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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기억을 찾아가는 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24 11:44:21

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지만,

그 안쪽에서 흘러나온 이름 하나는 민영의 안쪽 어딘가를 아직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흔들고 있었다.

'영아.'

그 이름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입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려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 불리지 않아서 잠들어 있던 이름처럼,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대리님."

민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강은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것을 즉시 알아채고 곁으로 다가섰다.

"네."

"저요..."

민영은 짧게 숨을 고르며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

"지금... 여기가 좀 이상해요."

"어디가 이상하십니까?"

"심장 근처예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프진 않은데... 마치 누가 기억 하나를 안에서 살짝 두드린 것 같아요. 깨우려는 것처럼."

최강은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증상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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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END. 질문이 사라진 자리

    오후의 빛은 유리창을 통과하며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같은 사무실, 같은 자리였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공기의 결은 조금씩 달라졌다.민영은 문서를 넘기다 말고 손끝을 잠시 멈췄다.집중이 흐트러진 건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고요해서 스스로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질문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이 선택이 맞는지, 이 방향이 옳은지,지금의 감정이 잠깐 스쳐 가는 건 아닌지.하지만 오늘은 그 질문들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대신 이상할 정도로 분명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부담 없이 자리를 잡았다.민영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확답을 요구받지 않는 상태.그 여유가 자신을 나태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오히려 이런 여백이 있어야 다음 걸음을 정확히 내딛을 수 있었다.“정 사원.”고개를 들자 최강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회의실에서 바로 나온 듯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민영은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잠깐 괜찮으십니까.”그 말투에는 언제나처럼 강요가 없었다.민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복도를 따라 함께 걸으며 둘은 나란히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누가 맞추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 있었다.그 사실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는 점이 민영에게는 작은 안정으로 다가왔다.“아까 말씀드린 외부 일정 말입니다.”최강이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정 사원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민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머릿속에서 일정과 감정이 빠르게 정리되었고,그 과정에 망설임은 없었다.“동행할게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지금은 피할 이유가 없어요.”최강은 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표정에는 안도도, 놀람도 없었다.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알겠습니다.”그는 차분하게 말했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30화. 마음이 먼저 도착한 자리

    퇴근 시간이 건물 전체를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사무실의 불빛은 하나둘 자리를 비웠고, 복도에는 발소리보다 여운이 더 오래 남았다.민영은 모니터를 끄고도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오늘은 하루를 정리하는 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의자를 밀고 일어날 때, 몸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한 박자 뒤에 있었다.그 간격이 불편하지 않았다.오히려 이제야 자기 리듬을 정확히 되찾은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서자 낮보다 훨씬 낮아진 공기가 몸을 감쌌다.이 시간의 회사는 일보다 사람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민영은 그 흔적들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 안에 머물러도 괜찮았다.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그림자가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최강이었다.그는 민영을 보자 아주 짧게 고개를 들었다.놀람도, 기다림도 아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같이 내려가시죠.”그의 말은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네.”민영은 그 대답이 이상하리만치 쉽게 나오는 걸 느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나란히 섰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거리였지만, 공기의 결은 조금 달랐다.침묵이 더 얇아졌고, 말은 굳이 그 위에 올려지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늘의 상태를 가장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오늘”최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러나 그 말은 완성되지 않았다.민영은 그 멈춤을 기다렸다.“회의에서”그가 다시 말했다.“정 사원 의견이 상황을 정확히 잡아줬습니다.”칭찬처럼 들리지 않게 사실처럼 말하는 방식.민영은 그 방식이 이제 익숙했다.“그냥”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지금은 흐름이 보여서요.”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빠져나갔고, 둘은 그 흐름에 조용히 섞였다.건물 밖으로 나서자 저녁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웠다.민영은 코트를 여미며 숨을 들이마셨다.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오늘은 집으로 바로 가십니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9화. 비어 있던 시간의 결

    집 안의 불을 켜지 않은 채 민영은 현관에 잠시 서 있었다.밖에서 따라온 밤의 공기가 아직 코트 자락에 남아 있었고,그 공기 속에는 카페의 온도와 골목의 조용함이 겹겹이 묻어 있었다.문을 닫는 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들렸다는 사실이오늘 하루가 부드럽게 끝났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자 집은 늘 그래왔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이 오늘은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한 번 사람의 체온을 기억해 둔 자리처럼.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채 민영은 천장을 바라보았다.아까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다시 흘러갔다.결론을 미룬다는 말,서두르지 않겠다는 선택,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받았다는 감각.어느 하나 크게 울리지 않았는데도마음의 한쪽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비어 있는 시간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천천히 모양을 갖추는 중일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마음에 내려앉았다.민영은 이제야 왜 요즘의 일상이 지루하지 않은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사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건 없이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매일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따르며 민영은 유리컵 속의 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아주 미세한 진동이 표면에 남아 있다가 곧 고요해졌다.그 모습이 지금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안정된 상태.휴대폰이 탁자 위에서 가볍게 울렸다.민영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지금은 확인이 아니라 여운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화면을 켰다.-오늘 무리하지 않으셔서 다행이었습니다.짧은 문장. 그러나 그 안에는 오늘 하루를 같이 건넜다는 확인이 담겨 있었다.민영은 답장을 길게 쓰지 않았다.대신 이렇게 적었다.-덕분에요. 오늘은 편하게 머물렀어요.전송 버튼을 누르자 이상하게도 어깨의 힘이 조금 더 풀렸다.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기댈 수 있다는 감각은 설명보다 훨씬 따뜻했다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8화. 서두르지 않는 선택

    “아직”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모든 문장을 끝내지는 않았어요.”그리고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떤 문장을 남겨두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아요.”최강은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의 눈빛에는 서두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그 문장”그가 낮게 말했다.“제가 옆에서 지켜봐도 괜찮겠습니까.”민영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창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유리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가 멀어졌다.세상은 여전히 자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 거리면 괜찮을 것 같아요.”그 대답은 허락이면서도 선언이었다.누군가를 곁에 두겠다는 선택.그러나 아직 완전히 이름 붙이지 않은 선택.카페의 불빛 아래에서 둘은 말을 아꼈다.아껴진 말들은 공기 속에 겹겹이 쌓여 다음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영은 그 여백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지금은 이 정도의 온도가 가장 정직했기 때문이다.남겨둔 문장은 언젠가 이어질 문장을 위해 존재한다.민영은 그 생각을 가슴에 담고 컵을 내려놓았다.오늘 밤은 결론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카페의 음악은 조금 전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사람들의 말소리는 유리잔에 부딪혀 둔해졌고,시간은 벽에 걸린 시계보다 느리게 흘렀다.민영은 컵 가장자리에 손끝을 얹은 채 아직 식지 않은 온기를 가만히 느꼈다.이 자리에 더 오래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최강은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지나가는 사람들 위를 따라가지 않았고, 어딘가 머물러 있었다.마치 지금 이 시간 자체를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민영은 그 침묵이 자신을 재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았다.“이런 시간”민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전엔 조금 불안했어요.”최강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서요.”민영은 말을 끝내고 잠시 자신의 숨을 들여다보았다.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7화. 비워둔 자리의 선택

    퇴근 시간이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도착하는 건 아니었다.민영에게 저녁은 시계보다 먼저 몸의 안쪽에서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다.하루의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접히는 느낌.아직 끝내지 않은 문장들이 마음의 여백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서류를 정리하며 민영은 마우스를 한 번 더 천천히 움직였다.급할 이유가 없었다.오늘의 일은 이미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컴퓨터를 끄자 모니터에 비친 얼굴이 짧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그 순간, 자신이 오늘을 잘 건너왔다는 확신이 작게 남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사람들의 말이 겹쳐졌다가 흩어졌다.민영은 그 소리들 속에서 유독 한 사람의 침묵을 떠올렸다.말이 적어서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자리하던 그 방식.그가 자주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특별하지 않다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은 몰랐다.회사 앞에서 잠시 멈춰 섰을 때, 바람이 옷깃을 살짝 건드렸다.민영은 고개를 들었다.해는 이미 건물 뒤로 사라졌고, 도시는 자기 빛을 켜고 있었다.그 빛들 사이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야 자각했다.“정 사원.”낮고 차분한 목소리.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민영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웃었다.“오늘은 조금 늦으셨어요.”“확인할 게 하나 남아서요.”최강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섰다.둘 사이의 간격은 늘 그렇듯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그 거리감이 오늘은 유난히 편안했다.“집으로 바로 가세요?”그가 물었다.민영은 잠시 생각했다.집이라는 단어가 오늘은 목적지가 아니라 선택처럼 느껴졌다.“조금 걸어도 될 것 같아요.”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질문도, 확인도 더하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민영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빈 자리를 그대로 남겨두는 사람.둘은 나란히 보도를 걸었다.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민영은 자신의 팔이 걷는 동안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의식하지 않았다.그저 지금의 리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6화. 머무는 쪽의 그림자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지만 민영은 곧바로 발을 떼지 않았다.초록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 번져 있었고,그 위를 먼저 건너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루의 끝을 서둘러 밀어내고 있었다.그 와중에 그녀는 아주 잠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무게를 느꼈다.“안 가십니까.”최강의 목소리가 곁에서 낮게 울렸다.재촉은 아니었다.그저 같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에 가까웠다.“네.”민영은 짧게 답하며 그제야 한 발을 내디뎠다.신호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길을 건너는 동안 민영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자신의 시야 한편에 겹쳐지는 장면을 막을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던 강산의 눈빛,그 안에 섞여 있던 체념과 계산,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기미.그것은 과거처럼 그녀를 흔들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도 않았다.길을 다 건넌 뒤 둘은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췄다.민영은 발소리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두 사람의 발걸음이 같은 리듬으로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귀에 남았다.이상하게도 그 리듬은 안정적이었다.“아까”최강이 말을 꺼냈다가 잠시 멈췄다.민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서두르지 않는 침묵은 이제 둘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강산 씨와 같이 계셨죠.”민영은 그 질문에 놀라지 않았다.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잠깐요.”최강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대신 한 박자 늦춰 말을 이었다.“그분은 여전히 많이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그 말에는 질투도, 경계도 뚜렷하지 않았다.그러나 아무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민영은 그 미묘한 온도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도 알고 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더더욱 제가 어디에 머무는지를 헷갈리지 않으려고요.”최강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늦춰졌다.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시 같은 속도를 되찾았다.“그 말”그가 말했다.“저는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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