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
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
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손에 쥔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검은 슈트, 완벽히 정돈된 줄, 비서, 경호원, 운전기사들까지 줄줄이 늘어선 그 끝에서,
이현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이 정도는 해줘야 내 스타일 아니겠어?’라고 말하는 듯했고,
그 표정 하나로 골목은 난리가 났다.
“아이고야, 유리야! 저거 네가 데려온 거냐?!”
마춘배 아저씨가 허겁지겁 주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유리는 눈가가 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미쳤나봐, 진짜. 저 인간 뭐야…”
잠시 뒤, 식당 문이 열리고 이현이 들어섰다.
그의 등장만으로 골목은 다시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고,
단골손님들의 수군거림이 작은 폭죽처럼 터졌다.
유리는 손을 허리에 얹고, 마치 투사가 전장에 나서듯 그를 노려봤다.
“진상님,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이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지극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줄 서라며. 그래서 줄 섰는데, 뭐.”
짧고 건조한 한마디, 그러나 그 안엔 장난기와 도발이 한껏 섞여 있었다.
“진짜 사람 많이 불렀네? 비서에, 경호원에, 기사까지… 이건 무슨, 동네 습격이세요?”
유리의 한숨 섞인 말에, 이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맛있는 밥 한번 먹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그 순간 유리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화를 꾹꾹 눌렀다.
“진짜… 또라이야, 이 사람…”
음식이 완성되어 테이블로 내갈 때쯤,
이현은 짧게,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름 뭐야.”
유리는 순간 움찔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도, 사과도, 멋쩍음도 없었다.
오직 솔직한 호기심, 그리고 은근히 마음을 찌르는 듯한 뻔뻔함이 가득했다.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요. 유리예요. 조유리…”
이현은 잠시 입꼬리를 올렸다.
“유리.”
이름을 한번 툭, 던지듯 불러보더니 그냥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유리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홱 돌렸다.
“진상님, 이름 알았으면 이제 그만 좀 와요. 진짜요.”
그러나 이현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며 느긋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 이름 알았는데 왜 그만 와. 재밌는데.”
유리는 테이블 위 물수건을 툭 내려놓으며 씩 말했다.
“이런 인간 처음 봤네, 진짜…”
이현은 웃음기가 서린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짧게 중얼거렸다.
“그래, 너도 처음이야.”
식당 문 너머,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가 있었다.
조은별, 이현의 비서. 완벽한 정장을 입고,
날렵한 턱선을 드러낸 얼굴에는 평소처럼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조유리…웃기네, 정말.”
은별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질투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가 그녀의 마음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상님, 오늘은 또 뭐 먹고 싶으세요?”
유리는 앞치마를 고쳐 묶으며 최대한 무심한 척 물었지만,
그 말끝엔 살짝 씩 웃음이 배어 있었다.
이현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오늘 나 보고 웃었지.”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상님 진짜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웃긴 게 아니라 황당해서 그랬거든요?”
하고는 휙 돌아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이 조금 더 빠르고, 귀 끝이 붉어졌다는 건 그녀 자신만 모른 채.
겨울의 아침은 여전히 느릿했다.햇살이 이마를 스칠 때에도 그 빛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쉽게 읽히지 않았다.유리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긴 숨을 쉬었다.그 숨결은 새벽 내내 가라앉았던 감정의 무게를 조용히 토해내는 듯했다.이현이 바로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온기를 느끼지 않았다.아니, 일부러 느끼지 않으려 했다.그가 자신을 지켜보는 눈빛을 잠든 척한 채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말이라는 것이, 그 순간엔 너무나 큰 파장이었기 때문이다.주방에선 물이 끓고 있었다.이현은 커피를 내리는 손길로 아침을 열었고, 유리는 그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둘 사이엔 인사도, 조금 전의 기척도 오가지 않았다.그럼에도 두 사람은 묘하게 익숙한 동선으로 서로의 공간을 비켜갔다.이현은 커피잔을 두 개 꺼냈고 유리는 그 중 하나를 들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감사해요.”입술에 걸린 그 말 한마디. 그것조차, 이젠 다소 어색한 예의처럼 들렸다.아침 식사는 조용했다.바게트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식탁 위의 공기를 깨트릴 뿐이었다.유리는 국물을 천천히 떠올리며 이현의 눈을 피했다. 그녀는 알았다.그가 자꾸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는 걸.그 다정한 시선이 이제는 따뜻하지 않았다.그것은 조심스러운 감시처럼 느껴졌고, 그것이 그녀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이현 역시 말이 없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흘렀지만그 중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무슨 일이야?’‘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거야?’‘우리가… 멀어지고 있는 걸까?’그 물음표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그녀의 숟가락이 몇 번이나 멈추는지를 세고 있었다.오후가 되자, 유리는 산책을 나갔다.혼자서. 이현은 따라 나서지 않았다.그는 문틈 너머로 그녀가 코트를 입고, 천천히 목도리를 고쳐 매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녀는 그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 숨결 속에는 말이 되지 못한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고 이
그날 밤. 이현은 일찍 돌아왔다.손에는 작은 초콜릿 상자가 들려 있었다.“오늘 미팅이 잘 돼서요. 축하할 겸, 우리 둘이 좋아하던 거 사 왔어요.”유리는 초콜릿을 받아들고 작게 미소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오래 머물지 못했다.식사 후, 두 사람은 거실에서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이현은 유리의 손등을 감싸며 말했다.“요즘 우리, 자주 서로를 놓치는 기분이에요. 가까이 있는데도 멀게 느껴져요.”그 말에 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그 마음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도리어 숨이 막혔다.“그럴지도 몰라요.”유리는 조용히 말했다.“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이현의 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그 다정함이, 이제는 유리에게 상처였다.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이현 없는 삶’을 상상했다.그를 놓아주는 상상. 그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선택.그 상상은 차갑고, 아프고, 하지만 아주 조금, 해방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오래도록 울었다.그 울음은 어떤 말보다 정직한 자신의 고백이었다.파리의 겨울 햇살은 어제보다도 더 맑았다.하지만 그 빛이 부엌에 들이칠 때, 유리는 그것이 차갑다고 느꼈다.빛은 따뜻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은 점점 무채색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그날 아침, 식탁엔 따뜻한 수프와 갓 구운 바게트가 놓여 있었다.이현이 준비한 식사였다.그는 정성스럽게 접시를 정리하고 작은 꽃병에 라넌큘러스를 꽂아두었다.겨울에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꽃,그는 그것이 유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유리는 그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식사하세요. 금방 식겠어요.”이현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끝만 테이블을 쓸고 있었다.“…입맛이 없어요. 잠깐만, 이따 먹을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엔 어딘가 무거운 것이 고여 있었다.이현은 조용히
에펠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고,그 아래를 걷는 연인들은 각자의 언어로 속삭이며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고 있었다.이현은 유리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우리 예전엔 이런 산책 자주 했었죠.”그가 말했다. 유리는 작게 웃었다.“…그땐 그게 좋았어요.”그녀는 말했다.그 말 속에는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 조용히 녹아 있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고,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숨을 삼켰다.집에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그 고요함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로에겐 익숙해진 침묵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유리는 화분 옆에 걸터앉았다.이현은 가만히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유리 씨… 혹시, 내가 너무 다정한 게… 부담돼요?”그 물음은 생각보다 너무 정직해서 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 건 아니에요.”그녀는 겨우 말을 뱉었다.“그냥… 제가 지금, 누구에게든 받는 게 조금… 힘든 것 같아요.”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그녀가 덧붙였지만 그 말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찔렀다.눚은 밤.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운 두 사람 사이엔 한 뼘 남짓한 거리가 있었다.그러나 그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말하지 못한 감정이었다.이현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쉬었다.그는 다정함으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그 다정함이 그녀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다정함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무언의 상처가 되어버린 밤이었다.파리의 이른 새벽. 창밖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눈이 올 듯한 날씨였다.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거리에서, 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잠든 이현의 얼굴이 보였다.고르고 깊은 숨결.오래도록 자신이 의지해왔던 그 사람의 온기가 아직 곁에 남아 있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문득 이현이 없는 세상을 떠올렸다.그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그가 나로 인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그녀를
“…네. 기억나요. 예전에 저 잼 바르고 빵 먹는 거 정말 좋아했어요.”“지금은요?”그가 묻자, 그녀는 망설였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좀 다른 사람 같아서요.”그 말에 이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병을 내려놓았다.그 말은 단순한 잼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그녀는 지금의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유리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했지만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이현은 자꾸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고, 유리는 그런 그를 애써 모른 척했다.식사 중,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유리 씨… 무슨 고민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요.”“그 생각… 혹시, 나 때문이에요?”그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아니요. 아니에요… 정말.”그러나 그 ‘아니에요’ 속에 이미 수많은 ‘그렇다’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이현은 느끼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작은 숨을 쉬었다.밤이 깊고, 불이 꺼진 집 안에서유리는 침대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옆에 누운 이현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지만,그녀는 그 손을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가만히 두었다.예전 같으면 그 손을 더 꼭 쥐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 다정함조차 자신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다.그저,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을 뿐.한밤중, 유리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 창가에 섰다.빛 하나 없는 창 너머 어둠 속에 자신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그녀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속삭였다.“…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걸까.”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지금 이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그저, 말하지 못한 감정이 가슴속
파리의 늦은 오후, 유리는 혼자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늘 가던 정육점, 채소 가게, 그리고 작은 꽃집 앞을 지나며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매장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코트 깃을 세운 채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그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그저 평온한 어느 주부의 일상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투명한 감정들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감정은 외로움이기도 했고, 지속되는 익숙함에 대한 피로이기도 했다.어느 순간부터 이현의 다정함은 그녀에게 따뜻함보다는 의무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집에 돌아와 식탁 위에 장을 풀어놓고, 채소를 씻기 시작한 유리는 문득 손끝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배춧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던 중,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얼굴이 있었다.며칠 전, 시장 입구에서 스쳐 지나간 그 남자.낯선 관광객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그의 이름도 모른 채 짧게 스쳤을 뿐인데,그 순간의 감정이 지금까지 그녀 안에서 희미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그건 설렘은 아니었다.그러나 분명히, 오랫동안 잊고 지낸 ‘자기 자신’이 그 짧은 교차 속에서 고개를 든 것이었다.그녀는 물에 젖은 손을 닦지도 않은 채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날 저녁, 이현은 퇴근하자마자 그녀가 좋아하던 레몬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오늘 기분 전환 좀 해볼까 싶어서.”그는 환한 웃음으로 말했다.유리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그의 그런 배려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다정함이 자꾸만 그녀의 안쪽을 건드렸다.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도 좋은 사람이라그가 주는 배려를 거절하는 것조차 잔인한 일이 되어버리는 사람.그래서 유리는 말하지 않았다.자신이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것도,마음의 방향이 어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그녀는 차라리 다정한 아내의 모습으로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케이크를 조심스레 잘랐다.식사 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이현은 책을 읽었고 유리는 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조금 더 꼭 쥐었다.저녁이 되어 이현은 퇴근하듯 그녀를 마중 나왔다.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웃으며 말했다.“오늘 많이 피곤해 보여요.”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오히려… 오랜만에 혼자 있어서 그런지 기분이 좀 정리됐어요.”그 말에 이현은 잠시 멈칫했다.혼자 있어서 좋았다는 말이 마음 어딘가를 찌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다정한 얼굴로 받아주었다.“그랬구나. 그럼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요. 유리 씨는 푹 쉬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그 말은 진심이었다.그러나 그 진심 속에는 조금씩 가라앉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밤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그녀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사랑은 식은 게 아니야. 그냥, 그 모양이 달라진 거야.’그러나 그 모양이 서로를 닮지 못할 때,사랑은 결국 서로의 마음을 어긋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들고 있었다.그날 아침, 유리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짧고 어지러운 꿈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이현은 등장하지 않았다.그녀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가슴 한가운데에 잔잔한 허기를 느꼈다.그것은 공복에서 오는 허기가 아니라,말하지 못한 마음이 쌓여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틈이었다.햇살은 여느 날보다 부드러웠고 그녀의 손은 평소처럼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였다.그러나 그 손끝의 움직임은 어딘가 느려지고 있었다.그녀는 이유 없이 칼질을 멈추고 주방 창 너머를 오래 바라보았다.마치 자신이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이 더는 누군가에게 닿지 못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이현은 오전 내내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했다.유리의 말없는 웃음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녀는 여전히 다정했다.그러나 그 다정함에는 더 이상 ‘기대’가 담겨 있지 않았다.이현은 안다.사람의 마음은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그 무게와 결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느끼게 된다는 것을.그는 그녀가 무언가를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