 나를 협박하는 것밖에 못 하지?”강이한이 문 입구까지 걸어간 순간, 이유영은 몸을 돌렸다.그를 바라보는 이유영의 눈에는 온통 분노들로 가득 찼다.강이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나도 당신한테 그러고 싶지 않아. 가자!”그 순간, 이유영은 제자리에 선 채, 온몸은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분노는 완전히 이유영을 잡아먹었다.분할뿐만 아니라 또 내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강이한의 발걸음을 따라잡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비방물은 그나마 아까보다는 작아졌다.하지만 이유영에게 있어서는 똑같았다.“어디로 가면 돼?”아주 천천히 산길을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이유영이 물었다.“모리나 호텔로 가줘.”‘한지음은 아직도 모리나 호텔에 있었구나?’‘설마 한지음은 강이한이 데려온 게 아닌가?’‘강이한이 한지음을 데려온 거면 어떻게 그녀를 그곳에서 지내게 놔뒀지?’하지만 한지음 데려온 게 강이한이든 아니든 이제 다 이유영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도로에는 이유영의 차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유영의 운전속도는 여전히 느렸다.강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했다.“좀 더 빨리 가줘.”“늦다고 징징거릴 거면 당신이 운전하던지!”이유영의 말투는 여전히 안 좋았다.아무리 강이한이 지금 소은지를 두고 이유영을 협박하는 중이라고 해도 그의 무례한 요구에 그녀는 도무지 성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참자! 소은지를 찾을 때까지만 참자!’도시에 들어오자 정말 강이한의 말 대로 길에는 경찰들이 엄청 많았다. 아마 그저께 고속도로에서 일어나 사고 때문에 그런 것 같다.그리고 특히 이렇게 비가 크게 내리는 날이면 교통안전 검사가 엄격했다.그들의 차도 검사를 면할 수 없었다.“은지 지금 당신 손에 있는 거 맞아요?”소은지의 문제에 대해 이유영은 어떻게든 놓치지 않았다.술을 먹은 강이한이 어떻게든 빈틈을 보일 거라고 이유영은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강이한은 아주 총명하고 눈치가 빨랐다.
이 둘의 세상은 한참 전부터 이미 단순하지 않았다.소위 말하는 세상은 그대로인데 변한 건 사람이라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강이한은 자기의 삶이 있었고 이유영도 자기만의 인생 계획이 있었다.강이한은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나랑 한지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하!”이유영은 냉소를 지었다.강이한의 눈은 더욱 깊고 심각해졌다.그는 입술을 버금 버금하며 뭐라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 시각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전생에… 전생에서 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뭘 잃었는지 이유영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강이한이… 강이한이 뭐라고 이유영한테 말할 수 있을까?강이한은, 이유영이 전생의 고통을 끝내고 다시 이번 생에 와서 새로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강이한은 몰랐다.그는 전생과 이번 생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인생 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유영에게 어떻게 전생의 이유영과 한지음의 결말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한지음이 이유영 때문에 잃은 게 얼마나 많은지 이유영은 전혀 몰랐다.그리고 그 상황 속에 처했던 강이한은 또 이 모든 걸 목격하고도 그녀가 제멋대로 막 살게 놔둘 수는 없었다.강이한이 사색에 잠긴 사이, 차는 어느덧 모리나 호텔에 도착했다.“도착했어.”이유영은 쌀쌀맞게 얘기했다.강이한은 호텔 대문을 한번 보고는 이유영에게 말했다.“여기에서 나를 기다려.”“강이한 너 정말 제정신이야?”“…”“넌 지금 내가 네 기사를 할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오는 길 내내 참은 이유영은 결국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터졌다.강이한은 어리둥절했다.그리고 그제야 지금의 이유영은 확실히 예전과 신분이 달라졌다는 걸 인식했다.지금의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공손히 인사해야 하는 로열 글로벌의 대표였다.그런 위치에 있는 이유영이 매 순간 어떤 부담과 긴장감을 감당하고 있는지 강이한도 당연히 모를 리 없었다.“그럼, 당신 먼저 돌아가 봐. 내가 시간 날 때 당신 찾으러 갈게.”강이한은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이시욱은 당연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정말 지금의 이유영을 건방 하기 그지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아까 그 일을 시킨 뒤 또 특별히 이시욱한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시욱은 얘기를 꺼냈다.“사모님께서 오후에 떠나신 후 사람을 시켜서 도련님 차를 센 강으로 몰아넣었습니다.”강이한은 이 말을 듣고 순간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심지어 눈초리도 참지 못하고 움찔거렸다.아무리 강이한이 돈이 많고 호기로운 도련님이라고 해도 지금만큼은 속으로 이유영을 욕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이런 빌어먹을 여편네.’“사모님 지금 정말 한 성격 하시는 것 같습니다.”이시욱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그렇게 고가의 차를 정말 눈 깜짝 안 하고 바로 센 강에 버리다니. 참 어디서 난 호기로운 용기인지.’이시욱 등 사람들은 다 전부터 강이한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래서 당연히 예전의 이유영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역시, 사람이 신분이 달라지면 성격도 절대 달라진다. 예전의 다정한 강 씨 사모님은 이제 철저히 사라졌다.“그러게, 정말 성깔이 불같네.”강이한은 이렇게 한 마디만 남기고 차에 올랐다.이 말에는 차에 대한 안타까움이 조금 들어있었지만, 그보다 더 이유영에 대한 총애의 말투가 가득 찼다.…저녁 이유영이 퇴근하는 길에 조민정은 이유영이 운전했다는 것을 듣고 말했다.“전에 날씨 등 여러 조건이 좋을 때도 아가씨가 운전하면 사모님께서 많이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쭉 아가씨더러 운전하지 마시라고 하시는 겁니다!”“…”“사모님께서 오늘 이런 날씨에도 아가씨께서 운전하신 거 아시면 무조건 걱정을 엄청 많이 하실 겁니다!”조민정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얘기했다.그리고 조민정이 한 말들도 다 사실이었다. 이유영이 사고로 눈을 다친 후부터 아주 가끔 운전했다. 그것도 날씨 등 기타 조건이 아주 좋은 상황에만 운전했다.하지만 오늘 같은 날씨라면 절대 이유영을 운전석에 앉히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 쪽에서 정말 오늘의 일을 알게 된다
결국 거의 백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 이유영은 루이스를 한눈 보았다.“무슨 일 있으십니까?”“나 당신한테 시킬 일이 하나 있어요. 하지만 우리 외삼촌이 알게 해서는 안 돼요!”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루이스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컹했다.특히 이유영의 너무 엄숙한 얼굴을 보고 불안해졌다.“무슨 일입니까?”“연준 씨와 강이한 사이!”비록 지금 이유영은 소은지의 일에 엄청 마음이 급하지만 자기 주변의 이런 일들도 차근차근 알아내야 했다.서재에서 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이 있는 사진을 보고 비록 박연준이 외삼촌한테 설명을 해드렸지만, 외삼촌은 이유영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건 분명 그 설명을 안 믿으시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사진이 마침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이유영은 원래 조용하게 외부 사람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박연준의 이름을 듣자마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했다.그래서 지금 이유영은 하는 수 없이 이 일을 주변 사람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유영 곁의 사람들은 거의 다 외삼촌의 사람들이었다. 많은 경우, 이유영한테서 무슨 움직임이 있으면 외삼촌은 첫 번째로 바로 소식을 알곤 하였다.그래서 이유영은 처음 그 사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자기 곁의 사람에게 조사를 맡기지 않았다.“어떤 걸 알아보시라는 말씀이십니까?”“과거에 그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서.”“과거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루이스의 이 말은 이유영을 말문이 막히게 하였다.‘언제 적 과거일까?’시간이 일단 너무 오래 지난 후면은 많은 일들은 알아내기 정말 쉽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은 자기가 강이한이랑 함께 했던 그 십 년 동안에 강이한의 세상에는 박연준이 없었다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하지만 박연준과 강이한의 과거는 확실히 상당히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둘의 사이도 간단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은은하게 그걸 느끼고 있었다.박연준과 강이한의 사이가 밝혀지기만 한다면 이유영이 두
백산 별장에 돌아온 후, 임소미는 이유영에게 몸에 좋다는 보신탕을 끓여주었다. 이유영은 이런 보신탕을 보기만 해도 토나 올 정도로 많이 먹었다.하지만 외숙모의 관심과 걱정에 가득 찬 눈빛을 보고 이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여기 외숙모 댁에 들어온 후부터, 이유영은 거의 모든 것을 다 질리도록 먹었다. 예전에 좋아하던 음식들도 지금은 하도 많이 먹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특히 외숙모한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하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일단 외숙모가 이유영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언제든지 그 음식을 해서 먹인다.이미 먹기 싫어졌는데도 싫은 소리 꺼내지 못할 정도로 된다.“어때?”“맛있어요!”이 말을 하는 이유영은 양심에 찔렸다.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선명하게 외숙모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외숙모가 말을 꺼냈다.“유영이 네가 좋아하니 됐어. 이 국은 미용에도 좋아. 너 정말 여기 온 후로부터 피부도 아주 좋아졌어.”“당연하죠. 외숙모의 정성이 담겨있는데 당연히 좋아지죠.”“얘도 참, 입에 꿀을 발랐나!”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집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안경을 벗고 있는다.집안의 등은 다 부드러운 불빛이어서 그녀의 눈에 아무런 자극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유영도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저녁 식사가 끝났는데도 정국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이유영은 임소미를 보며 물었다.“외삼촌도 아주 바쁘신가 보네요.”요즈음, 외삼촌이 일찍 들어와 다 같이 식사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네 외삼촌 바빠. 신경 쓰지 마.”정국진의 바쁨에 대해 임소미는 이미 습관이 된 것 같았다.그래서 이 말을 듣고 이유영도 더 물어보기에 어떠했다.최근 파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유영은 하나둘씩 점점 뭐가 뭔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다른 한편, 모리나 호텔에서 유 아주머니는 전화를 한 통 받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지음한테 말했다.“주인님께서 오늘 아가씨 참 잘했다고 하십니다. 아주 만족하시답니다!”“그분을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