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은 집사를 보면서 말했다.“가지. 얼른 준비해.”“박연준.”이유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원래 두통이 있었던 이유영은 머리가 더욱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일단 핸드폰을 이리 줘.”박연준의 모습을 본 이유영은 장혜주가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아까 전화가 장혜주였나...?’문기원이 떠난 후 박연준은 더욱 이상해졌다.이 사건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장혜주는 확실히 실력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가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서 지금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인지 알게 되었다.여진우 곁의 사람들을 보면 다 알 수 있었다.“알프산에서 돌아오면 줄게.”“너...”이유영은 화가 나서 박연준의 말을 듣고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결국 박연준은 빠르게 이유영을 데리고 헬리콥터에 올라탔다.지면의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이 말했다.“이렇게 하면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그들이 이렇게 나올수록 이유영은 이 사건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정씨 가문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박연준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난 널 막고 싶지 않아.”“하.”이유영이 차갑게 웃었다.지금 이 상황을 보면서도 막지 않는다고? 어느새 주변은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이유영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얼마나 가 있을 건데.”“유영아.”“알프산! 얼마나 가 있을 거냐고.”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박연준은 이유영을 데리고 알프산에 가서 여행을 한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한 달, 어때?”‘한 달?’그건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면서 비웃었다.“정말 나랑 알프산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가능한지는 시도해보면 알지.”“...”이제는 이유영이 점점 화가 날 정도였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박연준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얼굴을 마
“박연준 님이 사모님을 데리고 갔습니다.”아주 진지한 말투였다. 백남 별장으로 오는 길,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수도 없이 많은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그런데 박연준이 데리고 간 것이라니.강이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장혜주도 똑같은 정보를 얻었다. 그녀도 강이한처럼 돌아오는 길에 이유영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강이한과 똑같았다.강이한의 차 옆을 지나칠 때, 장혜주가 강이한을 보고 물었다.“반응이 과했다니까요. 이유영 씨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세요.”그 말을 마친 후 장혜주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강이한과 이시욱은 차에 멍하니 앉아있었다.장혜주는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서주는 이제 끝장이다.하지만 반응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강이한은 이시욱을 보더니 얘기했다.“장혜주가 쉽지 않은 허들이 되겠어.”그 의미심장한 말에 이시욱이 입을 다물었다. 이시욱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리고 갔다.강이한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어디로 갔는지 알아?”박연준은 이런 방식으로 이유영이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자기 시야를 벗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험한 본능이 자꾸만 깨어났다.“숨기고 있습니다.”이시욱이 대답했다. 그 말인즉슨 아무도 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리고 어디를 간 것인지 모른다는 뜻이다.“...”강이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정말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다른 한편.파리에서 유일하게 안온해 보이는 것은 정국진이었다.서주는 혼란스럽지만 정국진은 저번에 서주로 가서 정씨 가문을 완벽하게 떼어내고 왔으니까 말이다.여진우는 로열 글로벌 그룹의 일에 착수하였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유영이다.하지만 감정 때문에 생긴 일은 처리하기 가장 어려운 일이다.지금 임소미와 정국진이 이유영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소월이를 잘 돌보는 것이다.하지만 강이한은 쉬
임소미는 원래도 화가 났는데 정국진의 말을 듣고 강이한이 그런 수법으로 이유영과의 관계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자 더더욱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미친 거 아니에요? 강이한 옆에는 신씨 가문과 이온유도 있잖아요!”그랬다. 이온유.이유영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이유영의 역린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소월이를 이용해서 이유영을 협박하려고 하다니. 완전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그만큼 조급한 모양이죠.”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강이한은 확실히 조급했다.이유영은 박연준과 함께 서주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박연준이 두 사람이 약혼 관계라는 것을 발표했으니 강이한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이유영은 오로지 강이한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의 이유영은 그저 이유영이다. 그 누구도 그녀를 이용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었다.그래서 강이한은 더더욱 조급해졌다.“지금 조급해해서 뭐 한대요? 예전에는 뭐하고 이제 와서 급해 한대요?”“...”“한지음 때는 넘어간다고 해도 이온유 때는요? 유영이가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임소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예전의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이온유는? 사람들은 그 점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고...”정국진이 한숨을 내쉬었다.“됐어요, 그만 얘기해요.”자기 아내가 아이들 때문에 심란해지는 것을 본 그는 마음이 아팠다.요즘 들어 임소미는 정국진의 보호 아래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아이들 때문에 신경 써야 한다니.“나는 유영이가 영원히 저 자식을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남자와 여자는 생각하는 방식이 현저히 다르다. 정국진은 그냥 이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임소미는 강이한이 한 짓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소월이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임소미는 이유영의 엄마로서 강이한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반산월
“당신...”“지금부터 본가에서 나올 때까지, 이 거리에 익숙해지는 겁니다, 알겠어요?”“...”‘이게 무슨 뜻이지? 오늘 밤에 스킨십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그 생각에 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왜요?”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인 줄 알고 부드럽게 얘기했다.뜨거운 숨이 소은지의 목에 닿았다. 소은지는 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걱정하지 마요.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요.”“그래요, 믿을게요.”“...”소은지는 또다시 설레었다.아무리 강한 여자라고 해도 이런 남자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어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두 사람의 사이가 약간 벌어지고 난 후, 소은지는 멍하니 엔데스 현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곧장 옆에 있는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코트를 벗고 정장 세트를 맞춰서 입었다.“...”소은지는 코피가 터질 것만 같았다.“밖에서 기다릴게요.”“여기서 기다려요.”“그, 그건...”소은지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 아니었다. 변호사로서 말을 논리적으로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엔데스 현우 앞에서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남자가...’“본가의 사람이 있으니 지금부터 연기해야 해요.”‘연기라니? 무슨 연기?’소은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엔데스 현우는 옷을 다 갈아입었다.그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소은지의 허리를 확 감아 안았다. 소은지는 처음 느껴보는 힘과 접촉에 그대로 굳어버렸다.“가야 해요.”귓가에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다.엔데스 현우는 정말 요물이 따로 없었다.사람들은 엔데스 현우와 소은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순간 놀랐다.모든 여자들이 소은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소은지는 전에 갑자기 이곳의 사모님이 되었다. 게다가 엔데스 명우와 얽히고설킨 사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소은지는 결국 이곳의 사모님이 되었다. 그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보면서 얘기했다.“가문의 연회예요.”‘가문 연회?’“엔데스 가문의 연회는 보통 반년에 한 번 열려요. 그래서 전에 안 데리고 간 거예요.”엔데스 현우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전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주었다.그러자 소은지는 더욱 멍해져서 약간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사실 이런 건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당신은 지금 반산월의 사모님이에요. 엔데스 가문의 사모님이기도 하고요.”“...”소은지는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그녀는 한 번도 엔데스 가문의 사모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전에 엔데스 명우의 곁에서 수많은 치욕을 견뎌왔다.가능하다면 엔데스 가문과 연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전에는 설선비 때문에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의 사이가 아주 복잡했다. 지금은 설유나의 원한까지 더해져 엔데스 명우와는 철저히 원수가 되어버렸다.“내가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소은지는 엔데스 현우를 보면서 물었다.“없어요.”‘없, 없다고?’소은지는 그제야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본가에 처음 가는 건데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나요?”“괜찮아요.”‘이것도 괜찮다고?’소은지는 가족이 없었기에 어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웃어른을 뵈러 가는 건데도 괜찮아요?”“네.”소은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준비하려고 해도 늦었다. 손등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당신이 이렇게 긴장할 때가 있군요.”마치 소은지는 영원히 긴장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했다.그녀가 말을 하기 전에 엔데스 현우가 얘기했다.“당신이 변론하는 모습을 봤었어요.”“...”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얼굴을 확 붉혔다. 엔데스 현우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논리가 정연하고 일리가 있는 게, 전혀 긴장해 보이지 않던데요.”“달라요!”소은지는 약간 부자연스럽게 얘기했다.
10년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만 박연준은... 서주는 기회다.박연준은 본인이 이유영에게 그 사건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유영에게 완전히 빠졌다는 것을.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저 예전의 그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가.“이온유의 병, 너랑 관련 있는 거야?”이유영이 차갑게 물었다. 박연준이 뭘 해도 이유영은 수그러지지 않을 것이다.“유영아!”“소월이랑 이온유, 그것도 네가 설계한 거야?”“...”“그런 거야?!”박연준은 차마 맞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박연준은 그녀가 뭘 가장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 그러기에 이유영과 강이한을 갈라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결국 박연준의 목표는 달성했다.그리고 총명한 이유영은 10년 전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박연준을 떠올리게 되었다.“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나랑 상관없어. 그때의 난 목표를 이뤘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우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이유영이 박연준이 소월이가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박연준은 강이한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래.”이온유가 차갑게 얘기했다.“이온유는 이미 퇴원했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았다.“그 애가 네 곁에 있을 때, 행복했지?”박연준은 그 판을 깔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그 말을 들은 박연준은 멈칫했다.이유영과 강이한을 보면서, 박연준은 이유영이 이온유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하긴, 한지음의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박연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난 그 아이를 본 적도 없어.”“그래?”“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거든.”“...”박연준은 아주 교활한 사
파리.엔데스산. 이곳의 모든 산맥은 엔데스 가문의 소유였다.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채 같은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건축물들이 이뤄낸 장대한 풍경은 압도적이었다.소은지는 잠시 넋을 잃었다.여행을 좋아해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한눈에 한 가문의 역사와 문화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처음이었다.엔데스 가문. 파리에서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것들로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직접 마주하고 있었다.“가죠.”남자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아끌며 안쪽으로 이끌었다.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발걸음이 자꾸만 흔들렸다.만약 엔데스 현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평소에는 어디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만만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왠지 그의 옆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지만, 그 속엔 서늘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소은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솔직히 말했다. “엔데스 가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엔데스 가문?”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에 대해 떠올랐다. 최근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 형제 사이의 긴장감을 통해, 이 가문에서 후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외관만 봐도 찬란함이 드러나는 이 집안은 말 그대로 위엄이 넘쳤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데요?”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은지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들었던 소문이 있어요.” “말씀해 보시죠.” “듣기로는, 엔데스 가문에서 후계자가 확정되면 나머지 후보자들은 해외로 이주해야 한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엔데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그녀는 침묵했다.
여자가 말을 하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눈으로 소은지를 꼼꼼히 훑었다.이 광경을 본 소은지는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곧게 세웠다."이쪽은 큰형수님이십니다."엔데스 현우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소은지는 곧바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흥."여자는 낮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친절함보다 미묘한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여자는 소은지 앞에 멈춰 서서 위아래로 소은지를 살펴보더니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는 다른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였다."막내가 당신을 데려올 거라고는 말을 안 했네요. 선물을 준비 못 했으니 이거 받아요.”말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소은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소은지는 놀라서 숨을 쉬지 못했다.여자는 자신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소은지의 손목에 끼워 넣었다.팔찌를 끼우는 순간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그녀의 작은 반응은 주위의 공기를 한층 묘하게 만들었다."어머, 꽤 예민하네?"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소은지에게로 쏠려 있었고, 그 시선들은 더 이상한 느낌을 자아냈다.특히 한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청초하게 생긴 여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그 시선은 소은지가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그리고 그 적대감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렬했다.소은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엔데스 현우와 이 가문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이는 분위기였지만,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복잡했다.소은지가 이 상황을 보며 느낀 첫인상이었다.시선을 엔데스 현우 쪽으로 돌렸다. 엔데스 현우의 눈빛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위험하게 느껴졌다.그런 모습을 본 소은지는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