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의 말처럼, 강이한 쪽은 지금 신씨 가문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서재 안, 어두운 공간에서 강이한은 한 대씩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이시욱은 강이한과 가까운 곳에서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흐릿하게 보였지만 심각함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방금 전, 이시욱은 이유영과 박연준이 이미 서주에서 떠났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보고를 했다."행방불명." 강이한은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며, 목소리에 무게를 실었다. 그날 밤, 장혜주가 사건을 알아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은 즉시 그곳으로 갔지만 결국 한 걸음 늦었다. 장혜주가 도착하기 전에 박연준은 이미 이유영을 데리고 떠났다.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연준이 일주일 내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걸까? 강이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청하와 파리에서의 일이 그렇긴 했지만, 그때는 그와 정국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 “혹시, 박연준 님이 장혜주가 소식을 미리 이유영 씨한테 알려줬을까 봐 걱정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이시욱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이한 주변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영과 박연준이 함께 할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실감했다. 강이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서주에서 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리고 떠날 수 있다는 건,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핸드폰에서 박연준의 번호가 계속 깜박였고, 마침내 전화 건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왜, 참을 수 없었나?” “박연준,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야?” 강이한은 한 마디 한 마디에 억제된 분노를 담았다. 박연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뭘 한다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 이유영은 아무 죄가 없잖아!” 강이한은 진중하게 말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너...!" "넌 못 할 거야.""이유영을 데려와!"강이한은 이를 꽉 깨물고 얘기했다.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뚝’하는 통화 종결음이었다. 박연준은 그의 전화를 단번에 끊어버렸다.서재의 공기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욱 냉랭해졌다.강이한은 연달아 담배를 피워댔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옆에 있던 이시욱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이제 어떻게 할까요?"조용한 서재 안에서, 방금 전의 전화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시욱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이미 오래전부터 박연준과 강이한은 갈등이 깊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폭발하고 있었다.서류든, 사람이든.서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이제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강이한은 찌푸린 이마를 주무르며 말했다."이유영을 빨리 찾아야 해."이유영의 이름을 부르는 강이한의 목소리에서는 무력감이 느껴졌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그녀를 이 진흙탕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증오 때문에 말이다."알겠습니다."이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며칠 동안 이유영을 찾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박연준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이시욱이 나가고, 서재에 혼자 남은 강이한은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왜 결국 이유영을 이런 진흙탕으로 끌어들였을까?분명 이유영의 증오 때문이었다.하지만 그 증오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한편 알프산.파리와 서주에서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와중에도, 이유영은 박연준의 곁에서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알프산은 매우 추웠다.박연준은 직접 이유영에게 두꺼운 옷을 입혀 무장시켰다. 그런 그의 세심한 행동과 부드러운 눈빛은 쉽게 여자의 마음을 흔들 만한 것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손길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음, 이제 출발해도 되겠다."그녀의 옷
이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춥거든."박연준이 준비한 건 최고였다.펭귄처럼 둥글둥글해져서 웃기긴 했지만 춥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박연준은 그녀를 보며 살짝 웃었다.알프산에는 유명한 스키장이 있어서 스키를 타러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박연준은 헬리콥터를 타고 이유영과 함께 스키장으로 향했다.헬리콥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유영이 말했다."이게 너희들이 살던 세상이구나."박연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순간 멈칫했다.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살짝 더 꽉 쥐며 말했다."유영아, 우리 약속했잖아. 이번 한 달 동안은 과거 얘기 안 꺼내기로.""근데, 넌 지금 과거에서 벗어나 있긴 해?"이유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묻고, 박연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박연준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그 여자는 아직도 네 마음속에서 중요한 사람이잖아."이유영의 물음에 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잡을 뿐이었다.촉촉히 젖어있는 이유영을 보면서 박연준은 약간 동요한 듯했다. 그리고 그런 박연준의 변화를 이유영은 똑똑히 목격하게 되었다.이유영은 변화에 예민한 사람이다.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의 원한을 왜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는 것일까.분명 그 안에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이한은 한 번도 박연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한 적이 없었고 박연준 역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서주에서 급하게 그녀를 데리고 떠나온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장혜주가 그 사건에 대해서 알아내서 이유영에게 알려줄까 봐 걱정되었을 것이다.“유영아!”“무슨 원한인지는 몰라도 너와 강이한 사이의 원한이면 나한테 알려줘도 되는 거 아니야?”굳이 이유영이 조사해야 할 정도라면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은 뻔했다. 그때의 흔적들도 다 깔끔히 처리했을 것이다.그렇다면... 이유영은 그들의 원한이 시작된 계기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인 것인지.
불안함에 박연준의 목젖이 꿈틀거렸다.너무 평온했다.이유영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박연준은 평온한 이유영의 옆모습을 보며 가슴이 더욱 답답해져 갔다. "유영아.""안 되는 거야?"이유영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오히려 박연준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의 눈빛은 마치 차가운 칼날 같았다.박연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연서... 라고 해.""연서, 참 좋은 이름이네."하지만 그 이름은 이유영의 신경을 건드렸다.박연준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 순간에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결국,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던졌다."유영아, 감정 문제에서는 너무 총명하면 좋지 않아. 적당히 멍청해야 해."좋지 않다고?이유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았다.그녀의 냉소는 박연준의 가슴을 더욱 조여왔다....서주.강이한은 이유영을 찾느라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박연준이 갔을 법한 곳은 전부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결국 그는 박연준이 이유영과 함께 알프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려고 했다.그러나 이시욱이 말했다."이미 돌아오는 중입니다."강이한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움찔하며 물었다."장혜주는 지금 어디에 있어?"그래, 장혜주.이유영이 돌아오면, 장혜주는 기어코 이 소식을 그녀에게 전달할 게 분명했다.이시욱은 말했다."사실 여진우 씨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결국 이 일은 숨길 수 없는 문제였다. 강이한은 며칠 동안 초조함에 시달리며 정신이 망가져갔다. 이시욱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려갔을 때부터, 그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그리고 이제야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금…강이한은 돌아온 이유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며, 몇 번이나 깊은숨을 들이쉬었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비행기 안.이유영은 창가에 앉아 조용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박연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가려고
진짜라고?박연준이 강이한을 위해 입 밖으로 꺼낸 그 두 글자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웃었다.그 웃음은 차갑고, 동시에 비웃음에 가까웠다.“너희가 내게 한 것 중에, 대체 어떤 것들이 진심이었는데?”진심?대체 진심이란 게 뭔데?거짓말을 오래 하면 자신조차 그걸 믿게 된다더니.박연준과 강이한이 딱 그 꼴이다.진심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너희 셋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던 거야?”“...”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갑고 날카로워졌다.박연준은 말을 잃은 채 침묵했다.'어떤 관계였냐'는 물음에, 그의 눈에 깊은 고통이 스쳤다.그러나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됐어. 말하지 마. 내가 하나씩 전부 밝혀낼 거니까.”반복되는 그녀의 말 속엔 증오와 단호함이 느껴졌다.듣는 이의 심장을 옥죄는 그런 말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엔 공허함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그녀는 정말… 박연준과 강이한이 아무리 서로를 증오하는 원수라고 해도, 같이 힘을 합쳐 이유영에게 그 일을 숨기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로를 협박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지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아무리 서로를 증오해도 그 사건만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주.결국 이유영은 서주로 돌아왔다.박연준은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그 순간, 그의 눈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이유영은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잡아채 갔다.“...”이유영은 그의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바로 장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울리는 사이,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장혜주는 지금 서주에 없어.”“네 정보는 참 빠르네.”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언제부터였을까.그녀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항상 그의 귀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전화가 연결되었다.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것은 장혜주의 공손한 목소리였다.“무
묵직한 힘이 이유영을 짓눌렀다. 바로 그때 박연준은 확실히 이유영의 몸에서 나는 온도가 너무나도 차갑다는 걸 느꼈고 그 한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온도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기운까지도 싸늘했다.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완전히 남처럼 멀어진 느낌이었다.이런 거리감은 박연준이 예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멀었고 그녀는 이제 영영 멀어졌다. 이런 기분은 박연준에게 정말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강이한과 어떤 원한이 있어도 연서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10년의 복수였다.이 복수가 언제부터 달라졌는지 박연준도 알 수 없었다. 원래는 계획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유영이 가장 행복할 때 강이한에게 결정타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의 세계에 한지음이란 예상치 못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들의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유영이 그 감정 속에서 괴로워하는 걸 보며 원래 계획도 변해버렸다. 이유영의 몸 안에서는 마치 사나운 사자가 날뛰는 것처럼 그녀의 신경이 완전히 곤두섰다. 차갑게 남자의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 일은 이미 다 지나갔고 그 사람은 이제 많이 달라졌어.” “다 그 여자 때문이야.” 박연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이 싸늘하게 자르듯 말했다. 모든 게 그 사람으로 인해 시작됐다.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과의 추억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박연준이 그녀에게 했던 일들도. 청하에서 남자는 늘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강이한과는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토록 좋았던 감정도 결국 한지음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가 사랑했던 건 결국 그녀가 아니었던 거다. 그저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바라본 거였고 그런 감정은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다. 박연준도 그녀의 이 얼굴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유영 씨.”이유영의 이런 싸늘한 말투에 박연준의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 그와 강이한 모두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모든 걸 알게 되면
한지음의 딸과 자기 딸 사이에서도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곧바로 한지음의 딸을 선택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아닌 건 영원히 아닌 거였다. 그래서 선택해야만 할 때도 주저 없이 바로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을 안은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유영 씨, 그게 아니라 사실은.”“자신을 위한 변명인지 아니면 강이한 씨를 위한 변명인지 궁금해. 두 분의 관계가 정말 특별한 것같아.” 남자의 말은 다시 이유영의 날카로운 비아냥에 끊겼다. 강이한을 위해 변명한다고? 그래 지금 박연준이 하는 이런 행동들이 이유영 눈에는 전부 강이한을 위한 변명으로 보였다.겉으로는 멀어진 것 같아도 중요한 순간에는 서로를 위해서였다 “유영 씨.”“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됐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어?” “당신!”“당연한 일이지. 연서는 절대 용납 못 할 존재였으니까.” 이유영이 살기등등하게 박연준을 쳐다봤다. 박연준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이유영의 원래도 표독한 말투가 더욱 독해졌다. “잘 죽었어.” “유영 씨.”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이유영이 내뱉었다. “죽어 마땅해.”남자의 말투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자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연서가 과연 특별한 존재였나 보다. 박연준은 그 자료에 얼마나 자세한 내용이 담겼는지 몰랐지만 이유영이 30분이나 볼 정도면 분명 그 안에서 이유영은 알아야 할 모든 걸 알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연서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이 세월 동안 박연준과 강이한의 세계에서 말만 해도 가시처럼 아픈 존재였다.박연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자 이런 모습을 보며 이유영의 조소와 광기는 점점 더 강해졌다. 박연준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무거운 기색이 눈에 비치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의 폰이 울렸다. 임소미한테서 전화가 왔다.연거푸 깊은숨을 쉰 다음에야 이유영은 답답한 가슴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엄마.” “
박연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러니까 그녀가 알아선 안 되는 거였다. 알게 되면 모든 게 통제 불능이 될 게 뻔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완전히 꼬여버렸다. 이유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십 년 동안 쌓아온 감정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무너졌는데 설상가상으로 강이한이 은별이를 데리러 간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귀를 찢는 듯한 뺨따귀 소리와 함께 그의 뺨에 새빨간 손자국이 새겨졌다. 이유영의 손톱은 그의 살갗을 파고들어 피를 냈다.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박연준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이유영이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강이한은 이유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이온유를 보며 생각했다. ‘퇴원했나 보네.’수술은 잘 끝났지만 큰 병을 앓은 탓인지 아이의 작은 얼굴은 파리했다. 강이한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불렀다. “온유야.”“네, 아빠.”“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아빠랑 여행 가자. 응?” 이 일을 겪으며 강이한은 아이의 학업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실감했다. 아이 숙제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겨우 이 나이에 그런 짐을 지게 하다니.온유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노는 게 천성인지라 나간다는 말에 기뻐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까지 흐뭇하게 만들었다.강이한의 얼굴에 걸려있던 부드러운 웃음기가 싹 가시더니 이온유를 보며 말했다. “온유야, 언니들이랑 잠깐 놀고 있을래?” “네.” 애는 참 착하기도 하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따라 나갔다. “다들 어디 갔어?” “꽃밭 쪽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집사가 말했다.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 사실 강이한이 파리에서 이유영과 아이 때문에 언쟁을 벌였던 일을 이시욱이도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이 방문할 때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살펴보도록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지금도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