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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
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팽하게 조였다.
“이것도 아니야.”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으며, 무언가를 집어삼킨 듯 건조하고 예민했다.
그의 눈썹은 점점 더 좁아졌고, 얇게 다문 입술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 접시가 탁자에서 밀려나며 자리 잡은 그 긴장의 끝에서,
이현은 또 다른 한 접시에 나이프를 툭 던지며 푸념처럼,
그러나 명확한 실망의 감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것도 아니라고!!”
평소라면 그조차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남자였지만,
오늘따라 그의 참을성은 바닥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정말 국내 최고의 요리사 음식이 맞습니까?”
회장실 안은 그의 목소리에 따라 잔잔했던 물결이 깨지듯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
복도에 서 있던 셰프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누군가는 등을 굽히고,
누군가는 뒷덜미를 습관처럼 주무르며 한껏 초조해했다.
이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 다리가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짧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짧은 숨을 토해냈고,
이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회장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쿵, 요란한 소리에 복도 끝까지 울림이 번졌다.
그는 한순간 복도 끝까지 침묵을 가져왔고,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거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지나가는 길을 조용히 비켜주었다.
그렇게 회장실을 벗어나 비상계단을 내려가며, 이현은 눈꺼풀 너머로 묘한 공허감을 느꼈다.
수십 명의 셰프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맛보았지만, 그 무엇도 그의 마음속 공허를 메우지 못했고,
혀끝에는 잠깐의 감각만 남았을 뿐 가슴 한복판까지 내려가는 따뜻함은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S그룹 본관 뒤편 골목길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공기가 뺨을 스치며 내려앉을 때,
어디선가 퍼져오는 고소하면서도 따뜻한 냄새가 그의 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그 냄새는 상류사회의 고급스러운 향과는 달랐고,
억지로 연출된 파인다이닝의 복잡한 향도 아니었으며,
왠지 모르게 오래전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소박하고 포근한 냄새였다.
골목 끝,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곳에서 작은 식당 하나가 보였다.
‘마싯집’이라고 손글씨로 적힌 허름한 간판,
그리고 그 아래 줄지어 선 사람들.
긴 기다림에도 불평 대신 웃음과 수다가 오가는 풍경은,
그에게 놀라움과 약간의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이현은 그 줄 끝을 따라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망설임도 없이 곧장 줄 맨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날렵한 걸음,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끌어당기는 강렬한 존재감.
“저, 저기요!”
“아저씨, 줄 서야죠!”
뒤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이현은 가만히 주머니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카드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며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었고,
알아보는 이들의 표정은 잠시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오늘 매상 전부, 내가 계산하겠소.”
낮고 확신에 찬 목소리는 골목을 관통했고,
“뒤로 물러들 나시오” 라는 마지막 한마디는 더할 나위 없는 힘으로 사람들을 잠시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때, 식당 안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
앞치마를 질끈 묶은 젊은 여자, 붉게 달아오른 뺨,
긴 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채, 왼손에는 검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오른손에 빗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단단했고, 순간 이현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활처럼 단호하게 그어진 눈썹, 화장기 거의 없는 얼굴,
그리고 불꽃처럼 살아 있는 눈동자.
“여긴 웨이팅 순서 지켜야 하는 집이에요. 돈 있다고 다 되는 거 아니거든요?”
이현은 처음으로 조금 웃을 듯 말 듯한 입꼬리를 살짝 움직였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흥미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늘 매상 다 줄 텐데도?”
순간, 그녀의 얼굴에 짧은 놀라움이 스쳤다가, 곧 매서운 기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단호하고 짧은 대답.
“…미친놈인가.”
짧은 한마디. 그 한마디는 이현이 평생 들어본 어떤 비평보다도 강렬했다.
유리는 빗자루를 번쩍 들어 올렸고, 이현은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짧은 장면은 골목 끝까지 파도처럼 번졌고,
사람들은 숨죽인 웃음을 터뜨리며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는 이도 있었다.
그날 밤, 이현은 오랜만에 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살짝 건드려졌다.
‘재밌네.’
그건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던 소년의 마음이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촬영 현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조유리는 머리가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었다.주방 도구가 놓인 테이블, 조명이 켜진 촬영장, 카메라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그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무대 위에 오르듯 서 있는 도마 앞에 서자 조유리는 다시 숨을 고르게 됐다.그녀는 익숙하게 우엉을 잡고, 칼질을 시작했다.짧은 숨소리. 그리고 규칙적인 칼질의 리듬.그것만으로, 유리는 다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있었다.윤재는 모니터 너머로 그녀의 손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칼날보다 그걸 잡은 손가락이 더 인상 깊었다.‘정확하고, 망설이지 않아. 그리고… 따뜻하네.’촬영이 잠시 쉬는 틈. 윤재가 다가왔다.“혹시, 방송 처음이시죠?”“네. 티 많이 나나요?”“전혀요. 오히려… 그 정적인 모습이 너무 강해서 다들 화면 보면서 숨죽이고 있었어요.”유리는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제가 화면으로 그렇게 보여요?”“네. 사람이 아니라 음식이 숨 쉬는 것 같았어요.”그 말은 분명 칭찬이었다.그러나 그 시선에는 직업적인 감탄만이 아닌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고, 유리는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그 다정함이 어딘가 낯설고 조심스러웠다.그날 밤, 이현은 집에서 유리의 첫 방송 촬영분 편집본을 보고 있었다.화면 속, 주방에 선 조유리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고,더 집중해 있었으며, 어딘가 조금 멀어 보였다.그 옆에 서서 설명을 돕는 오윤재.그의 말투, 눈빛, 그리고 유리를 바라보는 시선.이현은 조용히 리모컨을 내려놓았다.마음이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켜보고 있는 게 나 혼자였다고 생각했는데.’다음 날, 이현은 유리의 가게에 들렀다.“촬영 잘 다녀오셨어요?”그가 물었다.“네.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조금 낯설긴 했지만요.”“오윤재 PD는 어땠어요?”유리는 질문의 의도를 읽고 살짝 멈췄다가 대답했다.“일 잘하시더라고요. 저보다 더 제 요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느
유리는 그 순간, 무엇보다 자신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걸 느꼈다.예의 바른 말투, 격식을 갖춘 제안, 그리고 그 이면에 담긴 ‘이현’이라는 이름.“죄송하지만, 저는 제 공간에서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요리를 하고 싶어요.”유리는 단호하진 않았지만, 확실한 태도로 말했다.채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요.”그녀의 마지막 미소는 마치 확인하고 싶었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했다.그날 저녁. 이현은 가게에 들렀고, 유리는 그를 맞이하며 특별한 말 없이 물을 내왔다.“오늘… 채린 씨 다녀가셨어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요. 채린한테 연락 왔더라고요.”“식사 괜찮으셨대요. 요리도… 만족하셨고요.”“그럴 거예요. 유리 씨 요리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이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혹시… 불편하셨어요?”유리는 조금 망설였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불편하진 않았어요. 그냥… 잘 지켜보게 되더라고요. 말투나, 시선이나… 전 그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서요.”이현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을 다문 채 조용히 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은 내 기억 속 한 시절의 친구일 뿐이에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입니다.”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따뜻했지만,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무게가 실린 말이었다.“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채린은 짧은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이현은 문자창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딱 한 줄, 답장을 보냈다.‘식사 자리는 불편할 것 같아. 일로만 봤으면 좋겠어.’보내기까지는 짧았지만, 그걸 결정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날 오후. 이현은 사무실에서 회의가 끝난 뒤 잠시 머리를 식히려 건물 옥상에 올라섰다.도심 아래는 여전히 분주했고, 찬바람이 코끝을 차갑게 스쳐갔다.생각보다 채린은 여전히 변함없었다.겉으로는 단정하고 이성적이지만, 사람 사이의 거리를 본능적으로 재고,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그 틈으로 파고들 줄 아는 사람
겨울 초입의 카페는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다.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에는 아직 노란 잎이 다 지지 않은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그 안쪽에 이현은 무심히 커피잔을 손에 감싼 채 앉아 있었다.그때,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섰다.“야, 서이현.”익숙한 목소리. 이현은 고개를 돌리며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채린…?”“너 진짜 오랜만이다.”윤채린. 대학 시절 같은 조로 몇 번 과제를 같이 했고,시험 기간엔 서로 교재도 공유하던 사이.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굳이 이름 붙이자면 ‘편한 친구’였다.“야, 나도 깜짝 놀랐다. 설마 진짜 여기서 너랑 마주칠 줄이야.”“너 언제 들어온 거야?”“한 달쯤 됐어. 원래는 유럽에 계속 있을 생각이었는데, 본사에서 아시아 쪽 다시 맡으라 해서.”“아직도 그 외식 브랜드 쪽 일하는구나.”“응. 이번엔 한국에 정식 지사 내는 거라서, 아마 너랑도 회사 일로 마주칠 일 있을걸?”이현은 짧게 웃었다.“진짜 신기하네. 너 이렇게 오래 있다가 다시 보니까.”“그치. 근데 너, 표정 되게 부드러워졌더라?”“그래 보여?”“응. 예전엔, 조금 까칠했잖아.”“지금도 까칠해. 근데 누가 좀 다독여주는 중이라.”그 시각, 유리는 평소처럼 가게 주방에서 손님이 남기고 간 테이블 정리를 마치고 있었다.우연히 SNS 피드를 내리다가 익숙한 이름이 태그된 게시글을 보게 됐다.그 글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사진. 웃고 있는 채린, 그 맞은편에 앉은 이현.사진 속 표정은 담백했지만, 유리는 이상하게 그 한 장을 보고 나서 속이 알 수 없이 쓰려왔다.저녁. 이현은 평소처럼 가게에 들렀다.“조금 늦었죠?”그는 겨울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유리는 조용히 대답하며 물을 내왔다.“오늘은… 카페 다녀오셨더라고요?”이현은 고개를 들었다.“아, 그거… 채린 만났어요. 진짜 우연히.”“그러셨군요. 오랜만에 만나셨겠네요.”“응. 대학교 이후로 처음 봤어요.”“친하신가 봐요.”“뭐, 편한 친
“회장님, 정말 잘 들으셨죠? 진상 고객 할인은 없어요.”“아쉽네…그럼 그냥 매일 와야겠다.”저녁 시간이 지나 가게 문을 닫고, 둘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밖에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테이블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유리는 컵에 따뜻한 보리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오늘도, 잘 지나갔네요.”이현은 그 말을 조용히 따라하며 대답했다.“그게 기적이더라고요.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거.”“아무 일 없지 않았어요.”유리는 웃었다.“사랑이 있었죠. 그리고 잘 먹은 한 끼도 있었고요.”그 밤. 식당의 불이 꺼지고,가게 입간판이 다시 ‘영업 종료’로 뒤집히는 순간. 작은 가게의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그 안에 담긴 온기만은 천천히,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 온기 속에, 유리와 이현, 두 사람의 삶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겨울 첫눈이 내린 날. 도시는 느릿했고, 가게 앞 골목도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유리는 창가에 서서 유리문에 닿아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다 속삭이듯 말했다.“오늘, 첫눈이에요.”이현은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웃었다.“알죠. 그래서 오늘, 내가 밥 짓는 날이에요.”주방에서는 이현이 직접 계란을 풀고, 김을 굽고, 밥을 짓고 있었다.재료는 특별하지 않았다.달걀, 참기름, 밥, 그리고 어제 유리가 담가둔 무말랭이 무침.하지만 이현의 얼굴엔 어느 때보다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음식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그는 조용히 중얼이며 접시를 테이블에 놓았다.“재료는 똑같은데, 그 사람 손에서 나올 때마다 다른 온도가 느껴지잖아요.”유리는 조용히 테이블 앞에 앉았다.이현이 만든 음식은 소박했지만 단정했다.계란지단이 곱게 얹힌 밥 위에 작게 썬 김가루, 그리고 정갈한 장국 한 그릇.“이게… 오늘의 메뉴예요?”“응. 이름은…”그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같이 먹고 싶은 밥’이에요.”유리는 수저를 들었다. 한 입,두 입.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 갑자기 뭔
“다녀왔어요.”유리는 조용히 말했다.“가서, 어린 날 나를 조금 안아줬어요.”이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그리고 작은 서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이건…”“당신 가게. 재건축 승인이 났어요. 위험한 구조 걷어내고 1층은 예전처럼 가게로, 2층은… 우리가 살 집으로.”유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우리?”“응. 가게도, 삶도, 식탁도 같이 만들고 싶어요.”그 순간, 세상이 아주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유리는 천천히, 종이에 사인된 자신의 이름을 내려다봤다.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고마워요. 그냥… 이렇게까지 나를 함께 데려와 줘서.”반면, 그 시간 은별은 조용히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책상 위 사진들, 일지 노트, 서랍 속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감정의 잔해들.그녀는 모든 걸 천천히 정리한 뒤, 핸드폰을 꺼내 문자 하나를 남겼다.‘이젠, 보내줄게요.’그 말은 누구에게 보낸 건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지만,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은별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새로 단장된 가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바닥의 나무 결은 더 고요했고, 조명은 조금 더 따뜻했으며,주방 벽 한쪽에는 유리가 고른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내일도, 당신 입에 따뜻하게 닿기를.’그 문장을 고르고, 스스로 적어 걸었던 순간,유리는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느꼈다.첫날 아침. 유리는 앞치마 끈을 고쳐 매며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따스한 봄바람이 스며들었고, 기분 좋게 간판이 흔들렸다.조유리 식당 그렇게,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간판을 처음으로 아무 두려움 없이 바라봤다.문이 열리고, 첫 손님이 들어섰다.“예약한 사람인데요.” 익숙한 목소리. 낮고, 느긋하고, 조금 장난기 어린. 이현이었다.유리는 고개를 들며 웃었다.“진상 손님, 오늘은 예약도 하셨어요?”“첫날인데, 줄 서는 건 좀 모양 빠지잖아요.”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꽃다발 하나를 꺼냈다.장미도, 백합도 아닌 작고 수수한
“정말 나가겠다는 거예요?”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단정하게 셔츠 소매를 걷었다.“이제는 내가 직접 말해야 해요. 지켜지기만 하는 사람으로는 이 사람 옆에 서 있을 자격이 없을 것 같아서요.”기자 회견장, S그룹이 마련한 별도 공간.보도자료 배포 없이 준비된 비공식 회견이었지만,이미 사전 정보를 입수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유리는 단정한 베이지 셔츠에 정갈하게 묶은 머리로 단상 앞에 섰다.카메라 셔터 소리, 속삭이는 목소리, 그리고 시선.그 모두가 똑바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안녕하세요, 조유리입니다.”그녀는 숨을 고르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최근 보도된 기사들에 대해 제 입장을 직접 전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어느 한 음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저의 어머니는 과거 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법적 조치 없이 무혐의로 종결되었습니다.저는 그 사건의 피해자였고, 당시 미성년자로서 조사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그 순간, 기자들의 질문이 터져 나왔다.“S그룹 회장과의 관계가 이 사안을 덮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혹도 있습니다.”유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사랑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방패가 될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방패로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그 사람은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저를 숨기지 않고 마주봐 준 사람입니다.”“그래서 저도, 이제는 그 사람을 향한 제 감정을 세상 앞에 놓기로 했습니다.”그 말이 끝난 순간, 회견장 뒤편 문이 열리고 이현이 들어섰다.기자들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고, 유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이현은 천천히 그녀 옆에 섰다.“이 자리에 함께 서는 건, 그 사람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그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오늘을 기점으로 조은별 비서와의 모든 업무 관계를 종료합니다.앞으로 그 사람 곁에는, 조유리 씨만 있습니다.”이현의 단호한 말은 곧이어 터진 플래시 세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