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
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팽하게 조였다.
“이것도 아니야.”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으며, 무언가를 집어삼킨 듯 건조하고 예민했다.
그의 눈썹은 점점 더 좁아졌고, 얇게 다문 입술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 접시가 탁자에서 밀려나며 자리 잡은 그 긴장의 끝에서,
이현은 또 다른 한 접시에 나이프를 툭 던지며 푸념처럼,
그러나 명확한 실망의 감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것도 아니라고!!”
평소라면 그조차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남자였지만,
오늘따라 그의 참을성은 바닥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정말 국내 최고의 요리사 음식이 맞습니까?”
회장실 안은 그의 목소리에 따라 잔잔했던 물결이 깨지듯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
복도에 서 있던 셰프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누군가는 등을 굽히고,
누군가는 뒷덜미를 습관처럼 주무르며 한껏 초조해했다.
이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 다리가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짧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짧은 숨을 토해냈고,
이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회장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쿵, 요란한 소리에 복도 끝까지 울림이 번졌다.
그는 한순간 복도 끝까지 침묵을 가져왔고,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거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지나가는 길을 조용히 비켜주었다.
그렇게 회장실을 벗어나 비상계단을 내려가며, 이현은 눈꺼풀 너머로 묘한 공허감을 느꼈다.
수십 명의 셰프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맛보았지만, 그 무엇도 그의 마음속 공허를 메우지 못했고,
혀끝에는 잠깐의 감각만 남았을 뿐 가슴 한복판까지 내려가는 따뜻함은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S그룹 본관 뒤편 골목길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공기가 뺨을 스치며 내려앉을 때,
어디선가 퍼져오는 고소하면서도 따뜻한 냄새가 그의 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그 냄새는 상류사회의 고급스러운 향과는 달랐고,
억지로 연출된 파인다이닝의 복잡한 향도 아니었으며,
왠지 모르게 오래전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소박하고 포근한 냄새였다.
골목 끝,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곳에서 작은 식당 하나가 보였다.
‘마싯집’이라고 손글씨로 적힌 허름한 간판,
그리고 그 아래 줄지어 선 사람들.
긴 기다림에도 불평 대신 웃음과 수다가 오가는 풍경은,
그에게 놀라움과 약간의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이현은 그 줄 끝을 따라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망설임도 없이 곧장 줄 맨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날렵한 걸음,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끌어당기는 강렬한 존재감.
“저, 저기요!”
“아저씨, 줄 서야죠!”
뒤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이현은 가만히 주머니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카드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며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었고,
알아보는 이들의 표정은 잠시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오늘 매상 전부, 내가 계산하겠소.”
낮고 확신에 찬 목소리는 골목을 관통했고,
“뒤로 물러들 나시오” 라는 마지막 한마디는 더할 나위 없는 힘으로 사람들을 잠시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때, 식당 안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
앞치마를 질끈 묶은 젊은 여자, 붉게 달아오른 뺨,
긴 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채, 왼손에는 검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오른손에 빗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단단했고, 순간 이현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활처럼 단호하게 그어진 눈썹, 화장기 거의 없는 얼굴,
그리고 불꽃처럼 살아 있는 눈동자.
“여긴 웨이팅 순서 지켜야 하는 집이에요. 돈 있다고 다 되는 거 아니거든요?”
이현은 처음으로 조금 웃을 듯 말 듯한 입꼬리를 살짝 움직였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흥미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늘 매상 다 줄 텐데도?”
순간, 그녀의 얼굴에 짧은 놀라움이 스쳤다가, 곧 매서운 기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단호하고 짧은 대답.
“…미친놈인가.”
짧은 한마디. 그 한마디는 이현이 평생 들어본 어떤 비평보다도 강렬했다.
유리는 빗자루를 번쩍 들어 올렸고, 이현은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짧은 장면은 골목 끝까지 파도처럼 번졌고,
사람들은 숨죽인 웃음을 터뜨리며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는 이도 있었다.
그날 밤, 이현은 오랜만에 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살짝 건드려졌다.
‘재밌네.’
그건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던 소년의 마음이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계란말이 하나가 팬 위에서 천천히 말려지고 있었다.달걀물이 얇게 펴지고, 가장자리가 살짝 익어가면서 부드러운 노란빛이 퍼졌다.이현은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작은 주걱을 들어 계란을 조심스럽게 말았다.자꾸만 옆으로 새고, 한쪽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유리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말없이, 숨도 죽인 채 주방 한켠에서 두 손을 모은 채로.그녀의 시선엔 비웃음도, 조바심도 없었다.그저, 오래 잊고 있었던 어떤 ‘정다움’ 같은 것이 조용히 피어나는 느낌.계란말이 한 줄이 간신히 완성되었을 때, 이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결국 터졌네요.”그가 멋쩍게 웃자 유리는 처음으로 소리를 내 웃었다.“터져도 괜찮아요. 진심은 새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리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같이 먹을래요?”“당신이 만든 거라면.”식탁엔 계란말이 하나와 미소된장국, 그리고 간단하게 데친 채소가 올려졌다.소박하고 조용한 식사.하지만 두 사람은 이 순간을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온 듯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이현이 계란말이를 한 조각 잘라 유리의 접시에 놓아주었다.“나름 정성 들였어요.”그가 말했다.유리는 말없이 그것을 집어 입에 넣었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씹었다.부드러웠다. 조금 짠듯하면서도 속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맛있네요.”“거짓말.”“응, 조금.”둘은 동시에 웃었다.그 웃음은 몇 주간 쌓여 있던 거리감을 한순간에 녹여내는 듯했다.하지만 그 거리의 흔적은 여전히 식탁 아래 숨어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 유리는 조용히 컵을 들어 이현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허브티 향이 방 안을 은은하게 감쌌다.그녀는 잠시 머뭇이다 입을 열었다.“…당신이 없는 동안 나는 내가 나를 이해하게 됐어요.”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는 혼자 있는 법을 배웠고, 당신과 함께 있는 법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비행기 바퀴가 파리 샤를드골 공항의 활주로에 닿는 순간,이현은 창밖으로 어스름이 번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그 하늘은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고, 창유리에 내려앉은 습기는 그의 이마에 맺힌 조용한 불안을 닮아 있었다.공항에서 나서는 길,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도착했어요'라는 단 한 줄을 쓰기까지 몇 번이고 손가락이 멈췄다.그리고 결국, 그 메시지는 보내지지 않았다.‘그냥, 가야겠다.’이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말없이, 그녀가 머무는 거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유리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해는 어느새 완전히 져 있었고,길 아래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대화 소리와 지나가는 자동차의 타이어 소리,가끔 들려오는 트램의 종소리만이 그녀의 귀에 맴돌았다.그녀는 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지만 한참 전부터 식어 있었고,그 안의 홍차는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그리고 문이 울렸다.그 순간, 유리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숨을 들이쉬며 그 울림의 정체를 마음으로 먼저 짚어보았다.두 번째 노크. 그제야 유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문을 열었을 때, 그곳엔 이현이 서 있었다.겨울 외투의 깃에 박힌 먼지,장시간 비행으로 약간은 피로해 보이는 눈동자,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여는 목소리.“…생각보다, 파리가 더 춥네요.”그 말에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엔 예상도, 원망도 없었다.그저 아주 담백한, 하지만 간절한 ‘확인’이 있었다.“…들어와요.”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고, 이현은 한 걸음, 그녀의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앉았다.하지만 그 식탁 위엔 아무 음식도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엔 밥보다 더 무거운 공기가 놓여 있었다.“나, 도쿄에서 계속 생각했어요.”이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당신의 침묵이, 어떤 의미였는지.”유리는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처음엔 무서웠어요. 당신이
도쿄의 회의실은 언제나처럼 정돈되어 있었다.반듯하게 나열된 서류들, 적막을 가르는 키보드 소리,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에서 이현은 유독 자주 고개를 돌렸다.프레젠테이션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집중은 자꾸만 어긋났다.“정리된 자료는 메일로 다시 공유드릴게요.”동료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이현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리는 건,꺼진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고 확인했기 때문이었다.거기엔 여전히, 유리의 이름 옆에 작은 점 하나조차 없었다.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 침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언의 의사표현’처럼 느껴졌다.회의를 마친 후, 이현은 조용히 호텔로 돌아왔다.짐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은 그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지금의 유리처럼.그는 메시지를 열었다. 어제, 그제, 그 전날. 자신이 보냈던 짧은 안부들과그녀의 ‘읽지 않음’ 상태를 하나하나 짚어보듯 바라봤다.‘무슨 일이 있는 걸까.’‘아니면… 일부러 그런 걸까.’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쪽과 의심으로 향하려는 쪽이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충돌 끝에 그는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돌아가야겠다.”파리, 같은 시각. 유리는 오래전부터 즐겨 찾던 작은 서점에 있었다.프랑스어 원서들과 여러 나라의 여행기,그리고 낡은 표지의 소설들 사이에서 그녀는 가볍게 손끝을 움직이며 책장을 넘겼다.하지만 집중은 쉽지 않았다.‘잘 자요.’이현의 마지막 메시지가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그는 매일 다정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은 그 손을 외면하고 있었다.왜일까.그녀는 자문했다. 왜 그토록 익숙했던 사람의 말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서점의 주인이 차를 내어주겠냐고 묻자 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창밖에선 해가 느릿하게 지고 있었다.그리고 그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테이블 위에 김이 오르는 찻잔, 두 사람 사이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섞인 미세한 망설임.유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지금 이 상황을 정말 아무 감정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그건 단순한 커피 한 잔이었고, 그는 더 다가오지 않았지만문제는 그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날 밤, 유리는 조용히 창가에 앉아 이현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밤 10시 12분. 도착한 메시지는 짧았다.‘오늘은 어땠어요?’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대답을 하기엔 너무 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아무런 답장 없이 휴대폰을 뒤집어두었다.도쿄의 이른 아침, 이현은 호텔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희끄무레한 햇빛에 눈을 떴다.창밖은 이미 활기찬 도시의 박동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그의 마음은 아직 파리의 어느 고요한 창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메시지는 없었다.어젯밤 보낸 단정한 안부에도 유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바쁘겠지’‘시간이 안 맞았겠지’그렇게 넘겼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녀의 침묵은 어딘가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 의도는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기에 더 무거웠다.회의 시간 내내 이현의 시선은 종종 멍하니 창밖으로 빠져나갔다.파리의 겨울 하늘, 그곳에서 유리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그는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혼자 아침을 차려 먹을까.아니면 어제처럼 산책을 나갔을까.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냥 창가에 앉아 커튼 너머의 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그 상상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상하게 이어졌다.어디서부터 시작된 상상인지 모른다.하지만 그 상상 속엔 언젠가 봤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치듯 떠올랐다.요리 수업에서 잠깐 마주쳤던 남자.인사도 나눈 적 없지만, 유리가 유독 부드러운 얼굴로 대
무소식이 무관심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그녀는 왠지 조금 서운했다.그리고 그 서운함은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넷째 날. 유리는 아침 산책을 나갔다.라탱 지구의 좁은 골목길. 혼자 걷는 그 길 위에서그녀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 남자.요리 수업에서 만났던,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고 믿었던 사람.그는 유리를 보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어… 안녕하세요?”“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유리도 당황했지만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잠깐, 같이 커피라도 하실래요? 전 지금 막 시킨 참이라…”유리는 고개를 저을까 하다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았다.그 순간, 그녀는 스스로에게이건 단지 커피 한 잔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저 파리의 겨울, 햇살과 안개 사이에서묘하게 따뜻한 시간을 공유했다.그리고 그 대화의 마지막,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혼자 남은 시간이 길면사람은… 작은 친절에도 마음이 열리게 되죠.”유리는 그 말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그건 그가 지나온 감정의 고백이었고,그 순간 유리는 그의 말 속에서 자신의 오늘을 보았다.그날 밤, 이현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단순한 문장이었지만 유리는 한참을 망설였다.답장을 보내기까지 십 분, 이십 분이 걸렸다.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조용했어요.혼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어요.’이현은 짧게 답했다.‘내일은 더 조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그 말은 어딘가 외로움이 스며 있는 다정함이었다.그리고 유리는 그 다정함이 자신에게 여전히 필요한 온도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그날 밤, 유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하루가 비어 있는 것이 어쩌면 사랑의 부재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다.’‘그 빈 하루 속에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들어올 때, 마음은 어느 쪽으로든 흔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잠깐, 도쿄에 들어오라는 연락이.”“출장이에요?”“응. 일주일 정도. 아마 미팅과 회의가 이어질 거라서, 급히 가야 할 것 같아요.”그 말은 단순한 출장의 언급이 아니었다.유리는 그 말의 너머에 또 다른 제안이나 결정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언제 가요?”“모레.”그 짧은 대답은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었다.그날 밤, 두 사람은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TV에서는 무채색 뉴스 화면이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그것에 집중하지 않았다.유리는 담요를 무릎 위로 끌어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응.”“거기서… 더 오래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그 질문은 지금 이 공간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그 공간의 모서리를 미리 만져보려는 손끝 같았다.이현은 잠시 정지된 듯한 시선을 보였다가 답했다.“솔직히 말해도 돼요?”“응.”“나… 조금, 마음이 기울고 있어요.”그 말은 이현이라는 사람의 책임감과그가 품고 있는 야망이 그동안 어떻게 눌려 있었는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말이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난 어떻게 돼요?”유리가 묻자 이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당신을 데려가고 싶다’는 말과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유리는 그 눈빛이 어쩌면 대답보다 더 정직하다고 느꼈다.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 유리는 혼자 안방 침대에 앉아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이현의 옷장에서 출장 준비를 위해 꺼낸 셔츠들이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그 정돈된 풍경 속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는 파리’를 상상해보았다.그리고 그 상상은 뜻밖에도 너무 쉽게,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졌다.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서늘한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