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산월의 어두운 불빛은 사람에게 야릇한 고용함을 안겨다 주었다.지잉 지잉.이유영은 핸드폰이 진동하여 전화번호를 힐끔 보니 박연준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이 남자!’이유영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이유영의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이때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순간 엔데스 명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엔데스 명우는 사랑이 없는 한 남자를 절대 함부로 건드리고 계산하지 말라고 했었다.그리고 예를 들어... 박연준이라고도 했다. 비록 엔데스 명우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지극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그녀를 향한 절절한 사랑이 보이지는 않았다.“저 지금 아래층에 있어요.”이유영은 멈칫하더니 바로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박연준은 검은색 코트를 입은 채 자기의 패기 넘치는 벤츠 G 클래스 옆에 서 있었다.사람이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준수해 보였다.“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이유영은 바로 외투를 챙겨 자신이 입고 있는 파자마 위에 걸치고는 슬리퍼를 신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박연준은 밖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거실에서 일을 보던 우지는 이유영을 보고 멈칫하더니 물었다.“아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저 안 나가요.”“아. 그럼?”“연준 씨가 와서, 볼일 보세요.”이유영의 말투는 아주 담담했다.지난번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핍박해 대 저녁에 차를 몰게 한 이후부터 저녁에 이유영이 외투를 입고 내려오는 것을 볼 때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일단 이유영이 저녁에 차를 몰기만 하면 그들은 무조건 임소미에게 한 수 들을 게 뻔했다.박연준이라는 말을 듣자, 우지도 그나마 한시름을 놓았다.이 몇 년간 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뜰하게 대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원래 두 사람은 결혼 얘기까지 나왔는데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서 두 사람이 그 이후로 조
이유영은 바로 조용히 박연준을 째려보았다.엔데스 명우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어서 지금 이유영과 외삼촌이 골머리를 세게 앓고 있는데 지금 박연준은 웃고 있었다.“당신 웃음이 나와...!”이 얘기가 나오면 화가 저절로 났다.원래, 외삼촌과 연을 끊으면 엔데스 명우가 자연히 어려움을 알고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가 물러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한 보 더 전진 한 걸 보니 이유영은 정말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박연준은 가리고 하얀 손가락으로 살랑살랑 이유영의 눈 주위를 어루만졌다.“걱정하지 마요. 그 사람 당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예요!”적어도 당장은 감히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그 사람이 절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만 지금 온 파리 사람들이 다 저랑 그 사람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어요.”이유영의 말투는 무거웠다.따지고 말하면 그녀와 정씨 집안이 엔데스 명우에게 한바탕 놀아난 셈이었다.원래 그들의 의식 속에 엔데스 명우라는 자는 이익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속셈에 넘어가지 않을 줄 생각도 못 했다.이렇게 되니 도저히 엔데스 명우의 속이 잘 보이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이 말은 이유영이 정말 화가 나서 한 말인지 아니면... 박연준이 들으라고 한 말인지 몰랐다.하지만 박연준은 이유영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녀에게 되물었다.“당신 이 눈, 지금쯤이면 수술해도 되지 않아요?”박연준은 차가운 손가락으로 이유영의 눈시울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이 말에 이유영은 순간 몸이 굳어져 버렸다!눈 얘기를 안 하면 모를까, 눈 얘기가 나오자 안 좋은 기억들이 다시 머릿속에 흘러넘쳤다.이유영은 자기의 두 눈이 어떻게 흐릿하게 되었는지 영원히 기억한다. 아직도... 강이한이 한지음의 두 눈은 곧 수술할 수 있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그리고 결국... 그의 선택은 여전히 한지음이었다.“네.”이유영은 살랑 대답하고는 더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이유영도 이 얘기를 계속
그리고 그 후, 박연준의 부드러운 말투는 따라서 엄숙해졌다.“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은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똑같은 말을 전에 강이한도 말한 적이 한번이 아니었다.지금 이유영은 마음속으로 갑자기 한 개 의문이 떠올랐다.‘도대체 누가 좋은 사람인데? 누구도... 좋은 사람이 아니야!’그랬다. 지금 이유영의 느낀 점이 그랬다.강이한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엔데스 명우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그리고 박연준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박연준이 간 후, 이유영의 마음은 박연준이 내던진 말 때문에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이 어두운 밤 속에서 내내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한 시간 후, 이유영은 백산 별장에 나타났다.지금은 새벽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서재에서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기사님이 바래다 주신 거야?”말투는 별로 상냥하지 않았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강산 별장에서 떠난 이후, 이유영이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온 적이 엄청 드물었다.‘오늘 지금 뭐 하는 거지!?’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강이한, 지금 서주 쪽에 있대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정국진의 눈시울이 진동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연준 씨도 그쪽으로 갈 거래요!”“뭐라고?”정국진의 목소리는 갑자기 높아졌다. 그리고 이유영을 바라볼 때 동공도 조금 축소되어 있었다.이런 정국진의 반응을 보자 이유영도 이 속에 무조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지금 이 시각, 정국진의 눈 밑은 엄숙함으로 가득 찼다.“외삼촌, 서주 쪽이 우리 로열 글로벌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없어.”이유영의 물음이 끝나자, 정국진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하지만 정국진의 대답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이유영을 바라보는 정국진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박연준이 너에게 알려 준 거야?”“네. 한 시간 전에 연준 씨가 반산월로 절 찾아왔어요. 자기가 한동안
틀림없는 건 정국진과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만남에서 얘기가 잘 안되었다는 것이다.엔데스 명우, 현재 엔데스 가문을 관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정국진이 그 쪽에게 뭘 준다고 해도 그 녀석은 절대 응답하지 않을 것이었다.서주 쪽의 큰일도 이제 곧이니 정국진은 반드시 가봐야 했다.“외삼촌...!”외삼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자, 이유영은 파리의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이 한 발짝 한 발짝 쪼여올 때, 외삼촌도 서주로 가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은 이유영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그리고!”이유영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정국진은 그녀의 말을 끊고는 계속해서 말했다.“나, 박연준, 강이한의 행방에 관해서 얘기하지 마. 특히 여섯째 도련님께 알리면 안 돼!”“...”이유영의 안색은 확 변했다!‘그래서 여섯째 도련님도 서주 쪽이랑 연관이 있다고?’‘그럼, 지금 내가 마주해야 할 게 도대체 어떤 싸움인 거야!?’“유영아, 꼭 기억해. 넌 지금 자기 자신을 꼭 지켜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섯째 도련님과 서로 견제해야 해!”“...”“설사 소은지가 없었더라고 해도 넌 이 싸움을 맞이했을 거야!”이유영의 심장은 순간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다.‘은지가 없었더라도 여섯째 도련님과 마주하게 되었을 거라고!?’원래 이 일은 소은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소은지가... 이유영더러 미리 여섯째 도련님과 상대하게 만든 것뿐이었다.지금 엄숙한 정국진을 마주한 이유영은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파리로 오기 전에 감당했던 그런 비즈니스 특훈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것들은 그녀에게 어렵긴 했다!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기억했어?”“...”“꼭 그 사람에게 박연준이랑 우리가 서주로 갔다는 것을 들키면 안 돼.”‘여섯째 도련님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정국진의 엄숙한 눈빛을 보며 이유영은 그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이 순간
떠났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났다!이날 밤 이유영은 반산월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날이 밝아지면 자신이 직면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말할 것도 없고....박연준과 정국진은 항상 파리 안에 있어서 하루, 이틀, 삼일... 정도는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관심을 보이진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날이 길어지면?특히 얼마 전에 방금 정국진이랑 인연을 끊겠다고 한 조카가 갑자기 로열 글로벌로 돌아간다면 또 어떤 풍랑이 일까?‘서주... 도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그리고 또 이유영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일이 이 지경까지 된 이상, 이유영은 자기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서 이 일에 휘말려 든 사람이라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다.어제저녁에 박연준과 당장에서 얼굴을 붉히지 않은 건 그저 표면상의 우습고 가여운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그 당시 강이한이 이유영과 만났을 때, 강이한이 목적을 갖고 이유영에게 접근했는지 이유영은 모른다!하지만 박연준은 그녀더러 그 도리를 깊게 깨닫게 하였다. 세상에는 절대 이유 없이 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청하시에서 매번 이유영을 곤경 속에서 구해낸 것도 아마 오래된 계획성 접근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이렇게 생각하자 이유영은 갑자기 크게 깨닫기보다는 그저 덤덤하게... 그놈들 속에는 정말 좋은 놈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유영은 조금 어지러웠다!우지랑 우현은 이런 이유영을 보고 걱정이 되어 물었다.“아가씨,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습니까!?”“잘 못 잤어요.”이유영은 직접적으로 대답했다.하룻밤 사이에 파리에는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그리고 앞으로 잘 못 대응했다가는 어떤 큰 사단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이런 시기에 이유영이 어떻게 잠이 오겠는가?어제저녁 내내, 이유영은 오늘부터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를 궁리 중이었다.“사모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꼭 휴식을 잘 취하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봐요?”이유영이 말을 마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엔데스 명우는 말이 없었으며 그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유영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이 개자식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절대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특히 엔데스 명우의 매 같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유영은... 막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주 쪽에 도대체 어떤 난리가 났는지를 막론하고 이유영은 지금 정국진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현재의 엔데스 명우는 정말 무섭기 그지없었다!“봐요. 당신도 말하고는 자기 스스로 마음에 찔리잖아요!”엔데스 명우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경망스러움이 담겨있었다“...”이유영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았다!엔데스 명우의 이 말은 정말 이유영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이런 사람은 정말 무서운 정도뿐이 아니었다!소은지가 그의 곁에 있었을 동안에 도대체 어떤 것을 감당했을지 상상조차 안 되었다. 수단을 막론하고 이렇게 언어로 하는 공격도 충분히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특히 그 변태스러운 번호, 이유영은... 그런 것은 엔데스 명우처럼 변태스러운 사람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그토록 모욕적이고 인간미가 없는 짓! 사람의 존엄성을 바닥에 놓고 마구 비비는 그런 짓!“내가 찔릴 게 뭐가 있어요.”이유영은 다시 한번 입을 열면서 화가 난 말투로 답장했다.“끝까지 고집이네요!”“당신...”“가볼게요, 차라리 잘 됐어요!”이유영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엔데스 명우는 계속해서 그윽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말에 이유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어서 엔데스 명우가 무겁고 심드렁하게 말했다.“3일 뒤가 길일이던데 우리 일단 혼인신고부터 할까요?”“...”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머리가 띵해 나는 것 같았다!어젯밤 이유영은 이런 경우를 예상했었다!‘외삼촌이 안 계시니 이때 엔데스 명우가 기회를 봐서 결혼을 강요하지
더욱 열 받는 건 엔데스 명우가 이유영보고 카리스마 없게 생겼다고 한 것이었다!‘고작 1.46m인 키에 카리스마가 있으면 이상하지!’지잉 지잉.엔데스 명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두 눈에서 불을 내뿜고 있는 이유영을 한 눈 보고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말해!”한 단어였지만 차갑기 그지없었다.전화 반대편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다음 순간... 엔데스 명우의 별로 안 좋은 안색은 순간 어두워졌다.아까까지 이유영을 놀리면서 올라갔던 입꼬리도 어느새 내려졌으며 웃음기도 사라지고 없었다.이유영은 싸늘한 그의 눈빛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 후 엔데스 명우는 핸드폰에 대고 정색하며 말했다.“당장... 가서 잡아 와!”글자 하나하나에 다 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말은 핸드폰에 대고 한 것이었지만 엔데스 명우의 매서운 눈빛은 이유영의 몸에 떨어졌다.이유영은 순간 그가 잡아 오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그녀의 가슴은...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라왔다.엔데스 명우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눈앞의 사람에게 질문했다.“당신 누구를 잡아 오라는 거예요?”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의 몸에는 온통 왕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에 이유영은 가슴이 철렁하였다.“당신도 알고 있었죠? 그렇죠?”입을 열고 묻는 엔데스 명우의 말에는 질문이 가득했다.“뭘 알아요?”“그 여자가 임신했다는 걸!”“...”심장이 목청까지 올라온 이유영은 엔데스 명우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살짝 떨었다.‘그러니까 아까 전화에 대고 잡아 오라고 한 사람이 은지가 맞는 거네!? 지금 이 사람이 은지를 잡아 오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입술을 꾹 오므린 채,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순간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소은지가 일단 잡혀 오기만 하면 번호로 능욕을 당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영이 제일 잘 알았다.그리고 소은
“...”이유영은 침묵을 지켰다.이 시기에 엔데스 명우가 강세로 결혼을 강요할 게 분명했다.엔데스 가문의 상속자에 관한 후계 작업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리고 정씨 가문은... 틀림없이 엔데스 명우의 키 카드였다!근데 그의 손에는 정씨 가문 말고도 다른 카드들이 있을 게 뻔했다.하지만 정씨 집안과의 인연이 시작된 이상, 엔데스 명우는 그걸 엔데스 가문의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그래서 그는 이유영을 손에 꽉 잡고 있어야지 마음이 든든했다.이유영은 어젯밤 외삼촌의 당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 문제에 직면할지 몰랐다.이유영도 알고 있다...엔데스 명우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일단 그와의 혼인을 승낙하면, 그럼 진정한 번거로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게다가 소은지...두 사람의 날카로운 눈빛은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대치하고 있었다.갑자기 집사가 들어오면서 이 정적을 깨뜨렸다.“아가씨.”이 한마디가 이유영과 엔데스 명우의 대치를 깨버렸다.엔데스 명우의 미간에는 불쾌한 기운이 서렸다. 다른 한편 이유영은 집사를 바라보았다.“나염이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이유영은 엔데스 명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피우면서 박연준의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저 어깨를 들썩이었다.하지만, 이때 이유영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젯밤의 부드러운 박연준이 아니라 오히려... 그날 공항에서 당한 일이었다.“거실에서 좀 기다리라고 하세요.”“네.”집사가 나간 후, 정자에 다시 이유영과 엔데스 명우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남자는 손에 든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윽한 말투로 말했다.“유영아, 당신도 박연준, 이 사람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을 거예요.”‘너희들 다 개자식이잖아.’이때 이유영은 정말 이 말을 냅다 엔데스 명우에게 던지고 싶었다.하지만 이유영 맞은 쪽에 앉은 엔데스 명우는 말이 없는 그녀를 보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당신 외삼촌하고 박연준 다 서주로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