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그 말은 너무나 공허하고 힘없었다. 그녀의 생각과 다르다고? 이유영은 차갑게 웃었다.자리에서 일어선 이유영은 차갑게 말했다. “신경 쓰든 말든 상관없어. 강이한, 네가 감히 또 은별이를 해치거나 나를 해치면 반드시.”그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강초한의 가슴은 텅 비어버린 듯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유영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길 거야.”그 말을 내뱉고 이유영은 차갑게 돌아서서 나가버렸다.강이한은 등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알았다. 모든 걸 알아버렸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그녀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걸까. 결국 그녀는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상황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의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적은 없었다.맞다.이유영을 알게 된 순간부터 강이한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그의 운명이라고, 다시 시작된 인연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그런데 지금 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박연준이가 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만족해요?”익숙한 기운을 느끼자 예전처럼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없었다. 이 순간 강이한은 마치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슬프고 무거웠다. 박연준의 말을 듣자 그의 분위기도 순간 무거워졌고 눈빛에는 전에 없던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하지만 이런 복잡함 속에서도 그들 사이에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평온함이 감돌았다. “갔나요?” 결국 박연준이 입을 열어 물었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이한의 눈빛이 쏘아보듯 박연준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운 냉기로 가득했다. “박연준 씨, 그 여자는 연서가 아니에요.” 마침내 오랜 세월이 흘러 강이한은 박연준 앞에서 직접 연서라는 이름을 꺼냈다. 그동안 누구도 감히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서 연서를 언급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조차 금기시된 이름이었다.그 인간
한편으로 이유영은 크리스탈 별장을 나와 곧장 공항으로 갔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이상 여기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벨 소리와 함께 핸드폰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독한 여자네. 정말 포기할 수 있어요?” 액정에 뜬 이름은 신지수였다. ‘독하다고? 포기한다고?’ 신지수의 날카로운 물음에 이유영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유영은 말했다. “전에는 아마도.”그녀의 말은 결국 끝맺지 못했다. 그래. 예전에는 아마도 포기할 수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원래부터 이렇게 무정했던 건 아니었다. 대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이유영은 마음속 답을 알고 있었다. “일단 끊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유영의 말투는 담담했다.이유영의 냉정한 태도에 전화 속 여자는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질게 나오면 나도 껍데기만 남기고 싹 발라먹어 주겠어요.”신지수의 마지막 말에는 섬뜩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무슨 패를 쥐여준 건지 서주에서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강이한, 박연준, 여진우까지…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강이한과 엮였다니 믿기 힘들었다.무정하다고? 차갑다고? 강이한이 전에 이유영에게 했던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귓가의 휴대폰이 누군가에게 순간 빼앗기자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돌아봤다. 박연준이 깊이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연준을 보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워진 눈빛은 더욱 서늘하게 변했다. 분명했다. 그녀는 박연준이 쫓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목에 힘이 느껴졌다. 남자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너.”이유영은 그런 박연준를 보며 숨이 턱 막혔다. “당신을 서주에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온 이상 여기 있어.” 박연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에 속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만해. 무슨 사실?” 이유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연서에 관한 서류를 봤을 때 그녀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 순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단순히 마음이 뒤집힌 게 아니라 더 큰 것은 굴욕감이었다. 그래. 굴욕감이었다. 엔데스 가문이 소은지에게 가한 모욕은 노골적이었다. 그는 소은지에게 왜 이렇게 대하는지 알게 했다. 하지만 강이한과 박연준은? 그녀에게 가한 모욕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강이한과 함께였을 때 한지음이 나타나기 전, 그녀는 줄곧 자신이 강이한을 사랑하고 강이한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하지만 그 달콤했던 시간 동안 진짜 마음을 준 건 나 혼자였어.강이한은? 연서? 하. 모든 좋았던 기억들 심지어 박연준이 날 위험에서 구해준 순간들조차 다 내 얼굴 때문이었지.’ “결국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박연준 씨.” 이유영은 차갑게 이를 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그 눈 속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보고 박연준은 이유영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에게도 이렇게 대하는데 강이한에게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우리 먼저 가자.”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분하게 이유영에게 제안했다. 본능적으로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유영은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그에 대한 반감과 차가움을 드러냈다. 이제는 단순한 접촉마저도 그녀가 싫어하고 있었다.“유영 씨.” 박연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눈앞이 흐릿해졌다.이유영은 차갑게 몸을 돌렸다. 박연준이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잡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쫓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가 너무 차가웠다. 정말 너무나 차가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한편.이유영은 서주의 일을 알게 되자 이미 파리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그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구나. 강이한과 박연준이 서주를 완전히 뒤집어엎기 전까지 그곳으로 돌아가길 꺼렸던 이유가 지
소은지는 낮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녀 맞은편에는 엔데스 운빈의 아내이자 엔데스 가문의 넷째 며느리인 송연미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여자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녀와 소은지가 가족 만찬 이후 매우 친밀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실 문이 닫히는 순간 실내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제 다 알았지?” 송연미는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모든 몸짓에는 품격이 배어났다.하지만 말투는 너무나 차갑고 냉랭했다. 소은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말에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지금은 그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소은지는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송연미와 지현우의 관계는 조만간 누군가 악용할 게 뻔했다. 더군다나 벌써 그들의 관계를 이용해 엔데스 현우를 깎아내리는 자들이 있었다.소은지의 말이 끝나자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잠시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은지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의외였던 모양이다.‘대체 뭐지?’ 송연미는 점점 더 적대적인 눈빛으로 소은지를 쏘아보았고 소은지 역시 차가운 눈길로 송연미를 응시했다.소은지의 말은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정말 그 사람을 위한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텐데.” 그녀의 이지적이고 예리한 모습에 송연미의 눈은 더욱 가라앉았다. 한참 뒤 송연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지?”소은지가 차갑게 말했다.“어떻게 부르길 바라는 거야? 사모님 아니면 형님?”두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송연미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런 그녀를 보며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이런 똑똑함과 냉철함이라니. 송연미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질투심까지 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래 질투였다. 소은지와 지현우는 이젠 정식 부부였다. 송연미는 질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하는 짓이 쇼라고 해도 소은지를 편하게 둘 순
소은지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서늘했다. 송은미가 말도 하기 전에 소은지가 쏘아붙였다. “나와 여섯째 도련님과의 관계가 어떻든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어야겠어.”여기까지 말한 소은지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송연미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송연미는 마치 심장을 찔린 듯 숨이 막혀왔다. “그게 무슨.?”말을 멈추고 서늘하게 쳐다보는 소은지의 눈빛에 송연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진짜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독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소은지가 전에 이혼 전문 변호사였고 어떤 이유로든 결혼이 깨지는 건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지금 송은미의 이런 행동은 완전 소은지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었다.소은지가 송은미를 매섭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내가 여섯째 도련님하고 무슨 사이든 전 지금 일곱째 도련님의 법적 배우자라는 걸 잊지 마라.”법적 배우자란 말에 소은지는 특히 날이 서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송은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소은지가 날카롭게 덧붙였다. “그리고 잊지 마. 넷째 도련님과 당신 사이의 그 관계를.”무슨 말인가? 바로 어떤 식으로 맺어진 인연이든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기본적인 도리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건 도덕 강요가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때로는 도덕과 양심 앞에서 자신을 통제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다른 누구도 아닌 최소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송은미의 눈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소은지.” 그 순간 그녀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과 그분은 영원히 불가능한 사이예요.”“그럼 둘사이에 뭔가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해?” 소은지가 매서운 어조로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 엔데스 현우가 결혼하기 전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의 관계가 얼마나 됐든 한결같이 기다려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고 자신은 반드시 그때를 기다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존재와 그녀의 날카롭고 솔직한 말과 눈빛은 그녀에게 깊은 치욕감을 안겨주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존재와 그녀의 날카롭고 솔직한 말과 눈빛은 깊은 치욕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엔데스 현우 곁의 단 하나뿐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깨달음이 마음에 스며들 때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었다. “둘의 사이가.”“내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송연미의 말은 소은지에 의해 단호하게 잘렸다. “나는 그 사람 아내니까.”아내라는 두 글자가 송연미의 신경을 거세게 후려쳤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는 날카롭고 다른 하나는 차갑고 무감했다. 한참을 그렇게 대치한 뒤 송연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라니. 하하.”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은지는 송연미가 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녀가 울다니.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에서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순식간에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엔데스 현우였다.송연미는 엔데스 현우를 바라보는 순간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연약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소은지는 얼굴에 차가움이 가득했고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남자는 이 상황을 보자마자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소은지는 손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걸어가다 엔데스 현우 옆을 지나치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 시간에 돌아왔으니 점심은 집에서 드시겠죠? 주방에 준비하라고 할게요.”이 말만 던진 채 엔데스 현우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소은지는 바로 그 자리를
엔데스 현우의 이미 찌푸려진 미간이 이제는 더욱 깊게 주름졌다. 눈앞의 가련한 모습을 보며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를 돕는다고? 지금 엔데스 가문은 그들 둘의 관계를 매우 미묘하게 보고 있었다. 이런 때 그녀가 소은지와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 이런 식으로 그 루머들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그때 엔데스 현우가 말했다. “돌아가요!” 고작 네 글자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남자의 이토록 매정한 말에 송연미의 얼굴빛이 순간 굳어졌다.“당신.무슨 말이에요? 돌아가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에요?” 왜 지금 현우 씨가 이렇게 차갑게 구는 거지? 마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처럼.송연미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때 엔데스 현우가 말했다. “앞으로 반산월에는 다시는 오지 말아요.”“하지만.” 송연미의 말은 엔데스 현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끊겼다. “똑똑한 사람이면 그런 헛소문에 넘어가지 않겠죠.” 그의 냉정한 말에 송연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슬픔과 억울함이 서려 있던 그녀의 눈빛은 히스테리컬한 폭풍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헛소문은 똑똑한 사람들한테서 멈춘다는 건가요? 설마. 소은지 때문이에요?“송연미는 쓴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그녀가 소은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좀 어이없군요.”송연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순간, 송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눈이 마주쳤다. 깊은 눈 속에는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서는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았다.소은지가 부엌 정리를 끝내고 나오니 화실에 있던 엔데스 현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손에 시가 담배를 든 채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그의 깊은 근심이 더욱 짙어 보였다. 소은지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엔데스현우는 소은지의 기척에 고개를 들고 손을 내밀었다.소은지는 남자의 넓고 두터운 손을 보
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보기에 소은지가 이런 능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대단한데요.” 남자는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닿았고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 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자신과 엔데스 현우와의 이 접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일이 곧 끝날까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품 안에서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조금 더 견뎌야 할 거 같아요.”외부인의 눈에는 지금 이 둘의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고 조화로워 보일까.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실상은... “네.”생각보다 쉽지 않네.그러고 보니 그날 저녁 만찬에서 엔데스 가문 사람들을 다 봤는데 다들 보통내기가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간단히 끝나겠어?점심 식탁.지현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소은지는 일할 때만큼은 진짜 제대로였다.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엔데스 현우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한 듯 보였다.핸드폰 알림음이 울리자 소은지는 재빨리 확인하고는 엔데스 현우를 보며 말했다. “유영이 왔나 봐요.”엔데스 현우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오후에 백산 별장에 갈래요.” “알았어요.” 남자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존중하는 편이었다.점심 식사가 끝나자 엔데스 현우는 자리를 떴다.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비록 그의 행방에 대해 묻지는 않았지만 엔데스 현우와의 호흡은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현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연미가 왔다.두 사람이 다시 다시 마주 섰다.아침보다 더 냉랭하고 무거운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