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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마지막 문 앞에서

Autor: 데이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6-30 07:32:01

유리는 그날 밤 이현이 놓고 간 전세 계약서 복사본을 다시 꺼내 펼쳤다.

한참 동안 그 서류 위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아무 말도 없이 그림 속 집의 구조를 천천히 눈으로 따라갔다.

주방은 작고, 거실엔 오래된 조명이 있었고, 창밖으로는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녀는 그 감나무 아래 이현이 앉아 있는 상상을 그림처럼 떠올렸다.

그 상상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무섭게 익숙해지는 속도가 오히려 그녀를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집을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누군가와 같은 문을 열고, 같은 시간에 불을 끄고,

같은 식탁에 앉는 일이 무언가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삶의 방식이 얼마나 외롭고 단단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현이 그 단단한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멀리 함께 올 수 있었던 거였다.

그 다음 날. 이현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가게 옆 벽에 기대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는 그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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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40. 말없이 식탁을 채우는 따뜻한 여백

    늦은 오후의 빛이 식당 유리창을 부드럽게 적시고 있었다.분명 해가 떠 있는 시간인데도,파리의 거리엔 느슨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속에서 유리의 그림자도 조용히 길어지고 있었다.그녀는 오늘 가게를 일찍 닫았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조용한 바람 한 줄기가 자신의 마음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조용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주방에서 작은 국물을 끓이며 그녀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누군가와 함께 가만히 식탁에 앉아 뜨거운 국물 속에 그날의 감정을 풀던 순간들.그 순간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였는지 이제야 또렷하게 알 것 같았다.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그리고 이현이, 그 고요한 공기 속으로 들어왔다.그는 말없이 그녀가 끓이던 냄비 쪽을 바라보았다.“무슨 국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배춧국이요. 소금만 넣고 끓인 거예요. 많이 익은 배추라, 그냥 물만 부어도 국물이 깊어요.”유리는 조용히 대답했고, 그의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유리 씨가 끓이는 국은…늘, 설명만 들어도 따뜻하네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그를 향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피하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그 말을 제대로 받아내기에는 아직 마음 한편이 너무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식탁이 차려졌다. 배춧국, 달걀찜, 마른 멸치볶음, 그리고 작게 쥔 두 개의 주먹밥.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상차림이었다.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숟가락이 국물에 잠기고, 젓가락이 천천히 멸치를 집어 올릴 때까지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은 예전의 어색함과는 달랐다.그건 마치, 서로를 기다려주는 조용한 여백 같았다.식사를 마친 뒤,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사람… 민우 씨, 오랜 친구예요?”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이현의 얼굴엔 그리움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게 스며든 불안이 겹겹이 겹쳐 있었다.유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주 오랜 친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39. 민우의 도착

    그날 오후, 파리의 골목은 유난히 고요했다.하늘은 흐렸고, 노란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공기가 천천히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유리는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고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스테인리스 바닥에 남은 물기를 닦고,칼과 도마를 말리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그러나 가게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그녀의 손끝이 멈췄다.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민우.“오랜만이에요, 유리 씨.”그는 예전과 똑같은 말투로,그러나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삼켰다.민우. 그 이름은 그녀에게 ‘안정’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깊고 단단한 무언가였다.“어떻게… 여기에…”“출장이 있었어요. 하필이면 이 근처로 오게 돼서.”민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예전처럼 담백했지만그 안에 깃든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유리는 알 수 있었다.그녀는 그를 안으로 들였다. 주방은 아직 따뜻했고, 남은 국물에서 김이 희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민우는 가게 안을 둘러보다 식탁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메모지를 바라보았다.“여전하네요. 이 공간도, 유리 씨도.”그 말에 유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안엔 숨기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여긴… 당신이 있을 줄 알았어요.”“그 말, 기쁘게 들어도 되나요?”그녀의 질문에 민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기뻐하려고요. 이런 건 기쁠 때 기뻐해야 하니까.”그들은 오래 앉아 있었다.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척만으로 시간이 흘렀다.유리는 문득 지난밤 이현과 함께 요리했던 순간이 떠올랐다.그때와 지금. 감정의 결은 분명히 달랐지만 이 고요한 안정감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잘 지냈어요?”민우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그러고는 조용히 대답했다.“…매일을 살았어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그게 유리 씨다운 말이네요.”그는 웃었고, 그 웃음은 여전히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그러나 편안함이 전부가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38. 다시 차려진 두 사람의 식탁

    그날 아침, 유리는 평소보다 천천히 칼을 들었다.양파를 썰 때 나는 단내와 손끝에 스치는 얇은 껍질,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눈물 같은 수분.그 모든 것이 오늘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주방은 조용했다.오직 식재료가 내는 소리와 물이 끓는 리듬만이작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그런데 문득, 그 조용한 공기를 뚫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유리씨.”그 이름.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이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여느 날보다 망설임이 많은 눈빛으로.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와 작은 한마디를 건넸다.“같이… 만들어볼래요? 오늘 식사, 같이 준비하면 안 될까요?”유리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한때는 매일의 식탁이 당연했던 사람.그러나 그 당연함이 무너진 후, 그와 마주 선 식탁은 언제나 ‘그리움’이라는 허기만 남긴 채그녀의 손을 놓았던 기억이었다.그래서 그는 지금 ‘요리’라는 말로 그 모든 허기를 다시 채워보려 하고 있었다.유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앞치마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그 앞치마를 받는 그의 손에 작은 떨림이 스쳤다.그 떨림은 기쁨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다.하지만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분명한 허락이었다.함께 서는 주방. 그건 누군가에겐 일상이었겠지만그들에겐, 오랜만에 되찾은 침묵 속의 다정함이었다.이현은 야채를 다듬었고, 유리는 조용히 육수를 끓였다.칼끝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뜨거운 물이 끓어오르며 내는 숨결,그 모든 것이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다시 음표가 하나씩 채워지는 것처럼 들렸다.“이렇게 같이 서는 거, 정말 오랜만이네요.”그가 나직하게 말했다.“그러게요.”유리의 대답은 짧았지만그 안엔 담담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예전엔 내가… 당신 옆에서 뭘 그렇게 조급하게 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그의 말에 유리는 천천히 수저를 저었다.“사람 마음이란 게 급하게 끓이면… 속까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37. 오래된 문장,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아침이 밝았다. 파리의 공기는 여전히 무심하게 차가웠고,그날도 유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주방의 조명을 켰다.하지만 마음만큼은 어제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채 조금 더 느리고 조심스러워져 있었다.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국물의 첫 끓음이 났을 즈음,가게 입구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바람인가. 아니면 우연히 굴러온 나뭇잎인가.그녀는 조용히 문가로 다가가 문틈 아래 떨어져 있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그건 편지라기보다는 마음의 조각 같았다.조심스럽고, 다하지 못한 말들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쪽지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천천히 읽었다.유리 씨.말로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당신이 떠난 이후,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그때 왜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왜 그런 표정으로 당신을 보냈을까'스스로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그날, 당신이 내게 등을 돌리던 순간부터 저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아주 선명하게 알게 되었어요.그리고 지금, 그걸 어떻게든 전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습니다.당신이 웃고 있는 걸 봤습니다.아주 오랜만에당신의 그 웃음은 제게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유리 씨. 당신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든,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든,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다만, 제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이 말로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당신의 모든 계절을 한 번이라도 함께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 저는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이현.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 읽은 쪽지를 천천히 접으며, 손끝을 조심스럽게 눌렀다.그 문장은 그녀를 울게 하지도, 웃게 하지도 않았지만단 하나, 멈춰 있던 시간의 결을 천천히 열어놓았다.마치, 어떤 오래된 문이 다시금 미세한 틈을 만들어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는 것처럼.그녀는 그 쪽지를 식탁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국물에 소금 한 꼬집을 더했다.그 짠맛은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36. 파리의 낮게 깔린 석양과 창 너머 마주한 기억의 미소

    비행기는 부드럽게 착륙했다.창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하늘은생각보다 따뜻해 보였고,그 아래 펼쳐진 도시는 과거의 어느 장면처럼,그의 기억보다 훨씬 더 조용히 다가왔다.이현은 천천히 좌석벨트를 풀었다.아무 말 없이 손등을 만지작거리던 그는오른손 약지에 남겨진 가벼운 눌림 자국을 보며 문득 유리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조유리. 그 이름은 아직도 목구멍을 타고 오를 때마다 작게 떨렸다. 마치 오래된 노래의 첫 음절처럼.그는 파리의 거리 위를 걷고 있었다.짐은 최소한으로 줄였고, 동행도 없었으며 예정표도 따로 짜지 않았다.단지 그녀가 있을지도 모르는 골목을 그저 걷고 싶었다.어느 작은 카페 앞에 멈춘 순간,가게 창 너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두 여성의 뒷모습이 보였다.그 중 하나의 실루엣이 이상하리만큼 유리와 닮아 있었다.이현은 한 걸음 다가섰다가, 곧 조용히 발을 멈췄다. 그녀가 아니었다.하지만 그 순간, 가슴속 어디선가 잊었던 이름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유리 씨.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이현은 며칠 전, 우연히 SNS에서 본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창가의 식탁, 부드러운 조명,그 식탁 위에 담긴 기억에 닿는 음식.그는 확신했다. 그 식당엔 그녀가 있다고. 그 요리엔 그녀의 손이 닿아 있다고.그는 작은 수첩을 꺼내 주소 하나를 확인했다.한 한국 관광객이 남긴 글에 달린 댓글 속,작은 파리 골목의 좌표.그곳으로 가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그날 저녁, 이현은 마침내 그 골목에 들어섰다.조명이 낮게 깔린 석양빛 속, 한 집의 창가에 작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작은 간판 하나. 낯선 듯 정겨운 한글. 그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으면서도,또다시 상처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오히려 껴안기로 했다. 그 두려움 속에 아직 남은 마음이 분명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가게 문을 열지는 않았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35. 손끝의 온기

    파리의 밤은 오늘따라 유난히 느리게 흘러갔다.유리는 커튼을 걷은 채,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창밖에서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고,그 소리는 마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했다.그녀는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라기보다,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사람에게.그래서 ‘민우’라는 이름을 떠올렸다.한국에 있는 민우. 한때 자신의 식당에 들렀고,자신보다 먼저 삶의 균열과 회복을 겪었던 사람.무심한 척 조용히 건넨 말들 속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위로했던, 그 유일하고 단단한 사람.그녀는 펜을 들었다.민우 씨, 잘 지내시죠.여기 파리는 지금 비가 내려요.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면서 문득, 예전 식당의 창가를 떠올렸어요.그때 그 공간에서 민우 씨가 앉아 있던 자리가,이상하게 지금 제 앞에 있는 창가랑 겹쳐져 보이더라고요.참 이상하죠.저, 요즘 누군가와 자주 식사를 해요.처음엔 그 사람이 그냥 이국의 낯선 얼굴이라 생각했어요.나를 모르는 사람. 나의 상처를 모르는 사람.그래서… 부담이 없고 편하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그런데요.그 사람의 식사 방식이, 자꾸 제 마음을 건드려요.젓가락을 드는 각도, 밥을 다 먹고 난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는 태도, 국을 식히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무는 숨결.그 조용한 리듬 안에 저도 모르게 같이 걸어가고 있어요.그리고 그 길 위에서 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걸 느껴요.무섭기도 해요.‘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지?’‘또 상처받으면 어쩌지?’그런데… 민우 씨.제가 놀란 건, 그 사람 앞에선 그런 생각보다 먼저‘나답게 있어도 괜찮다’는 이상한 확신이 생긴다는 거예요.그건 이현 씨와는 달라요.이현 씨는 제가 사랑을 애써 만들어야 했던 사람이었고,지금 이 사람은…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그냥 있는 그대로를 편안하게 받아주는 사람이에요.그런 차이가 처음엔 미묘했는데, 지금은 아주 크게 느껴져요.그래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3. 선 긋는 건 너였는데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8. 요동치는 북소리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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