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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동치는 북소리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7 17:33:59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

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

“…나… 이러면 안 되는데.”

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

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

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혹시…’

스스로를 타이르며 국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마음속에서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은 점점 무게를 더해갔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정오가 가까워오자 식당 문이 열렸다.

익숙한 실루엣, 길게 뻗은 다리와 깔끔한 슈트, 그리고 미소를 숨기지 않는 입꼬리.

“오늘은 별로 안 바쁘네요. 좋아요, 조용히 먹고 갈게요.”

이현은 무심한 듯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보다 곧장 주방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유리는 손끝이 움찔했지만, 최대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진상님, 자리 알아서 잡으세요. 저는 바쁘니까요.”

말끝은 단호했지만, 뺨이 살짝 붉게 물드는 걸

주방 안의 거울이 비추고 있었고, 유리는 그걸 애써 외면한 채 칼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식당 안은 잔잔한 소음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이현의 시선은 오롯이 주방을 향했고, 그 눈빛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루의 마지막 피로까지 잊게 할 만큼 부드럽고 진지했다.

한참 후, 유리가 음식을 들고 그의 테이블로 다가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진상님.”

그 말에 이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조유리 씨, 저 말투, 은근히 귀엽다는 거 아세요?”

조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말씀이세요! 귀엽긴 뭐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 끝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저녁이 깊어갈 무렵, 식당 문이 또각또각 울리며 열렸다.

은별은 완벽한 미소를 얹은 얼굴로 들어와 식당 안을 천천히 훑었다.

“회장님, 오늘도 여기 계셨군요.”

그녀의 말에 이현은 턱을 괴며 대꾸했다.

“여긴 제 출퇴근 코스예요.”

유리는 접시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두 사람에게 향했고, 은별은 그 시선을 정확히 느끼며 아주 자연스럽게 웃음을 더했다.

“사장님,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 아무래도… 좋은 영향 덕분이겠죠?”

조유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장사가 잘 돼서 그렇죠, 뭐.”

짧게 대답하고는 주방으로 몸을 숨겼다.

그 안에서, 그녀의 가슴은 요동치는 북소리처럼 점점 속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문 닫을 시간이 되고, 유리는 마지막 정리를 하려다 골목 끝에서 여전히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

“진상님, 오늘도 안 가실 거예요?”

한숨 섞인 목소리에 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다가왔다.

“조유리 씨, 솔직히 말해봐요. 이제 저 좀 신경 쓰이죠?”

그 한마디에 유리는 온몸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입술을 달싹이려 했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미워할 수가 없게 하시잖아요.”

순간, 이현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리며 짧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일 봬요, 조유리 씨.”

그는 짧은 인사만 남기고 천천히 골목 너머로 걸어갔고,

조유리는 한참 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뜨거운 볼을 꾹 눌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유리는 아침부터 마음이 심란했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재료를 준비하고, 주방을 정리하고, 

손님 맞을 채비를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엊그제 골목에서 나눈 이현의 말로 어지러웠다.

‘이제 슬슬 인정하셔야죠.’

그 한마디는 마치 숨겨뒀던 감정의 뚜껑을 열어버린 것 같았고, 

아무리 애써도 마음속에서 잔잔히 퍼져가는 그 울림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유리는 국을 끓이다 말고 멍하니 주방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점심 시간 전이라 한산한 골목, 그리고 그 너머에 서서히 다가오는 낯익은 실루엣.

그림자만 보아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고,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요.”

이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여유로웠지만, 

그 안에 깃든 장난기와 설렘이 유리의 귓가를 간질였다.

유리는 국자로 냄비 뚜껑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상님, 좀 그만 오세요. 저 장사해야 돼요.”

하지만 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여기 오는 게 요즘 유일한 재미인데, 그걸 뺏으실 거예요?”

그의 눈빛은 장난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간절했고, 유리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국을 휘저었다.

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심장이 자꾸만 빨라지는 이 기분이 싫으면서도 달콤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가게는 잠시 한산해졌다.

그 틈을 타 이현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고, 

유리는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재료를 정리했다.

“조유리 씨,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이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왔다.

“제가 이렇게 오는 거… 솔직히 싫지는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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